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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과 영성

찰스 피니, '죽을 만큼 기도하라! 어떤 것도 기도를 대체하지 못한다'

작성자Stephan|작성시간14.12.17|조회수1,121 목록 댓글 1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의 영향력이 필요하기에 항상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그 자체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기도가 당신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라.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우리 영혼을 푹 적셔준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며, 그러한 교통의 신성한 영향력 아래 온 마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기도는 용서를 구하고 도와주시는 자비와 은혜를 찾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과 인생에 기도의 영향력이 항상 필요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명백해지는가! 진실로 하나님께서 항상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는 사실에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이 하시려는 모든 일을 실행하는 조건으로 하나님께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베풀어주시기를 기뻐하는 수많은 축복을 친히 바라보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축복을 구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축복을 베푸실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과 우리에게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관점과 품행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죄를 고백하고 단념하는지의 여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모든 일에서 철저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마음껏 풍성하게 주실 수 있게 하려고, 특히 우리에게 안전하고 하나님 자신에게 영예로운 방법으로 주실 수 있게 하려고, 우리가 기도하고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도덕 체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이다.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서나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에서나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의 기도를 대신할 수 없다.

 

우리는 개인적인 기도, 고백, 신뢰, 찬양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당신은 이것을 아주 그럴듯한 다른 가르침으로 대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우리 영혼의 경험 안으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그것들을 느껴야 하며, 주님 앞에서 온 마음으로 이러한 진리의 생명력과 능력을 실행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당신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다. 기도 없이는 이런 것 중에서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것들을 나름대로 잘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 지식이 당신에게 단지 저주가 될 수도 있다.

 

 

 

 

 

더 많이 기도할수록 더 많이 기도를 사랑하게 된다

 

죄인들이여, 무엇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그토록 유익할 수 있겠는가? 수많은 다른 것에도 그만한 쓰임새가 있다. 좋은 가르침도 많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다. 다른 성도들과 교통하는 것도 유익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교통하는 것과 감히 어떻게 비교하겠는가? 다른 어떤 것도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죄에 그토록 넌더리내게 하고 세상에 대하여 그토록 죽게 만들 수는 없다. 다른 어떤 것도 진정한 기도만큼 우리 영혼에 그토록 깊은 영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한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갖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더 잘 준비시키므로 항상 끊임없이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는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여 그분 자신의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라. 그러면 당신은 가장 진실한 기도를 드렸던 곳에서, 그 영혼이 하나님의 임재에 가장 깊이 스며들었던 곳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풍성하게 그 영혼을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누가 감히 그 옛날의 거룩한 사람들이 얼마나 신실하고 강력하게 기도를 드렸는가에 따라 유용성과 능력에서 두드러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는가? 점점 더 많이 기도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많이 밝은 빛을 비추게 될 것이다. 만약 인간의 이성이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보다 더 멀리 신성한 곳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사실상 하나님으로부터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점점 더 많이 기도할수록 점점 더 많이 기도를 사랑하게 되고, 점점 더 많이 하나님을 누리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점점 더 많이 기도할수록, 진정한 기도로 나아갈수록 하나님은 점점 더 많이 우리 안에서 참된 기쁨을 맛보실 것이다. 이것은 단지 자비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품에 대해 깊은 만족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그분의 기도하는 자녀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점점 더 많이 기도할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를 좋아하신다. 만약 하나님의 자녀가 많이 기도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방편으로 그 자녀를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 그러면 이 자녀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것이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비심을 더 많이 흘러나오게 할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어떤 자리로 나아갈 수 없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아예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도대체 누가 믿겠는가? 진실로 천국 성도들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기도를 가로막기는커녕 오히려 기도를 훨씬 더 많이 확실하게 보증한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단지 온전한 믿음이 있기만 하다면, 기도를 멈추게 될 것이라고 추론해왔다. 그 어떤 추론도 이보다 더 어리석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확실히 우리는 절대 기도를 뛰어넘는 어떤 응답도 받을 수 없다.

 

 

도대체 누가 기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단 말인가!

 
만약 나에게 시간이 많았다면 그리스도인이 성결함에서 자라갈 때 기도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적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법에 관해서도 상당히 잘 알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이 주로 영성생활과 서로 뒤섞여 있을 때, 그 영혼이 하나님께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감격이나 흥분이 있다. 당신은 그런 흥분, 동물적인 흥분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충분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영혼의 깊은 수원지에는 하나님과 깨어지지 않는 공감이 유유히 흘러들고 있다.


우리의 기도는 절대 우리에게 굉장히 유용한 것을 넘어서서 응답을 받지 못한다. 우리 마음이 점점 더 많이 하나님을 호흡할수록, 점점 더 많이 천국을 소망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일어날수록 그러한 훈련은 점점 더 많이 유용해진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감에 따라 기도하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유익을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점점 더 많이 기도할수록 자기 자신의 영적인 유익을 위하여 기도의 필요성과 지혜를 점점 더 많이 깨닫게 된다.


기도가 죄인들에게 너무나 커다란 특권이라는 그 사실은, 바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는 훨씬 더 명예로운 일로 다가오게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생각이란 말인가! 그 사람들이 말한 바로는 하나님의 진정한 위대하심은 우리 같은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데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천사장이 타락하는 것에 대해서도,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무척 신경을 쓰신다.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사건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만큼 너무나 하찮은 일이 아니다. 어떤 벌레도 그분의 주목과 사랑을 받지 못할 만큼 너무나 작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곧, 어떤 것도 그분의 관심을 받기에 너무 고상하거나 너무 시시하지 않다. 어떤 것도 너무나 무의미하여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어떤 것도 너무나 시시하여 하나님의 친절함을 받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를 특권이 아니라 단지 의무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런 관점으로 기도를 바라본다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기도를 절대 올려드릴 수 없다. 어떤 요구 사항을 가득 안고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에게 기도하면서 달려올 때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특권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달려오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것을 자기네 특권으로 간주하고 있다. 다른 아이들은 당신에게 이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특권이다! 도대체 누가 기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단 말인가? 기도가 특권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깨달음이 끈기 있는 기도를 계속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마라. 그러면 결국에는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찰스 피니, ‘죽을 만큼 기도하라’(브니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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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Stephan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2.17 말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서 기도는 게을리하고 있다면, 또는 세상을 더 잘 알겠다는 명분으로 은연중 세상 뉴스를 골방 기도보다 더 중시하고 있다면, 사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지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뜨거운 기도를 소홀히하고 기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치밀한 지성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은 지성, 감정, 의지가 고루 균형잡힌 전인적인 삶이라고 믿습니다. 기도 사역의 우선순위를 놓고 더 바짝 긴장하게 해주는 찰스 피니의 말에 새삼 깊이 공감하면서 교회사에서 귀한 신앙선배들이 남겨준 기도의 고전들에 마음을 더 써야겠다는 도전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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