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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작성자물소리|작성시간07.10.28|조회수378 목록 댓글 6
다음 주에 아우수티누스(일반적으로 영어식 발음으로 '어거스틴'이라고도 합니다.)에 대해 잠깐 언급할 예정이기에 그의 고백록에 대한 Tom Butler-Bowdon의 해설을 옮겨 놓습니다. 참고되셨으면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의 고백록(Confessions)

우리 대부분은 되고 싶은 나와 지금 이대로의 나 사이에 있는 긴장을 경험한다. 자아가 이렇게 둘로 분리된 정도가 크면 클수록 고통은 그만큼 커진다. 그러나 그 고통 자체는 치유되기를 바라는 강한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다. 아우구티누스의 비통한 내적 씨름은 그가 30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비록 천5백 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의 내적 승리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의 삶에서 처음 10년 동안 아우구티누스는 타고난 총명으로 순항을 계속할 수 있었고, 전문적인 일에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우수한 두뇌와 해박한 지식도 그를 행복하게 하거나 평안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쾌락을 정열적으로 즐겨보지만 다가오는 것은 공허함뿐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우구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음 그는 교회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교부의 한 사람으로서, 그 유명한 󰡔신의 도성 (De Civitate Dei)󰡕의 저자, 아우구티누스 수도회의 창립자 등이 되었다.

그러나 󰡔고백록󰡕에서 말하고 있는 목소리는 ‘위대한 인물’의 목소리가 아니다. 친밀하고 정직한 목소리로 아우구티누스가 어떻게 이기적인 관심에서 점점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옮겨갔는가 하는 것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훌륭한 번역으로 읽으면 마치 스스로를 개선시키고 좀 더 영적인 삶을 살려고 애쓰는 친구의 일기장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고백록󰡕은 최초의 자서전에 속하는 책으로서 서양 문학사에서 배아와 같은 역할을 했다. 영적 깨달음 (혹은 ‘거듭남’)이 어떻게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초년의 삶

아우구티누스는 354년 로마제국의 말년에 북 아프리카 누미디아(지금의 투니시아) 주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 지방 하급 공무원으로서 로마제국의 일상적 이교 관행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여인이었다.

아우구티누스는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키케로, 베르질리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읽는 지극히 총명한 학생이었다. 󰡔고백록󰡕에서 그는 그 당시 멋있는 웅변이나 글쓰기가 윤리적 가르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불만이라 하면서도, 자기는 웅변이나 글쓰기 솜씨가 뛰어났다고 이야기한다. 교육을 더 받기 위해 그는 집에서부터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문법과 수사학 전문학교로 전학해 자기 반에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열여섯 살 때 아우구티누스는 다시 부모의 집으로 돌아와 일 년을 그들과 같이 지냈다. 그는 급속도로 성장했는데, 하루는 목욕을 하는 중 그의 아버지가 그의 만개하는 ‘성숙성’을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있다. 이렇게 한 해 동안 자유스럽게 보낸 것이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실수로서, 이 때 욕정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스스로를 소진했다고 후회스런 어조로 회고한다. 죄가 “기름 덩어리에서 나오는 분비물 같이 자기에게서 흘러나왔다”는 표현을 썼다. 그의 부모들이 그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결혼을 시킴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결혼해서 아내가 있으면 그의 야망이 좌절되어 버릴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으리라 회고한다.

번뇌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영혼, 아우구티누스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젊은 시절의 불장난 같은 것으로 여겨질 일들에 대해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써내려 가고 있다. 자기와 자기 친구들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재미로 배나무를 흔들어 배를 따 가지고 도망간 사건을 이야기하는 유명한 고백도 있다. 아우구티누스에게는 그 사건이 양심 없이 사는 삶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개인적 상징이 되었다.

유혹의 가마솥

아우구티누스의 삶은 그가 카르타고로 옮기면서 또 하나의 전기를 맞이했다. 카르타고는 학문의 중심지로 그가 학업을 계속한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시칠리아 섬으로부터 지중해를 가로 질러 있는 항구 도시로서 ‘천박한 사랑의 가마솥이 온통 내 주위에 널려져 있어서 내 귀에 대고 노래를 속삭이는 곳’이라고 할 정도로 온갖 유혹이 들끓는 곳이었다. 그는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살았고,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 ‘욕정의 행위’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밤에는 극장으로 가 연극을 구경했는데, 특히 극도로 비극적인 것이나 음란한 것을 좋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쾌락에 빠지면 빠질수록 그의 삶은 더욱 의미 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우구티누스는 계속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특히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을 통해 철학을 더욱 좋아하게 되고 진리 탐구의 정신을 일깨울 수 있었다. 성경도 읽으려고 했지만 그 때에는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겸손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자인한다. 아우구티누스의 자연스런 영적 성향은 마니교로 쏠리게 되었는데, 마니교란 영지주의 복음과 조로아스터교와 불교를 혼합한 기독교의 분파였다. 이것이 그의 어머니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아우구티누스는 9년간 마니교 신앙을 지켰다. 그는 점성술에 심취하기도 했다.

