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말씀은 비교적 짧고, 그 내용도 명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돈을 봉헌한 많은 부자들보다
보잘 것 없이 적은 돈이지만, 가진 것을 모두 바친 과부에게
부자들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고 칭찬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복음말씀을 통해서 주시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눈은 우리들의 눈과 다르고,
우리들은 외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결과를 보고 판단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외적인 결과보다는 마음을 보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을 가지고 한 행동이라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잘못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판단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가 좋은 마음으로 한 것이라면,
결과에 상관없이 좋은 마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주시고 이해해 주시리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오늘 상기할 수 있다면,
외적인 나의 행동이나 일의 결과를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기보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좋은 마음으로 여유있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보았다면, 이제 과부의 마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부는 가난했기에 적은 액수의 동전 두 닢을 봉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생활비를 모두 봉헌했습니다.
부자들은 비록 큰 돈을 봉헌했으나,
부자였기에 그 큰 돈은 그가 가진 재물의 일부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봉헌할 용기를 내었을까요?
오늘날의 예를들어 생각하면,
식당에서 일하는 어느 과부가 100만원을 버는데,
80만원 정도를 주일헌금과 교무금으로 봉헌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이렇게 봉헌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그렇게 무모한 봉헌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과부가 이렇게 무모한 봉헌을 할 수 있던 이유,
그 이유는 그녀가 세상에 대해 어떤 기대나 집착,
혹은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의 과부는 죄인으로 취급이 되었고,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가장 힘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성서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주어라.’ 라는 구절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이렇게 당시의 과부는 고아와 같은 불쌍하고 무력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과부는 이 세상에 대한 기대나 집착이 보통사람보다는 적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이 세상의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봉헌할 용기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큰 유혹이 이것이 아닐까합니다.
하느님도 갖고 싶고, 세상 것도 갖고 싶은 유혹,
하느님의 사랑도 받고 싶고, 세상 사람들의 사랑도 받고 싶은 유혹,
하느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고 싶은 유혹...
이러한 유혹은 참으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1206년 아시시 주교관 앞에서 알몸이 되어 세상과의 결별을 선언한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입성은 이 세상의 집착에서 이탈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의 마음,
그 마음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것들에 기대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기에 그렇게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처럼, 또한 성 프란치스코처럼 무모한 선택을 했던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고, 그 나라를 증언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