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요한 지음 / 최민순 신부 옮김 / 바오로딸
1. 작가소개
- 지은이 : 십자가의 성요한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 6월 24일 에스파냐의 아빌라 근교 폰티베로스에서 직조공이었던 곤살로 데 예페스와 카탈리나사이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극심한 빈곤과 궁핍 속에서 생활하였고 아버지와 형 루이스는 요한이 어릴 때 사망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어머니와 함께 메디나 델 캄포에 정착해 살며 교육을 받았고, 17세 때에는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메디나 병원장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1563년 그는 메디나 델 캄포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이듬해에 성 마티아의 요한이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하였다. 1564년부터 4년간 살라망카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6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한은 고향집을 찾았을 때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를 만났다. 그 당시 카르멜회의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해 더 고적하고 깊은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카르투지오회로 옮기고 싶다는 뜻을 성 요한이 피력하자, 성녀 테레사는 그를 설득하여 카르멜회에 남아 함께 개혁운동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1568년 11월 28일에 그는 두루엘로에서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도움으로 개혁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성 요한은 카르멜회의 최초 규칙으로 돌아가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하였으며, 이때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바꾸었다. 그는 열렬한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면서 인근 마을들에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년 뒤 두루엘로에 최초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보급을 위하여 진력을 다하던 중, 1577년 10월 2일 수도회 개혁을 반대하던 완화 카르멜회 수도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톨레도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578년 8월까지 9개월간 ‘어두운 밤’을 체험하였다. 이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신비적, 영성적, 문학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감옥 안에서 그는 몇 편의 시를 썼다. 9개월 만에 감옥에서 탈출한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여러 직책을 맡아 활동하는 한편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1579년 맨발의 카르멜회는 인정을 받았고 수도원도 세웠다. 그는 바에사에 개혁 카르멜회 대학을 세우고 학장이 되었으며, 1582년에는 그라나다의 로스 마르티레스 수도원의 원장을, 1585년에는 안달루시아 관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1590년 카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요한은 1591년 6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병에 걸려 그대로 에스파냐에 남게 된 그는 그 해 9월 말 우베다 수도원으로 옮긴 후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은 후 12월 13일 밤 자정이 지난 무렵에 사망하였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중 한 명이며, 그의 저서들은 가장 유명한 영성신학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카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 등이 가장 유명하다. 요한은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에스파냐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 옮긴이 : 최민순 신부
전라북도 진안 출생. 1935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을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전라북도 정읍·임실·남원 등지에서 본당신부로 근무하다가 1939년부터 전주해성학교 교장, 1944년부터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학장취임 2개월 만에 학교가 폐쇄되자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 聖神大學의 전신. 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로 전임되었다.
1951년 대구교구 출판부장 겸 천주교회보와 대구매일신문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한때 교직을 떠나기도 하였으나, 1952년 다시 성신대학의 교수로 복직하였다. 그 뒤 1960년 스페인 마드리드대학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신비신학과 고전문학을 연구한 뒤, 1963년부터 경기도 부천의 소명여자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1965년부터 가톨릭공용어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6년부터 다시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5년 8월 지병인 고혈압으로 사망,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수필집 ≪생명의 곡≫, 시집 ≪님≫·≪밤≫ 등이 있으며, 유고집 ≪영원에의 길≫이 있다. 또한 다수의 번역서도 남겼다.
특히 단테의 ≪신곡≫>,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등은 정확한 번역으로 알려져 있다. 저작과 역서는 주로 영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와 관련된 번역서로는 ≪예수의 데레사, 완덕의 길≫(1967), 구약성서의 <시편>(1968), ≪영혼의 성≫(1970)·≪십자가의 요한≫(1971)·≪깔멜의 산길≫ (1971)·≪어둔 밤≫(1973) 등이 있다.
2. 간추림 또는 내 마음에 다가온 구절및 느낌
1. 독자에게
무릇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루카 15,17) 스스로를 관조하는 사람이면, 자기 초월의 필요성을 절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p3)
'나‘의 인생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누구를 만난다함은 쉬운 일이 아니라도, 다만 확실한 것은 나의 생명과 구원을 위하여 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만남,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p3)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하라고 창조된 존재이기에, 사랑은 자기 실존의 가장 뿌리 깊은 핵심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나’라는 이 나는 항상 그 ‘너’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오롯하게 될 것입니다. (p4)
사랑이신 하느님을 제 돌아갈 자리로 하여 태어난 나그네이기에, 인간은 이를 의식하건 거부하건 결국 사랑을 향하여 걸어가는 길손인 것, 그러기에 당신 아닌 누구나 무엇으로 채워질 수 없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p4)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 ― 인간인지라, 사랑을 겨냥하여 삐뚜로 쏘아진 화살이 하고 많은 사람들의 그릇된 삶이요, 올바르게 거침없이 나가는 것이 과녁을 맞히는 이들의 참 생활일 것입니다. (p4)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려면 모든 것에 대한 욕(慾) 끊기와 맛 없애기의 밤을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피조물에 대한 애집이 하느님 앞에서는 어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니, 이 어둠을 둘러쓴 영혼이 먼저 어둠을 떨어버리지 않으면 티없이 맑으신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도 빛날 수도 없다. 성요한께서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5)라고 하신 말씀에도, 빛과 어둠이 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p5)
“상반되는 둘이 하나의 주제에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철학의 가르침 … 그러므로 피조물에의 애집인 어둠과 하느님이신 빛은 상극이요, 서로 비슷하지 않을뿐더러 전혀 엉뚱하여서 성바오로께서 ‘빛이 어둠과 무슨 사귐이 있겠습니까?’(2코린 6,14) 즉 풀어 이르면 빛과 어두움이 어떻게 어울리겠느냐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영혼이 먼저 애집을 쫒아버리지 않고는, 하느님과의 합일의 빛이 그 안에서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 (p5)
"정화를 우리는 어둔 밤이라 부른다.“고 하신 성인은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 인간이 치러야 하는 정화, 즉 밤이 감성 및 영성의 두 가지라 했고 그의 양상 역시 능동 및 수동 두 가지라 했습니다. (p5)
능동의 밤은 곧 “다름 아닌 끊음과 씻음으로써, 세상의 바깥 일들, 육에 즐거운 것들, 의지에 맛스러운 일체를 끊고 씻어버림”인데 「가르멜의 산길」은 이를 다루었습니다. (p5)
성인의 표현을 빈다면 “능동적이란, 영혼이 밤에 들기 위한 일을 제 편에서 할 수 있고, 실제 하는 것”이지만 “수동적이란, 영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체, 다만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고 영혼은 수동적인 상태에 있음”을 말합니다. (p5)
인간의 능동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절대 정화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손길로 다스려짐이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이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성요한의 천재가 유례없이 밝혀내는 밤입니다. (p6)
☞ 최민순 신부님의 ‘독자에’란 글은 어쩌면 어려운 이 글(어둔 밤)의 핵심을 짚어준다
어둔 밤
완덕이란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 영혼은 벌써 우리 구세주께서 복음에 말씀하시는 영생으로 통하는 좁은 길의 영적 수련을 거쳐, 답답하고 숨막히는 곤경을 치른 것이다. (p10)
제1편 감각의 밤을 다룸
제1장
하나의 영혼이 회심을 해서 하느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뒤이면, 하느님께서는 거의 항상 그 영혼을 영 안에서 키워가신다는 사실이니, 사랑 깊은 어머니가 가날픈 어린이를 가슴의 체온으로 덮혀주고, 달콤한 것과 부드럽고 맛난 음식을 먹이며, 그 팔로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듯이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귀여워하신다. (p20)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이가 커감에 따라 부드러운 사랑을 감추면서 응석을 받아주지 않고 다디단 젖통에다는 쓰거운 노회즙을 발라, 아기를 품에서 내려놓고 제 발로 걷게 한다. 어린이의 구실은 그만 하고 어른다운 큰 일에 처신을 하라 함이다. 자모와 같은 하느님의 은총도 영혼을 재생시켜 하느님 섬김에 새로운 열과 성을 베풀 때면 꼭 그러하다. (p20)
영혼으로 하여금 제 힘 하나 들이지 않은 채 하느님의 일마다에서 달고 맛난 영의 젖을 발견하게 하고, 영성 수행에 대단한 취미를 느끼게 만든다. 하느님께서는 가날픈 어린이에게 하듯 부드러운 사랑의 다사로운 가슴을 그에게 주시는 것이다. (p20)
제2장 : 교만의 습성에서 지니고 있는 몇 가지 영적 불완전
