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신라의 초기 세력인 석탈해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석탈해는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기원전 19년?~80년, 재위: 57년~80년)이라고도 하며, 신라의 제4대 왕으로서, 성(姓)은 석(昔)이고, 휘는 탈해(脫解)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석탈해 신라 초대왕 박혁거세 즉위 39년, 곧 기원전 19년에 신라로 건너온 인물입니다. 당시 신라는 사로국(斯盧國) 또는 계림(鷄林)이라 불리웠습니다.
석탈해는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건너온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파나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본 큐슈라는 의견, 연해주라는 의견, 우산국이라는 의견, 캄차카 반도라는 의견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또한 출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이에 대해서도 알아 보겠습니다.
1. 석탈해의 출신지에 대한 증거
1) 석탈해의 집안은 대장장이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면 석탈해는 자신이 “숯과 숯돌을 사용하는 대장장이 집안”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我夲冶匠乍岀隣郷而人取居之, 請堀地檢看.” 從之, 果得砺炭乃取而居.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동자의 말대로] 따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
『삼국유사 기이(紀異第一) 탈해왕(脫解王)』
그런데 석탈해의 성(姓)인 ‘석(Sok)’은 당시 인도 타밀어로 ‘대장장이’를 뜻하는 ‘석갈린감(Sokalingam)’의 줄인 말로 성과 직업이 일치합니다. 또한 ‘석갈린감’ ‘석’ ‘석가(Soka)’등은 영어의 Blacksmith, Smith처럼 대장장이 집안의 이름으로 통용됐으며 여전히 타밀인의 남자이름에 남아 있습니다.
2) 탈해(脫解)는 타밀어로 우두머리 라는 뜻
‘탈해(Talhe)’는 타밀어로 ‘머리, 우두머리, 꼭대기’를 의미하는 ‘탈에(Tale)’나 ‘탈아이(Talai)’와 거의 일치합니다. 따라서 ‘석탈해’라는 이름은 타밀어로 ‘대장장이 우두머리’를 가리켜 그가 바다 건너 한반도에 함께 들어온 대장장이의 지도자임을 이름에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3) 이사금(尼師今)은 타밀어로 왕을 의미
석탈해의 제안에 의해 제3대 유리(儒理)왕부터 쓴 이사금 즉 타밀어로 ‘니사금’(Nisagum)이라는 단어는, 왕, 대왕을 뜻하는 말입니다. 타밀어로 ‘대왕’(a great king), 또는 ‘황제’(an emperor)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왕보다는 상위 개념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석씨계의 마지막 왕인 제16대 홀해왕(재위 310~356)까지 니사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김(金)씨 가문에 의한 왕자리 독점을 알리는 제17대 내물왕부터 왕은 ‘마립간’으로 불리기 시작하여 석탈해가 자신의 모국어에서 빌려온 니사금은 석씨계의 몰락과 함께 신라왕의 명칭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여러 정황들을 보면 석탈해(昔脫解)는 허황옥(許黃玉) 과 같은 인도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 석탈해가 왔다는 다파라국의 위치
석탈해는 다파나국(多婆那國)또는 다파라국(多婆羅國)에서 건너온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파나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본 큐슈라는 의견, 연해주라는 의견, 우산국이라는 의견, 캄차카 반도라는 의견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파라국 위치의 중요한 기준은 바로 왜국(倭國)의 위치입니다. 왜국(倭國)을 어디에 두느냐가 다파라국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이전 글에서 왜국은 가야의 묘견 공주(히미코, 신공황후)가 큐슈를 점령하고 세운 야마대국(邪馬臺國)이며 지리적인 위치는 큐슈 남서쪽 지역으로 이는 대방군의 동남쪽 1만 2천리와 아소산(阿蘇山)으로 동북 천리의 위치와도 일치하는 기록입니다.
당시 왜국과 다파라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사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倭國. 在帶方東南. 其王居邪馬臺國. 案今名邪摩堆音之訛也.樂浪郡徼去其國萬二千里
왜국(倭國)은 대방의 동남쪽에 있다. 그왕은 야마대국(邪馬臺國)에 거한다. 지금은 이르기를 아마퇴로 발음한다. 낙랑군에서 그 나라까지 1만2천리이다.
『책부원귀册府元龜』
脫解尼師今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夲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일설에는 토해(吐解)2라고도 한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왕의 성은 석씨(昔氏)로, 왕비는 아효(阿孝) 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先是陜父 奔南韓 居馬韓山中, 從而出居者 數百餘家. 未幾歲連大歉 流離遍路. 陜父乃知將革 誘衆裹糧 舟從浿水而下. 由海浦而潛航 直到狗야韓國 乃加羅海北岸也. 居數月 轉徙于阿蘇山而居之 是爲多婆羅國之始祖也
협보가 남한으로 달아나서 마한산(지금의 평양)속에 은거하고 있을 대 따라와서 사는 자가 수백여 가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해 흉년이 들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 때 협보가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싸서 배를 타고 패수를 따라 내려왔다. 해포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해의 북쪽 해안이었다.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따라서 다파라국의 위치는 왜국 동북쪽 1000리 아소산 근처로 비정되며 석탈해서는 이곳에 살다가 이동한것으로 보입니다.
3. 석탈해는 어떻게 신라로 오게 되었는가?
