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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

(사29:1-24) “이상한 행위예술, 작가와 마주보기”

작성자플레로쓰데|작성시간14.03.10|조회수239 목록 댓글 1

                  (사29:1-24) “이상한 행위예술, 작가와 마주보기”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 함께 합니다. 이사야 29:1-24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1-4절과 13-14절을 함께 읽습니다. 



1.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2.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3.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너를 에워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4.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이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오늘 읽은 말씀중심으로 “이상한 행위예술, 작가와 마주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2010년 3월 14일부터 5월 31일까지 12주간 동안 뉴욕의 현대 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뉴욕 현대 미술관 역사상 처음으로 행위예술 분야의 전시회를 열도록 허락을 한 것입니다. 그전에는 조각이나 회화 작품들이 전시 되다가 처음으로 열리게 되었는데, 이 행위예술 전시회의 작가가 바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라는 여성분인데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행위예술 작가입니다. 행위예술을 퍼포먼스라고 하잖아요? '퍼포먼스 아트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나이가 한 63살 됐어요. 70년대부터 이분이 행위예술을 실험적으로 해왔는데 그 모든 작품들을 회고하는 의미로 전시회를 열었고, 전시회의 주제는 ‘(Artist is present.) 작가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작가가 현존한다.’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행위예술을 저는 잘 알지도 못하겠지만, 여러분이 이걸 한번 상상해보면 좋아요. 우리가 얼마 전에 이사야가 3년 동안 벌거벗은 몸으로 살면서 그 삶 자체가 하나의 예언적 행위가 아니었습니까? 행위로 드러낸 예언이었습니다. 마찬가지겠지요. 이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작품 중에 이러한 작품이 있었다는 거예요.

 


2층 로비에 올라가면 한쪽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고 테이블을 놓고 의자를 2개를 놓았습니다. 개관시간부터 아브라모비치가 그 자리에 앉아있으면 맞은편 테이블 빈 의자에 관람객 중에서 아무나 원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시간만큼 아브라모비치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그냥 앉아 있는 거예요.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마주보고 있는 겁니다. 무려 이 전시기간 동안에 하루도 예외 없이 아브라모비치가 앉아서 관람객들과 마주보고 있었는데 736시간 30분 동안 앉아 있었고, 그러는 동안에 맞은편 의자에 1400명의 관람객이 참가를 해서 작가와 함께 마주보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게 작품입니다. 작가와 마주보는 것이 행위예술 작품인 거예요.  


제가 뉴욕 현대미술관에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 전시회에서 전시된 행위예술 작품들 얘기를 쭉 들어보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기억되는 게 두 남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고 정말 몇 인치 안 되는 거리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아직 작품이 완성 된 것이 아니에요. 마주보고 있을 때 관람객이 그 사이로 지나갈 때 그게 완성된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게 행위예술이죠. 뭘 느끼는가를 스스로가 체험해보라는 거예요. 완전히 벌거벗은 자들이 아주 밀접하게 서 있는데 그 사이를 지나가는 거예요. 아니면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사랑하라, 사랑하라’라고 계속 외치는 거예요. 제가 느끼기에 아브라모비치라의 작품세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마주보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요. 


1976년에 독일의 같은 분야의 작가 울라이(F. Ulay)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서 12년 동안 연인사이로 지내거든요. 그런데 12년 동안 둘이 같이 한 작품 중에서 완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데, 그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으로 그 둘 사이로 관람객들이 하나씩 지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몸을 스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회고전을 하려니까 다른 사람들이 할 수 밖에 없었겠죠.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울라이가 연인과 헤어질 때 어떻게 헤어지느냐? 12년의 연인사이를 정리할 때 중국으로 가서 만리장성 양 끝에 서서 서로 마주보는 방향으로 걸어와서 만리장성 중앙에서 만납니다. 



