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는 손이 없는 댁에 양자로 오시어 슬하에 4남 1녀를 두셨다.
네 아드님들이 줄줄이 아들들을 낳으니 번족하여 손자 대에서 백 명의 자손이 되었다.
오 남매 중에서 총기가 뛰어나고 거기에 성품에 정감이 깊어서 부모님의 사랑을 극진히 받으셨고
효심 또한 남달라서 그 일화가 아직도 대소일가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는 당신 가문에 대해 깊은 애정과 자긍심을 가지신 분이었다.
“가난한 선비 가문이 뭬 내세울 게 있어요?” 내가 말하면
“국혼을 하지 않은 것, 삼정승을 배출하지 않은 것이 자랑이란다” 하며
“자고로 권력 주변에 있으면 지조를 지키기 어렵고 정쟁에 휘말려 가문과 일신에 환을 자초하기 마련이다.” 하셨다.
아버지는 학교 문전에도 못 가보신 어머니나 우리 다섯 딸들에게 다정하고 자상하여
퇴근을 하시면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 중에 고향 파주에서 할
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해서 스무 식구가 살던 이야기는 흥미가 진진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파주이다.
열아홉 살 때, 기미년 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났고 그 때 학생 대표로 참가하였다가 붙잡혀서
8개월 옥살이하고 나온 뒤 제적당하여 이 일 저 일을 하여 돈을 모은 후,
종로구 누상동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고향에 있는 동생과 조카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모두들 재주가 출중하여 경성제일고보에 입학이 되었고,
월반을 하여 서울대의 전신인 제국대학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대학 일학년의 나이인 20살 청년이 해낸 일이다.
Daum에 지금은 휴점 상태지만 "兪씨네 여인들"이라는 조촐한 카페가 있다.
가끔 나는 그 곳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썼다. 그러면 조카들이
"고모, 토지를 읽는 것 같아요. 재미있어요. 기억력 흐려지기 전에 많이 쓰세요" 한다.
무엇이 재미있겠는가. 자기들 핏줄 이야기니까 그렇지.
그래서 쓰여진 것이 “그 여름의 강물”이라는 긴 글이다.
둘째아버지는 딸 다섯을 두셨는데 셋째 따님이 상딸이었다. 이름이 유옥진.
한 살, 두 살짜리 아기들의 실질적인 家長이 되어, 평소의 음전함과 기품을 조금도 잃지 않고 굿굿 하게 살아 나갔다.
친정의 행사 때마다 잘 자라고 있는 두 아들을 치장시켜서 데리고 오면 쌍둥이처럼 대견했다.
언니는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하였는데,
당시 여인들의 유행은 이 광장 시장의 포목상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비단 앞에 서 있는 상점 주인들은 맵시가 뛰어 나고 화려하고 당당했다.
그 때는 거의 한복을 입던 때이라 장안의 갑부들의 안방마님들이 주 고객이었다.
언니는 그 곳에서도 의연하고 품위가 있었다.
하루 장사를 끝낸 어느 날, 점심을 먹은 것이 얹혔다고 저녁밥을 거르더니
그 밤으로 세상을 떠났다. 언니 나이가 마흔 여덟 살이었다.
물론 따님이 유명한 소설가지만..." 하는 것이다.
친정 식구들과 더불어 당신 시누이의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하관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사돈(박완서 선생)"과 조문으로 수인사를 나누었다.
그후 박선생의 작품을 다시 읽어나가며 언니가 나오는 대목을 남다른 감회를 갖고 훑어 나갔다.
"도시의 흉년"의 광장포목상들의 묘사에서, 또 "그 많은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에서
시뉘님의 손끝을 타고 살아나는 언니를 보았다.
박종화 선생님 댁이 이웃에 있었고, 문성여중 교정에서도 놀았구요."
60회 호원숙 후배였다,
우리는 그 시절 골목 앞 푸주간의 젊은 부부. 공동 수도. 잡화상 할머니의 이야기를 신나게 나누었다.
