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뒷 이 야 기 들

내 청춘의 이름; 환장할 청춘아...

작성자똥별이|작성시간12.02.22|조회수1,231 목록 댓글 13

내 청춘의 이름; 환장할 청춘아

 

■교복 입은 대학, 영악한 젊음
누구나 스무살을 넘길 무렵, 자신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과 자신감을 갖고 산다. 나 역시 그랬고 소위 세상의 체계화된 ‘관념’이 신물이 난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그 것이 정답인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남한(Republic of Korea) 사회에서는 사회생활에 있어 기본적인 ‘기준’이 20대 청춘을 틀에 집어넣으려 한다. 안타까운 점은 오늘날 젊은이들은 사회가 준 틀에 정말이지 착하게 자신을 끼워 맞춘다. 아니 좀 더 파고들자면 영악하고 지극히 계산적이다.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을 뒤도 안 돌아보고 도입해 버리니까.

 

2000년대 초반 대학가는 소위 낭만과 현실이 맞물린 시기가 아닌가 싶다. IMF라는 위기를 겪고 나서 대학에도 더 이상 이전의 낭만, 좀 더 까놓고 이야기 하자면 ‘대충 학과공부하며 자유의 시간을 보내고 사회로 나갈 수 있는 완충지’란 개념이 없어졌다. 99학번이란 이름으로 대학에 입학한 나는 분명 두 모습을 봤다.

 

군대를 제대하고 온 선배들에겐 90년대 중반의 캠퍼스 낭만이 남아있었다. 매일 술을 마실 수 있으며 그 시간이 ‘토론의 장’이란 허울아래 선후배들이 모이고 또 모이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에게선 자신이 선택한 ‘학과공부’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적어도 ‘학문’에 대한 열정은 낭만이라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열정이 종종 현실이 결여된 지독히도 주관적인 열정이 되고 말 때 안타깝기도 했다. 열정은 열정이되 개인만족으로 빠져버리는 경우가, 소위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이상만 좇는 결과’로 나타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학문에 대한 열정은 있었으되 학문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한계였다.

 

학문을 향한 열정이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볼 때 그 낭만을 긍정했으나 그 경우는 2000년부터 쉽게 볼 수 없었다. 도서관 내 공부하는 책들이 어느 순간 취업전용 책으로 뒤바뀌는 걸 봤다. 각종 토익서적과 자기계발서란 이름으로 불리는 ‘어쭙잖은’ 싸구려 책들로 채워진다.

 

대학 내 베스트셀러 중 토익서적과 자기계발서들이 상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이었다. 소위 낭만이라는 건 사라지고 지극히 현실적인 살아남기만 대학에 남아 있다. 철학, 사랑, 빈곤, 연대, 학문은 철 없는 대학생이나 부여잡고 있는 카테고리가 되었다.

결국 개개인의 ‘철학’은 죽어가고 사회적 ‘살아남기 허울’만 절대시 되고 있을 뿐이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 상아탑이라는 말이 있다. 20대를 청춘의 시작이라고 볼 때 ‘지성의 전당’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지는 학교를 다녀본 자신에게 물어볼 일이다. 때론 관념 속에 사는 게 오히려 속편할 수 있다. 아직은 곧 죽어도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니 ‘대학생’이라면 뭔가 있어 보이지 않나. 그 있어 보이는 울타리 안에서 적당히 사회적 ‘성공 타이틀-높은 연봉, 지위, 눈에 보이는 허영, 대기업 사원증’을 거머쥐기 위해 전략적으로 사고한다.

 

전공서적은 시험기간 벼락공부 1주일 정도만 필요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요 몇 년 동안 경영학과가 복수전공 중 거의 필수학과가 된 것도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남한사회의 유별난 특징이다. 곧 요즘 20대는 자기가 얻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이 빠르고 그걸 위해 쾌속 질주한다. 현실적 기준으로 똑똑하지만 자기만의 ‘철학’이 다들 똑같은 경우를 볼 때 ‘멍청하다’고 말할 수 있다. 헛똑똑이들이 난무하는 것이 어느덧 대세가 되었다. 