영성의 일이나 신심 행위 등에 열렬하고 근면하다고 느끼면, 잘 된다 싶은 마음에서 (무릇 거룩한 일들은 절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건만) 제 완전함 때문에 은근한 교만의 싹이 터오르기가 일쑤다. 그리하여 제가 한 일과 제 자신에 대해서 약간 자만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또 부질없는 마음, 주제넘은 생각조차 이는 바람에 영성의 일을 남들 앞에서 곧잘 이야기하고 더구나 자기가 아는 이상으로 남을 가르치려 든다. (p22)
흔히 악마는 이런 사람들을 부채질해서 되도록 그런저런 일들을 많이 하려는 열성과 욕심을 품게 만드는데, 이는 방자하고 참람한 마음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악마는 이들이 하는 일이나 덕이 모두 아무런 가치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악덕이 되는 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p22-23)
어떤 사람들은 어찌나 마음이 나쁜 데까지 이르렀는지, 자기네 아닌 딴사람들이 좋게 보이는 꼴을 도무지 보려 하지 않고 기회가 닿기만 하면 말과 행동으로 남을 비난 비방하여 제 눈의 들보는 생각지 않으면서 제 형제 눈에 있는 티끌만 보고, 남의 모기는 걸러내면서 제 낙타는 삼킨다. (마태 7,3; 23,24) (p23)
고해 신부가 자기를 업신여길까봐 그들은 있는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는 대신 죄에 채색을 해서 되도록 그다지 나쁘지 않게 보이려 하니, 이것은 고백보다 차라리 변명을 하러 가는 셈이다. (p23-24)
남을 기리기는 원수같이 싫고 스스로 기림받기를 몹시 좋아하는 그들은 이를 종종 노리기까지 하니, 꺼진 등잔을 가지고 기름을 밖에서 찾고 있던 어리석은 처녀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마태 25,8) (p24)
누구의 선생도 될 수 없다는 이이들은 만약 명령이 떨어진다면 가던 길도 바꾸어서 새 길로 접어들기를 여반장으로 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기리는 것이 그들의 기쁨이요, 남들처럼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이 오직 하나 걱정이다. (p26)
겸손한 영혼 안에 하느님의 슬기로운 영이 살고 계시는 만큼, 당신은 영혼을 움직여 그윽한 속에다 당신의 보배를 간직하게 하시고, 나쁜 것일랑 밖으로 털어내게 하신다. (p26)
이런 영혼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이를 위해서라면 자기 심장의 피라도 바치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있는 힘을 다 써서 사람들을 도와줄 것이다. 자신이 떨어지는 결점을 보면 겸손을 가지고 견디어 낸다. 그리고 하느님께 희망을 걸면서 온화한 마음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견딘다. (p26)
제3장 : 영적 탐욕에서 흔히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불완전
진정한 신심이란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영스러운 것을 상징하는 무엇의 본질과 진리에만 있어야 한다. 이 밖의 모든 것은 집착이요 허욕일 뿐이니 완덕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욕념을 다 없애야 한다. (p28-29)
눈에 보이는 물건에 마음을 붙이거나 많이 가지거나 함이 없이 일하기에 필요한 지식 외에는 아무 것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받들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만 온통 눈이 쏠릴 뿐 이밖에 욕심이라곤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한껏 너그럽게 베풀고 영성적인 것이든 현세적인 것이든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하면 없이 사는 것을 멋으로 아는 것이다. (p29)
내적인 완전의 진실에만 눈을 주기 때문에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고 일체에 있어 자기 자신에게는 기쁨을 주지 않는 것이다. (p29)
제4장 : 사음을 두고 흔히 가지는 불완전들
감성은 다른 것을 가지지도 가질 수도 없는 만큼 이때 제게 가장 가까운 것을 가지게 되는 데 이것이 곧 부정한 감각이다. 예를 들면 영혼이 그 얼로는 하느님과의 깊은 기도에 잠겨 있는데 한편 감성으로는 (비록 본인이 못 견디게 싫어해도) 관능의 반항과 충동 및 행위를 느끼는 그것이다. 이런 일은 종종 영성체 때에 일어난다. (p32)
감성의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은 악마인데 이놈은 영혼이 기도 중에 있거나, 혹은 기도를 하려고 할 때 불안과 동요를 부채질하여 그 본성 안에 부정한 충동을 일게 한다. 만일 거기에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쓰는 날이면 영혼은 크나큰 해를 입게 된다. 왜냐하면 악마가 노리는 대로 영혼이 부정한 충동을 무서워하여 이와 싸우다 보면 기도가 힘없이 될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아주 기도를 놓아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p32-33)
악마는 다른 때보다도 이런 기도 시간에 훨씬 더 많은 동요와 교란을 불어넣어서 영적 작업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p33)
우리 구주께서 복음서에 “육으로부터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부터 난 것은 영입니다.”(요한 3,6) 하신 말씀이 까닭이 있으니, 이는 곧 감성에서 나는 사랑은 감성으로 끝나고 영에서 나는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자라서 끝난다는 것이다. (p35)
제5장 : 분노의 허물
어떤 사람들은 영적 분노의 다른 종류에 빠지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어 남의 잘못을 보면 성내지 않고 못 배기는 성미다. (p36)
☞ 이 책은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느낌을 달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남의 잘못을 보고 성내는 사람이란 바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끌을 보는 사람을 이름이다
그들의 결심은 많기도 하고 엄청나기도 하다. 그러나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을 믿는 그들이라 결심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만치 더 떨어지고 성을 내고 참을성이 없어서 하느님께서 보아주실 때를 기다리지 못한다. (p37)
☞ 자기 딴에는 열심히 많다고 자부하지만 성을 내고 참을성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 보시기에 아무 소용이 없는 자들이다.
제6장 : 영적 탐식에 대한 불완전
초심자 대부분은 영성 수행에서 발견하는 맛과 재미에 빠져서, 하느님이 영성의 전과정에서 보시고 기뻐하시는 영의 순결과 분별보다도 차라리 영의 맛을 얻으려 한다. (p38)
☞ 주객이 전도되는 꼴이다. 하느님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이들은 가장 불완전하고 철없는 백성 … 복종과 순명을 육체적 고행 다음에 제쳐놓으니(순종이 곧 이성과 판단의 고행인 것, 그러기에 모든 것보다도 하느님께서 더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맛스러운 제사가 아닌가) 순명없는 고행은 짐승들의 고행일 따름, 그렇다면 거기서 얻는 맛과 탐욕에 움직이는 사람이 동물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p38-39)
☞ 순명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모든 극단은 덕이 아닌 악인데 이렇듯 제 뜻대로만 움직이는 사람들은 덕보다도 악덕에 자라는 것, 이런 식으로 기껏 얻는대야 영적 탐식과 교만이 있을 뿐이니 순명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p39)
☞ 언제나 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순명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있어서도 이를 수행할 마음과 기쁨이 가셔지는 사람들까지 있으니, 맛과 재미로만 동하는 그들이라면 차라리 그런 일을 하지 않음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p39)
☞ 가셔지는: 없어지는, 동하다: 움직이다
제 마음 제 멋을 하느님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라 이를 앗아서 하느님의 뜻과 바꾸어놓으면 그 즉시로 슬퍼하고 맥이 빠지고 까라진다. 이들 생각으로는 자신이 기쁘고 만족한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고 당신께 만족을 드리는 일로 안다. (p39)
☞ 자가당착의 생각이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우선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기도 중에 할 일이란 오직 맛과 감각적인 신심을 발견하면 그만인 줄로 알아서 억지로라도 그 감각적인 것을 짜내느라 애쓰기 때문에 머리와 다른 능력들이 피로하고 지칠 따름이다. (p40-41)
☞ 억지로 감동을 자아내기 위하여 하는 기도. 그것은 기도가 아니고 자아도취며, 고역이 아닐까!
참다운 신심이란 자기를 믿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생각으로 인내와 겸손으로 무미한 속을 끝까지 버티는 데에 있는 법이다. (p41)
맛과 영혼의 위로를 찾는 것이 고작인 그들이라 아무리 책을 읽어도 마음에 찰 리가 없어 이 묵상을 하다가 저 묵상을 하다가 이렇게 하느님의 일에서 맛을 낚으려 헤매는 것이다. (p41)
☞ 좋다는 말씀, 좋다는 기도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이 경우 일 것이다
맛에 끌리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또 하나 다른 중대한 결점은, 십자가의 험한 길을 가는 데에 자못 더디고 게으르다는 것이다. 맛에만 내맡겨진 사람이니 자기 부정이라면 으레 오만상이 찌푸려지기 때문이다. (p41)
☞ 자기 입맛에 맞는 길만 찾는 신앙 생활.
사물의 가치와 완성은 많은 일이나 작업의 맛에 있지 않고 무릇 사람이 일을 하면서 자기를 부정할 줄 아는 데에 있으니, 하느님께서 어둔 밤에 인도하시어 실제로 정화를 시켜주시기까지 사람들은 자기의 힘을 다하여 자기 부정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p42)
제7장 : 영적 질투와 나태
질투로 말하자면 많은 초심자들이 남의 영적 재보(財寶)를 언짢게 여기는 것이 보통으로 다른 사람이 이 길에 뛰어나면 그게 못마땅해 시무룩하고 그들이 찬사받는 것조차 보기를 싫어한다. (p43)
☞ 본당에서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그냥 싫은 경우가 이에 해당되리라.
남의 덕을 마음으로 섭섭해 하고 때로는 그 덕이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며 남이 기림받음을 할 수 있는 대로 없애려 드니, 매사에 자기만 높으려고 하는 사람들이라 남이 그런 찬사를 자기에게 보내지 않으면 눈에 쌍심지가 돋는다. (p43)
혹시 사랑에 질투가 있다면 그것은 거룩한 시새움으로서 남 같은 덕이 없음을 슬퍼하고 다른 사람이 지닌 덕을 기뻐하고 하느님을 섬김에 자기는 모자람이 많을망정 남은 모두가 뛰어남을 만족으로 삼는 것이다. (p43)
☞ 거룩한 시새움도 있는구나! 남이 잘 됨을 기뻐하는 것.
제 뜻, 제 재미가 없는 일이면 하느님의 뜻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제 마음이 흡족하면 하느님도 좋아하시리라 믿으니 결국 하느님을 가지고 자기를 측량함이 아니라, 자기를 가지고 하느님을 측량하는 것이다. 이는 복음이 가르치는 바와 정반대되는 일이니 하느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도로 얻을 것이요,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라 했다. (마태 16,25)
☞ 결국 모든 것의 중심은 자기 자신에 있는 사람이다.
영의 기쁨이나 맛으로 사는 사람들이라 완덕의 억세고 힘드는 일에는 약해빠져서 마치도 단 것으로 자라나는 애들과도 같이 고된 일이라면 무엇이나 다 피해버리고 영의 즐거움이 있는 십자가를 보면 질색을 한다. 그들이 가장 영적인 일에 가장 염증을 내는 것은 제 멋대로, 제 맛대로 영성을 살려 하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생명의 좁은 길로(마태 7,14) 들어가기란 그들에게 매우 슬프고 언짢은 일인 것이다. (p44-45)
☞ 하느님의 나라에는 가고 싶지만, 십자가 지기는 싫은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어두운 밤에서 재미와 맛의 젖을 떼게 하시고 온전한 메마름과 내적 암흑 속에다 그들을 두시어 제 멋대로인 그들의 어린 놀이를 말끔히 없애심으로써 아주 다른 법으로 덕을 닦도록 마련하신다. 왜냐하면 초심자가 제아무리 스스로를 절제하고 하는 일, 당하는 일을 바로잡아나간다 해도, 하느님께서 이 밤의 정화를 통하여 그 사람이 수동적이 되도록 붙들어주시지 않는 이상, 다는 물론 조금도 무엇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p45)
☞ 어둠 밤의 정화를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해 가야 한다. 언제가지나 어린아이로 머물 수는 없다.
