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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및 인물

[스크랩] [펌]<朴正熙의 人間味> -3-

작성자隱穀 이상준|작성시간11.11.21|조회수61 목록 댓글 2

 [朴正熙의 人間味] -3-

                                                                   

                                                                -박정희님 生家-

 

<한반도에 근대국가 창출한 역사의 위인(偉人) / 김 정강 (사회평론가)>



군(軍)을 동경한 식민지의 아들

박정희는 한일합방 7년 후인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의 몰락 양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혈통은 고령 박씨로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의 차남 언성으로부터 발원한다. 아버지 朴成彬(박성빈)은 당시 46세였는데, 청년 시절에는 무과에 급제하여 나라(근세조선) 에서 效力副尉(효력부위)를 제수받기도 했다. 이 효력부위는 서반(西班) 정(正)9품인 말단무관으로서 급여가 없는 형식상의 임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동학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처형 직전 천운으로 사면되었다 한다. 군인으로서 이데올로 기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것은 부자의 운명이 같았다. 박정희를 임신했을 때 45세였던 어머니 白南義(백남의)는 유산시키려고 했다. 간장을 두 사발이나 먹었고 버드나무 뿌리를 달여 먹어보기도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실패하여 할 수 없이 출산했다고 한다. 유산하려 했던 이유는 빈곤으로 식구가 더 느는 것이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허약했으나 머리는 총명했다. 구미 보통학교 시절 체육을 제외한 전 과목이 대체 로 만점이었으며 급장이었다. 어머니는 신체허약의 원인이 실패한 유산기도에 있다고 생각하여 박정희를 익애(溺愛)하였으며, 당시 월 60전의 학비는 형편상 큰 부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힘닿는 데까지 희생적으로 교육에 열심이었다. 유산기도에 실패한 것을 생각하면서 “정희는 하늘의 점지로 태어났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유소년 시절에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검정 고무신을 처음 신어본 것이 국민학 교 5학년 때인데, 첫날에는 고무신을 안은 채 잠들었고, 고무신이 닳을까 보아 학교에 갈 적에는 고무신을 책보에 넣어 가지고 갔다가 학교 근처에서 짚신과 바꾸어 신고 학교로 들어갔다고 한다. 박정희는 보통학교 시절 이순신, 도고 헤이하치로, 노기 마레스케, 나폴레옹 등 명장들의 전기를 읽고 깊이 감동했고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대구에는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가끔 구미 지역에 와서 야외연습을 했다. 

80연대의 연습이 있는 날이면 박정희는 연습장 근처에 가서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담임 大野 (오노.日人)가 가정방문을 하여 아버지 박성빈에게 대구 사범 입학시험에 응시할 것을 권유했다. 아버지와 담임의 강권으로 대구사범에 응시하여 합 격했으나 박정희는 싫었다. 당시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구사범이었지만 박정희는 교사가 아 니라 군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국수주의

당시 일제(日帝)의 사범학교는 단순한 교원양성의 기능적 과정이 아니었다. 皇國臣民化敎育 (황국신민화교육)의 일선 첨병을 제조하는 정신의 세뇌장이었다. 박정희는 사범학교 입교시에 기숙사 사감 廣瀨(광뢰, 히로세)에게 애독하던 李光洙(이광수) 의 '이순신'을 압수당했다. 박정희는 임진왜란 때 십만양병론을 주장한 李珥(이이)의 저서 '萬言封書(만언봉서)'를 그 책갈피속에 '其命維新(기명유신)'이라는 글씨를 쓴 종이를 끼워 가지고 있다가 역시 사감 히로세에게 발각된 적이 있다. 

학생과장은 내부관료 출신인 藤原(등원, 후지와라)였는데 禁書所持罪(금서소지죄)로 퇴학 또는 정학시키려고 했다가 학생들의 집단 스트라이크 위협으로 처벌하지 못했다. 이 스트라이크 위협의 배후 조종세력이 左派(좌파)독서회였다. 독서회의 비밀 지도자는 조 선인 교사 金永驥(김영기)였는데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이 독서회는 박정희가 졸업하고 난 이듬해에 발각되어 30여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5명은 옥사하였다. 박정희가 입학하기 전 해에도 朴憲永(박헌영)계 콤그룹의 핵심이었던 영어교사 玄俊赫(현 준혁)이 지하에 '사회과학 연구회'를 조직하고 있다가 검거되어 투옥되었다. 박정희는 좌파 독서회로부터 입회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해방 직후 광복군 1대대 2중대장


사범교육이 적성에 맞지 않아 교과과목의 성적이 떨어졌으나, 교련과목 특히 총검술에서는 현역을 능가하는 발군의 실력을 연마해놓고 있었다. 체격이 왜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중력, 대담성, 민첩성에서 뛰어났다. 관동군(關東軍)에서 배속된 有川(아리카와)대좌가 교련교관이었는데 일본인 학생을 제치고 박정희를 조교(助敎)로 임명했다. 

박정희가 대구사범에서 가장 존경하고 추종하고 영향을 받은 교사는 바로 아리까와대좌 다. 그는 일본육사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대본영(大本營, 戰時일본의 작전기획본부) 참모를 거친 일본군의 超엘리트로서 대구사범의 일반교사는 물론이고 교장까지도 눈 아래로 보는 처지였다. 아리카와는 대일본 국수주의자였다. 일본을 맹주로 하여 황색 아시아를 단결시켜 백색 美·英·露와 서구 세력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사상의 소유자였다. 박정희는 아리카와의 감화를 크게 받았다. 

문경보통학교에서 사범학교 출신의 교사 의무복무 기간을 마치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원서를 제출했을 때에는 22세였다. 만주군관학교의 응모가능 연령은 16∼19세로 이미 자격이 상실되어 있었다. 박정희는 '盡忠報國(진충보국)'이라는 혈서를 쓰고 東亞신질서의 대의에 정신(挺身)하겠다는 직소장을 보내었다. 이 직소장은 만주신문에 미담(美談)으로 게재되었으며 수험자격 특례를 인정받았다. 박정희의 창씨명은 高木正雄(고목정웅, 다카기 마사오)였다. 군관학교 수험시의 추천인은 아리카와였다. 그때 아리카와는 관동군(關東軍)독립수비대장의 직에 있었는데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의 치안 책임자였다. 

그 뒤 東條英機(동조영기)정권이 관동군 정예를 남방으로 돌릴 때 아니까와도 출동하게 되었는데 박정희에게 "이 전쟁에서 이미 승리의 필연성은 사라졌다. 대동아공영권은 소멸되고 조선은 독립될 것이다. 나는 죽지만 자네는 자기자신과 민족을 위하여 살아 남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아리까와는 남방에서 전사했다. 박정희는 1943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만주국 황제 박의(薄儀)로부터 상으로 금시계를 받았다. 만주군에서 6개월간 근무한 후 일본 육사 3학년 (제57기)에 편입되었다. 일본육사 졸업성적은 3등이었다.  