이 '만남'이라는 행위예술을 한 뒤에 둘이서 헤어집니다. 이 아브라모비치의 작품 세계의 핵심적인 주제가 바로 마주보기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제가 이 여자 분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구한 게 아니므로 ‘작가와 마주본다.’라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이 없더라고요. 


예를 들어 피카소를 생각하면 피카소와 피카소 자신에 관한 전기나 에피소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은 작품에 쏠리게 됩니다. 초기 작품은 어떻고 작품 활동기의 중간은 어떻고 말기는 어땠고 어느 작품은 어떻고 이 작품은 어떻다는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 아무런 생각 없이 피카소라는 인간을 마주보거나 그 인간 자체에 특별히 의미부여를 하거나 하는 적은 없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아브라모비치가 의도하는 것은 그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작가들, 작품을 통해서 느끼는 작가의 세계관이라든지 작가의 작품에 임할 때의 마음가짐이라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직접 작가를 대면에 보는 것입니다. (Artist is present.) 그냥 작가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여기 있는 거예요. 


바로 이 아브라모비치의 작품의 의도가 남 왕국 유다 백성들에게 그대로 살아났었더라면, 남 왕국 유다가 그렇게 처참하게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될 겁니다.

오늘 본문 1절부터 4절까지 보면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이 진 친 성읍이여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라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나옵니다. 

‘다윗의 진 친 성읍’은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 '아리엘'은 '해마다 절기가 돌아오려니와'라는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할 때 많은 연구가들이 번제단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절기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서 번제를 드리게 되니 2절에 보면 “내가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그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도대체 말이 되질 않아요. 

‘아리엘을 슬프게 하고 아리엘을 괴롭게 하는데 내게 아리엘 같이 되리라.’ 

그 '아리엘이 내게 아리엘 같이 된다'는 것인데 무슨 말이에요? 

아리엘이 번제단이라고 하면 번제단에서 뭐하는 겁니까? 멀쩡한 양과 소와 염소 등을 죽여서 각을 떠서 번제로 불살라버리는데 그게 번제단이에요. 그 번제단이 이제는 의미가 없어져버렸다는 거예요. 의미가 없어져버린 번제단 자체가 번제단에서 불살라지듯이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번제단에서 살라지듯이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겁니다. 


원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속속들이 뼛속깊이 스며들어가 있는 죄 때문에 번제단에서 각이 떠져서 불살라 재가 되듯이, 다 죽어야만 되는 존재들로 그 의미가 없어져버리므로 제사를 드릴 때 제사물이 타죽으면서 나 대신 죽는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소원과 내 계획과 나의 욕망이 다 죽어버리고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미가 없어져버리고 나니 이제 너의 본래의 값, 제물에 붙은 값, 원래 그렇게 죽어야 하는 제물의 의미가 없어지고, 제물을 통해 번제를 드리는 제사의 의미가 사라져버렸으니 이제는 너희 자신이 진짜 그렇게 죽게 될 것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번제단이 그렇게 문제가 생겨버린 것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표현하십니까? 

우리가 읽은 13절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입으로는 계속 하나님을 부르고 찾고 있다는 거예요. 이때의 역사적인 배경은 거듭해서 말씀드리는데, 앗수르의 산헤립이 쳐들어왔을 때 히스기야 왕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하나님 성전에 나아가 편지를 펼쳐 보이고 기도하는 가운데 응답을 받고 하루아침에 185,000명이 멸절 당할 때였습니다. 그렇게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께로 마음이 가까이 오지 않은 채,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입술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존경하고 있을 때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의 마주보기가 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마주보기라는 것이 뭘 의미할까요? 이 아브라모비치가 2층 로비에 벌려놨던 작가와 직접 마주보기의 현장이 바로 번제단입니다. 이 번제단에서 마주보기가 되어야 하는데 작가와 마주보기를 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겠는가?  