그 때쯤은 원숙씨가 박선생님의 따님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친근감이 더 들었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도 의연했던 언니를 다시 떠올렸다.
동생 현진(49회)이 지금 구리시 토평동에 살고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동생은 박선생이 선종하신 후 자손들이 바치는 연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해왔고.
낭독회에 다녀와서도 남다른 소회를 피력했다.
한국 문단에 뛰어난 자취를 남기고 떠나신 고 박완서님의 영혼이
천상에서 평화의 안식을 누리고 계실 것을 믿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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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선진4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1.29 덕숙후배, 오랜만입니다. 편안하지요? 어제는 설날이었어요. 음력으로 섣달그믐에는 밤을 새야한다는 말이 내려오지요
그래서 밤잠을 안자기로 하고 이것저것하다가 경운홈에 올라온 이 글을 사랑방에도 가져왔어요 24일 박선생 6주기 추모 낭독회가 있었어요.
송경희후배. 예쁜 카드로 덕담을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경희씨도 복 많이 받으셨을 줄 압니다.!! -
작성자김신숙55 작성시간 17.01.29 아! 그렇게 된거였군요. 선배님의 가족이나 친척이야기는 사적인 것 같은 데 항상 무언가 생각하게 해요.뭐랄까... 내려오는 '정신(원칙 또는 철학)'이 있는 집안이라는 .. 선배님 ,오라버님. 동생, 언니분 등등..
박완서(존칭 생략)의 글에서 올케 언니를 언급한 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올케가 박원서가 서울대학에 들어갔을때 무슨 일을 해서라도 박완서의 공부를 시키겠다고 올케가 얘기했을 때 박완서는 갸우뚱했다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렇게 해서까지 학교를 다녀야 하나?하는 회의를 가졌다는. 그 때 박완서도 재미있었고 올케언니도 그 나이에 아이가 둘딸린 과부인데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
답댓글 작성자유선진4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1.29 박완서님에게는 오빠 한분밖에 없잖아요? 그 오빠 결혼식에 6살인 동생 현진과 사촌오빠 딸인 유태화(49회)가 분홍 한복을 입고 화동이 되어
꽃을 뿌리며 결혼식 입장을 하였지요. 13살인 나도 물론 참석했고. 박선생님도 당연히 계셨을테고...언니가 오래사셨으면 집안 행사에서 만났을꺼에요.
우리 친정에서는 언니의 시어머니 그러니까 박완서님 어머님을 많이 칭찬했어요. 현명하신분 같았어요. -
작성자홍욱화60 작성시간 17.01.31 정말 옛날에는 한 집에서 8촌 난다더니 그렇네요. 저도 지금 보면 저한테는 친한 4촌이지만 이게
우리 세대를 넘어감 금방 6촌, 8촌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집안 대소사에 참여하지
않음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지내겠어요. 어떻게 된게 요즘엔 만났다 하면 몇십년만에 만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네요. -
작성자주덕숙53 작성시간 17.02.01 우리도 나이를 줏어먹어 그렇지요. 저 어려서 집안 대소사에 자주 오시던 친척분들, 촌수가 어떠했는지 여전히 아리송. 그저 아무개오빠, 사시는 동네 붙여서, 회현동, 필운동, 장충동 삼촌/큰엄마/잔엄마/할머니/할아버지... 이제는 다 멀리 먼저들 가셔서, 어느듯 저희가 어르신들이 되었고. 아무개오빠라 칠십년 부르던 분이 갑자기 제 당숙이라해서, 헐! 제 아래 세대들은 외가 친가 따질것 없이 그저 가까이 친하게 소식전하며 사는 사람들만이 "친척" 이랍니다. 아직은 할머니 할아버지 기일 알리면 군소리 없이 나타나 절 올리는 제 아랫세대가 대견할 뿐입니다. 음력설 모임은 부모님 타계하신후로 한 두번, 끝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