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이 땅 위를 걸으신 것은 1,80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건들과 같이 일이 끝나면 역사 속으로 옮겨지고, 이윽고 먼 과거의 사건이 되고, 드디어는 망각 속으로 가라앉고 마는 그런 사건이 아니다.
이 땅 위에 그분이 현존하셨다고 하는 그 사실은, 결코 과거지사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또 점차 과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땅 위에서 신앙을 찾아볼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누가복음 18장 8절).
그러나 신앙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렇다, 그렇다면, 예수가 생존하였다는 사실은, 그 즉석에서 먼 과거지사가 되고 만다.
반대로 한 사람이라도 믿는 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신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저 예수의 동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예수와 동시에 있었어야만 하고, 또 믿는 자로서 항상 동시대에 있어야만 한다.
이 동시성이 신앙의 전제인 것이다.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신앙 그 자체인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청컨대 우리들도 그렇듯이 당신과 동시에 있게 하시고, 당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하소서.
헛되고 뜻없는, 혹은 지각없고 광신적인, 혹은 역사적이고 수다스러운(예수 그리스도를 세계역사의 중심이라고 한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한 공격 – 편집자 주) 회상이 당신을 왜곡해버린 그 모습이 아니라, 당신이 이 땅 위를 걸으셨던 그때 그대로의 현실 한가운데 계신 그 모습을 말입니다.
저 왜곡된 모습은, 믿는 자가 당신을 실지로 본 그런 비천한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또, 아직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당신의 영광의 모습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하옵건대 우리들이 당신을, 지금 있는 그대로, 또 일찍이 계셨던 그대로, 또 앞으로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실 때까지 있는 그대로, 즉 실족(失足)의 표징으로, 또 신앙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하소서.
비천한 인간이면서도, 인류의 구주 혹은 구속주이신 당신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사랑 때문에 땅 위에 내려오시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고, 고통 속에서 사경을 헤매이시면서도, 그러면서도 오호라 – 땅 위에 한 걸음을 남기실 때마다, 길 잃은 자들을 불러 찾으시고, 몸소 손으로 표징과 기적을 행하시고, 혹은 또 손 하나 움직이지도 않으시고 사람들의 반항을 꾹 참으실 때마다 – 그래도 걱정스러운 듯이 ‘나에게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누가복음 7장 23절)라고 항상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으셨던 당신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원컨대 우리들에게 그런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그때도 여전히 우리들이 당신에게 실족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소서.
-쇠얀 키에르케고르(합리론을 비판한 19세기 덴마크의 종교철학자,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 ‘그리스도교의 훈련’(다산글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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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teph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17 감수성이 예민하던 청소년과 청년 시절,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철학자를 꼽으라면 저는 파스칼과 키에르케고르를 들겠습니다. 파스칼이 쓴 팡세의 영향이 지금도 남아서인지 저 또한 턱없이 부족하지만 나름의 단상 쓰기로 변증을 시도해보곤 하게 되네요.^^ 특별히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교회 안팎에서 누구도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는, 그래서 종교적 미이라 속에 갇혀 실상을 느끼기 힘들어진 듯한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그분을 속살 깊이 인격적으로 느끼며 끌어안을 수 있도록 글의 행간마다 마치 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 살뜰히 다독여준 고마운 철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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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teph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9.17 아주 짧은 글이지만 그의 당대에 권력과 타락한 전통을 거부하고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예수만을 증거하며 살기를 원했던 그의 심호흡을 잠깐이나마 함께 들이마시게 해주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