작품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작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매개물이 하나도 없이 작가를 직접 보는 것의 의미가 바로 아브라모비치가 연 전시관의 또 다른 작품에서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두 남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고 서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둘이서 그렇게 가까이 마주볼 수 있는 사이가 어떤 사이겠습니까? 연인 사이요, 부부 사이입니다. 연인이고 부부라는 그 관계 안으로 관람객이 들어갑니다. 들어갔을 때 그 관람객이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굉장히 어색하게 느낄 것이에요. 관람객은 옷을 다 입고 두 사람은 옷을 다 벗고 마주보고 있는데 자기가 그 사이에 끼었습니다. 그렇게 끼었을 때에 느끼는 감정이 너무 어색하고 이 두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관계에 내가 끼어드는 것 같고, 이 두 사람 사이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게 바로 진정한 마주보기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주보는 대상이 참 많아요.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마주볼 수도 있지만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내가 아내를 대하고 있는 동안도 실제로 내 마음은 돈을 마주볼 때가 있습니다. 

‘여보 가계부 갖고와봐. / 왜요? / 갖고와봐. 이 사람아, 내가 당신에게 이번 달 초에 200만원 줬잖아. 그거 다 어디다 썼어?'라고 하면서 아내와 이야기하고 있지만 돈을 마주보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동창들과 만나 이야기합니다. 자식들 이야기를 합니다. 내 자식은 어떻고 네 자식은 어떻고 전부 동창을 만나고 있지만, 마음이 마주보고 있는 것은 자식을 마주보고 있는 거예요. 바로 이러한 마주보기와 연관 지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고 입술로는 예배를 드리고 경배와 찬양을 하고 별걸 다하는데 실제로 마음은 내게서 멀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거래처 사람과 아주 가까이 만나서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래처 사람은 실제로는 멀리 있는 거예요. 내 마음은 누구를 마주보고 있느냐? 바로 돈을 마주보고 이익을 마주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무엇을 마주보고 있어요? 하나님께 나가서 입술로 하나님 부르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누구를 마주보고 있느냐는 겁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자비가 많으시고 긍휼하십니다. 자비가 영원하십니다. 공경하고 찬양합니다. 그 영원하신 자비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 건강을 허락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면 내가 마주보고 있는 것은 건강이 아니냐는 겁니다.


번제단은 마주보기 장소입니다. 

여러분! 예배, 제사, 봉사, 경배와 찬양, 성경공부 다 해도 작가와 직접 마주보는 것과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처럼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 기독교가 표방하고 있는 신앙적 행위를 별의별걸 다해도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마주보고 싶어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마음에 걱정이 생깁니다. 그 걱정이 마주보고 있는 것에서 생기는 거예요. 기쁨도 마주보고 있는 것에서 생기는 겁니다. 그 사이에 아무도 낄 수 없을 만큼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마주보는 것의 참 의미라는 거예요.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 사이에 끼었을 때의 어색함. 돈 문제가 아무리 급해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돈 문제가 끼어들었다가 좀 어색해하고 빠져나가야 돼요. 돈 문제가 스스로 이렇게 느끼는 겁니다. ‘이거 하나님과 이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있어서는 도저히 어색해서 안 되겠다’라고 하면서 빠져나가버리는 거예요. 돈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 주어졌는데도, 하나님을 마주보고 있느라고 그 사이에 돈이 끼어들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신앙이고 하나님 마주보기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가까이 하기를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자식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하나님과 내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뭔가 어색하고 자기가 있어야 될 자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 꼭 하나님 앞에서 자식을 마주보고 있고 내 건강을 마주보고 있고 사업을 마주보고 있고 심지어는 골프 낚시 같은 취미를 마주보고 있어요. 설교 시간에도 등산할 생각하고 낚시 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렁이를 어떻게 끼우면 고기가 잘 잡힐까? 골프 할 때 어떻게 하면 슬라이드가 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강대상 앞에 꽃꽂이 보면서 꽃이 이렇게 휘어져 있으니 골프공의 가는 길이 보이는 거예요. 갈대 하나를 꽂아놨는데 갈대가 휘어있으니그게 마주보고 있는 거예요.