제8장 : 어두운 밤을 풀이하기 시작
이 밤을 우리는 관상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영성인에게 두 가지 어두움, 혹은 정화를 마련한다. 즉 인간의 두 가지 부분을 따라 감성적인 것과 영성적인 그것이다. (p46)
☞ 어둔 밤→관상→감성적인 정화+영성적인 정화
그 하나의 밤, 혹은 정화가 감성적인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감성을 영에 알맞게 함으로써 감성면에서 정화를 하고 또 하나 다른 것은 영성의 밤, 혹은 정화로서 이로 말미암아 영혼은 영성면에서 스스로 정화 및 무일물(無 一物)이 되어 하느님과 사랑의 합일을 꾀하는 것이다. (p46)
☞ 이제부터 어려워진다. 어떤 것은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들이 영성 수행 중에 맛과 기쁨을 한창 누릴 때, 그리고 하느님 은혜의 태양이 눈부시게 비친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 빛을 몽땅 어둠으로 바꾸시고 전에는 마음대로 언제든지 하느님 안에서 맛볼 수 있던 영의 감로수, 그 생수 구멍을 밀폐해버리신다. (p47)
☞ 언제까지나 영적 어린아이로서의 기쁨만을 누릴 수는 없다.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성장통을 겪어야 한다. 그것이 정화의 밤, 어두운 밤이다.
이제는 그전처럼 묵상이 되지 않기 때문인데 이미 내관(內官)이 밤 속에 깊이 잠겨든지라 하느님은 그들을 말라 비틀어지게 놓아두시니 항용 기쁘고 즐겁기만 하던 영성의 일이나 완덕 공부에도 아무런 재미가 없을 뿐 아니라 그와는 엉뚱하게 그런 일들에서 맛없음과 쓰거움을 맛볼 따름이다. (p47-48)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하느님께서 그들이 제법 자라남을 보시고 어린 티를 벗어나 굳세어지도록 그들을 젖가슴에서 떼치시고 팔에서 풀어놓으시면 제 발로 걸을 줄을 익힌 그들은,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가므로 자못 신기로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p48)
☞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아직 영적으로 아기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제9장 : 감성 정화의 길로 나아감을 알 수 있는 표징들
첫째는 하느님의 일들에서 맛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에서는 아무런 낙을 못 얻는 그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이 어둔 밤에 두시어 감성욕을 씻어 닦게 하시므로 어느 것에든 빠지거나 맛들이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메마름과 맛없음이 새로 지은 죄나 결점에서 오지 않음이다. (p49)
☞ 내가 이해하기로는 감성이란 육체에 비롯되는 모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육(肉이)다.
옳은 정화를 알 수 있는 둘째 표징은 이러하니, 하느님의 일에서 맛을 못 느끼더라도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지 않아서 퇴보함이라 믿고 행여 하느님을 잊을세라 애타게 찾음이다. (p50)
메마름(건조)과 미지근함(미온)의 두드러진 차이는, 미온은 의지와 마음이 나른하고 풀려서 하느님 섬김에 열심히 없는데, 정화적 건조(씻어내는 메마름)은 하느님을 섬기지 못함에 대한 걱정 및 시름과 함께 열심이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p50)
☞ 몸은 말을 듣지 않지만 마음은 하느님을 애타게 찾는 것
이 메마름의 원인은 하느님께서 감각의 힘과 낙을 영 쪽으로 바꾸시기 때문인데 본성의 힘과 감각은 영의 그릇이 못 되므로 아쉽고 메마르고 텅 비게 된다. (p50)
말하자면 감각적인 부분은 순수한 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영이 누릴 제면 육은 재미를 잃고 일할 힘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영은 영양을 섭취하면서 굳세어지고 하느님께 소홀함이 없도록 조심하는 데에 그전보다 훨씬 더 빈틈없이 열심하게 된다. (p50-51)
☞ 감각에서 영으로 발전하지만 아직은 영의 그릇이 못됨으로 인한 메마름이다. 그것은 과정이므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천상의 음식을 먹으면서도―고기를 달라고 애걸복걸하였었다.(민수 11,5) 우리의 탐욕은 이토록 낮은 데까지 이르는 것이니, 그러기에 이것은 우리의 비참을 욕구하면서 하늘의 바꿀 수 없는 보배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이다. (p51)
☞ 썩어 없어질 지상의 것을 욕구하느라 천상의 보배를 잃어버리는 우리다
제10장 : 이 어두운 밤에 가져야 할 태도
순박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일이니, 당신은 그들을 그저 맑고 밝은 사랑의 빛으로 인도하시기까지 갈 길에 필요한 것을 꼭 주실 것이고,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자격을 얻으면 영의 어둔 밤을 통하여 저 빛을 주실 것이다. (p56)
☞ 어두운 밤을 통하여 하느님은 우리의 영을 정화하신다
감성의 이 밤에서 영성인들이 가져야할 태도는 절대로 묵상이나 추리를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인데, 때가 이미 그럴 때가 아니라 영혼을 정적 속에다 버려두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는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것만 같고, 한편 또 정녕 자기가 게으른 탓으로 아무것도 생각할 마음이 없는 양 여길지 몰라도,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곳도 아니할망정 꾸준히 기도하면서 참는 것만도 큰 일을 하는 셈이다. (p56)
여기서 다만 할 일이라곤 모든 지식과 사색에서 영혼을 해방시켜서 자유 분방하게 만드는 일이니 무엇을 생각하고 묵상해야 될까에 대해서는 염려를 놓고 다만 하느님 안의 고요하고 사랑겨운 지견에 만족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의지도 욕망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일체의 집착은 영혼을 어지럽혀서, 여기서 주어지는 관상의 정적과 맛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p56-57)
☞ 오직 하느님에게만 맡길 뿐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신다
기도할 때 생각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해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차라리 딴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여겨질지 몰라도, 그저 꾹 참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는 오직 영의 자유 해방이 있을 따름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 경우 제 힘을 가지고 정신 능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 영혼의 무위와 화평을 통하여 그 안에 박아주시고 굳혀주시는 보화를 막거나 잃게하는 일이 될 것이다. (p57)
말하자면 얼굴을 그리고 색칠하는 초상화가와 같으니, 만약에 무슨 일이 있어서 그 얼굴이 흔들리면 화가는 아무 일도 못하고, 하고 있던 일도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다. (p57)
☞ 아주 쉽고 적절한 비유다. 내가 하려고 하면 하느님은 하실 수 없다
관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겨운 내리심인 까닭이다. 그것은 사랑의 영 안에서 영혼이 불타게 하는 것이다. (p58)
☞ 관상, 하느님과의 합일
제11장
영성의 길이란 바로 메마름 그리고 우리가 다루고 있는 모든 욕구의 중절을 말한다. 다윗은 또 이르기를 “나는 무로 돌아가 없어졌어도 몰랐사옵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우리가 말한 대로 영혼이 어디를 거쳐가는지 모르는 채 전에 맛보던 천상 및 지상의 모든 것에 죽어버리고 이유도 모르는 채 다만 사랑에 반한 까닭이다. (p59-60)
☞ 중절(中絶): 중도에서 끊거나 그만둠
우리 구주께서 말씀하신 대로(마태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끝까지 견디어 내는 사람이 적은 까닭이다. 이 좁은 문이 바로 감성의 밤으로서 영혼은 그리로 들어가기 위해서 스스로를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믿음 안에 바탕을 지우는 것이니 그것은 일체의 감성과 동떨어진 것이다. (p62)
☞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육의 욕구를 버리는 것.