전문직으로 아우구티누스는 수사학 교사가 되어, 카르타고와 그의 고향 타가스테에서 가르쳤는데, 그는 이것을 ‘수다를 파는 것’이라 하며 부끄럽게 여겼다. 그가 선택한 직업이 내용보다는 형식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아우구티누스가 이를 거북스럽게 여긴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전문적인 냉소주의자가 되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진리의 샘을 즐기지 못했다.

“(나의 나이 열아홉부터 스물여덟까지) 9년간 우리는 여러 가지 정욕 속에서 유혹 당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면서, 속임을 당하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면서 살았다. 공개적으로는 이른바 자유스럽다고 하는 학문들에 의해, 비밀스럽게는 거짓 이름이 붙은 종교, 때로는 거만하고, 때로는 미신적이고, 언제나 허망한 그 종교와 함께. 여기서 우리는 공허한 대중적 찬양을, 심지어는 극장의 박수, 훌륭한 시에 따르는 포상, 멋있는 화환, 어리석은 쇼, 정욕의 무절제 등을 뒤쫓고 있었다.”

아우구티누스는 어느 여자와 혼전 동거에 들어가고, 그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 이름을 ‘아데오다투스’라 하였다. 비록 그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고 둘이서 아들을 사랑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죄책감 때문에 이 관계를 거룩하지 못한 것, 정욕에서 잉태된 것이라 묘사하고 있다. 나중 어머니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이 이외에도 무언가가 아우구티누스를 ‘영혼의 어두운 밤’에서 헤매게 했는데, 그것은 어느 친구의 죽음이었다. 자기 슬픔의 깊이에 스스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그런 비통함이나 비참함이 어느 특정한 사건 때문이기 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깊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조용한 곳, 독서, 먹고 마시기, 섹스 등에서 평안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어느 것도 그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아우구티누스는 20대에 들어서면서 두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학문이나 지성이 그에게 진리를 알게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질문하고 의심하게 하는 법만 가르친다는 것)과 쾌락을 그토록 오래 추구해 보았지만 오히려 더욱 비참하게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성이 ‘또 다른 빛으로 밝혀져야만’하는데, 그 빛이란 곧 하느님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이 그의 비참함을 받아들이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고통스런 발견

383년 아우구티누스는 어머니를 피해 로마로 이사했다. 다음 해 마니교에 속한 친구의 도움으로 밀라노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직업을 얻었다. 밀라노에서 그 유명한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강론하는 것을 즐겨 가서 보았는데, 그것은 그의 종교적 통찰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웅변가로서의 그의 화술을 보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암브로시우스는 그의 본받을 스승이 되었고, 점점 그의 그리스도교 기별이 아우구티누스의 머리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처음 아우구티누스는 성경이란 ‘부조리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라 생각했지만, 이제 성경에 그렇지만 않은 다른 부분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우구티누스는 ‘불안과 공포에 지쳤다’고 했다. 외적인 것만을 위해 살면서 내적인 평화를 찾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익숙한 불평이라 할 수 있다. 아우구티누스에 의하면, 언제나 성공이 그의 손에 잡힐 듯이 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 친구에게 그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솔직함을 가지고 한 말에 의하면, 사람들은 모두 행복의 근원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행복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심과 명예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고통만 당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은 아닐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으로 얻을 수 있는 더 큰 안목을 가지게 되면 비참함과 고뇌도 씻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당신에게 향하지 않고 자신에게 향할 때, 그것은 슬픔으로 뒤덮이나이다.”

하느님의 현현

아우구티누스는 생각했다. 하느님이 없이는 자기가 ‘자기 자신의 쇄락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앙보다는 이성에 의지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계속하면서 신이 정말로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매달려 있었다. 드디어 단순하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일로 그의 마음은 오랫동안 잠잠할 수가 없었다. 그의 가장 큰 걱정은 만약 자기가 신부가 된다면 그가 어찌 육체의 쾌락을 거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씨름의 고비는 그와 그의 친구 알리피우스의 시골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찾아왔다. 아우구티누스는 언제나처럼 절망감에 시달리면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엎드려 믿음이 없은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구원과 치유함을 얻을 수 있을까 부르짖고 있었다.

그런데 󰡔고백록󰡕의 절정에 해당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담 너머에서 자기 친구들과 무슨 게임을 하던 어린 아이가 “들어서 읽으라.”하는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것을 하나의 신호라 생각하고 아우구티누스는 자기 친구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가 읽고 있던 성경책을 집어 들고 아무 곳이나 펴보았다. 그의 눈이 처음 닿은 곳에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정욕이나 방탕함이나 경쟁의 길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뜻의 글이 있었다.

