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설거지를 시작한 지 이제 딱 2주 되었습니다.
그럼 그 동안 집에서 설거지를 안하고 살았냐고요?
예. 저를 뻔뻔하다고 여기실 수 있겠지만 안하고 살았습니다.
설거지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일과도 거의 담을 쌓고 지내다시피 해왔습니다.
그렇게 ‘간 큰 남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왜 갑자기 일주일에 세 번 설거지를 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는지 말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간이 쪼그라들어 크기가 작아져서?
도무지 정리를 할 줄 모르는 아이들에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사일로 힘들어하는 아내의 모습이 보기 애처로워서?
표면적인 이유들은 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것, 그것이 이유라면 이유입니다.
과거에는 설거지보다 중요하고 값진 일들이 많았습니다.
더 풍족한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생각에 잠기는 것,
건강을 위해서 쉬거나 운동을 하는 것......
이런 일들이 먼저이다 보니 설거지를 비롯한 집안일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나름 성실하고 괜찮은(?) 가장이었습니다.
물론 아내와 아이들은 어이없어 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일주일에 세 번 설거지하는 것이 뭐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는 크게 고마워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반응도 시큰둥합니다.
무슨 거대한 비전이 담겨 있는 일도 아니고,
아내가 아이들이 별로 알아주지도 않는 듯하고,
내 시간만 빼앗아가는 귀찮고 재미없는 설거지...
그 설거지가 왜 갑자기 중요한 일로 다가오는지 참 의문입니다.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고 추구해왔던 거대한 삶의 비전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으며,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는 사랑과 정의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지 못하고 마음 속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에 대한 반성으로 설거지가 튀어 나온 것은 아닌지...
혹시 또 모르겠습니다.
제가 앞치마를 두르고 어설프게나마 하는 설거지가
아내에게는 자신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받아들여지고
아이들에게는 힘든 엄마를 돕는 솔선수범하는 행위로 여겨져
우리 가정이 보다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으로 변하게 될지요.
물론 그렇다고 변한다고 해서 제가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니겠지요.
설거지를 사랑과 배려의 행위로 만들고
설거지를 솔선수범하는 가장의 행위로 만드는 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라는 거대한 비전도
오직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설거지뿐입니다.
토요일 저녁, 오늘도 설거지를 하는 날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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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Scaramouch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7.01 그러게 말입니다. 더 늦기 전에 철이 들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설거지가 생각보다는 힘이 들더군요. 저도 장로님처럼 전매특허를 받을 수준에 이르려면 한 30년은 더 해야겠지요? 나중에 설거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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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In his steps 작성시간 17.07.04 Scaramouche 몸글을 다시 읽으니 감동입니다.
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오직 설거지.
화목과 사랑이 넘치는 거대한 작업은 오직 주님만!
믿는 자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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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의각 작성시간 17.07.02 허허, 좋습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설서지 자문에 응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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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petty 작성시간 17.07.03 설거지 시작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저도 설거지를 시작한지는 한 참 되었습니다. 아마 20년은 된 것 같습니다.
시작한 동기는 아내가 몸이 약해 힘들어하던 것도 이유였지만, 더큰 이유는 사랑의 실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작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지만,
다 포기하고 설거지를 시작한지 일주일쯤 지나서야 제 마음을 추수르고 기쁜 마으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자기를 부인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설거지를 기쁜 마음으로 하기 시작하니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실천하게 되더라고요. Scaramouche 님도 이런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
작성자In his steps 작성시간 17.07.03 남자와 설겆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핫한 주제입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일의 분담으로 설겆이등 잡다한 일을 나누어 합니다. 심지어 육아휴직도 낼 수 있으니... 우리 세대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설겆이로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과 전매특허를 받을 수 있으신 수준이라니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진 않지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