제12장 : 이 밤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이익들
마치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이 젖을 뗐을 때 큰 잔치를 베풀었던 거와 같이(창세 21,8) 천당에서도 하느님께서 이 영혼의 배내옷을 벗기시고 안았던 팔에서 내려 제 발로 걷게 하시고 젖이나 달고 부드러운 어린이 음식을 끊게 하시고 그 대신 빵껍데기와 어른들의 음식을 먹게 하심을 기뻐하며, 아울러 감성의 메마름과 어둠 속에서 감각의 재미가 없는 강마른 영에게 이 음식을 주심을 기뻐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이미 말한 바 있는 주부적 관상이다. (p63)
☞ 주부적 관상, 젖을 떼고 음식을 먹는 것
이 메마르고 어둔 관상의 밤이 빚어내는 첫 번째 중요한 이익이 바로 자기와 자기 비참에 대한 지견(智見)이다 … 전 같으면 풍요를 느끼던 정신 능력이 메마르고 허전하며 선행에 곤란을 발견하는 데서, 스스로의 무능과 비참을 알게 되기 때문인데 편안한 때는 전혀 그런 기미도 없었던 것이다. (p63)
☞ 지견(智見): 지혜와 식견
메마름과 외로움의 일옷을 입고 맨 처음의 빛이 어두워지면, 자아 인식의 탁월하고 필요한 덕에 있어 보다 더 참된 빛을 지니게 되어서 자기에 대해 만족은 커녕 자신을 값없이 알게 되는 것이니 제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지 못한다 함을 보기 때문이다. (p64)
☞ 자신의 무능을 발견하는 것이 시작이다
이 자기에 대한 불만과 하느님께 불효한 데 대한 슬픔은 일찍이 영혼이 지녔던 기쁨, 하던 일 전부보다도(제 아무리 그것들이 대단했다 손 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더욱 대견히 여기신다. (p64)
욕과 맛의 신발을 벗고 나서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비참을 뼈저리게 느꼈으니 그러한 마음가짐이라야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p65)
☞ 자신의 비참을 통해서야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오직 괴로움만이 들은 바를 알아듣게 하였다(이사 28,19)고 일렀듯이, 괴로움으로써 하느님은 깨닫게 해주시는 것 … 텅 비고 걸림이 없는 영혼(하느님의 힘을 입으려면 이랴야 되는 영혼)을 하느님께서는 어둡고 메마른 관상의 밤을 통하여 초자연적으로 당신의 슬기 안에서 가르쳐나가시는 것이니, 이런 일은 처음의 그 맛이나 기쁨을 통해선 얻을 수 없던 것이다. (p66)
☞ 복된 고통이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영혼이 제 발로 서고, 감정이나 감각에 기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예언자도 자신을 들어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즉 내 초소에 버티고 서서(이는 욕을 끊어 기대지 않음이다.) 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망대에 서서 (이는 감성을 가지고 추리하지 않음이다) 기다려보리라. (이는 하느님께서 내게 알려주실 것을 관상하고자 함이다.) (하바 2,1) (p67)
☞ 자신에 의지하지 말고 오롯이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러한 메마른 밤에서 우선 자아 인식이 나온다는 점이고 마치 바탕이나 되듯이에서는 하느님의 인식이 나온다는 그것이다. 그러기에 성 아우구스띠노는 하느님께 아뢰기를 “주여 나를 알게 하소서. 당신을 알리이다.”라고 하였다. (p67)
☞ 메마름→자아 인식→하느님 인식
이 욕구의 밤의 메마름과 텅 빔에서 영혼이 뽑아내는 것이 또 있으니, 즉 영성적 겸손이다. … 이다지도 메마르고 비참한 자신을 발견할 때 그전처럼 자기가 남보다 낫다든가 뛰어나다든가 하는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고 도리어 남이 자기보다 나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p68)
☞ 자신을 아는 것, 그것도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
남들이 알아주고 전 같으면 자기만을 감싸주고 남을 가벼이하던 것을 이제는 판단함이 없이 다만 자기의 비참만을 알고 눈앞에 두고 있으니 남에게 눈을 돌릴 틈도 사이도 없는 것이다. (p68)
제13장 : 이 감성의 밤에서 영혼이 얻는 다른 이익들
어둡고 메마른 이 밤에서 영혼은 영적 탐욕으로 지니던 불완전을 씻게 된다. 그 탐욕이란 영성적인 것을 이것저것 욕심내는 것으로서 호기심과 맛에 끌려 이런저런 공부를 해보아도 만족할 수가 없다가 이제는 그것이 모두 가시게 된다. (p70)
☞ 영적 탐욕도 경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이 메마르고 어둔 밤에 영혼을 들여놓으시면 정욕을 누르고 욕구를 다스려주시므로 그 영혼은 천상의 일에나 지상의 일에나 그 어떤 감각적 희열이나 풍미로는 길러질 수 없다. 이것이 계속 되면서 영혼은 정욕과 욕구에 있어 눌려지고 닦여지고 새롭게 되어 제욕(諸慾)의 힘을 잃고 맛에 대한 무능력자가 되어버리니 마치 젖통에서 젖을 짜버릇하지 않으면 젖줄이 말라붙는 거와 같다. 이렇듯 영혼의 욕구가 말라버리면 이 영의 절제를 통하여 이미 말한 이익보다 훨씬 묘한 이익이 따라오게 된다. (p71)
제욕의 불길이 꺼지고 나면 영혼은 영의 평화와 고요 속에 사는 것, 욕정의 지배가 없는 곳에 혼란이 없고 다만 하느님의 평화와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p71)
☞ 일찍이 성인이 되는 길은 자신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것을 어떤 글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이러한 메마름들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나아가게 한다. 그 이유는 맛을 따라서 일하던 그전과는 달리 오직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일할 뿐이며 일의 재미나 맛에 끌리지 않기 때문이다. (p74)
득의(得意)의 시절엔 아마도 그러기 일쑤이던 자만자족(自滿自足)을 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가지고 일하면서 전혀 자기만족을 지니지 않으니 여기에 거룩한 두려움이 있고 이 두려움이 덕을 보존하고 키우는 것이다. (p74)
이 메마름의 밤에서는 하느님 걱정, 하느님을 섬기려는 열망이 커간다. 왜냐하면 영혼이 지금까지 의존했던 욕구를 부지하고 키우던 감성의 젖이 떨어지고 나면 메마름과 벗음 속에 오직 남은 것은 하느님 섬김의 열망뿐이니,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을 크게 기쁘게 해드리는 것… (p74)
☞ 나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함
영혼의 꾸준한 끊음으로 기쁨, 아픔, 바람, 무서움의 네 가지 감성을 가라앉히고 끊임없는 메마름으로 본성의 욕구가 감성 안에서 잠이 들고 작업에 있어 감각과 정신 능력과의 조화를 높이고 이미 말한 대로 추리의 활동을 멈추면, 이것이 모두 영혼의 하부 구조의 거주요, 권속으로서의 이를 영혼이 여기서 제 집이라 부르는 것이다. (p75)
☞ 어렵다. 좌우지간 감성은 기쁨, 아픔, 바람, 무서움이다.
제14장
영의 길이란 나아가는 사람, 나아간 사람의 길을 말함인데 이것은 달리 조명의 길 혹은 주부적(注賦的) 관상의 길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손수 영혼을 기르시고 먹이시므로 영혼은 추리도 어느 능동적 협력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이미 말한 대로 영혼에 있어서의 감성의 밤이며 정화다. (p76)
☞ 하느님이 다 하시는 것이다. 주부(注賦): 부어 넣어 줌
고생과 유혹을 거쳐서 시련과 단련과 시험을 치르지 않은 영혼의 감성은 지혜로 도달할 수 없으니, 그러기에 집회서(34,9-10)가 말하기를 “시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 무엇을 아느냐? 시험을 치르지 않은 사람이 옳다는 일이 어떤 것들이냐?”라고 했다. (p77)
☞ 시련과 단련은 싫지만 영혼의 단련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한다
제2편 : 영의 밤을 다룸
제1장 : 영의 어둔 밤을 다루기 시작함. 그 밤이 어느 때에 시작하는지를 말함
제2장 : 이 나아간 사람들이 지니는 불완전
습성적인 불완전은 애착과 불완전한 습성으로서 미처 감성의 정화가 이르지 못한 영 안에 아직 뿌리처럼 남아있는 그것이다. 두 가지 정화가 서로 틀리는 점은 뿌리와 가지의 차이, 케케묵은 때를 벗기기와 새로운 때꼽재기를 지우기와의 차이일 것이다. (P86)
☞ 습성(習性): 오랜 습관에 의하여 굳어진 성질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려면 영의 둘째 밤에 들어야 하니 여기서는 감성도 영성도 일체의 지각이나 맛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캄캄한 속을 순수한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순수한 믿음이야말로 영혼을 하느님과 결합시키는 가장 적절한 방법인 것, 그러기에 호세아는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호세 2,22)하였으니 이는 곧 믿음으로써 너를 내게 결합시키라는 뜻이다. (P88)
☞ 믿음이 없다면 하느님에 대해 아예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제3장 : 알아두기
영혼에 있어 완전히 정화되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즉 감성과 영성인 때문이니 하나의 정화가 없이 다른 것의 정화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것, 감성의 정화가 제대로 있으려면 진실된 영성의 정화가 있은 다음이라야 한다. (P89)
☞ 감성과 영성은 함께 정화되는 것이 아닌가! 선후가 있을까!
하느님께서는 묵은 인간을 이들에게서 실제로 벗기시고자 아울러 (사도가 말씀한 대로) 새 인간, 즉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하느님께 창조된 인간을 만드시고자 이들의 능력과 애착과 감성을 모두 다―영의 것이든 감각의 것이든 그리고 밖의 것이든 안엣 것이든―벗겨버리시고, 지성을 어둡게, 의지를 메마르게, 기억은 텅 비게, 애착은 극도의 불안과 고민거리로 돌리시어서, 그전에 영적 보배들에서 느끼던 맛과 감각을 없애주신다. (P90)
☞ 지금까지 쫒던 세상의 것을 벗기신다.
제4장
본성의 힘을 가지고 사랑을 낮게 아니하고 도리어 성령의 힘과 맑음으로써 하므로 의지는 하느님을 두고 인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마찬가지로 기억 또한 영광의 영원한 상(相)으로 변한 것이다. 결국 묵은 인간의 밤과 정화로 말미암아 영혼의 모든 힘과 뜻이 하느님의 기질과 낙으로 아주 변모해버렸다. (P93)
제5장
이 어두운 밤이란 영혼에게 끼치는 하느님의 한 작용으로서 영혼을 그 자연적 및 영성적 무지와 불완전에서 정화시키는 것이다. (P94)
☞ 어두운 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는 과정이다
하느님의 지혜가 영혼에게 밤과 어둠일 뿐 아니라 괴로움과 아픔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첫째는 하느님의 지혜가 아득히 높아 영혼의 역량을 초월하기에 어둠이라 이르는 것이요, 그 둘째는 영혼의 두려움과 낮고 낮음으로서 그러기에 괴롭고 아프고 캄캄하다는 것이다. (P95)
하느님의 일들이란 그 자체가 밝고 환할수록 그만치 영혼에게는 어둡고 캄캄하다는 것이니, 그것은 마치 빛과 같은 것, 빛이 밝을수록 올빼미의 눈동자는 더욱 캄캄하게 어두워지고 태양을 쏘아볼수록 시각이 약한 탓으로 안총이 흐려져서 어두워지는 것이다. (P95)
☞ 빛과 어둠이여, 하느님과 나 사이의 거리여!
하느님께서 아직 변화되지 못한 영혼에게 당신의 오묘한 지혜의 이 찬란한 빛을 쏘시면 인간의 이성이 캄캄하게 된다. (P95)
이렇듯 캄캄한 관상이 처음엔 영혼에게 괴로운 것이 빤하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주부적 관상이 지극히 좋은 뛰어남을 많이 가지고 있는 반면 이를 받는 영혼은 정화되지 못한 탓으로 지극히 나쁜 비참을 많이 가지는 까닭이니 하나의 주체 안에 상반되는 둘이 용납될 수 없음에서 괴로움과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다. (P96)
☞ 겸손되이 참고 견디야 한다
이 관상의 빛과 지혜가 매우 밝고 맑은 반면 빛을 받는 영혼은 어둡고 불결하다함은, 마치 흐리고 언짢고 병든 눈에 밝은 빛이 쏘아들어오면 아파지는 것처럼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도 아프다는 것이다. (P96)
☞ 관상에 빠져 하느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 마치 비오 신부의 오상의 기적이 놀랍지만 그 고통은 얼마나 극심한가!