석탈해가 어떻게 신라로 오게 되었는 지를 알기위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석탈해가 건너온 국가를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일명 정명국(正明國)ㆍ완하국(琓夏國)ㆍ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는 모두 같은 국가입니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완하국(다파라국)에서 김수로왕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왔다가 실패하여 신라로 달아 난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석탈해는 완하국(다파나국)에서 정치적 세력에 밀려 같은 인도계가 있는 가야로 먼저 갔다가 다시 신라로 이동 하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忽有琓夏國含逹王之夫人妊娠, 旀月生卵, 卵化爲人名曰脫解. 從海而來. 身長三尺頭圎一尺. 恱焉詣闕語於王云, “我欲奪王之位故來耳.” 王荅曰 “天命我俾即于位將令安中國而綏下民, 不敢違天之命以與之位, 又不敢以吾國吾民付囑於汝.” 解云 “若爾可爭其術.” 王曰 “可也.” 俄頃之間解化為鷹, 王化為鷲又解化為雀王化為鸇. 于此際也寸隂未移. 解还夲身王亦復然. 解乃伏膺曰, “僕也適於角術之場鷹之鷲, 雀之於鸇獲免焉, 此盖聖人惡殺之仁而然乎. 僕之與王爭位良難.” 便拜辝而出, 到麟郊外渡頭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 王竊恐滯留謀亂, 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 解奔入雞林地界, 舟師盡還. 事記所載多異與新羅.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고,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이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었다.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수로)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聖人)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삼국유사(三國遺事) 卷 第二 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탈해가 중국에서 온 배를 타도 도망갔다는 내용으로 중국과의 해상으로 이동 하는 수로가 있었으며, 수로왕이 500척이나 되는 수군을 보내서 탈해를 쫒게 했다는 내용은 수색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말해주는 내용으로 계림(鷄林)의 위치가 가야 바로 옆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6. 석씨는 어떻게 일본 열도로 오게 되었는 가?
다파라국(多婆羅國)은 원래 주몽의 부하인 협보(陜父)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석탈해의 부계는 고구려나 부여계 출신입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석탈해의 모계는 여국(女國)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석탈해의 출신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脫解夲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也. 冝弃之.” 其女不忍, 以帛裹卵并寳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徃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않다. 마땅히 버려야겠다.”라고 하니,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더불어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여국 또는 여인국은 일본 열도 혹은 중국 대륙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사천성(四川省)에 동여국(東女國)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천성(四川省), 해발 3500m의 가파른 협곡에서 천오백년 전 사라졌던 전설의 여인국, 동여국(東女國)을 발견했다.
“그 경계가 동서로 9일 거리, 남북으로 20일 거리인 동여국은 왕족 중에서 영명한 여인을 뽑아 한 사람은 여왕이 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소여왕이 되니 여왕이 죽으면 소여왕이 여왕이 된다. 여왕은 ‘빈지우’라 불리며 수백 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닷새에 한 번씩 정무를 보는데...” - <구당서> 中 -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 왕위는 오직 여인에게만 승계되는 나라, 동여국(東女國). 하지만 이 여인왕국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당나라 역사서 <구당서> 이후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SBS TV 'SBS 스페셜' '살아있는 전설, 여인국 자바' 동녀국(東女國)』
東女國, 西羌之別種, 以西海中復有女國, 故稱東女焉. 俗以女爲王
동여국(東女國)은 서강(西羌)의 별종(別種)이며, 서해(西海) 중에 또 여국(女國)이 있는 까닭에 동여(東女)라고 칭한다. 풍속이 여자를 왕으로 삼는다.
(주:女國: 티벳 고원에 있던 고대 민족. 6世紀 중엽에 靑藏高原에 존재하였으며, 모계씨족사회을 유지하였다. 본문 이외에도 여러 사서에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구당서(舊唐書) 卷197 列傳 第147 南蠻·西南蠻』
실제로 티벳과 사천성은 거의 같은 지역입니다. 그리고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의 출신지도 사천성(四川省) 보주(普州) 였다는 사실은 동여국(東女國)과 서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중국 사천성(四川省) 안악현(安岳縣) 일대에 허씨 집성촌이 있으며, 이곳에 보주(普州) 허씨 사당 대문에는 쌍어문(雙魚紋)이 있고 신정기「神井記」 금석문에 이곳이 보주(普州)라는 내용과 허여황옥(許女黃玉) 이 새겨진 명문을 발견되었습니다. "
그리고 드라비다어 계열인 인도 타밀어도 한국어와 유사하지만 티벳어도 한국어와 매우 유사합니다. 즉 이는 언어적으로 서로 같은 계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통해 인도계의 세력들은 아유타국에서 티벳과 사천성 일대에 이동하여 정착해 있다가 무한 지역으로 강제 이후를 당해 항주를 통해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한 세력은 김수로왕과 혼인하고 또 다른 세력은 일본 열도의 다파라국 함달파왕과 결혼하여 석탈해를 낳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항주에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로 들어오는 해상항로가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1. 쿠로시오 해류를 타는 경로, 2. 서해로 들어오는 경로 3. 가야를 통해 계림의 동쪽으로 이동하는 경로(석탈해의 이동 경로), 4. 큐슈 북부를 통해 다파라국으로 들어오는 경로(동여국인이 들어온 경로)
便拜辝而出, 到麟郊外渡頭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 王竊恐滯留謀亂, 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 解奔入雞林地界, 舟師盡還. 事記所載多異與新羅.
(석탈해는)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水路)로 해서 갔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삼국유사(三國遺事) 卷 第二 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駕洛國海中有舩來泊. 其國首露王與臣民鼓譟而迎将欲留之, 而舡乃飛走至於雞林東下西知村阿珎浦.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에 이르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탈해왕(第四 脫解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