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신라(新羅) 초기 도읍지의 위치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현 강단사학계에서는 신라의 초기 도읍지의 위치가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이고 그곳에서 신라가 시작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런 내용이 역사적 사료의 기록과 맞는 사실일까요?
역사를 공부할수록 강단사학에서 만든 역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료의 기록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신라의 초기 도읍지의 위치에 대해 추정할 수 있는 네가지 단서들의 기록들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 첫번째는 진한의 위치이고 두번째는 흠정만주원류고의 기록이며 세번째 고구려 동천왕조의 기록이고 네번째는 부여 왕실 파소 부인의 이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1) 신라의 초기 도읍지는 진한의 위치
신라의 초기 국명은 사로국(斯盧國) 이였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사로국으로 진한(辰韓) 12국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진한의 위치를 찾으면 신라의 초기 위치도 알 수 있게 됩니다.
현재 강단 사학에서는 진국 즉 삼한의 위치를 한반도 남쪽의 천리 밖에 않되는 작은 소국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후한서의 역사 기록에는 모두 삼한의 크기 모두 방사천리라고 하였습니다.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한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 동서는 바다로 막혀있으며, 남쪽은 왜와 접해있다. 방 사천리쯤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韓有三種. 魏志曰,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한은 3종류가 있는데 위지에 이르기를, 한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 동서는 바다로 막혀있으며, 남쪽은 왜와 접해있다. 방 사천리쯤된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韓》
辰韓在馬韓之東, 馬韓割其東界地與之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마한인들이 그 동쪽땅을 나누어 주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髙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 六曰明活山髙耶村, 是爲辰韓六部.
조선(朝鮮)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의 6부이다.
《삼국사기新羅本紀 신라본기新羅本紀》
한반도 남북의 길이가 삼천리이므로 방사천리를 영토는 북쪽으로 한반도를 넘어 중국 요녕성, 길림성까지 이르게 됩니다. 또한 사료의 기록에 의하면 진한은 조선의 유민들이며, 마한이 땅을 떼어주었고, 마한의 동쪽에 진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하면 진한의 위치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사료의 기록을 보면 진한이 경상도에 위치 할 수가 없습니다.
즉 진한의 위치는 한반도 북쪽에 있어야 정상입니다. 따라서 신라(사로국)의 초기 위치는 한반도 남쪽이 될 수 없습니다.
2) 흠정만주원류고에 기록된 신라의 초기 도읍지 기록
신라 첫 도읍지 위치에 대해 기록한 사료가 흠정만주원류고의 내용입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만주족의 뿌리 역사를 알기 위해 청나라 황제 건륭제(乾隆帝)가 직접 지시하여, 당시 최고의 관학자(官學者)들과 관리 30여 명이 참여하여 편찬한, 기존의 역대 사서와 지리지 등의 방대한 자료들이 모아져 있는 사서입니다.
숙신(肅愼) , 부여(夫餘), 읍루(.婁), 삼한(三韓), 물길(勿吉), 백제(百濟), 신라(新羅), 말갈(靺鞨), 발해(渤海) 모두 만주족의 역사로 보고 있으며 이와과 관련된 중국의 모든 정사 사료들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사료 가치가 매우 높은 책임에도 강단사학에서는 본인들의 역사관과 다르다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료에서는 진한의 신라 초기 위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至雞林 即吉林 雞與吉 音既相符 核諸地 里亦合
계림(鷄林)에 관하여는 오늘날의 길림(吉林)으로서 계(鷄)와 길(吉)은 음이 서로 부합하여 여러 지리 관계를 조사해 보아도 역시 부합한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길림(吉林)의 어원이 계림(鷄林)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어로 '계'(鷄닭계), '길(吉)'를 모두 중국어로 '지(ji)'라고 발음합니다. 즉 계림과 길림은 모두 '지린((jilin))'이 됩니다. 계림은 신라 최소 김씨 세력인 김알지와도 관련된 지명입니다.
계림이 길림으로 된 배경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처음으로 이곳에 길림장군(吉林將軍)을 임명하는 등 '길림(吉林)'이라는 용어가 정식으로 사용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흠정만주원류고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초기 위치인 사로국은 현재의 길림성(吉林省) 지역 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고구려 동천왕조의 '죽령(竹嶺)'의 기록
세번째로 신라의 위치를 말해주는 기록이 고구려 동천왕조의 기록입니다.