너무나 슬프고도 이상야릇한 일 … 얼마나 영혼이 무르고 더러웠으면 고우시기 한량없는 하느님의 그 손을 여기의 영혼이 되려 거북하고 거슬리게 느끼는가? 짓누르거나 꼼짝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다만 손을 댈 뿐 그나마도 … 영혼에게 벌이 아닌 은혜를 주시려고 … 자비의 손길이 아니신가? (P98)
제6장 “ 이 밤에서 영혼이 당하는 또 다른 고통
영혼이 여기서 당하는 그 셋째 고통은 두 가지 극단에서 오는 것으로 이는 곧 여기서 결합되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그것이다. 신적인 극단이란 정화의 관상이고 인간적인 극단이란 영혼의 주체다. (p99)
☞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비참한 인간의 만남에서 오는 고통
신적인 극은 영혼을 변화시켜 신스럽게 만들기 위하여 점령하고는 영혼이 일체가 되다시피 밀착해 있는 묵은 인간의 본성과 애집을 벗겨낸다. (p99)
☞ 이로 인하여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아이의 출산을 위한 고통같은 것
이 정화의 관상이 영혼을 조일 때면 죽음의 그림자, 그 비탄, 그리고 지옥의 고통을 아주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인데 곧 하느님 없는 자신을 몸소 느낌이 바로 이것이라, 당신께 죄받고 버림받고 내침받은 몸임을 느끼는 것이 여기이며 이보다 못 견딜 일은 항상 이러하리라고 믿어지는 그것이다. (p100)
☞ 엄마와 아기가 경험하는 산고(産苦)가 이러하리라.
영혼이 당하는 고통의 넷째는 어두운 이 관상의 다른 초월성 즉 그 존엄의 위대성으로 영혼은 이와 맞서는 극단 즉 자기의 빈곤과 비참을 통감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 정화에서 겪는 가장 대단한 고통 중의 하나이다. (p101)
☞ 자기를 아는 것. 자기의 비참을 아는 것.
영혼은 제 구미를 당기게 하는 세 가지 보배 즉 현세적 자연적 및 영성적인 면에서 빈곤과 철저한 공허를 자기 안에 느끼는 까닭인데 영혼은 스스로가 보배와 반대되는 악들, 즉 결함의 비참과 메마름과 지각의 공허와 어둠 속에 버려진 영을 발견하는 것이다. (p101)
☞ 자신의 실체를 똑똑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을
하느님께서는 영혼을 그 감각적 및 영적 실체에 따라 그 내외의 능력에 따라 여기서 정화시키시므로 영혼은 비워지고 가난해지고 그 모든 부분이 허탈해져서 바삭바삭하고 텅 비고 어둠 속에 버려져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감성면은 메마름 속에 정화되고 정신 능력은 비움에서 그리고 영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정화되기 때문이다. (p101)
☞ 쇠가 불 속에서 달구어지듯 인간은 시련속에서 달구어 진다.
제7장 : 의지의 고통과 마음의 죄
주께서 당신 뜻대로 영혼의 정화를 끝내주시기까지는 그 고통에 아무런 약도 별수도 소용이나 도움이 될 수 없는 것. (p107)
☞ 그저 섭리에 맡길 뿐.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언제 거기서 나올지 그 고생이 끝날지를 두고 큰 고통을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데, 그들이 비록 신망애(信望愛)의 향주 삼덕(向主三德)을 지니다 손 치더라도 당장 당하고 있는 각고와 실고가(고통을 느끼는 刻苦와 하느님을 잃어버린 失苦) 이러한 덕들의 위로가 될 수 없음은 하느님께서도 자기를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하느님을 잃고 비참한 상태에 있음을 실제로 겪은 몸이라 오래도록 하느님의 미움과 내침을 받아 마당하다고 생각한다. (p109)
☞ 연옥을 생각하면 솔직히 나도 두렵다.
제8장 : 영혼을 괴롭히는 또 다른 고통들
이 하늘스런 빛이 청정 순수하게 영혼에 사무칠수록―천상것 지상것 할 것 없이―부분적 애착이나 지각에 대하여 영혼을 캄캄하게 텅 비게 그리고 없게 만든다. … 무릇 초자연의 사상(事象)이란 그 자체가 밝고 똑똑할수록 더더욱 우리 이성에는 어두운 법이다. (p111)
☞ 나를 완전히 비우고 그 빈 곳을 하느님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다
영혼에 사무치는 이 하느님의 빛은 영혼이 지닌 빛을 초월하고 이와 함께 그전에 본성의 빛으로 얻었던 지각과 애호에 대한 빛을 일절 없애고 어둡게 해서 영혼을 어둡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능력과 욕구까지도 자연면에서나 영성면에서나 다 비워버린다. 이렇듯 비우고 어둡게 하면서 하느님의 영스런 빛으로 영혼을 씻고 빛내어주지만 그 영혼은 빛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도리어 어둠 속에 있는 줄 여기니, 방 한가운데에 빛이 있다 해도 그저 맑기만 하고 부딪는 무엇이 없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p112)
☞ 그냥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애매하지만 천천히 곰씹으면 가슴에 와닿는다
행복은 영의 가난에서 오는 것이다. (p113)
제9장 : 이 밤이 영을 어둡게 할지라도, 영을 비추고 빛을 주기 위함이다
영을 낮추어 비참하게 만듦도 높여주고 올려주려 함이요, 가난하게 만들어 자연의 모든 것과 정에서 비워놓음도 매사에 걸림이 없는 공번된 마음으로 저승과 이승의 일체 사상을 영묘하게 맛보고 즐기라 함이다. (p114)
습관적이건 현실적이건 단 하나의 애호나 정 붙인 무엇이 있다면, 온갖 맛을 뛰어나게 지닌 사랑의, 영의 그 심오한 맛을 느끼거나 얻어볼 수가 절대 없을 것이다. (p114)
☞ 무릇 하느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세상의 취미에 마음을 붙일 것이 아니다
영혼이 현재적(顯在的)이든 잠재적이든 어느 애호나 부분지 아니면 다른 어느 지각에 오염이 되어 있으면 영혼은 그가 원하는 대로의 청정 무애한 영의 낙을 미처 맛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영이란 신스러워서 그의 애호나 정감이나 지각 등이 자연의 그것과는 월등히 다르고 차원이 높기 때문, 따라서 현재적이건 잠재적이건 하나를 용납하려면, 한 주체 안에 양립할 수 없는 이율배반처럼 다른 하나를 몰아내거나 없애야 하는 것이다. (p115)
☞ 천상의 낙과 세상의 낙을 동시에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깨끗함과 더러움이 양립할 수 없듯이
그러므로 영혼이 이 드높은 데까지 다다르면 관상의 어둔 밤이 영혼의 낮은 데부터 부수고 없애어서 스스로 어둠 속에서 메마르고 궁하고 비어 있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니, 장차 받을 빛이 까마득히 높은 하늘스런 빛으로서 자연의 모든 빛을 초월하고 자연적으론 이성이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15)
이렇듯 신스럽고 숭고한 정과 낙을 느끼고 맛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마음이 모든 애호와 감정에 있어 정화되고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 일이건 사람 일이건 거기에 정 붙이던 습관을 버리고 마음이 메마르고 궁해야 바삭바삭하게 물기가 없이 이 어두운 관상의 불에 단련이 되어서, 맑고 티없는 마음가짐과 닦여지고 건전한 입천장을 가지게 될 것이니, 그래야만 하느님 사랑의 심오 희한한 접촉을 느끼게 되는 것…영혼은 이 접촉으로 말미암아 신스럽게 변화되고 이전에 지니던―현재적 및 잠재적―모든 정애를 몰아낼 것이다. (p116)
☞ 설령 하느님의 일이라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고통과 함께 구원의 영이 분만된다 함은 이사야(26,17-18)의 말에도 그 사실이 있으니 “주여 당신 얼굴에서 우리는 잉태하였고, 산고를 치렀어도 구원의 영을 낳았나이다.”라고 하였다. (p116)
☞ 산고→아이 탄생, 고통→구원
이 겨룸, 이 싸움이 심각한 까닭은 영혼이 기대하는 평화가 그만치 심오한 탓이고, 영혼의 아픔이 깊고 섬세함은 차지해야할 사랑이 그만치 매우 그윽하고 순수하기 때문이니 무릇 깊이있고 절묘한 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만치 작업도 정성되고 진지하고 깨끗해야 하며 오래가는 건축일수록 그만치 튼튼한 법이다. (p119)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빛이 한번 들어오기 시작하자 처음엔 그토록 고통스럽고 냉엄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 이런 결과는 하느님이 내리시는 관상 편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내리시는 관상이란 그 자체가 고통을 줄 수가 없고 도리어 맛과 낙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그때 영혼이 지니는 나약과 불완전이요, 은혜를 받아들이기에 마땅찮은 자세이니, 하느님의 빛이 이러한 데에 들어오는 바에야 영혼이 이미 말한 그러한 고통을 안 겪을 수 없는 것이다. (p120)
☞ 나의 영혼이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준이 안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빛과 영혼의 현 상태의 괴리만큼 고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제10장 : 하나의 비유로써 이 정화가 근본적으로 설명된다
하느님의 정화의 빛 사랑겨운 지견이 영혼을 스스로 완전히 합일시키고자 정화시키고 준비시키는 그 방법은 마치 불이 나무를 불덩이가 되게 하는 법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p121)
☞ 십자가의 성요한은 정화과정을 비유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한다. 사실 나도 이 비유를 접하기 전에는 책을 읽어도 정화에 대한 개념이 잘 잡히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물질의 불이 목재에 다려질 때에 맨 처음으로 하는 일은 말리기로, 습기를 밖으로 내뿜게 하고 목재에 배어 있는 수분이 우러나게 한다. 다음엔 어둡고 검고 보기 흉한 색깔이 되면 고약한 냄새까지 나기 마련인데 차차 말라들어가면서 불이 당겨지고 불과 상극인 모든 어둠과 더러움을 밖으로 몰아낸다. 그러다가 마지막엔 밖으로부터 나무를 태워 열을 올리고 다시 이것을 제게로 변화시켜서 불자체와 같이 아름답게 만든다. (p121)
☞ 정화 과정을, 나무가 불 자체가 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관상과 사랑의 하느님 불도 이와 같다 할 수 있으니, 이 불은 영혼을 제게로 당겨 동화시키기에 앞서 먼저 불과 상극되는 일체의 요소들을 없애준다. 영혼으로 하여금 더러움을 내몰아 검고 어둡게 하여 그전보다 못하듯이 그리고 평소보다 훨신 더 추하고 지겹게 만들어준다. 이 하느님의 정화가 모든 악과 잡스러운 습기를 제거하는데, 영혼 안에 자리를 잡고 깊이 뿌리를 박은 것들이라 잘 보이지도 않고 따라서 그토록 몹쓸 악이 제 안에 있는 줄을 미처 몰랐지만 이제는 내몰아서 없애려는 판이니 눈앞에 드러나고, 신스러운 관상의 이 어두운 빛에 환히 보여서(자기 자신을 보나, 하느님과의 합일면에서 보나 그 전보다 더 나빠진 것이 아니건만) 전에 안 보이던 것이 보이므로 하느님께서도 보아주실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겨워하실 수밖에 없는 그리고 지겨워하시는 자기인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p122)
고통은 그 지혜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나약과 불완전에서 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정화가 없이는 하느님의 빛과 맛과 낙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니(불이 다려져도 탈 준비가 되기까지는 곧 변화할 수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이토록 고통이 큰 것이다. (p122-123)
☞ 고통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연옥의 영혼들이 고통을 받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연옥 불이 그들에게 다려지더라도 그들에게 불완전이 없다면 불이 힘을 쓰지 못하고 각고(刻苦)도 없을 것이니 거기서는 불완전이 타는 재료인 만큼 그것이 없으면 다시 더 탈 것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승에서도 불완전이 다하고 없다면, 영혼의 고통거리도 끝이 나서 기쁨만이 남을 것이다. (p123)
☞ 명쾌하다. 영혼의 불완전한 것이 타는 곳이 연옥이다. 이승에서 완전히 타버린다면 연옥을 거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려면 이승에서든 연옥에서든 한번은 타야한다.