형(兄) 장례길에 남로당 입당

관동군(關東軍)하도(下道)부대의 지휘를 받으면서 중공 8로군 토벌작전을 벌이고 있던 만주국군 보병제8단에서 단장 부관(인사·조직담당)으로서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계급은 중위였다. 8단의 병력은 3천명 정도로 단장은 중국인 唐祭榮(당제영)이었다. 박정희는 해방후 8단을 나와 重慶(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北京判事處(북경판사처)에 갔는데 여기에는 구(舊)일본군, 만주군의 조선인 장병 약 4백명이 모여 있었다. 북경판사처는 이들을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로 편입했다. 박정희와 같은 8단 출신의 申鉉俊(신현준)대위가 1대대장이 되고 만군 출신 李周一(이주일)이 1중대장, 박정희가 2중대장, 학병 출신 尹映九(윤영구)가 3중대장이 되었다. 황망한 와중에서도 친일파 논쟁이 일어났다. 항일운동을 탄압한 日滿軍(일만군)출신이 어떻게 광복군의 간부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병사 대중의 강권에 못 이겨 박정희도 비판회에 출석하였는데, "중대장 동무"라는 호칭을 듣고 격분하여 퇴장한 후 다시는 군중집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1946년 5월 고향 구미에 돌아와 보니 친형 朴相熙(박상희)가 조선공산당 구미책으로 앉아있었다. 박상희는 구미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구미 지국장을 하고 있었는데, 보통학교 출신이라고 하지만 서당에서 유학(儒學)의 고전들을 공부했고 사서삼경(四書三經)정도는 거의 암기하는 상태였으므로 인문적 지식의 기초는 요즘의 대학 출신에 못지않다고 보아야 하며, 당시의 지국장 직책도 신문영업만 하는 것이 아니고 기자도 겸한 것이었다. 

공산당 경북도 위원회 서기 황태성, 경북도 인민위원회 치안부장 이재복과 박상희는 특히 막역한 사이로 자주 왕래하고 있었다. 대구 10.1폭동의 와중에서 박상희가 경관대에 의하여 사살되었으므로, 박정희는 경비대 장교로 임관후 조문차 구미에 갔다가 박상희의 가족을 돌보아주고 있던 이재복을 만났다. 그때 이재복은 남로당 중앙위원회 특수부장으로서 對국방경비대 전복공작의 실무총책 노릇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재복의 권유를 받고 이재복의 보증으로 입당했다.  

사형선고 받은 후 예편

박정희는 元容德(원용덕) 대령의 춘천 8연대에 배속되었는데, 원용덕에 의하여 작전참모로 발탁되어 국방경비대 최초로 대대 야외 기동훈련을 기획하여 훌륭하게 성공시켰다. 당시 대대급의 기동 훈련은 미군과 합동으로만 하였으며, 미군의 도움없이 완벽한 지휘를 할 수 있는 지휘관은 경비대 내에 몇 명밖에 없었다. 49년 11월 육사 7기 졸업식 후 박정희 소령은 정보국 특무과의 수사관에 의하여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7기 졸업식날 아침 박정희는 육사에 도착하여 동료로부터 숙군 팀에서 체포하려니 도망하라는 귀뜸을 듣고 도망하지 않았으며, 대신 동료에게 부탁하여 동 거처(박정희 소령이 두 번째로 결혼식을 올린 이대 출신의 이성희)에게 메모를 보낸 후 졸업식에 참가하였고 졸업식 후에 연행되었다 한다. 혐의는 박정희가 최남근과 함께 군내 남로당 현역장교 조직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최남근은 만군(滿軍)출신으로, 일제 말 조선건국동맹 分盟(분맹)군사위에 가입한 인물로 이재복에 포섭되어 남로당에 입당하였으며 당시 마산 주둔 15연대장이었다. 박정희는 모든 것을 자백하고 완전히 전향하였다. 박정희의 인간됨을 평가하여 구명에 노력한 인사들은 김창룡(실무팀 책임자, 군계급을 떠나 공산주의 지하당 검거에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실질상의 숙군 중심), 김안일 특무과장, 백선엽 정보국장, 원용덕(백선엽의 봉천군관학교 입교시의 추천인)등이었는데, 그 결과 박정희는 형식적으로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이 면제되고 군직이 파면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숙군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구명된 유일한 케이스였다"(백선엽저 '군과 나')고 한다. 박정희는 왜 검거됨을 알았으면서도 도주하지도 않고 검거되자마자 빠르고 확실하게 전향 했을까? 박정희의 군관학교 1기 선배인 崔昌崙(최창륜)은 만군 신경(新京)비행대의 대위였는데 최 남근 등과 같이 일제(日帝)말 건국동맹 분맹군사위의 멤버였다.  

6·25남침 꿰뚫어본 예지의 형안(炯眼)

해방이 되자 그는 인민군 창설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창설된 인민군 내에서 만군 출신의 설 땅은 없었다. 인민군 창건에 관여하였던 최창륜은 일시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잔인한 사상투쟁의 세례를 받아 영혼이 걸레처럼 찢겨진 모습으로 월남했다. 그는 최남근, 박정희 등을 만나 며칠이고 밤을 새우며 인민군의 실상을 전하고 좌파 국가가 건국될 경우 日滿軍(일만군)출신이 설 땅은 한치도 없음을 일깨워주었다. 

최창륜의 말을 듣고 박정희와 최남근 등은 공산주의의 위선적 평균주의가 싫었다. 광복군 시절 "중대장 동무"라는 좌파식 호칭에 격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데서도 나타난다. 사면 후 박정희는 민간인 신분으로 육본 전투정보과 북한반 부속 상황실장으로 있었다. 편제상 '상황실' 이란 직제는 없었다. 정식 문관이 아닌 전향자로서 정보과 내의 비공식적인 협조자 신분이었다. '실장'이라고 하나 지휘할 부하 1명도 없었다. 월급도 없었으며 정보과의 기밀비나 주변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신분은 보잘 것이 없었으나 북한 정세를 분석하는 능력은 탁월했다. 

박정희가 북한반의 총력을 동원하여 며칠간 철야를 거듭하여 '종합 적정 판단서'를 작성하였는데 "전쟁준비를 갖추고 나면, 북괴는 50년 봄을 계기로 38선 일대에서 전면 공격을 감행 할 기도를 갖고 있다"고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다. 박정희는 15페이지 정도였던 이 보고서를 49년 12월17일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보고하고 미군에게도 보냈으나 모두 묵살되었다. 국방장관 이하의 군 지도부는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 고 호언하고 있었고 대통령도 그 말을 신용하고 있을 때이니 묵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방이 되자 조선경제의 80∼90%를 차지하던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물러갔다. 조선은 일본과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경제중심과의 연결이 단절되었다. 더욱이 이른바 '南農 北工(남농북공)'의 구조적 취약성으로 인하여 남한경제는 추진력을 상실하고 붕괴에 가까운 마비상태에 빠졌다. 공업생산액은 39년에 5억 21천7백93만5천원이었던 것이, 46년에는 1억5 천 2백 19만 2천원으로, 공업생산액의 감소율이 무려 70%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미군정은 남한이 자본과 기술의 축적이 극히 낮고 부존자원도 얼마 없는 빈곤한 반봉건사회라는 것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비현실적인 자유방임주의를 실행함으로써 혼란은 최대한 증폭되었다. 일례를 들면, 군정통치 1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쌀의 생산·분배·수집에 관한 구일제의 모든 통제들을 일거에 철폐해 버렸다. 그렇게 되자 남한은 원래 쌀의 수출국이었고 45년의 쌀 생산고는 44년보다 60%나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자본가들이 독점이윤을 노리고 염가로 쌀을 매점매석하여 퇴장시킴으로써 쌀값폭등을 유발했다. 당황한 미군정은 배급제와 공출제를 다시 강화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군정의 정책이 갈팡질팡하는 동안에 매점된 쌀의 부패와 구매력 없는 서민의 기아가 동시에 만연되었다. 보잘 것 없는 공업생산력마저도 6·25남침으로 인하여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6·25뒤의 한국 공업생산력은 일제말에 비하여 70%나 감소하였던 46년보다도 낮아졌다. 53년부터 60년까지의 기간에 약 30억 8천 3백26만 9천 달러라는 막대한 미국원조를 받았으나, 새로운 산업시설을 건설하지 못했고 고용수준은 저하되어 실업자는 증가되었다.  