아우구티누스는 수사학 교사직을 사임하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가 신부로 안수를 받았다. 396년 힙포 (오늘날 알제리아의 안나바)의 주교가 되고 그가 죽기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그가 한 때 따르던 마니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이설들을 열정적으로 비판하고 스스로 정통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옹호자로 우뚝 섰다.

나가면서

우리의 비참한 심경이 지극하면 거기에 비례하여 지극히 평화스러움을 느끼고 목적의식이 뚜렷해지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그것은 고통이 그처럼 지극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경험해볼 수 없는 무엇이다. 󰡔고백록󰡕은 어떻게 분열되고 고통당하던 인간이 종교를 통해 치유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저작 중 하나다.

그러나 아우구티누스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같은 그런 식의 감명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은 아니다. 여러 면에서 아우구티누스의 독선적 교리라든가 섹스나 삶의 즐거움에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입장은 교회에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고백록󰡕을 영어로 번역한 브레이크록크도 기만, 욕정, 결단성 부족 등 아우구티누스의 인격 속에서 발견되는 결함들을 솔직하게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독자들도 아우구티누스가 사실혼 관계에 있던 여인을 어떻게 취급했던가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친한 친구들, 활발한 성격,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젊었을 때의 아우구티누스가 오히려 늙어서 교리적으로 고착된 아우구티누스보다 더 가까이하기 편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티누스처럼 자기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한 사람이 역사적으로 결코 흔하지 않다. 별볼 것 없는 로마 제국 시골구석에서 보낸 유년 시절이나 바삐 돌아가던 학창 시절을 감안할 때 아우구티누스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다가오는 천년 동안 서방 그리스도교를 위한 대표적 지성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거작, 󰡔신의 도성󰡕(426)은 그가 13년에 걸쳐 쓴 것으로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를 위해 신학적 초석의 역할을 했다. 이 모든 것이 백인들의 제국 변방에서 태어난 흑인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아우구티누스는 430년, 마침 반달족이 그의 도시를 약탈하기 위해 침공해 오고 있을 때 죽었다. 그의 교구에 있던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고백록󰡕은 그러니까 미구에 영원히 바뀌고 말 한 세계의 지리와 관습을 적어놓은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사실의 기록이 이 책에 나타난 내면적 혁명에 대한 기록만큼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아우구티누스는 모든 종교의 기본이 되는 영적 비밀을 발견했다. 그 비밀은 바로 믿음이 고뇌하는 심령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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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크리스마스 | 작성시간 07.10.30 읽고 또 읽고 감동이 크네요.....
  • 작성자물소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0.30 순수님, 한국에서 즐겁고 유익한 시간 보내시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계속 건강하세요. 크리스마스님, 크게 감동을 받으셨다니 저도 감동입니다. 어디서 '읽고 또 읽고' 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 작성자cowboy | 작성시간 07.10.30 인간적인 욕심의 생활로 부터 끊임없는 방황과 고뇌를 벗어나는 한 인간의 성장과정이 진솔하여 흥미있읍니다..허나 고뇌와 방황에서 영적 비밀을 깨달아 교리적 고착에 빠짐은 인간성의 한계를 말하는듯 합니다..아무리 심령에 평화를 얻었다해도 참 진리를 묵언하고 현실적 교리를 강제함은 어쩔수없는 주교의 역할이었을가요?..인간은 불완전것에 의미가 있을가요.
  • 작성자크리스마스 | 작성시간 07.10.31 본문에 있듯 친구의 일기장같이 정직하기에 감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초의 자서전격이라는 것, 기름덩어리에서 나오는 죄도 재미있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갈등하는 대목에서 며칠전 만난 친구전도사의 갈등이 이해되고 영혼이 자신으로 향할때 슬픔으로 덮히나이다 고백하며 믿음을 붙잡는 것과 후의 한결같음에 감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극히 고뇌하는 심령에 영적비밀이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주심에 물소리님이 아주 고맙습니다.^^
  • 작성자민들레 | 작성시간 07.11.06 저도 강의 중에 어거스틴이 사실혼 관계에 있던 아이까지 낳은 여인을 버리고, 신분 좋은정숙한 여인하고 결혼한게 무어 잘한 일이가 의심을 품었어요..기독교인이었을 어머니는 예수의 가르침을 몰랐나봐요. 주교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함도 세속적인 시각으로 봐서그렇고 , 목사로 탄광촌에가서 선교사업을 시작한후 비참한 광부들과 , 소작농들의 일상생활을 그리고 자신은 죽을 때가지 알코홀 중독자로 말술을 마셔 댔지만 자신과 인연맺은 매독걸린 창녀와 창녀가 죽은후 그딸까지 돌 본 고호가 훨씬 예수님의 가르침에 가까운 인간형이었다 생각해요..고백록을 읽느니 싸구려 복사품이라도 고호의 그림을 들여다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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