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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회심과 구원

믿는다면서 두려워하는 자는 천국에 못 간다

작성자Stephan|작성시간13.05.21|조회수1,498 목록 댓글 9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성경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인 지옥에는 어떤 사람이 가는가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죄목이 열거되어 있는데, 첫째 두려워하는 자들은 지옥에 간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참 이상한 말씀이다 싶으시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믿기는 믿고 교회도 다니는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교회를 어느 정도 다니면서 성경도 배우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믿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장 19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는 말씀대로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과 닮아도 제사하거나 기도하는 원숭이는 없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만 영(靈)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원숭이는 사람과 유사하게 생겼고, 사람 비슷하게 행동도 합니다. 원숭이가 사람처럼 옷 입고 침대에서 자고, 아침에 담배 하나 입에 물고 텔레비전도 보는 장면이 얼마 전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수세식 화장실도 잘 사용하고, 나들이옷으로 갈아입고 직장에 출근도 합니다.

 

 

직업은 바-텐더, 손님에게 양주에 얼음까지 넣어 주고, 담뱃불도 붙여주었습니다. 사람하고 다를 게 없이 행동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원숭이들로 이루어진 밴드도 있습니다. 나팔 불고 북도 치고 하는 것을 사진에서 봤습니다. 원숭이가 자동차 운전도 하고, 심지어 미국 어떤 농장에서는 원숭이가 트랙터도 몰고 다닙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원숭이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세계적으로 기도하는 원숭이는 한 마리도 없습니다. 원숭이가 제사했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원숭이가 무엇을 섬긴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왜 더 복잡한 것까지도 따라 하면서 원숭이는 기도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원숭이는 종교심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때 옆에 앉혀 놓고 아무리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도 따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원숭이는 영(靈)이 없는 까닭입니다. 짐승에게는 영이 없습니다. 짐승은 하나님을 찾을 마음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은 영이 있고, 이 영(靈)은 신(神)을 찾습니다. 문명의 발달 정도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람은 절대자를 찾고 또한 섬겨 왔습니다. 아침에 해 뜨는 것을 보고 그게 신인가 싶어 절하고, 밤에는 달 앞에 절합니다. 풍랑이 일면 바다에 절하고, 비가 오지 않으면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냅니다.

 

 

신을 찾고자 하는 마음은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든지 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 주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대부분 믿습니다.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저도 여러 번 만나 봤습니다. 교회는 비록 다니지 않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는 안 믿지만 밥 먹을 때 하나님께 꼭 기도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믿고 사람의 영혼이 있는 것도 믿는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회 가서 기도하려고 눈 감으면 답답합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고 자기는 죄수입니다. 죄수가 재판장 앞에 서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죄 때문에 답답한데 눈 감으니 더 답답합니다. “어찌 하오리까? 이 죄인을 어찌 하오리까?” 하고 눈물로 기도하지만, 그때뿐이고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밤 늦도록 울고 또 새벽마다 울고불고 하니, 그래서 교회당이 세워지면 근처의 집값, 땅값이 다 떨어진다고 합니다. 새벽마다 울어대고 밤 새가며 울어대니 사람이 살 수가 있어야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러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저렇게 우는 것을 보니까 예수가 진짜 죽긴 죽었는가 보다.” 정말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한다는 소리가 “그것은 말이죠, 은혜 받아서 우는 거지요”라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그렇게 우는 것입니까? 참으로 은혜를 받아 감사해서 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받았다는 은혜란 것이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워서 그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새벽마다 자기 아버지 방 문 앞에 가서 “아버지… 아버지!” 하고 울어대면 아버지가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런 기도 하는 사람 얼굴을 밑에서 쳐다보면, 인상이 다들 걸레 짜놓은 것 같습니다. 남들 이야기가 아니고, 전에 제가 그랬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제가 구원받기 전 농촌교회에서 목회할 때, 캄캄한 새벽에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런 식의 기도를 하도 오래 해서 발등에 복숭아씨만 한 굳은살이 박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무릎으로 천당까지 기어간다’고 하면서 기도하고, 하도 인상을 찡그리며 기도해서 젊었을 때 벌써 주름살이 다 끼었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위를 붙잡고 기도하며 울기도 했습니다. 은혜에 감사해서가 아니고 마음이 답답해서 그랬습니다. 어떤 때는 신세 한탄하며 답답해서 울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귀신들이 두려워 떠는 이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은 귀신들도 믿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지옥 갈 것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 떱니다. 귀신 들린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유대 종교가들은 예수님을 몰라 봤지만, 이 귀신 들린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봤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는 중에 만난 점(占)치는 귀신 들린 여자가 바울과 그 일행을 보고 따라와서 여러 날 동안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 16:16)고 소리쳤습니다. 얼마나 정확히 알았습니까. 귀신이 더 잘 압니다. 하나님을 알긴 아는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귀신에게도 그런 믿음은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캄캄한 밤에 불을 켜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채워지면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하나님 계신 것을 알게 되고, 자기는 죄인인 데다가 죽어서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갈 것을 알았다면 하나님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사실을 알고 너무너무 무서워서 잠을 못 이루기까지 합니다. 마치 지옥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자다가도 일어나 두려워 떨기도 합니다.