동천왕은 관구검에 의해 쫒기면서 압록강 쪽으로 올라가 압록원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에 다다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王以一千餘騎, 奔鴨渌原...王奔南沃沮, 至于竹嶺
왕이 기병 1천여 기(騎)를 거느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髙句麗本紀), 동천왕(東川王) 246년 조
또한 옥저를 지나 숙신의 경계까지 이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南界.
(동천왕이)옥저를 지나 천 리를 넘어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한원翰苑》
사료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죽령'은 남옥저 ~ 숙신와의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서 한반도 남쪽에 위치 할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신라본기 기록을 보면 신라의 북쪽 변경이 하슬라(何瑟羅) 인데, 그 속현이 '죽령'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四十二年, 秋七月, 北邊何瑟羅旱·蝗, 年荒民飢. 曲赦囚徒, 復一年租調.
42년(397) 가을 7월에 북쪽 변경의 하슬라(何瑟羅)에 가뭄과 누리의 피해가 있어 흉년이 들고 백성이 굶주렸다
《삼국사기新羅本紀 신라본기新羅本紀 나물奈勿 이사금尼師今》
何瑟羅州 一云河西良, 一云河西.. 乃買縣, 東吐縣, 支山縣, 穴山縣, 䢘城郡 一云加阿忽., 僧山縣 ... 竹峴縣
하슬라주(何瑟羅州)에 보면 죽현현(竹峴縣)이 속해 있으며 고구려의 영토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新羅本紀 잡지 지리(地理)四 고구려(高句麗)》
竹嶺縣, 本髙句麗竹峴縣, 景徳王改名. 今未詳.
죽령현(竹嶺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죽현현(竹峴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잡지 제4 지리(地理)二 신라(新羅)》
즉 정리해 보면 하슬라의 속현이 죽현현인데 그 원래 이름이 죽령(竹嶺)이며 그곳이 신라의 북쪽 경계입니다.
王謂曰, “竹嶺本是我地分, 汝若還竹嶺西北之地, 兵可出焉.”
고구려의 왕이 말하기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너희(신라)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줄 수 있다.”
《삼국사기新羅本紀 신라본기新羅本紀 第五 선덕왕善德王》
또한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다툰 경계가 죽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신라의 북쪽 경계가 죽령(竹嶺)인데 ,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이며, 그 위치는 남옥저와 숙신의 사이입니다.
또한 다른 기록을 보면 하슬라 죽령의 땅이 말갈과 접해있으며 궁예가 신라를 공격한 위치입니다.
三月, 王以何瑟羅地連靺鞨, 人不能安
〔5년(658)〕 3월에 왕이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靺鞨)에 맞닿아 있으므로 사람들이 편안치 못하다고
《삼국사기新羅本紀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 >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八月, 弓裔行兵, 侵奪我邉邑, 以至竹嶺東北
8월에 궁예가 병사를 보내 우리[신라] 변경 읍락을 침략하여 죽령(竹嶺) 동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삼국사기新羅本紀 신라본기新羅本紀 第十二 孝恭王(효공왕)》
또한 만주원류고에는 동천왕과 대립한 관구검전의 기록을 언급하며 신라의 위치가 숙신 남쪽 천여리의 길림(吉林) 오라(烏拉)의 남쪽이라고 했습니다.
新羅所保 據毌丘險傳 在肅慎界南千餘里目 南近 則當在吉林 烏拉之南
신라가 차지한 곳은 ‘관구검전’ 에 따르면 숙신 경계에서 남쪽 천여리이므로 길림(吉林) 오라(烏拉)의 남쪽이다.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이 사료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신라의 북쪽 경계가 죽령인데 옥저와 숙신의 사이이며, 종합해 보면 신라는 길림성 부근에 있었다는 것이 사실임을 알수 있습니다.
4) 파소(婆蘇) 부인의 이동 경로
신라의 건국자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 부인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삼국유사의 '사소(娑蘇)', 또 다른 기록은 태백일사의 '파소(婆蘇)'기록입니다. 동일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神母夲中國帝室之女. 名娑蘇...古有中國帝室之女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祖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이다. 이름은 사소(娑蘇)이고...옛날에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에 닿아서 아들을 낳았는데 해동의 시조가 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유사에서는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기록으로 인해 중국 황실로 기록하였지만, 진한(부여)가 맞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태백일사에는 이동 경로가 기록되어 있는 데 다음과 같습니다.
