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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 최대의 스캔들 - 해밀턴 부인과 넬슨 제독

작성자별낭자|작성시간08.09.21|조회수1,869 목록 댓글 10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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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해밀턴 (1765-1815)

 

넬슨제독과 엠마 해밀턴의 관계는 당대 최고의 스캔들이었다. 둘의 관계가 실제로 지속된 기간은 6년에 불과했지만 이 짧은 만남은 두 남녀의 사회적 명성과 지위 그리고 삶 그 자체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고 더불어 이 둘에 대한 대중의 시각도 변하게 만들었다.

 

호레이쇼 넬슨과 해밀턴 부인은 1793년 9월에 처음 만났다. 넬슨은 35살의 해군 대령이었고 엠마는 나폴리의 영국 외교관 윌리엄 해밀턴 경의 부인으로 28살이었다. 엠마는 아름다운 외모와 재치로 본국인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상류 사회에 이름을 날렸다. 특히나 사치스럽고 유쾌하기로 소문난 나폴리의 궁정에서 그녀는 사교계의 중심 인물이었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이기도 한 마리아 칼롤리나 왕비의 절친이었다. 그녀 특유의 극적이고 고전적인 포즈는 많은 이들을 매료시켰고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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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왕궁의 안주인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

 

해밀턴 부인을 만난 건 넬슨이 6개월 내내 바다에만 있다가 처음 육지를 밟았을 때였다. 넬슨은 엠마를 처음 만나자 마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부인인 패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넬슨은 해밀턴 부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명예롭고 사랑스러운 기품을 지닌 젊은 여인"

 

매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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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해밀턴의 본명은 에이미 리온으로 대장장이의 딸로 태어났다.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극적인 정세 속에서 이루어졌다. 1797년 나폴리의 궁정은 프랑스 혁명군의 침략에 대한 우려와 걱정으로 가득찼다. 더군다나 프랑스 공화국은 나폴리의 왕실이기도 한 부르봉과 합스부르크 가의 사적인 원수였다. 해밀턴 부부도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1년 후 넬슨이 나일 강에서 프랑스 해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자 나폴리 궁정은 안정을 되찾는다. 기쁨에 가득 찬 엠마 해밀턴은 편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세상에 이토록, 이 절반만큼이나 영예롭고 완벽한 것은 없었어요. 그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기절했을 정도에요... 나는 지금 자부심과 기쁨에 겨워 하늘을 사뿐히 걷고 뛰는 느낌이에요. 당신과 같은 땅에서 나고 자랐다는 게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남편과 나는 당신을 위해 방을 꾸미고 있답니다... 당신과 포옹할 날을 기다리며 윌리엄과 나는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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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해밀턴 경. 공작가의 후손으로 외교관이자 자연학자였다.

조카의 정부였던 엠마 해밀턴에게 매료되어 오랜 구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9월에 넬슨이 나폴리에 상륙하자 해밀턴 부부는 성대하게 넬슨을 맞이했다. 엠마는 당시 건강이 안 좋았던 넬슨을  정성으로 보살폈고 나폴리의 유력 인사들과 영국 귀빈들이 초청된 넬슨의 40번째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 넬슨과 엠마는 서로에게 깊게 빠지기 시작했다. 엠마의 남편 윌리엄 경은 이 둘의 관계를 알아챘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윌리엄 경은 넬슨을 매우 존경했고 친해지는데 열성이었다. 두 남자는 친한 친구가 되었고 친밀해진 이 셋은 스스로를 ‘Tria juncto in uno’, ‘하나로 합쳐진 셋’이라고 불렀다.

 

1798년 말에 이르러 전장의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고 프랑스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해밀턴 부부와 넬슨은 나폴리의 왕족, 귀족들과 함께 시칠리로 피신했다.

 

 

대중의 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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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쇼 넬슨 (1758-1805)

 

해밀턴 부부와 넬슨은 팔레르모 근처에 커다란 저택을 빌렸고 엠마의 친어머니를 포함한 영국인 지인들과 함께 머물렀다. 영국의 신문과 잡지들은 '국민의 영웅' 넬슨과 해밀턴 부부의 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영국에 있던 넬슨의 부인 패니는 남편에게 팔레르모를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넬슨은 그녀의 요청을 차갑게 거절했다. 그의 시선은 엠마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엠마는 1791년 윌리엄 해밀턴 경과 결혼한 이후 남편에게 충실했었다. 넬슨 또한 당대의 기준에서는 부인에게 정절을 지켰다. 그 시대에는 넬슨 정도 지위에 있는 남성이 정부로 두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넬슨과 엠마는 각자의 결혼 생활에서 그들이 항상 원했던 사랑과 즐거움을 얻지 못했고 더군다나 아이도 없었기에 부부 관계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넬슨 부부와 해밀턴 부부 모두 동료 내지는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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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과 엠마는 여러 모로 닮았다. 그 둘은 다분한 장난 끼와 재치 그리고 감정적인 기질을 공유했다. 또한 명성을 향한 끝 없는 굶주림과 야망에 있어서도 서로 닮은 점이 있었다. 1800년 5월 무렵 엠마는 넬슨의 아이를 임신했다.