 

한 번은 겨울에 전북 어느 농촌에서 집회를 할 때입니다. 죄(罪)와 심판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는데 중간쯤에 앉아 있던 한 부인이 벌떡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강단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대성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많은 사람들도 같이 소리 내어 울므로 설교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참 만에 설교를 다시 계속 했습니다. 그날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 부인에게 왜 설교 중에 벌떡 일어나서 나왔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부인이 대답하기를, 자기 앞에 지옥불이 훨훨 타오르는 것 같아 너무너무 답답하고 숨이 막혀서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알면 두려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두려움이 사라져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사랑이 죄와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집니다.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가득 채우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아 천국 갈 소망이 생기니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구주의 사랑 내 맘에 가득 찬 뒤 성령이 내 맘에 거하며, 주 나의 모든 두려움 물리친 뒤 내 소망이 하늘에 있도다”(찬송가).

 

 

주님의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이루어질 때, 죄와 죽음과 심판과 지옥의 두려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도 천국 간다는 소망이 더욱 확실해집니다. 그것이 성령이 오신 증거입니다.

 

 

 

뜨거운 체험, 신비 체험 해도 거듭나지 못하면 두려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뜨거운’ 체험을 한 것을 가지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내용인즉 기도하는데 온 몸이 화끈하고 불이 옆구리로 확 지나가거나, 또는 십자가 환상을 봤다는 것입니다. 신비한 어떤 체험을 하거나 방언을 하거나 기도하여 병이 나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것들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묘하게 정상적인 것보다 요상한 것을, 성경말씀보다는 이상한 체험들을 더 의지합니다. 성령은 육체의 어떤 느낌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靈)으로서 우리 영(靈)에 오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양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아직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란 믿기는 믿는데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란 말 그대로 불신자를 가리킵니다. 아예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그것이 심판의 조건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또한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도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남의 목숨을 파리같이 여기고, 흉악한 일을 골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히 “그런 놈은 지옥에 가야 돼!”라는 소리를 듣는데, 물론 그들은 당연히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흉악한 일을 한 사람 없습니까? ‘나는 살인은 안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과연 살인자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쉽게 살인하는 아주 뻔뻔한 살인자들이 요즘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나라만 해도 한 해에 백오십만 명이 넘는 태아가 ‘가족계획’이라는 미명하에 죽어갑니다. 자식에게는 그토록 인자한 어머니가 태아는 왜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것입니까? 뱃속에 있는 자식은 자식이 아니고, 태아의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까?

 

 

예전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당시에, 대통령의 지시로 낙태 수술하는 과정을 촬영했던 필름이 공개되었습니다. 15주 된 태아를 초음파로 찍으니까 심장 뛰는 것까지 다 보였습니다. 신체의 중요한 부분이 이미 다 생겼습니다. 낙태수술을 하기 위해 기구를 집어넣으니까, 그 태아가 본능적으로 기구를 피했습니다. 이리 저리 피하는 태아를 기계가 꽉 집자 그 아이가 입을 벌리며 비명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제목이「소리 없는 비명」인데, 우리나라에는「침묵의 절규」라는 제목의 비디오 테이프로 소개된 바 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이것을 보고, “봐라. 아이가 비명을 지른다. 이것이 살인이 아니냐. 이것은 엄연히 살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엄마 살려 줘! 날 죽이지 마!” 하고 애원했을 것입니다.

 

 

수술기구에 의해, 아니 부모 및 의사의 공모에 의해 그 태아는 처참히 살해되었습니다. 머리는 기계로 깨어서 흡입장치로 빨아냈습니다. 끄집어 낸 태아 조각들이, 깨어진 머리는 머리대로, 팔 다리는 팔 다리대로, 장기는 그것들대로 용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어떤 산부인과 의사가 말하기를, 자기는 낙태수술을 수없이 해왔는데 그것은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낙태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더 자란 태아를 수술하는 광경이 그 필름에 하나 더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를 본 레이건 대통령은 “낙태수술 절대 반대다”며 낙태수술을 금지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지금은 다시 낙태수술이 허용되고 있는데, 큰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아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기껏 한다는 소리가 “떼어 버려! 지워 버려!”라고 합니다. 모두가 살인 공모자들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지금은 처벌을 피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 살인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살인은 어미에게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와 육신의 병을 남깁니다.