근대국가 필수조건 창출한 역사적위인

즉, 인구가 증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인 이상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는 사업체의 종업원 수는 49년 26만 6천명으로부터 58년에는 23만 6천명으로 도리어 감소되고 있었다. 박정희가 집권하였을 때 한국은 1인당 GNP는 82달러, GNP 중 공업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14∼5%, 총고용중에서 공업부문 종사자는 9%에 불과한 후진적인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농업·상업·자영업자는 반 이상이 잠재실업상태였다. 

박정희는 강력한 경제개발 전략을 추진하였다. 제 1차 5개년 계획기간(1962∼1966)에는 경 제개발 기반조성을 만들면서 연평균 7.8%의 성장률을 달성하였다. 제2차 5개년 계획기간인 67∼71년간에는 공업부문의 개발에 따라 제조업 부문의 성장이 두드러져 연평균 9.7%의 성장을 이루었다. 1인당 GNP는 61년의 82달러에서 66년 1백25달러, 71년 2백78달러로 증가되었다. 물가상승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인의 생활수준은 61년으로부터 71년이라는 10년 동안에 배 이상 향상된 것이다. 

경제의 기반이 구축되자 73년에는 14.9%라는 경이적인 성장률의 스파크가 일었다. 제조업은 연간 29.2% 성장하였고 국제수지상의 경상수지 적자는 3억 달러대로 축소되어 흑자로의 반전가능성을 예고했다. 이듬해 74년과 75년의 극심한 국제 자원파동이 없이 73년과 같은 양질의 성장이 2∼3년만 더 계속되었더라면 이때에 국제수지의 흑자기조는 정착되고 한국경제의 자력성장 구조가 구 축되었을 것이다. 74∼75년의 혹심한 자원파동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72∼78년의 7년간 연 평균 10.4%의 성장 을 달성하였고, 1인당 GNP는 72년 3백6달러에서 78년 1천3백30달러로 비약했다. 

제조업 부문의 전체산업에 대한 비중은 27.0%로 증가되고 농림수산업의 비중은 21.9%로 감소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한국은 반봉건의 질곡을 벗어나 자본주의의 궤도로 진입한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 발전사에 있어서 일본을 제외하고는 유색인종 국가로서 선진 자본주의 권으로 진입한 나라는 없는데, 한국이 일본의 뒤를 따르는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암살에 의하여 깨어진 선진적 자주강국에의 꿈

박정희에 의하여 한민족은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했고, 한국이라는 국가는 비로소 근대국가로 창출되었다. 박정희는 한민족의 근대국가를 창출한 역사의 위인이다. 근대국가의 국가조건에 있어서 최하의 필수요건은 자신을 보위할 상비군과 행정을 처리할 관료제도를 자력으로 지탱할 경제적 능력이다.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에는 한국은 자력으로 상비군과 관료제도를 지탱할 최소한의 국가재정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경제원조인 대충자금으로 국가재정을 꾸려 나갔다.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자립경제의 터전을 닦아 나가면서, 60년대 말부터 극비리에 핵기술을 연구시키고 있던 '국방과학 연구소'에 81년 완성을 목표로 핵폭탄 개발을 지시했다는 설이 있다. 미사일은 78년 9월 '백웅(白熊)1호'가 발사되었는데 사정거리는 80Km였다. 80년대 중반에는 보다 정밀하게 발전시킨 미사일에 핵폭탄을 장착하여 이스라엘 수준의 핵탄 보유국 대열 에 진입하여 자주국방을 완성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동향인 김재규와의 기연(奇緣)

해방 후 귀향해 있던 박정희가 상경하려고 할 즈음 김형철 이라는 인물이 찾아와서, '구미보통학교 창설 이후 최고의 수재이며, 명문인 대구사범에 들어가고 일본육사까지 졸업한 존경하는 박정희'에게 자식을 지도해 달라고 하면서 맡겼는데, 이것이 당시 대륜중학의 교원으로 있던 20세를 넘긴지 얼마 안 된 김재규였다고 한다. 김재규는 창씨명 金本元一로서 안동 농림학교 농업과 출신인데 학교성적은 최하위였다. 4 학년 때에 四日市(요카이치)항공병학교에 특별간부후보생으로 지원입대 했다. 여기는 가미카제 특공요원도 선발하는 곳이다. 

김재규는 임관 6개월 전에 해방을 맞았다. 당시 29세였던 박정희는 김재규를 데리고 서울로 와서 47년 9월 24일 함께 경비사관학교 2기로 입교했다. 박정희는 항상 김재규의 아버지 김형철의 간곡한 부탁과 자기가 경비사관학교에 입교시켜 군인을 만든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암살한 후 군사법정에서 "동기생이며 동향인인 박정희를 (민주회복을 위하여) 야수의 마음으로 쏘았다"고 하여, 마치 자기와 박정희가 '동기'인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당시 미군의 방침이 군사영어학교를 나오지 못한 경력자는 무조건 경비사관학교를 거쳐 임관시킨 것이었으므로 경비사의 동기 중에는 대선배도 있었다. 

가령, 얼마 후 경비대 육군사령관이 된 송호성도 경비사 2기였는데, 그는 이미 중국의 하남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국민당군의 대령, 광복군의 참장(參將)과 제2지대장을 거친, 연령 도 50세 정도의 거물이었다. 박정희는 사단장 등 군의 지휘계통에 있을 때는 김재규를 데려다가 참모로 쓰기도 했고, 5·16때에는 아무런 공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하였다. 호남비료 사장을 마친 뒤에는 서울 근교의 6사단장으로 영전 시켰다. 이렇게 이끌어 주면서 나중에는 중앙정보부장까지 시키게 되었는데 김재규는 박정희를 암살해 버린 것이다. 

김재규가 쏜 총알은 박정희가 그리던 선진적 자주강국에의 비원(悲願)을 날려버렸다.  