 

너무 비판적인가. 때론 누군가 이를 사회의 한 현상이라고 한다. 맞다. 사회의 한 현상이다. IMF이후 먹고 살기 위한 ‘신자유주의’란 게 빠르게 대학사회에 들어왔다. 하지만 불과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대학생만큼 그 신자유주의란 시스템을 빠르게 체득한 이들도 없다.
소비와 향락, 타이틀로 정의하려는 사회적 지위, 학문은 뒷전인 패션쇼장, 여전히 변하지 않은 술문화, 무엇보다 돈이 최고란 가치지향 등등….

 

극단을 오가는 경향은 대학을 넘어 남한사회가 직면한 문제 아닐까. 쏠림현상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만큼 심하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 ‘사회 속 체면 세우며 먹고살기’는 요즘 남한을, 젊은이들을 ‘머리’ 없이 질주하게 만든다.

 

■영어와 취업, 풍요 속 빈곤
2011년 상반기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인 행복 지향점 중 최고 비중은 ‘돈’이었다. 80%가까운 이들이 ‘돈’을 인생의 최고 가치에 둔다. 트라우마도 이런 트라우마가 있을까 싶다. 결국 돈이라는 게 사회를 얼마나 얽매고 고통을 주기에 남한을 짓누르는가.

 

그 트라우마를 겪고 싶지 않기에 젊음은 지독히도 발버둥 친다. 은수저 물고 태어난 이들이야 적당한 ‘타이틀’(직장과 직업)만 쥐어 잡으면 그만이지만 은수저 없는 이들은 ‘돈’과 사회적 ‘타이틀’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생각하는 머리를 포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독히도 차별받아야 하는, 자기 스스로가 자존감을 파괴하게 만드는 트라우마를 경험해야 한다.

 

나 역시 트라우마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고상한 척하고 자못 생각하는 철학이 있다고 우쭐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위일 뿐, 남한 사회에서 어느 순간 초라한 백수. 꿈만 좇는 현실감 없는 백수일 뿐이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과 타이틀로 보는 사회, 잔인함도 이런 잔인함이 없다. 하지만 그 잔인함을 성공과 능력이란 포장 아래 모두가 박수를 친다. ‘사람 그대로의 사람’은 잊혀진 지 오래다.

 

트라우마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청춘은, 젊음은, 영어와 취업전선에 자발적으로 뛰어든다. 다른 이유가 없다. 남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고 자신 역시 그럴싸한 타이틀, 부끄럽지 않은 연봉 속에서 한 사회의 일원이라는 만족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예스라고 하는데 노라고 할 수 있는 유연성을 남한사회 자체가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 암묵적 동의 속에 하나의 가치기준을 향해 질주한다. 모난 돌은 아예 내던져 버리고 패배자로 만들어 버리는 게 오늘 남한의 모습이다.

패자부활전? 살아남은 이들끼리도 죽기 살기로 으르렁 대는데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취업한 자 돈 맛을 누릴 수 있는 사회인이요, 취업하지 못한 자 개인의 능력이 못난 패배자>란다.

 

‘토익’이란 단어가 지난 10여년을 취업전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코메디 중의 코메디라고 할 수 있다. 대학 도서관, 시립도서관, 국립도서관 할 것 없이 ‘브랜드’ 같은 토익책을 펴놓고 달달 암기하는 젊은이들을 수 없이 볼 수 있다.

점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위해 남한사회는 잣대를 들이대고 젊은이들은 욕을 하면서도 그 잣대를 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참 눈물겹게...점수 몇 점에 몇 달을 투자한다느니, 900점 수기를 대학수능 성공기보다 더 감격적으로 남기는 이들, 어학연수를 하러간다는 외침, 메아리만 남듯이 공허할 뿐이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한 학기 넘게 토익책과 시름하며 결국 얻는 건 점수뿐이다. 시간대비 효율로만 따져도 소위 교양도서를 읽으면 남는 게 수십 배는 된다고 장담하건만, 남한사회 젊은이에게 이는 선택이 아닌 제외사항이 되어버렸다.

 

취업이라는 바늘구멍을 뚫기 위한 몸부림이지만 남한사회 기업과 한 때는 의식화됐던 ‘아저씨, 아줌마’들이 무서울 정도다. 그들이 던져준 좁은 놀이터에서 결국은 뽑힐 아이들이건만 치고 박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의식화된 아저씨, 아줌마들은 젊은이들의 청춘을 마음대로 휘저을 권리를 너무 많이 갖고 있다. 