영혼이 이 사랑의 불로 정화에 정화를 거듭할수록 더욱 사랑에 불탄다는 사실이니 흡사 재목이 잘 타게 되어 있는 그 정도에 따라서 열도 그만치 뜨거워지는 것과 같다. (p123)
제11장 : 영혼이 하느님 사랑의 격정을 어떻게 느끼는가를 말한다
하느님 사랑과 불의 접촉이 영을 말리고 욕구에 한껏 불을 질러주는 까닭에 영혼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갈증을 풀려고 몸부림을 치며 말할 수 없는 갈망을 품고 갖은 모양으로 하느님을 소원하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62,2)에서 이를 잘 표현했으니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라고 한 것은 소원을 이름이고, 또 다른 번역에는 “내 영혼이 당신에 목이 말랐으니 내 영혼은 당신 때문에 죽어가니이다.”라 했다. (p128)
☞ 하느님을 목말라하며 죽어간 사람들이 또한 순교자들이다
불탄 상처에서 할딱임을 느끼는 것, 예언자 욥(7,2-4)이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그늘을 갈구하는 종처럼,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처럼,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눠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지고, 나는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이 영혼에게는 모든 것이 옹색하다. 자기 자신도 하늘도 땅도 일체가 좁을 뿐, 욥이 여기서 우리 문제를 들어 영적으로 말하듯이 영혼은 어둠에까지 아픔에 차있다. 말하자면 어느 가느다란 빛이나 영의 행복에 대한 털끌만한 기대도 위로도 없이 그저 괴롭고 아프기만 한 것이 여기서 당하는 영혼의 고통인 것이다. (p128-129_
☞ 기대나 위로도 없을 때 그것이 아픈 것이다. 그것이 어둠일 것이다
제12장 : 어찌하여 이 무시무시한 밤이 연옥인가
영들이 저승에서 어둔 불로 스스로를 정화하듯이 이승에서는 어둡고 영스럽고 사랑겨운 불로 정화된다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가 있다면 저기서는 불로 깨끗이 되는 대신 여기서는 다만 사랑만으로 맑아지고 밝아짐일 것이니, 다윗이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들어주소서.”(시편 50,12)라고 말한 때는 이 사랑을 빌었었다. (p131)
☞ 이승(삶)→사랑의 불꽃으로 정화, 저승(죽음)→불로 정화
마음의 깨끗함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기 때문이니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우리 주게서 복되다고 일컬으신 사람들 … 이는 곧 사랑에 빠진 사람들―행복이란 사랑만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p131)
☞ 사랑함으로써 마음이 깨끗하여 지는 것이다.
사랑겨운 지혜의 이 불로써 영혼이 스스로 밝아지면서 정화된다는 사실을(하느님은 결코 사랑이 없이는 신비로운 지혜를 주시지 않으니, 바로 이 사랑이 지혜를 주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높은 데서 내려 쏘신 그의 불화살이 뼈 속에 박혔다오.”(애가 1,13)라고 한 말이 잘 드러난다. 다윗도 하느님의 지혜는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닦인 순은”(시편 11,7)이라 했으니 이는 곧 사랑의 정화(淨火)다. (p131-132)
인간은 순수 영이 아니고 나약하므로 하느님의 빛이 쪼이면 마치 앓는 눈에 햇살처럼 쓰리고 아릴 뿐, 도리어 어두컴컴하게 되는 것이다. (p133)
높으나높은 느낌과 하느님 사랑에의 접촉에 다다르려면 많은 고생을 치러야 하고 정화의 커다란 몫을 차지해야 한다. (p134)
☞ 정화(淨化),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 살아서 못하면 연옥에서 해야 한다
제13장 : 이 관상의 어둔 밤이 일으키는 다른 맛스러운 결과들
하느님께서는 절대 진노하심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면야 그 모든 고생이 아무것도 아닐 테고 도리어 하느님을 섬기는 길이라 하여 기쁘기만 할 것이다. (p137)
사랑하는 님이 무덤에 갇혀 계시고 그 무덤이 커다란 돌로 봉인되었고 제자들이 도적질이나할까봐 군사들이 에워싸 지키는 줄을 잘 알았어도(요한 20,1)―그 어떠한 환경도 향액을 들고 주님을 발라드리고자 새벽길을 떠나던 그를 막지 못하였다. (p138)
☞ 주님을 향한 이 막달레나의 사랑. 나는?
암사자와 암콤은 그 새끼가 앗겨서 보이지 않을 때 이러한 초조와 기운을 가지고 새끼를 찾으러 나서는데, 상처받은 영혼도 하느님을 찾게 마련이나 어둠 속에 있으니 하느님이 안 계시는 줄로 여겨 당신 사랑에 죽을 지경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못견딜 사랑이니 이런 사랑을 가지고서는 오래 살 수가 없으니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면 죽음만이 있을 따름이다. (p139)
진실한 사랑은 힘을 주는 것, 사랑의 선에 자기를 완성하고자 그 사랑하는 것과 비슷하게 똑같게 되고 합쳐서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사랑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합일에 도달하지 못하여서 사랑 안에서 완성되지 못한 영혼은 아직 얻지 못한 합일에 대한 기갈과 한편 이미 마음 안에 불붙어 있는 사랑의 힘이 그러한 용기와 담력을 주는 것이니, 이성은 비록 어두워서 밝지 못하고 스스로의 비참과 죄스러움을 깨달을지라도 의지는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p139)
☞ 하느님과가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 뜨거운 사랑.
당신은 영혼 안의 모든 능력을 어둡게 하시어 저 모든 것에서 비우시고 감성적 및 영성적 애호를 조여 마르게 하시며 이런 것에 대해서는 영혼을 섬약질(纖弱質)로 만드셔서 하느님 당신 아닌 일체의 것에는 전혀 무능력하게 만들어주시니 이는 묵은 가죽을 벗어던진 알몸으로 새 옷을 갈아 입게 해주시는 것, 그리하여 영혼은 “독수리마냥 그 청춘 새로워지고”(시편 102,5),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따라 창조된 새로운 인간을 입게”(에페 4,24)되는 것이다. (p141)
이는 곧 초자연적의 빛으로 이성을 비춰서 인간 이성이 하느님의 이성과 합하여 하느님엣 이성이 되는 것, 의지(마음)가 하느님 사랑의 의지로 변하여 이미 하느님 뜻 아닌 뜻이 없고 하느님 뜻대로 사랑하지 않음이 없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 사랑에 합일함이며 기억도 이와 마찬가지요, 모든 애호와 욕구도 역시 하느님을 따라 신스럽게 변화한다. 그리하여 이 영혼은 이미 하늘의 영혼, 천상적이고 또 인간적이기보다 천주적인 영혼이라 할 것이다. (p141)
☞ 궁극의 목표는 이 처럼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
제14장
제15장
제16장 : 영혼이 캄캄한 속을 어떻게 든든하게 걷는가를 설명함
영혼의 멸망은 다만 그 자신에게서 오는 것(호세 13,9) 즉 그 작용과 내적 및 감각적 욕구에서 오고 그 대신 행복은―하느님의 말씀대로―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영혼의 악이 차단되고 나면 그 즉시 뒤따라오는 것이 욕구와 능력에 있어 하느님과 일치하는 보배들이니 여기서 하느님은 저 능력들을 신스럽고 하늘스럽게 만들어주실 것이다.(p149)
영성적인 모든 것은 위로부터 말하자면 빛의 아버지로부터 인간의 자유 의지와 욕구에 내리심이 아니면, 제아무리 하느님 일에 힘을 많이 쓰고 취미를 느껴 상당히 맛들인 줄로 생각된다 하여도 그것은 신적으로 영성적으로 맛봄이 아니고 나머지 일들에서 맛보는 인간적 및 자연 본성적 맛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무릇 행복은 인간으로부터 하느님께가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까닭이다. (p150)
☞ 행복은 인간에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영혼의 내적 충동과 행위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신스럽게 움직이자면 우선 자연엣 식량(識量)이나 활동에 있어 캄캄해지고, 잠들고, 고요해져야만 마침내 힘을 못 쓰게 됨을 아는 것으로 넉넉하다. (p151)
아! 영스러운 영혼아! 네 욕구가 어두워지고 네 애호가 메말라 죄어지고 네 능력들이 어떠한 마음공부도 할 수 없으리만큼 무능한 때가 있거든 그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행복으로 알라. (p151)
☞ 신앙은 결국 역설이다. 왜?
하느님께서 너 자신에게서 너를 해방시키시고 네 가진 바를 네 손에서 거두심이니 네 힘으로는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손이 부정하고 더럽기 때문에, 지금처럼 충분히 완전하게 또 안전하게 일하지 못하리라. 이제는 하느님이 네 손을 잡으시고 마치 장님을 이끄시듯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가든지 너는 모르는 캄캄한 속을 이끌어주시니 네 눈과 발을 가지고는 아무리 잘 간다해도 길을 가늠하지 못하리라. (p151)
☞ 인간은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는 것. 하느님께 온전히 맡길 때 하느님은 이끌어 주신다.