국민은 박정희의 위업 잊지 않는다

오늘날 세계 제11위의 경제력을 가졌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도 그 연원을 찾아가 보면 박정희의 공로다. 야당과 학생들이 굴욕외교라고 한일회담을 반대할 때 "미국인들한테 밀가루나 얻어먹는 것은 자주고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아서 나라경제를 일으키겠다는 것은 굴욕이냐"고 했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공시킨 70년 7월 7일 대구의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이 공사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며 민족적인 대 예술작품이다"고 했다. 2천년대에는 세계최대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되고 있는 포항제철도 박정희의 결단의 산물이다. 

94년 8월 16일 경향신문사에 보도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가 업적도(86.8%),정치력(65.9%),도덕성(44.8%),행정력(50.1%), 인기도(56.1%)등 모든 부분에서 가장 뛰어났다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 대통령의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한 대통령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주제로 미디어 리서치가 92년 6월에 여론조사를 해 본 결과 박정희(88.3%), 전두환(3.0%), 이승만(2.8%), 노태우(1.9%)의 순서였으며 역시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압도적으로 높다. 국민회의 鄭鎬宣(정호선)의원이 금년(96년) 10월 30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공개한 정부 출연 연구기관 연구원, 이공계교수, 정보통신업계 간부 6백73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보면 '역대 대통령 중 과학기술 정책을 가장 잘 이끈 대통령'으로 박정희(85.1%),전두환 (2.5%), 김영삼(2.1%), 노태우(0.2%), 무응답(10.1%)의 순서로, 박정희에 대한 높은 평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국민은 박정희가 이룩한 위업을 잊지 않고 있다. 

金聖鎭 (대우경제연구소 회장) 

정치인(政治人)으로서의 박정희를 말한다는 것은 퍽 어려운 일임을 이번에 새삼깨달았다. 

첫째는 정치란 무엇이고 정치인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한마디로 명쾌하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고, 둘째는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스스로를 '정치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겠는가? 돌이켜 볼 때, 결코 그러했던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 자신도 정치인이나 정치학도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새삼 공부하는 셈치고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의미를 내 나름으로 정리해본 다음에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정치란 낱말 중 정(政)이란 글자는 정(正)이라는 글자와 복( )이라는 글자가 합쳐져서 생겨난 것으로서 정(正)은 바르다는 뜻이고, 복( )은 가볍게 두들겨서 주의를 준다는 뜻이다.  

정치가와 경륜가는 다르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흔히 "政은 正이다"라고 말해 왔는데, 좀 더 부연해 말한다면 정치와 윤리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요, 정치기능과 교육기능 또한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정치를 영어로는 Politics라 하는데 그 말도 古代 희랍의 도시국가인 Polis에서 나온 말이다. 그 당시 희랍의 도시국가 사람들은 공동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 그 자체가 정치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다시 말해서 '정치'라고 해서 그 무슨 특수한 것이 아니었고, 인간이 생활하는 과정에서의 문화적 내지는 사회적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Aristoteles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다"라고 규정했으며 이때 정치를 무슨 특수개념으로 취급했던 것 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의 생활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또는 지역과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고 또한 변화해 왔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분석조사에 있어서도 역사적 단계와 문화권의 차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치에 관한 연구조사에 있어서 비교 고찰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보는 까닭이다. 그러면 정치인이란 무엇일까? 정치학사전보다는 Webster영어대사전이 훨씬 더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영어로는 정치인을 Politician 또는 Statesman의 두가지로 나누 어 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먼저 Politician에 관한 설명에는 Politic person, esp. a shrewd or carfty schemer 라고 쓰여져 있다. 즉, 속이 깊은 사람, 특히 약삭빠르거나 교활한 모사(謀士)라는 뜻이 있다. 그 다음으로, Art or Science of Government에 경험이 있는 사람, 또는 하나의 직업으로 또는 생계(生計)의 목적으로 party politics(정당정치)에 종사하는 사람, 또는 모든 사람들의 장기적 복리(福利)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느 특정 그룹이나 계층을 위한 좁고(narrow) 근시안적(short-run)이익에 의해 행동하는 사람 등으로 설명되어 있다. 다음 Statesman에 관한 설명에는 One versed in the principles or art of government라 쓰여져 있다. 정사(政事)에 관한 원칙과 그 예술(우아한 재능)에 통달해 있는 사람으로 설명되어 있다.  

비전·영도력, 역경이기는 용기 갖춘 사람

다음으로 좁은 당파성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해 현명하게 leadership(영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Statesman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Politician과 다르다고 쓰여져 있다. 어떻게 다른가? Statesman은 긴 안목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최상의 이익이 되는 정책을 구상(envisage) 하고 기대를 얻어낸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정치인에는 이른바 정치가와 경륜가의 두 가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정치가란 눈앞의 이해관계에 약삭빠르고 흥정(negotiation)에 능하며 선동정치가(demaogues)로서의 능력에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 반면, 경륜가는 국민 전체의 복리를 위한 비전(vision)을 갖고 영도력을 발휘하며 역경을 이겨내는 용기와 슬기를 갖춘 그리고 정사(政事)의 원칙과 예술성에 통달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동양의 전통적 의미에서의 정치인은 서양의 Statesman(경륜가)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가와는 명백히 구분된다.  

이상과 현실, 정치와 경제발전 충돌기

그러면 박정희 대통령은 어느 쪽에 속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통치시대가 크게는 세계사(世界史) 속에서, 그리고 작게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어느 시기에 속했으며 그 시대의 특성은 무엇이었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사의 맥락에서 보면, 세계질서가 미소 양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이전하면서 긴장환화 및 Pax Americana의 종말기와 겹치는 시기였다. 

닉슨 독트린이 선언되고 세계도처에서 미군의 철수 또는 기지의 감축이 시작되었고, 한국에서도 미 7사단을 비롯한 미군의 철수가 시작된 시기였다. 미국이 없으면 곧 망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한국의 식자(識者)층에게는 일대불안과 공포의 충격을 안겨준 시기였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세계적 긴장완화의 추세에는 아랑곳없이 북한 측의 무력도발-정규전과 비정규전의 형태를 막론하고-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안팎으로 밀어닥친 국가안보상 가장 어려운 위기의 절정기였다. 

그러면서 빈곤의 악순환에서 탈피해야할 긴급한 과제를 껴안고 경제발전의 시동을 걸어야 할 화급한 시점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라는 구호가 국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기까지 했었다. 그 후 한강변의 기적이 이루어지고 마침내는 '아시아의 세 마리 용'중의 하나로 불리면서 경제발전의 우등생으로 세계적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자마자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 가치관의 충돌이 급격히 발생하였다.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우선순위 다툼 때문이었다. 여기에 북한으로부터는 간접침략행위가, 그리고 미국 측으로부터는 인권옹호라는 가치관의 문제가 각기 이상주의에 편승하여 정부를 압박하기에 이르렀고, 한국사회는 혼란과 분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치안당국의 무능하고 원시적 대응은 사태를 더욱 더 악화시켜 마침내는 긴급조치의 발동 그리고 박 대통령의 피살로 이어져 박정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조화와 균형 모색하는 시련기

그러면 이 시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모두 부정적인 암흑기였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이상과 현실 역사적인 조화와 균형을 모색하는 시련기였을 망정 실패의 시기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국난을 당당히 극복해 나가면서 민족역량의 자각과 배양을 토대로 한 새 역사의 창조기였다. 박정희 대장은 1963년 8월30일 전역식에서 "찬연히 우리 민족의 앞날에 새 역사를 창조할 제3공화국의 여명에 서서 4·19와 5·16의 이념을 계승하여 민족주체 세력을 이룩할 것을 다짐하고, 민주공화의 기치 아래, 새 나라의 힘으로 뭉친 동지들과 더불어 영원히 이 땅에서 굴욕과 빈곤이 없는 번영된 조국건설을 위해 군복을 벗고 나의 남은 반평생을 바칠까 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흔연히 생명을 바치겠다는 사생관과 국가관은 군복을 입은 오늘이나 또 군복을 벗은 내일에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고 엄숙히 다짐했음을 새삼 기억 하게 된다. 

