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리스트
-
작성자 정혁현 작성시간11.06.30 애쓰셨습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후기를 올려주시니 송구스럽고 감사합니다. 더 열씸히 설교를 위해 애쓰겠습니다. 그게 나의 기쁨입니다. 조금 수정하고 싶은 내용은 "1차원', '2차원', '3차원"은 "상상적인 사랑, 혹은 개인적인 사랑", "상징적인 사랑, 혹은 대의를 향한 사랑" 그리고 "실재적 사랑, 혹은 이웃사랑 또는 하느님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그러고 보니 2차원과 3차원의 내용이 바뀐 거 같습니다. 혹시 제가 그렇게 말했나요? 벌써, 아니 애초부터 좀 치매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
작성자 정혁현 작성시간11.07.01 자꾸 수정을 요구하기가 좀 뭐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문제일 거 같아서...보로매오 매듭은 세 개가 함께 하나를 구성한다는 데 방점이 있습니다. 마치 '삼위일체' 같이요. 우리가 삼위일체에 관해 말할 때, 성부의 차원, 성자의 차원, 성령의 차원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이를 1차원, 2차원, 3차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 같습니다. 1,2,3이 들어갈 때는 구조가 점점 복잡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한데, 사랑에서는 상상적인 차원(오해하여 사랑하는 차원)이 없으면 대의에 대한 사랑이나 우리가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실재적인 대상(예를 들어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불가능하거나 있을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
작성자 정혁현 작성시간11.07.01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그리고 실재적인 것은 점점 더 고상하고 복잡한 사랑을 점층적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여 사랑하는 것은 철없어 보이지만 사랑하는 당사자의 심리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지요. 이 세 가지 형태의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한 사랑의 차원은 다른 사랑의 차원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한 개인에 대한 사랑에도 이 세가지 성질의 사랑이 공존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작성자 정혁현 작성시간11.07.01 그래야만 왜 하느님사랑과 함께 이웃사랑이 필요하고, 그것이 동어반복이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보수신학은 이 두 사랑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이해하였고 민중신학은 이 두 계명이 마치 동어반복인 것처럼 이해해 왔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현실과 무관한 것이 되거나 반대로 현실의 대의를 따르는 행위 그 자체로 빈곤해져 버린 것이지요. 사랑이 어떻게 동시에 세 차원을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할 때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필연적인 연관 속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다른 것일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내적 위안의 수준에 머무는 것도 '정의'와 같은 대의를 따르는 실천 그 자체만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