일찍이 알지 못하던 새로운 길을 감이 없이, 또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버려둠 없이 결코 새 땅에 도달할 수 없고 전에 알던 이상의 것을 알 수 없을 것도 뻔한 일이다. (p152)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버려야 얻을 수가 있다
영혼도 이와 같아서, 향상이 되어 갈수록 캄캄한 속을 모르고 가는 것, 그러기에 이미 말한 대로 하느님이 여기서 이 장님 영혼의 스승이며 길잡이시므로 그런 줄을 안 영혼으로서는 정말 기뻐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캄캄한 속을 든든하이. (p152)
☞ 하느님이 나의 편이신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고난을 당함으로써 덕을 닦고 얻을 수 있으며 영혼은 정화되고 더욱 조심성과 지혜를 익히게 되는 것이다. (p153)
☞ 그러므로 복된 고난이구나!
영혼이 하느님을 더 가까이할수록 약한 탓으로 캄캄한 어둠을 더 느끼고 더 깊어지는 것, 태양에 바싹 가까이하는 자가 제 눈의 약함과 부정 탓으로, 엄청난 빛을 감당 못하여 아찔 캄캄해지는 것과 같다. (p153)
☞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 깊은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을 이겨야 하는 것이다
보다 더 밝고 참된 것이 우리에겐 보다 더 어둡고 의아스럽고 … 그러기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는 피하게 되고 … 그리하여 보다 더 빛나고 우리 눈에 차는 것을 얼싸안고 그 뒤를 따라가나, 그것은 우리에게 보다 더 해로운 것, 갈수록 우리를 거꾸러지게 만들 뿐이니 인간은 얼마만한 위험과 공포 속에 사는 것인가. (p154)
☞ 몸에 좋은 것은 입에는 쓰고, 단 것은 이빨을 상하게 한다. 이 역설의 식별이 중요하다
제17장 : 어둔 관상이 은밀한 까닭
신적 관상이 비밀스럽고 자연의 능력을 초월하는 특성을 지니는 까닭은 이것이 초자연스러워서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합일의 완전으로 영혼을 이끌어주는 길이 되기 때문인데, 이 완전성은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으므로 이를 행하는 길도 인간적으로 알지 못하고 신적으로 모르면서 가는 것이다. (p160-161)
☞ 관상은 인간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길이다.
제18장 : 어찌하여 이 비밀스런 지혜가 또한 사다리인가를 밝힘
완덕의 상태란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과 자기 자신을 없앰이어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없이는 있을 수 없으므로 영혼은 우선 이쪽 저쪽을 다 공부하여야 한다. (p164)
☞ 완덕=하느님을 사랑함+자기 자신을 없앰
흔히 사람들은 제게 더욱 이로운―자기를 버리고 없애는―일을 나쁘게 알고, 보다 가치없는―위로와 맛을 찾거나 이익보다 손해를 보기 일쑤인―일을 더 낫게 간주함을 잘 볼 수 있다. (p165)
관상이란 사랑의 지식, 하느님께서 내리신 사랑겨운 지견으로서 영혼이 그 창조주 하느님께 한 층 한 층 올라가기까지 영혼을 비춰주며 사랑에 불타게 하는 것이다. 왜냐면 오직 사랑만이 영혼을 하느님께 결합시켜 하나가 되게 하는 까닭이다. (p165)
☞ 관상: 인간→사랑→하느님
제19장 : 사랑의 신비로운 사다리
사랑의 첫 층은 영혼을 좋이 병들게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층에 있는 새색시는, 그가 다음과 같이 노래할 때의 처녀다. 즉 “예루살렘 처녀들아 제발 덕분 부탁이니 혹시 내 님 만나거든 여쭈어다오. 님 그리다 나는 병들었다고.”(아가 5,8) 하지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니, 이 병중에 영혼은 죄에 약하고 하느님 아닌 모든 것에 생기를 잃고 오직 하느님을 위하는 것. (p166)
☞ 이제부터 성베르나르도와 성토마스의 주석을 중심으로 신비스런 사다리의 열 층계를 풀어나간다
이 병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맥풀림은 하느님께 가기 위한 첫 층계다. 영혼이 관상적 정화의 이 층계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모든 일에 맛과 의지와 위로와 안정을 얻을 수 없고 영혼은 무아(無我)임을 발견한다. (p167)
☞ 하느님을 사랑한 나머지 세상 것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단계다
둘째 층계는 영혼이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게 한다. 그러므로 신부는 밤의 침상에서 신랑을 찾다가(사랑의 첫 층에서 맥이 풀려 있을 때) 발견하지 못했을 때 말하였다. “떨치고 일어나 … 사랑하는 내 님을 찾아가보리.”(아가 3,2) (p167)
마치 새 색시가 순라군들에게 그 님을 묻고 이내 그들을 떠나버리듯….(아가 3,3-4) 마리아 막달레나도 무덤의 천사를 돌보지 않았으니, 여기 이 층계에서는 영혼이 얼마나 바지런한지 어디서든 찾는 것이 그 님이요, 생각하느니 님뿐이며 말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하거나 님에 대한 말이요 이야기이며 먹을 때나 잘 때나 밤샘을 할 때나 어떠한 일을 할 때나 온통 그의 마음은 사랑하는 님에게 있으니, 위에서 말한 대로 사랑의 할딱임에 있는 것이다. (p167)
☞ 앉으나 서나 하느님 생각에 사방천지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사랑겨운 사다리의 셋째 층은 영혼으로 하여금 일을 하게 하고 지치지 않도록 열을 안겨준다. 이를 들어 예언자 왕이 “복되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여, 당신의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여.”(시편 111,1)라고 말했다. (p168)
영혼은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대단하기에 당신을 위하는 일이 작음을 몹시 슬퍼하고 애달파하는 것이니, 차라리 천만번 당신을 위해 자기를 파괴할 수 있다면 오히려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가 하는 일마다에 스스로를 쓸데없는 자로 여기고 사는 것이 그에게는 공짜로만 생각되는 것이다. (p168)
☞ 사는 것이 공짜인데 나는 여지껏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사랑의 사다리 넷째 층은 사랑하는 님 때문에 일상 괴로우면서도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씀대로 아무리 크고 무겁고 어려운 일이라도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듯이 해내는 까닭이다. (p169)
여기서는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건 그 밖의 다른 일에서건 위로와 맛을 찾는 법이 없고 하느님께 특혜를 청하거나 바라지도 않는다. 이미 받은 은혜가 끔찍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니, 비록 큰 힘이 들지라도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조금이나마 기쁘시게 해드릴까, 어떻게 하면 당신께 받은 은혜대로 또 당신께 합당한 대로 섬겨드릴까 하는 데에 온 마음을 쓴다. (p169)
☞ 하느님의 은혜를 갚기 위한 열성이다
이 사랑의 다섯 째 층은 영혼이 하느님을 못 견디게 그리워하고 열망하게 한다. 이 층에서 사랑하는 이는 그 사랑하는 님을 붙들어 그와 합일하고 싶은 정이 치밀어 아무리 짧은 지체라도 지루하기 짝이 없고 분통터지고 괴롭기만 하여서 언제나 님 만날 궁리만 하고 있다. … 시편(83,3)의 작자는 정녕 이 층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을 것이다. “주님 계시는 곳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p170)
이 층에서 사랑하는 이는 그 사랑하는 님을 뵙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 그러한 상태의 라헬이 자식들이 몹시 보고 싶어서 제 낭군 야곱에게 “저도 자식을 갖게 해주셔요. 그러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어요.”(창세 30,1)라고 말했다. (p170-171)
☞ 말 그대로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다.
제20장
여섯째 층은 영혼이 재빠르게 하느님께로 내닫게 하고 당신 안에서 많은 접촉을 가지게 해서 영혼은 거침없이 희망을 가지고 내닫는다. 여기 영혼을 굳세게 한 사랑이 그를 날게 하는 것이다. 이 층에서 예언자 이사야(40,31)가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으니 이들이야말로 여섯째 층에 있는 이들과 같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이 하느님을 그리나이다.”하고 노래한 시편(41,2)의 구절 역시 이 층에 딸린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슴이 목마를 때 몹시도 날쌔게 물께로 내닫기 때문이다. 영혼이 이 층에서 가지는 사랑 안에서 이 재빠름의 이유는 영혼 안의 사랑이 벌써 매우 커졌고 거의 모든 면에서 정화가 된 까닭이다. (p172)
이 사다리의 일곱째 층은 영혼을 매우 대담하게 만든다. 여기의 사랑은 기다림에 판단이 필요없고, 물러섬에 심사 숙고가 쓸데없으며, 억제함에 부끄럼이 있을 수 없으니, 이미 여기서 하느님이 영혼에게 주시는 은혜가 그를 매우 대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p173)
역시 이 층에서 새색시가 대담스럽게도 “그 입술로 날 입맞춰 주셨으면!”(아가 1,1)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에게 드리워지는 임금의 홀의 총애가 느껴지기 전에는(에스 8,4) 영혼이 대담하게 구는 것은 옳지 못하니 그렇지 않으면 여기까지 올랐던 층에서 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 항상 어느 층에서나 겸손으로 자기를 지켜야 되는 법이다. (p173)
☞ 아무리 높은 성덕도 겸손이 흐트러지면 헛 것이 된다.