그리고, 1966년 1월 18일 박 대통령은 연두교서 속에서 "통일이나 조국근대화의 길이 멀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오늘의 우리를 위하여, 내일의 후손(後孫)을 위하여 통일의 열매를 맺을 자립의 거목을 심읍시다. 근면, 검소, 저축을 다시 우리의 행동강령으로 삼아 증산·수출·건설에 총력 을 경주합시다. 그리하여 올해도 진정 '일하는 해'가되게 합시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1967년 1월 17일 연두교서에서 박대통령은 "오늘 이 단계에 있어서 통일의 길은 경제건설이며 민주역량의 배양입니다. 우리의 경제, 우리의 자유, 우리의 민주주의가 북한으로 넘쳐흐를 때 그것은 곧 통일의 길입니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박대통령은 1971년 7월 1일 제7대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나는 통일과 중흥이 반드시 우리 시대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자신하며, 이를 성취하는 열쇠는 오로지 우리 자신의 힘, 즉 국력을 기르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70년대 중엽을 통일국력의 확보시기로 내다보고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수준을 높이고 국력을 기르는데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것입니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민주발전의 滋養素(자양소)로 민주사회의 성장은 통일기지의 확보인 것입니다"고 우리 나라의 나아갈 바 국정의 지표를 명백하게 제시한 바 있다. 이 박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가 오늘 이제 와서 새삼 우리들의 가슴에 강력하게 와 닿는 까닭은 무엇일까? 빈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지금에 와서도 우리들이 계속 추구해햐 할 지표라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행동이 따를 때, 실적이 뒷받침될 때, 그 말에는 무게가 실리고 믿음이 가며 역사에 길이 남게 되는 법이다. 박정희 시대의 특징을 나는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자 한다. 

첫째는, 솟구치는 민족주의의 정열을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한 시기였다. 우리 국민들의 가슴속에는 일제식민통치 아래서 학대와 가난에 시달린 쓰라린 민족적 울분이 산적해 있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감정은 자칫하면 부정적이며 저항일변도의 에너지로 폭발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세계2차대전 이후 미국은 아시아 질서를 가꾸어 나가는 데 있어서 삼대분쟁의 조속한 해결을 당면과제로 삼고 있었다. 인도·파키스탄간의 화해, 말레이시아·싱가포르간의 대립해결, 그리고 한·일간의 국교정상화등 그것은 민족감정과 종교의식 그리고 정치이념이 개재된 복잡하고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난제들이었다.  

발전동기 부여, 민족저력 일깨워 주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서 박정희 정부는 1961년 10월 20일 첫 번째 한일회담을 일본 동경에서 개최함으로써 이 지난(至難)의 과제에 용감하게 덤벼들었다. 그 후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寧日(녕일)이 없는 해를 거듭한 끝에 한일 양국간의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보건데 그것이 진선진미(盡善盡美)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당시 정권의 운명을 내걸고 그와 같은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시대적 흐름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미래를 내다본 용기 있고 현명한 영도력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한일회담의 결과로-지금 와서는 미흡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경제개발의 시동이 걸린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둘째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자신감의 절정기였으며 새 역사의 창조기였다. 경제개발에는 자본과 기술과 노동력을 연결시키는 기업의 활동이 왕성해야만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5·16혁명 전후 우리 나라 사정은 그러하지 못했다. 심지어 훈련받은 노동력조차 변변치 않았고 인플레(Inflation)는 극심하여 사회불안은 활화산의 용암처럼 언제 폭발해 나올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미국 정부도 그 당시 딜런(Dillon)보고서를 통해, 張勉(장면)정권이 직면한 최대과제는 인플레의 극복이라고 지적했었다. 이 난제를 극복한 것이 바로 제 1차 경제 5개년계획(62∼66)이었다. 그리하여 연이은 개발계획의 성공적 추진으로 연평균 10%의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우리 사회에서 빈곤을 퇴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발전의 동기를 부여하고 민족의 저력을 일깨워준 길잡이 역할을 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그가 이끄는 한국정부였다.  

개발독재에의 원조거부를 설득 시정

여기서 후진국개발에 있어서의 정부의 역할 또는 개입(서구인들이 즐겨 쓰는 용어)을 둘러 싼 논쟁에 관해 간략하게 살펴본다. 구미의 고전적 자유경제학파는 전통적으로 경제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운영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심지어 세계은행(전후세계질서의 兩大支柱의 하나)까지 지배(支配)했기 때문에 자유시장원리에 의해, 즉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가 운영되는 완전자유경쟁 즉 자유방임주의가 보장되지 않는 한 그것이 비록 후진국이라 하더라도 또한 선의라 하더라도 정부가 개발계획에 개입하는 나라에는 개발자금 조차 원조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집착해 왔었다. 따라서, 원조라 해야 고작해서 구호 원조나 주는 정도였다. 나중에는 끈질긴 설득으로 인색할 정도의 신축성을 보이기는 했으나 이러한 그들의 아집(我執)을 맨 먼저 앞장서서 시정시키고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또한 박 대통령과 그가 이끌어온 한국 정부내의 이코노미스트 들이었다.  

후진국 경제개발 모델 창안 입증

20여년이 지난 오늘, 계획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이행 도중에 있는 구 蘇聯邦과 그 위성국가였던 동구 제국의 정부들이 그리고 가까이는 중국정부가 우리나라의 개발전략을 교훈으로 삼아 모방하고 박정희 시대를 연구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할 때 우리는 후진국개발 이론에 새로운 실천적 모델을 창안해 냈다는 긍지를 갖게 된다. 일이 지나고 난 뒤 말하기는 아주 쉽고 편하다. 누구나 다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못된 것만 눈에 띄게 되며 정치적 이해관계에 사로잡혀서 보면 더욱 그렇다. 박정희 시대 말기에 미국 정부는 "경제발전에 상응하는 정치발전"(Political development commen-surate with economic develop-ment)을 이룩하라고 한국 측에게 종용 아닌 강요를 했었다. 이것이야말로 경제발전 없이는 정치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경제발전 우위의 우선순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제는 민주정치의 터전인 것이다. 

