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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 이 야 기 들

살림하십니까?

작성자월영씨|작성시간12.02.12|조회수1,148 목록 댓글 12

여성신학자 현경 교수는 `살림`을 사람을 살리는 일의 준말로 해석했다. 이십대 후반 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을 때. `유레카!`란 말이 떠올랐다.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집안을 정돈하는 일. 그저 주부들의 일로 폄하되는 살림의 실상은 현경 교수의 말대로 사람을 살리는 일들이었다. 아니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일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 말에 대한 각성 이후 살림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생겼다. 최소한 살림을 하는 사람은 큰 죄를 짓지 않으리란 것과 더불어 내 몸뚱아리 하나 살아가면서 가급적 남에게 수고로움을 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자취하면서 귀찮고 무의미했던 집안일에 의미가 생기고 스스로 뿌듯하고 자부심을 느끼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살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이 유기체임을 절감하게 된다. 신선한 식재료는 결국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나온다. 음식은 사람이 제 아무리 기교를 부려도 신선한 자연이 잉태한 그 본연 맛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빨래를 하다보면 인간들이 그저 남에게 깨끗이 보이겠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화학물질을 배출하는 지 깨닫게 된다. 또 대기의 오염과 스스로의 더러움도 알게 된다. 집안을 청소하다보면 일주일만 빗질을 아니 해도 곳곳에 쌓이는 먼지를 본다. 이처럼 세상살이는 다 연결되어 있고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내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또 행동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고 움직임 속에서도 생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또 가끔 울컥하기도 하는데 이 나이까지 온전히 살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가까이 있는 어머니의 살림에 기댄 것이란 생각이 미쳐서다. 살림이 실은 수고로운 일이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하거니와 딱히 자아의 실현과는 별개인 일이라 할 수도 하다. 그걸 다 감내한 어머니의 청춘과 세월이 감지되면 저도 모르게 코를 한 번 훌쩍이게 된다. 군대 있을 때도 스스로 빨래하고 다림질하고 식판을 닦긴 했어도 그땐 그렇게까지 사고가 확장되진 않았다. 그저 군대 있는 게 억울하단 생각밖에 못해서였을 게다.

 

먹고 싶었던 꼬막 무침과 홍합탕 재료를 사다가 설렁설렁 요리를 해서 한 끼를 해결했다. 그 전에 빨래를 널고 대충 집안을 청소했다. 온전히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일상을 영위한 하루가 됐다.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매진한 하루는 아니였을지라도 삶의 밀도를 ,삶의 의미를 꼭꼭 채운 하루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여 괜히 비약적인 상상을 해본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 중에 하나는 최소한 살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떠올려보니 초등학교 때 잠시 실과를 배웠지만 그건 정말 고등학교 때까지 심도 있게 가르쳤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스스로 밥을 지어먹고 스스로 빨래를 하고 다림질 하고 정리정돈을 하는 일이야 말로 어떤 무엇보다 사람의 기본이 아닐까 싶어서다. 나름 배울 만큼 배웠다 해도 크게 손가락질 받지 않을 이때에 실은 다시 배움의 시작으로 돌아가 이런 저런 것들을 깨치고 있다. 책이나 사람이 아닌 그저 일상에서 그리 흔하게 굴러다닌다는 `살림`을 통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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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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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월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3.05 믿지 아니하시겠지만..님께서 댓글을 다신 걸 확인하던 순간에 라디오에서 텅크슛이 흘러나와..오호호 했었답니다.
  • 작성자에디슨 | 작성시간 12.02.20 형, 어여 결혼하십시오. 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월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3.05 결혼하더니 좋은가 보쿤아..흑
  • 작성자검은레몬 | 작성시간 12.02.20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 중에 하나는 최소한 살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을 키우는 교육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것이다" ...비약적인 상상을 넘어 진실로 정답일 것만 같아요.ㅎㅎ
  • 답댓글 작성자월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3.05 그래야 정말 남의 도움 소중한 거 알고..세상의 순환에 대해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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