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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유 게 시 판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작성자땡땡|작성시간26.06.02|조회수2,467 목록 댓글 16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채용 인원으로..."
"안타깝게도 서류 전형에서..."

두 개 언론사의 서류 합불 발표가 있던 오늘 나는 두 회사 서류 전형에서 모두 떨어졌다. 도서관에서 황급히 짐을 정리해 나왔다. 70p 분량의 사설, 칼럼 모음집에 밑줄과 별표를 쫙쫙 쳐대며 읽고 있었는데, 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가는 가슴이 꽉 막혀서 체증이 도져버릴 것만 같았다.

오후 4시 30분. 도서관을 나서자 맞은편 아파트 베란다에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도서관 앞 내리막길 양쪽에 각각 일렬로 정렬된 가로수들은 햇빛을 받아 초록 잎사귀들을 파릇파릇 빛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길가에서 꺄륵거리며 신나게 킥보드를 타거나 뛰어다녔다. 정말이지 평화로운 오후였다. 나는 속이 미어터질 것 같은데, 세상은 내 심정에 크게 관심 갖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자전거 주차대 옆쪽 낮은 길턱에 걸터 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그와중에도 가방을 메고 한 손에 저가형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쥔 사람들이 도서관 안으로 드문드문 들어갔다. 젊은 학생과 청년들부터 나이 지긋한 중장년층까지 세대는 다양했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한 지 자그마치 3년이다. 사실 대학 때부터 준비를 했으니 실제 공부 기간은 더 길지만 그 기간은 집계하지 않는 게 아무래도 좋겠다. 서류, 필기, 실무, 면접 등 각 전형에서 수없이 합격과 불합격을 반복했다. 전형에서 떨어질 때마다 상심했지만, 간혹 가다 받아 드는 합격 결과에서 희망을 엿봤다. 이 희망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지 못했다. 사람을 망가뜨리는 건 비관이 아니라 낙관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내가 공부를 하는 사이 친구들은 취준생 신분을 벗고 N년차 직장인이 됐다. 사기업, 공기업, 공공 기관 등 다양한 영역에서 각자 능력과 임금에 따라 1인분을 하고 있다. 친구들은 정부와 가족의 일부 지원을 받고 자기 명의로 된 전셋집을 얻었다. 개중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이룬 친구들도 있다. 나는 친구들에게 힘든 공부를 하느라 고생 많다고 응원 받으며, 50만원짜리 월세 단칸방에서 신문과 책을 읽고, 잠을 잤다.

얼마 전 친구들과 혼술바를 다녀왔다. 그곳에서 내 또래 사회인들을 만났다. 술을 몇 잔 하다보니 서로의 직업 정보를 교환했다. 물리 치료사, 미용사, 개발자 등 직업이 다양했다. 그중 한 명은 다음날 반차를 썼는데 출근하기 싫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밥벌이를 위해 꾹 참고 버티는 그가 멋져 보였다. 제 밥벌이를 하는 사람만이 토로할 수 있는 불만이라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간 직업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라는 말을 매번 되내어 왔는데도, 여전히 직업을 삶의 목적으로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하기도 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그쯤에 했다. 오늘로써 그 생각은 더 명확해진다. 준비한 게 아까워서,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아서, 그래도 글 쓰는 게 좋아서 공부를 그만두지 못했는데, 시간은 맹렬하게 흘렀다. 늦었을 때가 제일 늦었다고 말했던 개그맨 박명수의 말을 떠올린다. 늦었으니까 지금이라도 분주하게 움직여보려고 한다.

도피지만 도피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도피라고 명명하면 너무 비관적이고, 시니컬해보인다. 거창하기까지도 하다. 글쓰기는 내 재능이 아니었고, 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으로 발을 뻗어보겠다 정도로 정리하려 한다. 자아 실현을 위한 새로운 진로 모색 정도로 명명하자. 무엇보다 지난 3년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던 책, 기사, 칼럼 등의 방대한 텍스트가 아까워서라도 도피라는 말은 안 하련다. 나는 언론사에 입사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간 많이 발전하고 성장했다. 

'난 글쓴이처럼 저렇게 안 되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착각하지 말라. 너무 공격스럽게 들렸을까? 화내지 않으셔도 된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 말한 게 아니다. 과거 내 자신에게 말한 것이다. 아랑에서 비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되지 않겠지 생각했던 게 약 2~3년 전쯤 나의 모습이다. 겪어보지 않아서 몰랐다. 이건 내 사례일 뿐이니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만큼은 꼭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있다. 후퇴로(路), 플랜B, 차선책을 생각해보며 공부하는 것도 꽤나 현명한 방법일 듯 하다. 공부하면서 글쓰기 학원이나 주변 스터디원들로부터 "후퇴로 생각말고 공부에 전념하자"는 말을 들었다. 지금 보면 꼭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후퇴로 생각말라는 이들은 우리네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한 번씩 직면하면서 공부를 해야 현실 감각이 무뎌지지 않길 마련이다. 나는 그러지 못해서 현실 감각이 무뎌진 채 3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평화로운 저녁 시간에 너무 비관적이고 무거운 글을 쓴 것 같아 죄송하다. 그래도 내가 위로나 격려, 연대를 바라고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니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너그럽게 지나가주시길 바란다. 언론사 준비생으로서 답답한 마음을 어디 토로할 곳이 없었다. 진심으로 여러분들께서는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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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페지기(아랑) | 작성시간 26.06.04 어디서 무엇을 하시든 앞날에 좋은 일 가득 하시길~ 직업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니까요. 맘속으로 응원하겠습니다!
  • 작성자초록색지갑 | 작성시간 26.06.04 이 글을 읽고 소리 지르면서 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요 고생하셨습니다
  • 작성자오리RTA | 작성시간 26.06.06 고생많으셨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든 노력하고 고생하신만큼 돌려받으실겁니다
  • 작성자바람처럼 | 작성시간 26.06.06 내가 정했던 길을 벗어나는 건 생각보다 꽤 큰 용기가 필요하잖아요.. 정말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이 경험을 발판삼아 앞으로 휼륭한 사회인이 되길 응원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 작성자컵케잌 | 작성시간 26.06.16 1x년차 현직인데요, 거의 10년 만에 아랑 들어왔어요. 이 글을 보고 댓글 꼭 써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네요. 우선 글 너무 잘 쓰세요.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습니다. 언론사 입사라는 게 문이 워낙 좁아서 그렇지 글쓴이님이 부족해서는 아니었을 것 같아요. 가진 장점을 충분히 못 보여주셨거나 운이 나빠서 일 거예요. 이 정도 글을 쓰시는 분이라면 충분히 좋은 기자가 되실 것이라고 생각해요. 연차가 쌓이다 보니 기자가 되고 싶어서 절박했던 20대 시절이 기억조차 나지 않았었는데, 글쓴이님 글을 보고 그 시절 그 마음이 다시금 되살아 났어요. 미래를 위해 진지했던 시간만큼 글쓴이님 인생에 아주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습니다. 기운 내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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