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가 놀이인 것은
놀이가 결코 진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놀이가 진지해지면
놀이의 목적인 기분전환은 상실되고 맙니다.
놀이가 진정한 놀이가 되려면
노는 사람이 전적으로 놀이에 몰입해야 합니다.
놀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놀이는 파괴되고 맙니다.
진지하지 않아야 놀이이지만
또한, 진지하게 임해야 놀이입니다.
놀이처럼 삶 역시 진지한 것은
삶은 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놀이처럼 삶 역시 진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 진짜 삶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고통과 아픔을 겪을 때마다
삶은 결코 놀이가 아님을 자각합니다.
문득 죽음 이후의 삶이 궁금해질 때마다
삶이 혹시 놀이는 아닌가 의심스러워집니다.
만약 고통과 아픔이 허용되는 놀이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약 4년간의 삶은
어쩌면 놀이의 세월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놀이에 열중한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단지 놀이임을 알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놀이가 끝나가면 비로소 알게 되겠지요.
4년간의 세월이 놀이였다는 자각은
이제 놀이가 끝나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고통과 아픔이 허용된 놀이,
바로 그 놀이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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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In his steps 작성시간 17.03.14 놀이를 풀이하면서 삶으로 연결시키는 Scaramouche님은 철학적인 사고가 뛰어나십니다.
'삶의 고통과 아픔이 허용된 놀이가 삶이지 않나...'
힘든 아픔과 고통 중에 세월이 물흐르듯 흘러가기를 바라며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인생은 결국 허무한 놀이일텐데, 사랑이 사라진 거짓과 음모, 비방과 다툼...
그것도 예수를 믿는다는 목사들의 광기...
놀이의 끝에는 알게될 날이 있을런지요. -
답댓글 작성자Scaramouch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3.14 몸글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해 주시는 In his steps님의 통찰력 있는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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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petty 작성시간 17.03.18 Scaramouche 님의 현란한 유머러스 한 문장력에 감탄을 금할 길 없습니다.
비유컨대, 드라마 대장금에서 어린 장금의 대답이 있었습니다.
"고기무침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 맞추는 테스트에서"
"홍시 맛이 나서 홍시가 들었다고 했는데 왜 홍시가 들었느냐고 하시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하는 대답을 들으면서 어린 장금이가 깜찍하다는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몸글을 읽으면서 불교에서는 " 인생은 고해와 같다"라고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고난과 아픔은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아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 일까요? 놀이 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