斯盧始王 仙桃山 聖母之子也 昔有夫餘 帝室之女 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 逃至東沃沮 又泛舟而
南下抵至辰韓 奈乙村
사로(斯盧, 신라의 옛 이름)의 첫 번째 왕(始王)은 선도산(仙桃山) 성모(파소)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황실에 '파소(부여의 공주)'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파소'는 남편이 없이 아이를 잉태하여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파소'는 스스로 눈수(嫩水, 일명 눈강)에서 도망쳐 동옥저(東沃沮)에 이르렀다. 그녀는 또 동옥저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辰韓)의 나을촌(奈乙村)에 닿았다.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최초로 사로국 (신라)를 세운 세력이 바로 북부여(진한)에서 내려온 박씨의 시조부인 파소 세력입니다. 이동 경로를 추정해 보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잉태한 몸의 파소 부인이 저 먼 북쪽의 부여(진한) 지역에서 고구려를 뚫고 한참 멀리 떨어진 한반도 남쪽의 경주까지 이동 했을까요??
즉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신라(사로국)은 북쪽에 위치 할수 밖에 없습니다.
사료를 통해서 보면 우리가 통설로 알고 있는 신라 초기의 위치는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시작은 모두 대륙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전 글에서 양자강 유역의 있었다는 신라 세력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사료를 연구해 보면 신라는 하나의 왕사로 연결되는 단일 왕조가 아닙니다. 건국자가 박씨, 석씨, 김씨 세명이나 되고 그 시작 위치나 한반도로 유입된 경로도 다른 것으로 파악됩니다.
신라에 대한 기록에는 크게 진한이라고 칭하는 신라가 있고 변한이라고 칭하는 신라가 있습니다.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종족이었다.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하는데, [梁나라와는] 서로 1만리 쯤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秦나라 때 流亡人들이 役을 피하여 馬韓으로 가니, 마한에서는 동쪽 땅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崔致逺云, “馬韓麗也辰韓羅也"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麗)요, 진한은 [신]라(羅)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第一) 마한(馬韓)》
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其國在漢時樂浪之地, 東及南方俱限大海, 西接百濟, 北鄰高麗
新羅國은 본래 弁韓 묘족의 후예이다. 그 나라는 漢代의 樂浪 땅에 있으니,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연하여 있고, 서쪽은 百濟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高[句]麗와 인접하였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新羅, 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 橫千里, 縱三千里
新羅는 弁韓 묘족의 후예이다. 漢代의 樂浪[郡] 땅에 위치하니,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같은 신라에 대한 기록인데 양서, 최치원은 신라를 진한이라고 했고, 구당서, 신당서는 변한 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에서는 진한을 조선의 유민이라고 했고 구당서에서는 그들을 묘족 이라고 했습니다. 묘족은 양자강 유역이 주 거주지 입니다.
여러 사료들을 고려해 볼때 진한의 신라는 박혁거세가 건국한 신라(사로국)이고 변한의 신라는 흉노계 투후 김일제의 세력입니다. 또한 인도계로 추정되는 석탈해도 있습니다.
신라사를 이해하려면 이들의 초기위치와 유입 경로 등에 대해 이해애야 합니다. 나중에 석씨, 김씨에 대해서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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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고려선비 작성시간 21.05.14 지나국에서 부르는 발해는, 본래 <대진국>이 원래 국명이었듯이,
왜 국명을 <대진국>으로 만든 이유는 국가의 탄생과 성장이
과거 <진한>과 관련이 있으니 국명을 그렇게 정했을거라 생각했는데,
초창기 <진한>의 위치가 만주(길림성)에 있었다고 하니 ,,,
나름 근거가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 -
답댓글 작성자동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05.14 길림성 사로국의 진한은 난을 피해 마한의 땅에 거주한 부용국으로서 이동한 진한일 것이고요. 우리가 알고있는 단군 조선의 진한은 더 북쪽의 흑룡강성 강역과 내몽골지역까지 모두 포함된 지역이 맞을 겁니다. 진한 사로국을 말할때 그들을 조선의 유민들이라고 한것은 그들이 단군조선 진한 지역에서 이주한 세력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 기록된 방사천리의 강역은 마한이 중심이 된 후기 고조선을 말하는 것이고 진한이 중심이 된 단군 조선의 강역은 더 넓었다고 볼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