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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갑을관계(전세금 편)

작성자1980|작성시간11.12.12|조회수1,129 목록 댓글 29

오늘 또 더러운 꼴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분을 풀 곳이 인터넷 게시판 밖에 없군요.

 

-월 7000만원대 오피스텔 전세 거주하는 한 친구 이야기.

 

이 친구 오늘 이상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부동산으로부터. 전세금 3000만원 올려서 계약하자는 집주인의 요청이 있었다고. 최소 1억 넘게 다시 계약하자고.

 

그런데 계약기간은 올 2월. 이 때 2년 계약이 끝나고 자동으로 2년 갱신됐죠. 계약기간으로부터 무려 10개월이 지난 주인의 뒷북이었죠.

 

올리고자 하는 이유는 단순해요. 시세보다 너무 싸다는 거.

 

맞아요. 요새 전세금 미친 듯 올랐죠. 같은 오피스텔 구하려면 요새 1억 넘게 줘야 하는 게 맞죠. 하지만 계약은 계약인데. 주인의 말도 안되는 소리였죠.

 

결과는? 2000 올리는 걸로 계약서 다시 썼어요. 니X랄. 그것도 12월부터가 아니라 10개월 전 2월부터 2000 더 올리기로 했다는 가짜 계약. 내후년 2월이면, 즉 14개월 후면 다시 계약해야겠죠. 또 올려달라겠죠.

 

부동산은 말 많습디다. "주인이 1억이 왜 안 되냐며 핀잔을 줬다. 이런 일 종종 있다"고. 또 덧붙입니다.

 

"법적으론 당신(친구)이 옳다. 계약기간 지났는데 올려 달라는 거 안 줘도 된다. 그런데 집주인은 갑이다. 이런 식으로 서로 틀어지면 계약 끝났는데 전세금 안 돌려줄 수도 있다. 곤란해지는 거다. 을인 세입자가 무조건 지는 거다."

 

친구는 생각해냈습니다. 주변에 전세금 못 돌려받아 소송까지 간 경우도 있다는 걸. '평민'에 변호사 사무실은 그 자체로 부담. 소송? 지든 이기든 시간과 돈을 잡아먹는 괴물. 집주인은 버틸 때까지 버티면 그만이지만, 전세금이 사실상 전 재산인 세입자는 소송 이겨서, 돈 받을 때까지 집도 돈도 없는 처량한 신세.

 

그래서 올려줬습니다. 분하지만 꾹꾹 눌러담았다며. 분하지만 잊기로 했다며. 게다가 걱정까지 늘었습니다. '집주인이 돈 올려달라는 거 보면 혹시 급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위태로운 게 아닐까. 돈 못 돌려받는 게 아닐까.' 친구는 돈도 까먹고 걱정도 늘었습니다.

 

---

 

이 얘기를 들은 전 분노 모우드. 생각 같아선 집 쳐들어가서 깽판 놓고 싶은 기분. 소송 가도 좋으니 주인장에 '빅엿' 먹이고 싶은 기분. 가능하다면 권력자, 아니 조폭을 이용해서라도 그 주인집 탈탈 털어버리고 싶은 기분.

 

"아서라, 참아라. 열 낼수록 손해다. 1억 안 넘었으니 그래도 시세보다는 싸다." 그런 제게 친구는 말합니다. "계약 끝나면 돈이나 제때 받아야지."

 

분하지만 별 수 없더군요. 약자를 편들고, 강자를 견제한다는 '나름 기자다'지만 백기를 살랑살랑 흔듭니다. 친구의 말이 걸립니다. 사실 그 인간이 똥배짱 부리면, 천하의 구악(舊惡) 기자도 별 수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견찰,떡검,국세청,동대장,구청 하나라도 대동하고 나갈 수 있다면 모릅니다.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습니다. 아, 이 무능력함이란.

 

현실도피일까요. 전 분노를 빠르게 삭이고 '갑을관계에 대한 단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에는 어떤 식으로든 갑을관계가 존재한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은 홍보실 어르신이 내게 깍듯이 하는 건 내 품성 때문이 아니오. 오로지 갑을관계기 때문이다. 대기업 구매본부에 협력사 직원이 술을 사는 것도, 건설사 사장이 구청 직원에게 설 선물을 보내는 것도, 작은 기업에는 우렁찬 우리 회사가 글로벌 대기업에는 매일 굽신거리는 것도. 돈과 권력이 친히 만들어 주시는 갑을관계 때문이다. 집주인과 세입자도 마찬가지. 물론 살다보면 갑을관계가 바뀔 수도 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니까. 누구든 훅 갈 수 있으니까. 권선징악이니까. 뿌린 대로 거두니까. 드라마에도 나온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좀처럼 뒤바뀌지 않는다. 부와 권력은 달다. 이걸 잡은 사람이 병신이 아닌 한 여간해선 놓치지 않는다. 뒤바뀐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땐 사람이 변한다. 부와 권력은 달콤하니까. 그렇게 갑과 을이 서열화 한다. 공고해 진다. 내가 집주인에 빅엿을 먹이기 위해 무의식중에 더 큰 권력을 찾는 것 역시 갑을관계가 가장 빠른 해법이기 때문이다. 공권력일 필요도 없다. 조폭 방식이 쉽고 빠르다. 집주인 하는 짓거리도 사실 조폭 스탈 아닌가. 갑을관계의 노골적 과시. 이것은 내 문제가 아냐. 이 사회의 문제야. 갑의 사랑를 바라는 을이 되던지, 갑이 되던지 해서 잘 사는게 개인으로 최선이다. 평화롭게.'

 

현실을 형이상학적으로 보니까, 현실도피 하니까 기분이 나아집니다. 찌들었나봅니다. 사실 이보다 더한 부조리도 '남의 일'이라고 눈 감기 일쑤인 게 지금의 내 삶. 아니 심지어는 간접적으로나마 일조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려니. (아, 쩌는 패배주의)

 

이 형이상학적인 갑을관계 건. 이 심적인 굴욕. '내가 저 님 때리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지만 '땡값' 없어서 안 때리는 거다.' 이런 심정으로 버팁니다. 사실 싸우면 제가 나가떨어지는 걸 알죠. 그래도 억지로나마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구려. 허허. 잠이나 자야겠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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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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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스스슥 | 작성시간 11.12.20 오해하실까봐 그러는데, 지방이라 서울 전세값으로도 집을 구할 수 있는 수준이라 갑행세도 가능하다죠.;
  • 답댓글 작성자1980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2.21 아~ㅎㅎ 처음엔 무슨 얘기인가 했어요^^ 스스슥 님도 파이팅!
  • 작성자짐바브웨 | 작성시간 11.12.21 소송이..현실적으로 어려운 거군요. 교과서론 법을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배워서. 이 정도로 불합리하면 그냥 고소하면 되고 당연히 이기는 건 줄 알았는데. 아무튼 마음이 아프네요 ㅠㅠ
  • 답댓글 작성자스스슥 | 작성시간 11.12.23 저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다만, 법은 돈과 시간에 여유러운 사람에게 가깝다는 차이만 알고 계시면 되실 듯 하네요. 실제로 돈의 문제라기보다 대부분이 소송을 이끌어갈 시간에 지친다죠. 위와같은 주택관련 쟁점은 최소 6개월가량 소요됨.
  • 작성자빡쎠 | 작성시간 12.03.01 님이 부동산에 찾아가서 "이 내용 기사에 쓸까요?" 이렇게 말하면 부동산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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