그런데, 고르바초프 시대와 옐친 초기의 러시아에게 미국은 세계은행을 통해 무조건 정치적 자유화를 선행하도록 요구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였으며 오늘 우리가 보는 러시아의 경제현실은 딱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 반면, 중국의 모습을 보자, 미국이 제아무리 견제와 압력을 넣더라도 미국의 충고(?)를 따랐던 러시아보다는 훨씬 더 밝고 성공적임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뒤늦게나마 나는 이들 외국에서 박대통령의 선견지명을 다시금 접할 수 있어 기쁘다. 그분과 그의 이코노미스트들은 참으로 후진국의 개발전략에 새 기원을 이룩한 것이다. 

셋째는, 중화학공업의 육성과 방위산업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일하면서 싸우며, 싸우면서 일하자."라는 정부지표를 경제발전단계의 변화에 알맞게 안보적 면에서 실천적으로 한 차원 더 높여, 국가방위를 공고히 다진 시기였다. 이 점은 90년대 초에 한때 과잉투자였다는 시비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었으나 이제 와서 냉정히 돌이켜 본다면 70년대 후반에 그 같은 big push를 하지 않았던들 오늘 우리나라에는 중화학공업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의 방위산업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중요시해야 할 점은 군인 출신인 박 대통령이 방위산업을 일으키는데 과거의 軍의 병참제도를 무시하고 민간 기업에게 전담시켰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박 대통령의 넓은 식견과 인재등용의 혜안에 힘입은바 크다고 볼 수 있다. 방위산업을 육성한다고 하니까 가장 신바람이 난 곳은 두말할 나위 없이 군부(軍部)였다.  

중화학공업·방위산업결합 길 닦아 

그러나 박 대통령은 놀랍게도 군부의 개입을 단연코 배제하고 민간인 기업가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국가산업에 있어서 군수산업과 민수산업이 따로 분리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이해한 박 대통령은 군수산업을 방위산업이라 부르게 하고 민간기업의 손에 의해 평시부터 하나씩 실적을 쌓아 나가도록 그 틀을 잡아 주었다. 이것은 아무리 크고 복잡한 선진 무기라 해도 따지고 보면 여러 개의 부품의 결합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각 민간 기업에서 필요한 부품을 나누어 만들기만 하면 그것이 일단 유사시에는 곧 방위산업으로 전환된다는 吳源哲(오원철 당시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씨의 진언(進言)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중화학공업도 발전하게 되었고 방위산업도 터전을 닦기에 이른 것이다. 

세상을 떠난 후 박대통령은 외국에서 존경받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라든가 또는 박대통령의 전적(全的)인 신임을 받았던 오원철이 그 후 방위 산업에서 배제되었고 과거 군부의 후예들인 新軍部세력에 의해 부당한 혐의를 받고 고초를 겪었던 일 등을 우리는 한낱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고 평범히 보아 넘기고 있어야만 할 것 인가! 우리도 여기서 어떤 반성과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국가방위의 토대이며 대들보인 방위산업을 전시와 평화시의 시간적 구분을 초월하여 그리고 군수산업과 민수산업의 분야별 차이를 극복하여 국가경제와 국가안보라는 총체적 개념으로 파악, 관군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추진할 수 있었던 까닭을 우리는 똑바로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  

'유권자에게 아첨할 필요 없다'

그때의 그와 같은 big push는 오늘에도 귀중한 우리의 교훈이 된다. 엊그제 일어났던 북한 잠수함의 강릉(江陵)침입사건 따위의 어처구니없는 안보상의 구멍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훈시나 구호로만이 아니라 對備策(대비책)을 마련하고 실천으로 옮겨야만 한다. 실천되지 않는 훈시나 구호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다. 71년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둔 어느 날 나는 박 대통령에게 유권자에게 '아첨'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 방법의 하나로 예컨대 공공석상에서 어린애를 껴안아 준다든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뭐 내가 평시에 하지 않던 일을 선거 때라 해서 일부러 꾸며서 해야 할 게 뭐야. 쑥스럽게…"라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선거유세에서 박대통령은 "나의 경쟁상대는 야당후보가 아니라 북한의 김일성이다"라고 선언하고 북한의 무력도발을 물리치면서 경제개발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것은 경제발전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토대요, 조국통일의 확실한 지름길이라고 믿어온 경륜가(statesman)로서의 박대통령의 진면목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박 대통령은 비록 김일성보다 장수하지 못 했을망정 남북한의 국가(國家)건설과 국력(國力)경쟁에 있어서는 김일성을 크게 누르고 대승(大勝)하였음을 누구도 부인(否認)하지 못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집권 18년 동안 정치적인 대중인기와 무관하게 살아온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 분을 독재자니 권위주의자이니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Webster영어대사전에 나오는 Politician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Statesman이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아가서는 순수한 동양적 의미에서의 전통적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를 正자 와 다독거려 주의를 환기시켜주는 복( )자가 합(合)쳐진 정(政), 이것을 할 줄 아는, 다시 말해서, 정치와 윤리 그리고 정치기능과 교육기능의 본질적인 일치를 지향한 경륜가 (Statesman)였다. 

박정희의 시대(時代)

하야시 다테이코 (林 建 彦·日本 東海大學 敎授) 

주문받은 제목이 '외국인이 본 박정희 대통령'이다. 나의 하찮은 저서 '박정희의 시대-위로부터의 혁명 18년'의 「서문에 갈음하여」를 다시 옮기면서 시작할까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半독립국가'와도 같았던 대한민국을 근대국가로 만들어내는 혁명과업을 마무리 지으려던 시점에서 불의의 10·26사태로 황급하게 그 시대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대통령 박정희의 혁명정치가로서의 가혹한 생애는 일본의 명치유신 위업을 성취하여 근대 일본국가의 기초를 다지고, 이제 앞으로 10년을 걸고 명치국가를 궤도에 올려놓으려던 참에 암살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그것에 흔히 비유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의 제도의 기초는 명치원년에서 10년까지의 기간에 이루어졌다.  

'위로부터의 혁명'의 18년

그것을 만든 인간들을 단 한사람의 이름으로 대표하라고 말한다면 오쿠보의 이름을 들겠다"고 말한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씨에 따르면 오쿠보도시미치도 '침착·강의(剛毅)· 과묵하여 한마디도 쓸데없는 말은 지껄이지 않았으며, 자신과 국가를 동일화하고, 불철주야 국가건설만을 생각하면서 그 밖의 잡념이란 없었다'('명치라는 국가' 일본방송출판협회 刊) 또 명치유신사 전문의 모리 도시히코(毛利敏彦) 교수의 '오쿠보 도시미치'에 따르면 '그는 강직하고 재치 없는 정치가다. 그리고 심려숙고 끝에 결정을 보면 목표를 향하여 무서운 집중력과 지속력을 보인다. 그의 권력 의지도 강렬한 자부심과 책임감에 뒷받침되어 직책을 회피하지 않고 앞서서 난국에 부딪쳐 목적을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생활은 대체로 깨끗했고, 지위를 이용하여 사복을 채우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나는 '박정희의 시대'를 써 나가면서 위 두 사람의 오쿠보 도시미치 평은 그대로 대통령 박정희의 18년에 겹쳐 놓을 수 있다고 여러 번 실감하게 되었다. 1961년 5월 16일의 군사혁명을 박정희 의장 자신이 총괄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 따르면, '5·16군사혁명은 反봉건적, 反식민지적 잔재로부터의 민족해방, 빈곤으로부터의 민족해방으로 경제자립, 건전한 민주주의의 재건, 즉 민주주의의 한국화-의 3대 민족사적 과제의 해결을 겨냥한 국민혁명'이었다. 