 

 

또 사람을 직접 죽이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으로 누구를 죽이고 싶도록 증오한다거나 남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도 살인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살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들은 당연히 지옥에 갑니다.

 

 

 

유부남의 7할 이상이 혼외정사 경험 있다는 음란의 도시

 

“행음자(行淫者)들”, 즉 음란한 행위를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도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행을 무거운 죄로 여기십니다. 옛날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연애까지 판을 쳤던 매우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들을 불로 멸망시켜 후세의 경계로 삼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특별한 죄가 있다면 바로 이 음란죄입니다.

 

이태리에 폼페이라는 옛 도시가 있었는데, 매우 음란한 도시였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어느 날 베수비오스 화산이 폭발하여 도시 전체가 불과 화산재로 완전히 덮여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음란죄로 가득한 도시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저도 그곳에 가 보았습니다. 화산재를 긁어내니, 지붕은 없어졌지만 벽이나 기타 시설물들이 화석으로 보존된 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음탕한 벽화들과 음란한 조각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웅크린 채 죽은 사람들의 화석과 아이 밴 여인의 화석이 그대로 있습니다. 수백 명이 들어가는 남녀 혼용 대중탕도 있었다고 하니, 그 타락의 정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악이 관영한 도시를 싹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폼페이 못지않습니다. 가정을 가진 가장의 7할 이상이 혼외정사의 경험이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성(性) 개방 시대’, ‘성 자유화 시대’, ‘성 향락 시대’라고 하면서, “그것이 무슨 죄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3,14)라고 하여, 간음죄를 살인죄 다음으로 큰 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8). 자기의 인격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죄가 이 음란한 죄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행하는 성행위, 정상적인 결혼생활 외의 모든 성적 행위는 간음입니다. 간음하는 자들, 음행하는 자들 모두 지옥에 갑니다.

 

 

요즘 여관, 호텔마다 밤낮으로 붐빕니다. 밤에만 영업해서는 타산이 맞지 않는다고까지 말합니다. 자녀 과외비를 마련한답시고 몸을 파는 주부가 경찰에 잡혀 세상을 놀라게도 했습니다. 음란죄가 아예 골수에 사무칠 정도입니다. 보고 듣고 하는 것 대부분의 것들이 성적 타락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블랙박스에 담긴 죄의 기록, 내 입으로 고백할 날이 온다

 

“술객(術客)들”, 즉 점쟁이와 무당들, 그리고 그런 것 믿고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자들”, 즉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도 곧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또한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갑니다. 모든 거짓은 마귀에게서 났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예사로 떡 먹듯 하지 않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은 어떻습니까? 지금껏 설명 드린 죄목에 해당되지 않는 분 있으십니까?

 

옛날에 지어 이미 지나간 죄, 마음속 깊이 감추어진 죄, 쥐도 새도 모르게 지었다고 여기는 혼자만 알고 있는 그 모든 죄들이 누구에게나 있으실 것입니다. 그것들을 자신의 양심은 알고 있고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우리의 행위는 비행기의 불랙박스처럼 기록되어 하나님 앞에 설 때 내 입으로 나의 죄를 고백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죄는 하나님과 나는 다 압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죄인으로 태어나 오늘날까지 사는 동안에 많은 죄를 지었고,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죽음을 맞게 됩니다. 갑작스런 사고나 불치병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몇 십 년 안에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심판을 받고 둘째 사망 곧 불못인 지옥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죄인의 운명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구원(救援)받는다는 것은 심판과 멸망 받을 이러한 운명에서 건짐 받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 죽기 전에 구원받아야 합니다. 죽으면 이미 심판이 결정나버리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 구원해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또한 약속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배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과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린다는 성경의 경고가 믿어지거든 기도하십시오. 마음속 깊이,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제게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려서 죽어 가던 강도가 자기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구한 것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는 단순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솔직하고 간절한 마음을 주님은 받아 주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마음자세라면,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받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멸시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마음으로 진지하고 간절하게 기도해 보십시오. 참으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간절히 구원받기 원하면 반드시 구원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몇 십년 교회 다녔는데도 아직 구원받지 못했는데, 며칠 성경 배워서 구원받는다고? 쓸데없는 소리들 하고 있다”고 비방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에 대한 오해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구원 사역(to save)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구원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 구원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여부를 놓고 따지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할 뿐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은 까닭입니다. 문둥병이 든 나아만처럼 “내 생각에는...”하며 내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 내 생각을 버릴 때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구원은 내가 ‘하는’(save) 것이 아니라 나는 ‘받는’(be saved) 것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구원받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며칠이라는 기간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실 때에 얼마의 시일이 걸렸습니까? 아닙니다. 말씀 한 마디로 당장 살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시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 말씀을 믿으십시오. 청년아 일어나라! 소녀야 일어나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나십시오.