사랑의 여덟째 층은 영혼이 붙들어 잡고 놓지 않게 하는 것, 새색시는 이런 수법으로 “내 영혼의 사랑, 님을 만나뵙나니 한번 붙든 당신을 놓칠 리 없네.”(아가 3,4)라고 말한다. (p173)
사랑의 아홉째 층은 영혼을 맛깔스럽게 불태워준다. 이 층은 완전한 어둠의 층으로서 그들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맛지게 타오르고 있다. 이 맛깔스럽고 무르녹는 정열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성령께서 이뤄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그레고리오는 성령이 눈에 띄게 사도들 위에 내려오셨을 때 사도들이 속으로 맛지게 타더라고 말씀하셨다. (p174)
사랑의 이 비밀 사다리의 마지막 열째 층은 영혼이 온전히 하느님을 닮게 한다. … 이런 영혼은 그 수가 적은데 이미 사랑으로 정화가 말끔히 되었기 때문에 연옥에 들어가지 아니한다. 그러기에 성마태오(5,8)는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라고 말했다. (p174)
사랑이란 불과 같은 것, 불은 항상 제 범위의 중심으로 타들어가면서 위를 향하여 올라가기 때문이다. (p175)
☞ 사랑이란 자신을 태워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제21장 : “변장한 몸” 의 낱말을 풀고 이 밤에 영혼이 변장하는 그 빛깔들을 말함
변장을 한다함은 일상 자기가 지니고 있던 옷이나 모양새와는 달리 자기를 분장하고 감춤인데, 혹은 색다른 옷과 모양새로 마음속에 품은 것을 드러내어 사랑하는 이의 총애와 마음을 얻으려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와 맞서는 자에게 몸을 숨겨서 자기의 일을 더 잘 하려고 그럴 수도 있다. (p176)
영혼은 신랑인 그리스도의 사랑에 닿은 영혼이므로 당신의 총애를 얻고 그 마음을 사려고 여기서 변장을 감쪽같이 해가지고 제 마음의 정을 그럴싸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악마와 세속과 욕 즉 맞서는 자들 원수들 눈을 피하여 안전하게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로 세 가지 빛깔, 말하자면 희고 푸르고 붉은 옷을 입는데 이는 곧 향주삼덕인 믿음 희망 사랑이다. (p176-177)
성 베드로는(1베드 5,9)는 악마에서의 해방이 믿음보다 더 든든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셔서 “믿음으로 굳세어져 그에게 대항하시오.”하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님의 총애를 받고 그와의 합일을 얻으려면 영혼이 믿음의 새하얀 속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되니, 믿음은 다른 모든 덕―옷들의 바탕이요, 비롯함이라. 이것이 없이는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히브 11,6), 믿음만 있으면 하느님을 기쁘시게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p177)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믿음 안에서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호세 2,21)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이니 뜻인즉, 영혼아 나와 결합하려거든 속으로 믿음의 옷을 입고 와야 한다는 말이다. (p177)
☞ 믿음은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의 시작이다.
이 믿음의 새하얀 속옷 위에다 영혼은 즉시 둘째 빛깔 즉 푸른 저고리를 껴입는데 이것은 앞의 말대로 바람의 덕을 상징하는 것, 이것으로 영혼은 마치 둘째 적의 경우처럼 그 둘째 원수―세속에서 해방되어 보호를 받는다. (p178)
왜냐하면 하느님께의 생생한 바람을 나타내는 이 푸름은 영원한 생명의 일에 대한 생기와 용기와 고결을 얼마나 영혼에게 주는지 바라는지 저기에 비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사실 그러한 대로) 시들고 메마르고 죽어서 아무 가치가 없는 듯이 보이는 까닭이다. (p178)
☞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단지 영원한 생명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
여기서 영혼은 세속의 옷이란 옷을 말끔히 벗어 내던지고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둠이 없이 이 세상에 있는 것, 있을 것, 그 어느 것도 바람이 없이 오직 영원한 생명의 바람만을 입고 사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이 세속에서 높이 떠 있으므로 세속은 그 마음에 닿거나 움키지도 못하고 눈으로 따를 수조차 없는 것이다. (p178)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 눈을 치뜨는 말하자면 다윗이 “언제나 나의 눈은 주를 향하여 있나이다.”(시편 24,15)라고 한 바로 그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다만 주님만 우러러봄이니 다윗은 다른 시편(122,2)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상전들의 손을 여겨 보는 하인들 눈과 같이, 주부들의 손을 여겨보는 하녀들 눈과 같이, 우리 눈도 주 하느님 우러러보며 어여삐 여기심을 바라나이다." (p179)
영혼은 이 바람의 옷으로 변장을 하고 앞에서 말한 그 비밀스럽고 어둔 밤을 거쳐간다. 이리하여 영혼은 가진 것도 의지할 것도 없는 빈 몸으로 하느님 말고는 마치 예레미야의 표현대로(애가 3,29) 혹시 바랄 것이 있을까 하여 입을 땅에 대듯, 아무것에도 눈을 주지 않고 아무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 (p179)
☞ 오직 하느님만을 바란다
영혼은 변장을 감쪽같이 할 작정으로 그 새하얌과 푸름 위에다 셋째 빛깔 즉 아주 새빨간 옷을 걸친다. 이것은 셋째 덕인 사랑을 상징하는데 이것이 다른 두 가지 빛깔을 아리땁게 해줄 뿐 아니라 영혼을 높혀서 하느님 대전에 매우 아름답고 귀엽게 만들므로 영혼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처녀들아, 내 비록 거뭇해도 … 그래도 나는 아름답단다. 그러기 임금님이 내전 안으로 날 들이셨으니.”(아가 1,4-5) (p180)
이 애덕의 옷은 이미 사랑의 옷으로서 님께 대한 사랑을 뜨겁게 해주고 영혼은 셋째 원수인 육에서 스스로를 감싸고 덮을 뿐 아니라(참다운 하느님 사랑이 있는 데는 제 사랑 제 것 사랑이 들어가지 못하므로) 나머지 덕에도 힘을 돋우어서 생기와 끈기로 영혼을 돕게 하고 두 가지 덕으로 그 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우미 단아함을 준다. 사랑이 없으면 어떠한 덕이고 하느님 대전엔 탐탁하지 않기 때문이다. (p180)
☞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영혼이 이 비밀 사다리로 믿음의 밤에 하는 변장이 이것이고 변장하는 빛깔은 이같이 셋이다. 세 가지 빛깔이 영혼의 세 능력, 즉 이성과 기억과 의지로서 하느님과 합일하는 데에 가장 알맞은 준비다. 믿음으로 말하면 이성이 모든 자연엣 지식을 비우고 어둡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지혜와 결합하도록 준비를 시키고, 바람으로 말하면 기억을 비워서 모든 피조물을 지니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져 있게 하니 성 바오로의 말씀대로 바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로마 8,24)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차지할 수 있는 것에서 기억을 멀리 떼어서 바라는 것 안에다 두는 것이니 그러기에 오직 하느님께 바람은 하느님과의 결합을 위하여 기억을 순수하게 준비한다. (p180-181)
☞ 믿음으로 모든 지식을 지우고, 바람으로 모든 기억을 지워 오직 하느님만을 향하는 것
사랑은 의지의 욕구와 애호를 하느님 아닌 일체에서 비우고 없애어서 오직 하느님 안에 두니 이렇듯 이 덕은 이 능력을 준비해서 사랑으로 하느님과 결합해준다. 이렇듯 세 가지 덕이 그 구실로 삼는 바가 하느님 아닌 일체에서 영혼을 떼쳐 동시에 하느님과 합일시키는 것이다. (p181)
제22장
제23장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일은, 하느님께서 영혼을 이끄시고 대하시는 그 모양대로 악마도 같은 모양으로 영혼을 이끌고 대하게 내버려두신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선천사를 통해서 참다운 시현을(설령 그리스도가 보인다 하더라도 천사를 매개로 함이 보통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위격을 가지고 나타나시는 일은 없다.) 주신다면, 악천사도 같은 모양으로 거짓 시현을 꾸미게 버려두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럴싸함에 조심 없는 영혼이 쉽사리 속아넘어갈 수 있고 또 그러한 사례가 많은 것이다. (p187)
☞ 그러기에 식별이 필요한 것이다.
제24장
아가(5,7 ; 3,4)의 신부도 같은 심정을 노래하니, 성안을 돌고 있던 순라군들이 밤의 옷을 벗기고 상처낸 고비를 지나 내 영혼의 사랑님을 만나뵙다니, 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합일에는 대단한 순결이 없이 오지 못하고 그 순결은 모든 피조물에서의 해탈과 피나는 절욕이 없이 얻을 수 없다. 이는 신부의 옷을 벗긴다는 말과 신랑을 찾아 밤길을 가는 신부를 상처낸다는 말로써 상징된다. (p193)
☞ 하느님과 하나됨은 모든 피조물을 끊어버리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혼약을 위한 새 옷은, 묵은 옷을 벗지 않고 입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님을 찾아 밤에 나가기를 꺼리거나 자기 의지를 버리기와 절제하기를 꺼리면서 마치 신부가 그랬듯이 제 침상에서 안일하게 그를 찾는다면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니, 여기의 영혼은 자기를 말하면서 사랑에 할딱이며 캄캄한 속으로 나가서 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다. (p193)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을 찾아 나서야 한다.
제25장
하느님께 가는 길에 그는 하느님 아닌 어느 것에도 멈추지 않으니, 이미 형과 상과 자연의 지각에 구애를 받음이 없이 자유로운 몸이 된 까닭이다. 이런 것들이 영혼을 방해하여 항상 하느님의 것으로 당신과 결합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P195)
사랑이야말로 그때 영혼을 움직이고 인도하는 것, 그 사랑이 영혼을 제 하느님께 고요의 길을 거쳐 날아가게 한다. (P195)
☞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 가장 힘들게 읽은 책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성요한의 ‘어둔 밤’을 완독했다는 기쁨이 크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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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그리움 작성시간 14.10.10 저는 2005년도 방효익 신부 옮김/ 기쁜소식판 '어둔 밤'을 읽었습니다.
하느님의 빛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둔 밤,
그 '어둔 밤'에 하느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기도가 지금도 이어집니다.
마음지기님! 이 밤 더 큰 감사를 전합니다.^^* -
작성자율리 작성시간 14.10.10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정진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힘들게 읽은 책 정리한다고 수고했습니다.
조심 없는 영혼이 쉽사리 넘어가는 누를 범하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겠습니다..^^ -
작성자보헤미안 작성시간 14.10.13 어두운밤이 지나면 밝은 아침이 오는 확신속에 기도의 열정을 더 하겠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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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아기토비 작성시간 14.10.16 마음지기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어둔밤"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덕으로 하느님만을 향한 사랑을 태워 새 옷을 입고 싶은 마음입니다.^^* -
작성자평화... 작성시간 14.10.18 마음지기님.. 대단하십니다.. 십자가 성요한의 <어둔밤>을 완독!하셨군요. 저도 십자가의 성요한을 하늘의 오빠처럼 가르침에 감동받습니다.
마음의영성에서 <어둔밤>을 다시금 읽게 해주셔서 더더욱 감사합니다.
눈에 띄는 거실탁자에 두며 하루일과를 마치고.. 몇줄이라도 다시 음미하면서 읽고 싶은 보물과도 같은 저서로 여긴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