5·16군사혁명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을 '한국에서의 실패'로 지목한 미국의 계간지 '포린어 페어즈'(1961년 10월호)논문은 '실업자도 노동인구의 25%, 국민 1인당 GNP는 1백달러를 밑돌며 전기출력은 멕시코의 6분의 1, 수출은 2천만달러, 이러므로 한국에 경제적 기적의 가능성은 제로' 라면서 '북한보다 뒤떨어진 한국'이라고 극론했다. 이 논문보다 2년 앞서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외교정책'이라는 부제를 붙인 미국의 '콘론보고서'는 이승만 시대 말기의 한국을 분석하면서 '한국만큼 내우외환을 안고 있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군사정변', 괄목할 두 개의 유산 남겨

어느 정도 민주주의에 정상참작을 할 필요도 있겠고, 과도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지도'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피치 못할 과도적 정체(政體)단계'로서의 군사혁명 정권의 출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행한 63년 12월 17일까지 2년 7개월에 이른 군사혁명정권 시대를 지금 와서 검증할 때 뛰어난 두 개의 성과가 눈에 띈다. 그 첫째는 62년을 초년도로 하는 제 1차 5개년 계획을 궤도에 올려서 조기에 그 계획의 초과달성을 전망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수교국의 수를 이승만 시대의 23개국으로부터 76개국으로 일약 3배가 넘는 수로 확대한 사실이다. 

군사혁명정권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은 제 1차 5개년계획을 위한 외자도입정책이었다. 외자 도입선과 수출시장 개척을 위한 경제외교는 그대로 수교국의 확대로 직결되었다. 수교국의 확대는 5·16군사혁명에 대한 국제적 이해와 지지 획득을 겨냥한 혁명정권의 외교목표의 달성을 의미하고 있었다. 군사혁명정권이 민정이양 후의 국민국가 건설을 위하여 남겨 놓은 실로 괄목할 만한 두 개의 유산이었으나, 오늘의 한국에서는 '군사정변'의 이름으로 부정적으로만 말하는 5·16군사 혁명이다.  

70년도 예산부터 독립국 면모 갖춰

미국학자 엘렌 K. 트림버거씨는 영국, 프랑스 등의 전형적인 시민·노동자의 폭력적 '아래로부터의 혁명'과 대비하여 일본의 명치유신(1868년), 터키의 케말 파샤의 혁명(1923년)등 혁명을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명쾌하게 논하면서 그것을 위한 5개의 지표를 들고 있다. 지면 관계상 5개의 지표를 모두 말할 여유는 없으나 '초법규적 정치권력의 접수와 변화의 주도(혁명)는 구체제의 군부와 관료들에 의하여 조직되고 유도된다. 그때 대중의 참가는 거의 볼 수 없으며 초법규적 혁명행동을 취하는 군부의 움직임은 대중의 동향과는 무관하며 때로는 양자가 적대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5·16혁명과 그 뒤의 박정희 정치의 18년간은 '위로부터의 혁명'그것이다. 

박정희 의장은 '혁명이 왜 필요했었는가'라고 자문하고 '나라가 빈곤했기 때문'이라고 자답하고 있다. 5·16혁명 당시의 한국이 半독립국가, 半식민지국가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는 것은 61년의 한국의 자립도가 재정적으로는 39.2%, 국방비에 이르러서도 겨우 4.9%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도 명백한 것이다. 한국이 재정·국방비의 양면에서 대체로 독립국가의 면모를 확보하기에 이른 것은 제2차 5개년계획(1967년∼1971년)이 조기 초과달성을 본 70년도 예산이었다. 

재정자립도 94.5%, 국방비자립도 83.9%에서 명백해졌다. 국민의식 또한 76년의 경제자립 달성을 고비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의 '77년 전국여론조사'는 한줌의 부유층과 방대한 저소득층간에 중산층이 없다고 한 그전까지의 한국 사회구조에 커다란 변모를 부각시키게끔 되었다. 실로 86.8%의 사람들이 '자기의 생활수준이 중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한국경제의 자립도에 관해서도 '머지않아서 자립 한다'를 포함하면 국민의 9할 가까이가 자립달성에 강한 자신을 보였다.  

탁월한 역사관·역사인식

돌이켜 보면 1966년은 한국과 북한이 명암(明暗)을 달리하는 기로의 해였다. 이해, 연 8.1%의 성장률로 제1차 5개년계획을 초과 달성하여 바야흐로 고도경제성장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 한국에 비하여, 북한은 '위대한 전망'이라고 일컬은 1961년부터의 7개년 계획이 좌절의 늪에 빠져 계획 달성률은 간신히 5%, 3년의 계획 연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북한이 도입한 타결책 수법은 김일성 일족의 끝없는 신격화와 김일성·정일 부자의 세습체제 착수였다. 포린어페어즈지의 논문으로부터 5년이 지나서 다가온 남북의 역전이었다. 

외국인이, 특히 일본인이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그의 탁월한 역사안(歷史眼)과 역사인식이다.- 그 사람이 계속 대통령 비서실장자리에 있었던들 10·26사건은 피할 수 있었을 것- 이라고까지 알려진 김정렴(金正濂)씨도 회상록 '한강의 기적과 박 대통령'속에서 '박 대통령은 한국의 역사에 조예가 깊으며 확고한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다' 고 특필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역사관의 핵심은 '일본이 명치유신을 할 무렵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중대한 시기였던 만큼, 한국민이 슬기롭게 대응하고 국가지도자들이 좀 더 각성했었다면 일본과 같이 근대화를 이룰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원군과 민황후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파쟁이 일어나 혼미를 거듭한 끝에 일본에 합병되어 나라는 망하고 35년간에 걸쳐 일본의 식민지로 되고 말았다'는 데 있었다고 김정렴씨는 쓰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러한 역사관과 역사인식은 제2의 저서 '한민족의 진로'에 수록된 '우리 민족의 과거를 반성함', '한민족의 수난의 역사'의 2편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박대통령은 이 2편 속에서 단호하게 '우리의 민족성으로 볼 때나 또는 지정학적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이어받은 것은 내부적 빈곤과 외부적 압박에서 오는 수난의 역사였다'고 시작 하면서 '나라를 지켰다거나 잃었다 해도, 민족문화를 향상시켰다거나 후퇴시켰다 해도, 한국 역사라는 지구의 일각에 쌓인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이며 한국 국민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박대통령은 계속한다. '한국 역사에 대한 책임자는 종국적으로 청국인도 아니고 러시아인이나 미국인도 물론 아니다. 수난의 역사에 대한 책임은 종국적으로 당시의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 있었다. 만약 당시의 우리 지도자들이 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하여 국민의 노력과 지지를 얻기 위한 국내적 사회개혁에 과감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민족의 비극의 씨는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따르면 5·16군사 혁명이야말로 19세기말 서구열강의 동점(東漸) 이래 미완성의 숙제로 남아 있는 한국 근대화라는 역사적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국민혁명이었다. 그 국민혁명의 과제는 (1)반봉건적·반식민지 잔재로부터의 민족해방, (2)빈곤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경제자립, (3)건전한 민주주의의 한국화-의 세가지로 집약된다.  