 

그렇다면 취업을 한 이들은 적어도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나 역시 취업전선에 뛰어 들고 토익점수를 만들고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이름 있는 기업에 들어간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모습은 이적의 노래 ‘달팽이’가 따로 없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지,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헷갈릴 뿐이다.’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직장 초년생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취업전선을 통과해 얻은 타이틀이 무의미할 뿐이다. 한 달에 한 번 뽕을 맞는 월급쟁이 인생 시작.

 

■존재냐 소유냐
자존감. 현재 남한사회는 과연 젊은이에게, 개개인에게 삶의 ‘지향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는지 의문이다. 학교를 졸업하기 앞둔 이들은 원치 않아도 취업난이란 공포를 맛볼 수밖에 없다.
이미 학교 밖으로 나가 떠돌고 있는 수많은 취업준비생과 취업에 성공해 뻔지르르한 옷가지에 돈을 써주는 이들이 극명하게 대비되지 않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공포감 속에 생각을 말하는 건 어쩌면 사치일 수 있다. 

 

‘자존감이란 걸 애초에 거세시키고 있는 사회’, 남한이 사회로 나오는 이들에게 주려는 고약한 선물이다. 잉여를 만들어 놔야 희소성을 결여시킬 수 있듯이 현재 남한 청년실업은 일자리를 얻은 자건 얻지 못한 자건 별반 차이가 없다. 그 가운데 ‘돈’과 알량한 ‘사회적 인정’이 있을 뿐.

 

그럼에도 자존감을 잃지 않고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이들이 묵묵히 뜻하는 바를 이루어 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의지가 있는 이들에겐 에리히 프롬이 쓴 책 ‘존재냐 소유냐’를 권하고 싶다. 이 책은 적어도 요즘 남한사회를 사는 젊은이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장 쉽고 명확하게 이야기 해주기 때문이다.

나 역시 바닥을 향해가는 자존감을 붙들어 맬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의 도움이 컸다. 꿈을 이뤄보고 싶다고 수십 곳을 들락날락하고, 취직한 이들이 사주는 밥과 술을 마시며 씁쓸함을 피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느꼈을 때 도움이 컸다. 자신을 믿고 따를 수 있는 믿음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기회가 닿는다면 사회로 나가기 전에 남한 사회가 아닌 곳을 둘러보았으면 한다. 웃긴 사실은 인간은 무엇을 하든지 자기 한 몸은 유지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고정된 한 곳을 향하게 만드는 사회, 또 우리의 선택이 마음을 힘들게 한다.

 

낯선 곳,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 이십여 년 넘게 ‘참’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외국 한 시골 동네에서는 참이 아닐 때 느꼈던 충격, 피부색도 다르고 출신국도 다른 아이들이 한데 모여 점심을 먹으며 수다를 떨 수 있는 경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자연.

무엇보다 짧은 기간이나마 아무런 부담감 없이 온전히 자신를 위해 쓸 수 있었던 경험은 존재와 소유에서 고민하는 자신을 다시 보게 만드는 기회를 준다.

 

그렇게 다시금 남한사회로 돌아 왔을 때 멋모르고 남들 가는 길을 따라가는 삶보다는 ‘씨발’ 주악거리며 따라가는 모습이 더 낫다. 악다구니의 모습을 보이는 게 적어도 우리가 아직은 살아있다는 딴죽이며, 자신을 잃지 않고 있다는 몸부림이기에...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똥별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2.24 저 역시 아랑이...제 초심(?)과 당시의 그 순수했던 바람(?)을 되새겨주고 추억에 젖게 해 들어오곤 합니다. 우린 초라하지 않습니다! 직장인이여 힘냅시다...^^
  • 작성자희리 | 작성시간 12.02.24 결국은 돌고 돌아 토익에 목 매달고 있는 현실..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참...ㅠ_ㅠ 이제는 주악거림마저 상실한 채 묵묵히 따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쳤어요 흑흑.
  • 답댓글 작성자똥별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2.25 토닥토닥...ㅜㅜ
  • 작성자월영 | 작성시간 12.02.27 다른 건..별이님 인생이니 뭐..이러는데...가도가도 광활한 자연...그건 부럽습니다..ㅋ
  • 답댓글 작성자똥별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2.28 가도가도 끝없는 광활한 자연...정말 좋죠...한데 실상은 휴가 때나 둘러보거나, 막상 연휴 나서고 싶다가도 혼자라 청승맞아 포기...^^; 월영님 글이 전 반갑습니다ㅎ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