 

필요한 것은 사람 편에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우리가 준비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옥 갈 운명에서 구원받으려면 먼저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영원한 세계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과 천국, 지옥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며, 자신이 지옥 갈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내 죄를 지시고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구세주)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하나님께 드린 어린양의 피 제사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 되신 예수가 나와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를 인정하고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한 것을 믿느냐? 그것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해 가시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며,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또한 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잃어져 있고, 죄로 인해 심판받을 운명에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배우는 일차적 목적은 그러한 사실을 깨달음으로 지옥 갈 운명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우리 마음을 말씀으로 붙잡아 하나님께로 돌리는 작업입니다. 채널을 맞추면 방송이 잡히듯, 우리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성령이 그 속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구원받기 원하면 반드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주님의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내가 원하면 안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구원받고나서 행하는 모든 것은 상급으로 주어집니다. 그 상급을 위해 열심히, 그리고 정결하게 살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아들 된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기만 하면 지옥이란 단어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이단들은 지옥이란 단어가 무섭지만 자기도 모르게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다가 지옥 갈 수 있다는 말이 자기도 모르게 좋게 들리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아주 쉬운 방법을 허락하셨는데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도 지옥 가시고 싶으시면 믿지 마십시오. 아주 쉬운 방법으로 천국 가기를 원하시면 아멘 하세요.

 

 

-호분성 목사/ 카페 ‘예수가 좋다오’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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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예술가의 정원 | 작성시간 13.05.23 면 우리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자유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의 신앙이 구원받지 못할 잘못된 신앙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수긍이 가지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때로는 자기 신세도 말할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면 성서에서는 왜? 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실까요? 왜? 고난에 참예하라는 말씀이 있는가요? 저는 가끔씩 기독인들이 헷갈리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진정으로 자유함을 누리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두려움을 주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저는 솔직히 헷갈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예술가의 정원 | 작성시간 13.05.23 그리고 사람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어려움과 두려움을 느끼고 이 세상 것에 먼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마치 사람들이 지옥에 대한 두려움만 가지고 있다는 것 같은데 어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지옥보다는 이 세상에 더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신앙심과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한 것들을 너무 단순하게 지옥과 죄에 대한 두려움으로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쉽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쉽다면 사람들이 예수님 믿다가 실족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기만 하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이 됩니까?
  • 답댓글 작성자예술가의 정원 | 작성시간 13.05.23 저는 헷갈립니다 이곳 변증카폐의 다른 계시글에는 예수님를 그렇게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믿음이라고 지적을 하는 기독인들의 글들도 있고 말입니다. 제가 이해를 못하고 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독인들이 이런 말을 하고 저런 말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헷갈려서 믿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두려움 없이 진정한 자유함을 가지게 하는 것은, 진정한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성경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신앙경험의 깨달음도 참고를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깨달음들이 다 맞지는 않아 보입니다
  • 작성자Steph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5.23 정원 님, 강조점의 차이라고 보시면 될 듯싶습니다. 이 글이 '믿음과 행함' 게시판이 아닌 '참된 회심과 구원' 게시판에 올려진 이유지요. 호분성 목사님은 믿음 이후의 성결한 삶을 중시하는 감리교 권사님 출신이시면서도 거듭남 이후의 삶은 상급에만 관련된다고 보시는 듯싶네요. 거듭남과 성도의 견인 부분에서 성경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중간쯤에 진리를 둔 듯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거듭난다는 가르침은 칼빈주의의 강점이고, 믿음 이후 거룩한 삶을 끝까지 강조한 것은 알미니안의 강점인 듯싶어요. 양쪽에 다 강점이 있고 우린 신앙의 유익을 따라 때로 두 부분을 같이 보기도 하는 거지요. 헷갈리지 마시길 바라며^^
  • 답댓글 작성자예술가의 정원 | 작성시간 13.05.23 댓글 감사합니다^^ 목사님, 헷갈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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