 

나폴리 사교계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우려한 영국 해군성은 그 해 넬슨을 다시 영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72세의 해밀턴 경에게는 외교관직을 사퇴할 것을 요청했다. ‘하나로 합쳐진 셋’은 지인들과 함께 이태리 반도, 오스트리아 제국, 독일을 지나 영국으로 향했다. 그들은 가는 도시마다 환영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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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패니' 넬슨

 

영웅은 국민들의 엄청난 환호 속에 그 해 11월 런던에 입성했다. 넬슨과 해밀턴 부부는 환대 속에 각종 무도회와 파티, 극장 공연에 동행했다. 지난 7년 동안 넬슨의 부인이었던 패니는 남편의 무관심 속에 이 셋의 뒤를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대중 앞에서 굴욕을 당한 패니는 남편에게 해밀턴과의 관계를 청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최후통첩은 오히려 넬슨을 화나게 했고 결국 그는 아예 집에서 나와 버리고 만다. 더불어 그녀에게 보내는 돈도 절반으로 줄였고 이후 죽을 때까지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영국에서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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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전폭적인 사랑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넬슨과 해밀턴의 관계에 대해선 비판적인 여론도 강했다. 몇몇 친구와 지인들은 넬슨의 방문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당대의 거의 모든 귀족과 부유한 남성들은 정부를 두었고 나폴레옹 전쟁의 또 다른 영웅인 웰링턴 공작처럼 공식석상에 정부와 같이 나타나 부인을 모욕한 사례도 흔했다. 그러나 넬슨처럼 부인을 아예 내치는 경우는 드물었고 이는 무수한 스캔들과 루머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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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링턴 공작은 10년의 구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지만

무수히 많은 정부를 두었다.

 

여론에 대한 우려 때문에 넬슨은 엠마가 그에게 보낸 편지를 모두 불태웠고 엠마에게도 똑같이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해밀턴 부인은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건전한 삶의 방식을 유지함으로써 대중의 호의를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넬슨의 형제들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갔고 넬슨의 조카딸인 샬롯 넬슨에게는 항상 방문할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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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경은 교구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해군 생활을 시작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국가는 넬슨을 필요로 했다. 결국 임신 8개월의 엠마는 홀로 남겨졌다. 대중의 눈을 피하기 위해 넬슨은 임신한 부인이 있는 톰슨이라는 부관의 이름을 빌려 엠마에게 편지를 보냈다. 1801년 1월 엠마는 딸을 출산했다. 넬슨에게도 첫 아이였다. 기쁨으로 가득 찬 넬슨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톰슨 부인의 친구가 기쁨으로 미칠 지경이라 믿습니다. 그는 울고, 기도하고, 당신과 그녀에 대한 얘기 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엠마는 딸아이를 호레시아라고 이름 지었다. 여자 아이 이름 치고는 드문 이름이었고 그녀의 아버지가 누구임을 바로 알 수 있게 하는 이름이었다. 넬슨은 엠마로 하여금 아이를 키우기에 적당한 장소와 집을 물색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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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와 윌리엄 경은 윔블던 근처에 머튼 플레이스라는 집을 마련해 이사했다. 그리고 이듬해 1802년 3월에는 기쁨에 가득 찬 넬슨이 자신의 새로운 집으로 귀환했다. 머튼 플레이스에서의 세 남녀의 동거는 대중의 상상을 자극했고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런던의 신문사와 잡지사들은 엠마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스타일로 집안을 장식하고, 저녁 식사에 어떤 메뉴를 올렸는지 열성으로 조사해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마지막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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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과 해밀턴 부부는 헤밀턴 경의 웨일즈 영지들을 살펴보기 위한 여행길에 나섰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환호했고 환영회와 무도회가 열렸다. 그러나 유럽의 상황이 악화되어 넬슨은 바다로 돌아가야만 했다. 엠마는 두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1803년 초 윌리엄 경이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이도 태어난지 몇 주 후 죽었다. 엠마는 반년 안으로 넬슨이 돌아오리라 기대했지만 전쟁 때문에 6개월은 2년 3개월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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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 플레이스

 