번제단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마주보기 작품이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이 세상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우리 마음이 보이는 것들을 마주보게 되어 있어요. 직장 생활을 마주보게 되어있어요. 내일 승진이 결정되는 날입니다. 그러면 승진의 문제를 마주보게 되어 있으면 번제단에 와서 뭘 하는 겁니까? 하나님 말고 다른 것 마주보던 내가 타 죽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죄니까. 

'벌거벗는다'는 게 뭐예요? 내가 누구의 아버지다. 누구의 남편이다. 직장의 직원이다. 이 세상이 부여한 모든 신분을 벗어버리는 걸 말하는 거잖아요. 번제단에서 바로 이렇게 이 세상에서 나에게 부여된 모든 관계가 불타죽는 겁니다. 완전히 벌거벗는 거예요. 나라는 인격 하나만 남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과 마주보는 자리가 번제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번제단을 어떻게 이용합니까? 

13절에 “사람의 계명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았다.”라고 나오는데 이게 무슨 얘기겠어요? 

사람의 계명이라고 해서 십계명이나 하나님께서 가르쳐준 모세의 율례 같은 것들을 다 뒤집어엎었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건 다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는 자들, 선지자나 제사장들이 하나님과 자기들 스스로 먼저 하나님과 마주보기를 하지 않은 채로 계명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들이 다 대제사장의 비즈니스를 위한 것들이 되고 말아요. 하나님과 마주 본 목사님이 ‘주일을 성수하라.’라고 얘기하면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끌어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마주보기가 되어있지 않은 목사님이 ‘주일 성수하라.’라고 하면 그게 뭡니까? 목사님의 비즈니스가 되는 거예요. 교회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비즈니스의 흥업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목사라는 타이틀까지도 다 벗은 채로 하나님과 마주보기가 되어 있는 목사님, 하나님만이 마주보기 대상인 목사님께서 하나님과 마주보고 있다가 내려와서 강단에서 설교하시면서 전도하라고 하면 그것은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하나님과 마주보기가 되지 않은 목사님의 전도하라는 말은 영혼 구원이 아니에요. 말은 영혼 구원이에요. 그러나 교회에 사람을 많이 채우라는 얘기로 바뀌어버리는데 이게 바로 사람의 계명이라는 거예요.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바꾸어서 '도둑질해도 좋다'는 계명으로 바꾼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들이 하나님과 마주보기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가르치게 되면 자신의 비즈니스가 되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남 왕국 유다가 지금 그런 상태가 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 독일의 시인 에리히 케스트너(Erich K?stner)가 쓴 시 중에 “마주보기”라는 시가 있어요. 시의 부제는 “도시가 끔찍이 싫어질 때”라고 합니다. 도시가 끔찍하게 싫어질 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시가 '마주보기'라는 거예요. 그 마주보기의 일부분만 읽어드릴게요.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봅니다. 

파랑바람이 붑니다. 

싹이 움틉니다. 


이 시의 똑같은 구절이 끝에도 나옵니다. 

수미상관법이라고 하나요? 

 

사랑에 주린 눈을 들어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 봅니다.


마지막 구절이 어떻게 끝나는가 하면 ‘마술의 시작입니다’라고 나옵니다.

왜 너와 내가 마주보는 것이 마술의 시작일까요? 더군다나 도시의 삶이 힘들 때, 그 도시의 삶의 풍경을 이 사람이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 


고급수학으로

도시의 성분을 미분 합니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잘라봤다는 거예요. 

이 구석을 보고 저 구석을 봐도 어떤 모양뿐이냐? 


황폐한 모래더미 위에

녹슨 철골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서로서로

핏발선 눈들을 피하며

황금충떼가 몰려다닙니다. 


왜 피해요?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황금을 찾아 돌아다니는 거예요. 

