1세 犀(서) : 호 죽계, 시호 충정, 자 양종. 고려시대의 유명한 장군으로 신라 경명왕(박혁거세의 29세손)
의 넷째 아들인 박언립(죽성대군)의 11대손이다. 그가 1231년(고려 고종 18년)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고의 장수 살리타이(撒禮塔)가 쳐들어와 철주를 함락하고 구주를 공격
하자 김중은, 김경손 등과 함께 구주에서 각종 무기로 공격해 오는 몽고군을 한 달동안의
격전 끝에 물리쳤다. 몽고군이 구주를 포기하고 개성을 먼저 함락시켜 고종의 항복을 받아
내고 철수하는 길에 다시 구주를 공격하는 몽고군을 대파하여 몽고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때 몽고 장수 살리타이는 '박서같은 장수는 처음 봤다'고 하였다. 그 뒤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고 음성백에 봉해졌다. 그는 원래 죽산 박씨였으나 음성백에 봉해
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박서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음성으로 하였다.
2세 榟(재) :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역임 했다
배 파평윤씨 부 英 조 諧 宗
3세 玄桂(현계) : 충숙왕(忠肅王)때 전리총랑(典理摠郞)과 평해부사(平海府使)를 거쳐,1327년 정승(政丞),
윤석(尹碩)등과 함께 조적(曹 )의 난(亂)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이등공신(二等攻臣)에
책록(冊錄)되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배 군부인 여흥민씨 부 閔光啓 조 昉 이다.
슬하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문서(文瑞)는 강화부사(江華府使)를, 차남 문길(文吉)은
지군사(知郡事)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다
4세 ①文瑞(문서)->강화 부사(江華府使)
②文吉(문길) ->지군사(知郡事)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
③文桓(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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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文瑞(문서)의자 -> ①濟(제)
②洹(원)정승공파->고려(高麗)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
文吉(문길)의자-> ①淳(순)충민공파 : 태종은 淳(순)에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추증하였다
②淨(정)문익공파 : 세종(世宗) 때 직제학(直提學)과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좌찬성(左贊成) 에 이르렀다.
淳(순) : 1388년요동정벌 때 이성계의 후하에 종군하였다.
성품이 침착하고 사리가 밝아 이성계와 친구지간이었다.
위화도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우왕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이 되었다.
함흥차사로 유명한 박순장군은 용흥강변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박순과의 옛날 우정을 위해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박순이 돌아가는 길에 병이 나 시간이 지체되어 이성계가 부하 병사에 의하여 죽게되었다.
태조는 박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돌아갈 생각을 굳혔다는 것이다
태종은 순(淳)에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고,
태종은 화공에게 명하여 그 반신을 그려서 그의 공(功)을 치하했으며 관직(官職)과
토지(土地)를 내리는 한편 자손들을 음직으로 벼슬에 등용하였다
박순은 숙종때 충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박순이 운검(雲劒)으로 자청하여 함흥차사로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죽자,
부음을 들은 장흥임씨부인은 자결을 하였고, 이에 태종은 임씨에게 묘지(墓地)를 내리고,
아들 박흔(朴昕)에게는 참판(參判)을 증직(贈職)하였다.
* 묘지->북한 함흥 용흥(龍興)강변에 있다.
정경부인 장흥임씨 묘는 고양시 일산 성석동 황룡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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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소(昭) : 충민공 淳(순)의 장남이다
좌승지(左承旨)로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했다가 형을 받았다
* 묘지->의왕시 청계산에 있다(손이 끊겨 가계를 잊지 못했다)
흔(昕) : 충민공 淳(순)의 차남이다(1403~1442년)
세종때 음직(蔭職)으로 사헌부감찰과 병조참판을 지냈다
태조가 함경도에 있을 때, 박순(朴淳)이 운검(雲劒)으로 자청하여 함경도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자, 부음을 들은 부인 장흥임씨는 자결을 하였다.
태종이 이를 애도하여 박순의 고향에 충신과 열녀의 정문(旌門)을 세웠고,
아들 박흔에게는 벼슬을 증직(贈職)하고 노비와 전답을 하사하였다는 내용이다.
박흔은 연안부사(延安府使) 전경(全卿)의 딸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는데,
40세로 일찍 생을 마쳤고, 부인 전씨를 1484년(성종 15년)에 합장하면서 비를 세웠다.
* 묘지->고양시 일산 성석동 황룡산 종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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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①叔蓁(숙진)대사헌공파 ->흔(昕)의 장남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455년(세조 1) 권지정자가 되고,
병조정랑을 거쳐 466년 성균직강이 되어 김질(金#질18)과 함께 《경국대전》
병전의 교정을 맡았다.
1472년(성종 3) 군기시정으로 평안도절도사를 선위(宣慰)하였고,
1474년 공혜왕후(恭惠王后:成宗妃)의 국장도감낭청(國葬都監郎廳)이 되었다.
1477년 형조참의에 이어 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참판, 1479년에 좌윤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 폐비 윤씨(廢妃尹氏)를
별전(別殿)에 거처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가 성종의 노여움을 사서 개성유수로
체직되었다.
②叔楙(숙무)목사공파 (1426년~1495년) ->흔(昕)의 차남
세종때 음직(蔭職)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 묘지-> 음성군 삼성면 상곡리 아랫정골 백운산 계좌록에 장사했다.
③叔達(숙달)사인공파 ->흔(昕)의 삼남
성종(成宗)때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집의(執義)를 거처 통정대부예조참의로 제수 되었다
* 묘지->고양시 일산 성석동 황룡산 종산에 있다.
④叔暢(숙창)평사공파 ->흔(昕)의 사남
성종때 수의교위(修義校尉)와 평사(評事) 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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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문화시중과 문화시랑은 같은 문하성에 소속된 종1품의 관직(官職)이다.
문하 시랑은 문종 15년(1061년)~충렬왕 1년(1298년) 까지 사용하였다.
문화시중은 문종 15년(1061년)까지 사용한 현재와 비교하면 장관급 이상이다.
고려시대 공부(工部)는 상서성(尙書省) 소속의 6부(六部)중 하나로 공업과 농업을 맡아 관장하는 기관이며,
지금의 통상산업부·농림부로 공부상서는 정 3품 관직으로 판서를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시대 副使(부사) 관직은 정3 품으로 관리관 (문관) , 소장(무관) 이다
조선시대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는
중추부의 종일품 벼슬로 관찰사나 병마절도사를겸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첨의정승(僉議政丞)은 종1품으로 현재 직급으로 부총리급 입니다
고려시대
문화시랑평장사는 문화부에 속해있는 정2품의 관직 현재 현재 도지사, 장관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