'위로부터의 혁명' 한계도 예견

35년간에 걸쳐서 한국의 이 세 가지 국민혁명의 기회를 빼앗고 지연시킨 것은 바로 식민지 지배를 자행한 일본과 일본인이었다. 그러한 일본인에게는 솔직히 말해서 과거사의 청산을 위한 요란한 규탄보다도, 육중하게 천금의 무게로 마음속에 파고드는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관·역사인식이 절실하다. 18년간에 걸친 박정희 정치시대를 통하여 세 가지 국민혁명 과제 중 앞의 둘은 훌륭하게 완전히 수행되었다. 그 18년간을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정의한 연유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5월 16일과 10월17일의 두 기념일을 맞으면 어김없이 5·16혁명과 10월 유신에 대한 감상을 일기에 적었다. 78년 5월 16일자 일기에는 '10월 유신 이래 과거 5년간의 우리 국력의 신장은 참으로 괄목할 만하다. 80년대 중반에는 대국 대열에 진입할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 유신체제를 이해 못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름지기 결과로써 후세의 평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맺고 있었다. '국민개인당 GNP가 4천 달러 시대가 되면 본격적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박정희 대통령이 힘주어 말하는 것을 고 육영수 여사의 오라버니 육인수씨가 들은 것은 86년 4천 달러 달성을 목표로 한 '장기경제정책'이 확정된 78년 11월이었다. 

그런데, 4천 달러를 넘어 4천40달러를 기록한 것은 서울올림픽의 해인 88년이었다. 한국에서 본격적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를 고한 것은 87년의 '6·29민주화 선언'이었다. '과거를 알면 현재를 알게 되고, 현재를 알게 되면 미래가 보인다.' 참으로 역사인식의 변증법 그대로 미래를 꿰뚫어 본 박정희 대통령의 '6·29선언' 예견 발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최초의 저작이 5·16혁명 얼마 뒤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의장 입장에서 쓴 소책자 '지도자도(指導者道)-혁명과정에 처하여'였다는 것은 이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지도자도'가 묘사한 혁명지도자상, 특히 '동지의식' '판단과 해결능력' '선견지명' '원칙에 충실한 양심적 인물' '용단'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목표에 이른 확신' '지도자의 단결' '성의와 정열' '신뢰감'-등 10개 항목이 '사회가 바라는 지도자의 자격'이라는 것은 그대로 혁명지도자 박정희의 자화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높아 가는 후세의 박 대통령 평가

반면, '지도자도'는 혁명으로 궐기한 일꾼의 '지도자들'에 대해 '피지도자=국민'이라는 등식을 대치시킴으로써 국민을 어디까지나 지도되고 영도되는 측으로 분류하여 '위로부터의 혁명'이 장차 봉착할 시대의 한계를 엿보게 했다. 대통령 유고, 운명의 날 79년 10월26일에 앞서 5일 부마사태를 현지에서 취재하면서 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토크기자가 쓴 '새로운 번영이 뿌린 저항의 씨'는 18년간에 걸친 박정희 정치의 '위로부터의 혁명'-한국의 근대화가 초래한 변증법과 도달점의 기막힌 총괄이었다. '한국은 어느 발전도상국보다도 최고의 성장을 기록했다. 박정희는 이 나라에 산업혁명을 이루었다. 영국이 1백50년 걸려서 달성한 것을 15년만에 해치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성과가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 권위를 거의 무너뜨리고 있다. 눈이 높아진 중산층으로 된 사회도 이제 5·16혁명 당시에 비하여 훨씬 복합적 사회가 되었다. 중앙정보부를 가진 정부와는 별도로 새로운 힘의 센터가 생겨나고 있다. 국가안정의 유지 면에서는 박 대통령의 덕을 보면서도 이제는 그 박 대통령의 지배에 거역하는 빅 비즈니스 사회가 출현한 것이다. 항도 부산의 상점가 주민들은 부마사태의 시민폭동으로 휩쓸어 넣은 것은 여태껏 실시를 주저하고 있던 국무회의를 밀어붙인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으로 77년 7월에 시행된 부가가치세였다.  

목숨과 바꾸어 국민에게 남긴 유산

박 대통령 '유고'를 둘러싸고 그 방아쇠가 된 것이 부가가치세라는 것이 한국민간의 공통된 관측이었다. 혁명가 박정희 대통령이 '위로부터의 혁명'의 도달점에서 그의 목숨과 바꾸어 국민에게 남긴 유산은 대형간접세인 부가가치세의 도입으로 국가예산의 항구적 흑자화의 길을 터놓은 것이다. 5·16혁명 궐기에 즈음하여 혁명지도자 박정희 소장이 간절히 소원하던 반 독립적 국가재정의 자립화와 건전화의 길은 여기에서 훌륭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에 비하여 국가재정의 누적 적자가 쌓이고 쌓여서 국민 1인당 2백만엔(1천4백만원). 늦게나마 도입한 대형간접세인 소비세도 '언 발에 오줌 누기'. 국가재정 재건의 전망이 서지 않고 있는 일본은 점점 한국에 낙후되기만 한다. 

'후세의 판단을 기다릴 뿐'-박정희 대통령이 일기에 심정을 토로할 때 자주 쓴 표현이다. 박 대통령 사후 10년. 조선일보가 실시한 역대 대통령의 통치업적 평가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도 이미 '후세의 판단'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제외한 4명의 대통령이 '잘했다'보다는 '잘못했다'가 훨씬 웃도는 마이너스 평가를 받은 가운데서 '잘못했다'의 5.6%를 멀리 따돌리고 '잘했다'가 84.7%로 단 한사람 플러스 평가를 받은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필자의 소론의 상세에 관해서는 졸저 '박정희의 시대-한국 위로부터의 혁명 18년'의 일본어판 또는 한국어판(1995년 8월 5일 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참조 본문; <naver블로그(김삿갓; 박정희의 功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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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秋思 박웅근 | 작성시간 11.11.22 박통과는 알게 모르게 인연이 깊었기에 한 말씀 드립니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들 거의 모두가 우리의 미래를 연 것은 사실이나
    3 선개헌을 필두로 유신과 그 후의 족적은
    그분이 일구어 놓은 경제적 업적으로 미화할 수는 없다고 사료됩니다.
    진정한 위인은
    자신의 위업을 이어나갈 사람을 찾아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뼈를 깍는 아픔을 견디며 민족을 사랑한 그분의 심경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자신이 사랑한 백성을
    끝까지 믿지 못한 한계속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10:26 비극을 자초한 것이라 사료됩니다.
    1% 가 모자라는 인물을 100%라며 섬기는 것은 식견있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겠지요?
  • 작성자隱穀 이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1.22 본문의 내용을 글 쓴 이의 생각을 보는 것으로 우리들은 참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秋思께서 지적한 부분에 공감 합니다. 다른 견해를 갖이신 분도 수용 할 수 있다고
    생각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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