‘손이 야구장갑 만하고’ 

왜 야구장갑만 해요? 자꾸 긁어모으려면 손이 커져야 하니까. 이런 도시 생활이 끔찍해질 때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 대한다는 거예요. 아무 사심 없이 이해관계를 떠나서 마주 대한다는 거예요. 그때 파랑 바람이 부는 겁니다. 황량한 잿빛 도시의 삶 속에 누군가를 아무 사심 없이 마주보고 있을 때 내 마음 속에 파랑 바람이 불고 싹이 움틉니다. 마술이 시작되는 겁니다. 지치고 지친 영혼이 누군가 사심 없이 마주 대하고 마주보고 있을 때 그 사람만을 보고 있을 때- 돈 때문도 아닙니다, 명예 때문도 아닙니다, 이득 때문도 아니고, 출세 때문도 아니고, 승진 때문도 아니고 인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냥 마주보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내 마음속에 황량한 도시의 무거운 부담을 이겨낼 수 있는 파랑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인데 희망의 싹이 솟아난다는 시예요. 도시가 끔찍이 싫어질 때 읽는 시가 ‘마주보기’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간혹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다만, 제가 우리 집 사람 마주보고 있으면 늙어가는 주름밖에 더 보겠습니까? 우리 자식 마주보고 있어봐야 기쁠 때도 있지만 걱정만 생기지요. 정말 이 도시의 삶이 이 세상의 삶이 힘들 때, 이사야서 40장에서 보겠습니다마는, “여호와를 앙망하라”라고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마주보는 겁니다. 

어떻게 마주봐요? 주님의 십자가가 번제단이에요. 이게 아브라모비치가 2층 로비에 만들어 놓은 작가와 직접 마주보는 현장입니다. 이 세상을 지으신 작가와 직접 마주보는 현장이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 마음이 딱 붙들고 있을 때, 내 마음이 마주보고 있고 붙들고 있는 모든 세상으로부터 끊어지고 하나님이 내 앞에 나타나시는 거예요.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합니다. 

에리히 캐스트너가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호와를 마주볼 때에 이 세상 삶에서 지친 영혼들이 소생할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 해 보라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가 이 땅에서 내 마음의 시선을 빼앗아가고 이 땅에서 마주보고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죽게 해줍니다. 

자식을 갖고 있는 아빠도 아닙니다. 사업을 하는 사업가도 아닙니다. 선생도 아닙니다. 교수도 아닙니다. 이 세상이 부여한 모든 신분에 대해 죽어버리고 알몸으로 하나님과 독대해서 하나님을 마주볼 수 있는 시간을 십자가사건이 우리에게 마련해 준다는 거예요. 

‘주님! 십자가에서 주님이 번제로 드려졌습니다. 어린 양으로 죽으셨습니다. 내가 죽은 겁니다.’라고 번제로 드려지면. 내가 자식을 마주보고 걱정이 생겼을 때, 자식 앞에서 자식보다 앞세워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사업 걱정이 생길 때 사업보다 앞세우고, 뭐가 잘 될 때에도 그 일 보다 앞세워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번제로 드려질 때, 아리엘이 제대로 된 아리엘이 될 때에 하나님을 마주보는 이 세상 삶의, 내 삶의, 내 몸의, 작가 되시는 하나님과 직접 마주 대하는 놀라운 축복의 순간이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 마주보기가 되셔야 됩니다. 어떤 일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끼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하나님과 마주보기를 하게 해주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웬일입니까? 티끌과 같고 더럽기가 한이 없는 죄인들이 세상이라는 천지만물이라는 우주라는 작품을 만들어내신 작가되시는 우리 하나님을 마주보기 할 수 있도록 십자가 사건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십자가사건의 번제의 자리가 하나님과 마주보는 자리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어디서든 마주봄을 통하여 새 힘을 얻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내 삶을 주관하실 수 있는 복된 경험들이 오늘 하루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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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플레로쓰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6.30 "알몸으로 주찬양" 욥기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십자가에서 알몸되어 온 우주와 내 인생의 작가되시는 하나님아버지를 마주보게 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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