넬슨은 1805년 8월 영국으로 돌아왔다. 머튼 플레이스에서의 3주간의 바쁘고도 기쁜 나날들이 지나갔고 9월에 이르자 넬슨은 다시 전장으로 호출되었다. 케이프 트라팔가 근처에서 프랑스 해군과 교전이 있을 모양이었다. 전투 직전 넬슨은 유언을 변경한다. 자신이 사망할 경우 영국 정부는 엠마와 호레시아가 적당한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1805년 10월 21일 오후 '구국의 영웅' 넬슨은 역사적인 트라팔가 해전 중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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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의 죽음 이후 엠마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 넬슨이 남긴 유산으로 처음에는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지만 점차 지출이 늘어나면서 생활고에 처했다. 넬신의 유언과 당부와 다르게 정부는 넬슨의 형제들과 조카들에게 보상을 대신 해주었고 엠마와 호레시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엠마는 넬슨의 친구들과, 선장들, 군인들,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추억이 깃든 머튼 플레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비싼 돈을 매년 지불했다. 1812년에 이르러 엠마 앞에 남은 것은 엄청난 액수의 빚뿐이었다.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녀는 적절한 보상을 정부에 계속 요청했지만 1814년 엠마가 갖고 있었던 편지들이 도둑질 당해 출판되자 정부 보상은 영영 물 건너 가버렸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에는 감옥에 갇히기에 이른다. 몇 주 후 감옥에서 출소한 뒤 그녀는 채권자들을 피해 호레시아를 대리고 프랑스 깔레로 출국한다. 타국 생활에 그녀의 몸과 마음은 나날이 쇠약해졌고 결국 1815년 1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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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시아 넬슨 워드 (1801-1881)

넬슨 제독의 유일한 후손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해밀턴 부인을 어머니로 공식 인정하진 않았다.

 

넬슨과 엠마의 유일한 자식인 호레시아는 영국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넬슨의 형제들이 그녀를 보살폈다. 호레시아는 21살 때 이웃 마을의 성공회 목사인 필립 워드와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필립 워드는 사려 깊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결혼생활은 행복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 치세에 들어와 그녀의 아들과 딸들에게 연금이 일부 지급되었다. 그녀는 1881년에 죽었다. 사회적 명성과 성공을 열망했고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린 아버지, 어머니와 달리 그녀는 목사의 아내로서 조용하고 평탄한 삶을 살았다.

 

호레이쇼 넬슨은 생전에 자작, 남작에 봉해졌다. 번햄-쏘프의 자작위와 남작위는 넬슨 대에서 끊겼고 힐즈버러 남작위는 형인 윌리엄이 물려받았다. 힐즈버러 남작위는 후에 머튼 자작과 넬슨 백작으로 승격되었으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한편 시칠리 왕국으로부터 브론테 공작에 봉해지기도 했는데 공작위는 질녀를 통해 이어졌고 그 후손이 영국에서 브리드포트 자작에 봉해져 오늘에 이른다. 브론테 공작위는 이탈리아 통일 왕국의 성립으로 인해 사라졌다. 넬슨은 합법적인 자녀가 없었으므로 모든 작위는 그의 형제와 조카들이 물려받았다.

 

넬슨과 엠마의 유산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엠마가 그토록 애정을 갖고 관리했던 머튼 플레이스는 다른 사람에게 팔렸고 훗날 철거되어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소지품들도 지난 200년 동안 대부분 소실되었다. 다만 앞서 언급한 넬슨 경의 편지들은 현재까지 전하며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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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밀턴 부인"에서 해밀턴 부인을 연기한 비비안 리와 넬슨 역의 로렌스 올리비에

그들이 연기한 커플만큼이나 회자되었던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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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베스트 드레서 poadun님


 

 

 

 

 

 

 
One Man's DreamㅡYan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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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fa110 | 작성시간 08.09.22 굉장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음에는 틀림없네요~~
  • 작성자violet u.k | 작성시간 08.09.22 불륜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한 유혹의 향기가 그림으로 부터 짙게 나타나니, 같은 여자지만 정신이 몽롱해지네요. 그 향기가 너무 독해서요. 그리고 배경음악과 그림이 정말 조화가 잘 이루어져, 두가지 향수처럼 결합되니, 다시 하나의 매혹적인 향수가 탄생된것 같아요. 그런데 그 향에 중독이 되어 머리가 아프네요.
  • 작성자hayden | 작성시간 08.09.22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서양문화중 정말 이해하기 힘든점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것임. 뭐랄까... 문명의 껍데기를 쓴 야만인같다고나 할까. 서구문명은 기술과 물질문화빼곤 별로 배울점도 없고, 배워서도 안된다는 생각만 듬.
  • 작성자신애마 천국 | 작성시간 08.09.23 해밀턴 부인이 넬슨의 사후 보상을 받지 못 했던 건 조지 4세가 된 섭정 황태자에게 밉보여서죠. 황태자가 자기한테 추근거린다고 넬슨한테 써보낸 편지의 답장에 넬슨이 황태자 욕하면서 멀리 하라고 한 편지가 저 위에 썼듯이 도둑맞아 출판되는 바람에 황태자가 그걸 보고.. 범인은 대우를 못받았다고 생각한 하인의 짓이었음. 대신 넬슨 형제들과 특히 부인 패니는 엄청난 보상을 받습니다.
  • 작성자짱가언제나타날래 | 작성시간 08.09.24 서양의 초상화를 뽀샵을 너무해서.........그림보면서도 실물을 어땠을까 하게 된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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