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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의로움, 완전함, 동행의 삼박자 방주_태승철 (창 6:9~2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5.13|조회수127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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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삼박자 은혜의 방주 타고 넘실넘실>의 줄거리 :

사실상 노아 때의 대홍수가 아니라도 세상은 지금도 부패와 포악으로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패와 포악함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방주는 일상의 삶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방주 타고 하나님 주권의 물결 위에서 넘실넘실 살아야 합니다. 이때 멀미 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삼박자 은혜의 방주를 타야 합니다.

 

 

삼박자 은혜의 방주 타고 넘실넘실

 

(창세기 6:9~22)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그때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대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실 것을 결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14~22절에서는 방주의 규격을 말씀하시고,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과 세 며느리가 방주 안에 들어가고, 모든 짐승들 암수 한 쌍씩을 방주로 들여보낼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노아는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합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삼박자 은혜의 방주 타고 넘실넘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삼박자 은혜의 방주 타고 넘실넘실 인생을 살자는 뜻이 되겠습니다. 넘실넘실은 물결이 크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의태어입니다. ‘바닷물이 넘실거린다.’ 혹은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이 넘실대며 춤을 춘다.’라는 식으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삼박자 은혜의 방주를 타면 인생은 물놀이하듯이 넘실거리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 주권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가 언급되는 본문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부분은 이 땅의 타락상입니다. 노아 시대가 아니더라도 이 땅은 본문에서 말씀하신 대로 부패와 포악함으로 홍수 상태입니다. 노아 시대에 이미 죄악은 홍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대홍수로 심판을 하셨고 방주에 탄 노아와 그 가족들만 살아남습니다. 이 장면은 대홍수 직전까지 부패와 포악함이 넘실거리며 홍수를 이루는 가운데 노아와 그 가족만 죄악에 빠지지 않았음을 그림을 그리듯이 보여 주시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죄악과 부패와 포악함의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홍수를 이루고 있는 죄악과 부패와 포악함에 빠지거나 휩쓸리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노아 홍수는 바로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노아 홍수가 어떻게 일어났느냐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노아 홍수 사건을 말씀화해서 보여 주십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노아 홍수 직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죄악과 부패와 포악함의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방주를 탄 노아 가족들만 홍수에 휩쓸리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죄악과 부패와 포악함에 휩쓸리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방주를 타야만 합니다. 쉽게 말해 본문은 ‘모두가 방주를 타라. 방주를 타지 않으면 세상에 가득 찬 죄악과 부패와 포악함의 홍수에 휩쓸리고 빠질 수밖에 없다. 지금 방주를 타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타야 할 방주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족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톨레도트(תּוֹלְדֹת)는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식의 족보가 아닙니다. 내력 혹은 경력, 경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족보니라’라는 부분을 풀어본다면 ‘노아의 인생 이야기다, 노아의 인생 경로다, 노아의 삶의 역사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의인, 완전한 자, 동행하였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의로움, 완전함, 동행이 바로 제목에서 말씀드린 삼박자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의로울 수 있고, 완전할 수 있고, 동행이 가능한 조건을 은혜로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입었던 사람이 노아뿐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8절을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듯이 똑같이 제공되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노아만 입었던 것입니다. 노아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곧 노아 이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의로울 수 있는 은혜, 완전할 수 있는 은혜, 동행이 가능한 은혜를 차버린 것입니다. 삼박자 은혜를 차버린 자들에게서 나온 결과는 부패함과 포악함입니다. 마치 옹달샘이라도 된 듯이 부패와 포악을 솟구치게 되었고, 이러한 사람들로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만나고, 뉴스를 보고, 영상을 보아도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등진 채, 자기 인생에서 스스로 있게 하려는 주체성을 발동합니다. 이를 통해 세상은 부패함과 포악함의 홍수의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홍수의 세계에서 살 때 휩쓸리지 않고 빠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방주가 필요합니다. 그 방주란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이라는 삼박자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삼박자 은혜의 방주를 타지 않으면 반드시 부패함과 포악함의 홍수에 휩쓸리고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의로움이 무엇이고, 완전함이 무엇이고, 동행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라고 했습니다. 의인은 옳은 사람입니다. 다만 이 옳음이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옳음이지 죄악에 찌든 인간들이 옳다고 여기는 상태가 아닙니다. 의란 곧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심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은 타락하여 스스로 있는 자 앞에서 스스로 있게 하려는 체질이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죄와 타락에 빠진 상태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있게 하고 원치 않는 것을 없게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체하는 위치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옳다 여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자면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죄악은 곧 잘못됨입니다. 잘못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자기의 잘못됨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잘못을 옳음이라고 하면 틀린 것이지만, 잘못을 잘못이라고 하면 옳음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제쳐놓고 내가 스스로 이 세상일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추구하는 나는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것을 마음에 담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는 옳게 여기십니다. 반대로 잘못된 자기를 옳다고 여기고 유지하려 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계속 세상 것들을 담고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지속한다는 것은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잘못을 옳다고 우기는 것이기에 틀린 것입니다.

한편 마찬가지로 옳음을 옳다고 하면 맞는 것이고, 옳음을 잘못이라고 한다면 틀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오류를 밥 먹듯이 범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부패와 포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잘못됨을 알았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잘못됨을 알고도 죽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이로부터 두 가지 오류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은 내 삶에 대해 자발적으로 다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주체가 되어서 삶을 마음에 담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담았기에 생각하고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첫 번째 오류는 잘못됨을 지속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옳다고 하기에 틀림입니다. 두 번째 오류는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옳음입니다. 옳음을 잘못되었다고 하기에 틀림입니다.

스스로 문제를 끌어안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지속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굳이 이것을 지속한다면 잘못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한편 내가 관계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생각하심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로부터 내가 문제를 끌어안기를 지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생각 따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하며 뿌리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어서 ‘노아는 당대의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노아도 죄인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보실 때 완전할 수 있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5장 4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중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함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흔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흠 없는 상태를 생각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가장 완전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자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우리는 완전함의 기준을 도덕이나 윤리 같은 행위적 차원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완전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함이란 이 공백을 채우는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완전함이란 마음 공백의 채움이 완전한지 혹은 불완전한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마음의 공백을 가진 존재로 지어졌고, 그 공백을 채워야 하는 책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분이시라는 것은 요한복음 17장 21절의 예수님의 기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도 성령 안에서 아들 예수님으로 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라는 요청입니다.

이로부터 불완전함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로 채우려는 상태가 불완전함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창조주이심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세계에서 채울 것을 찾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당신이 창조하신 어떠한 피조물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건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명예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성공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마음을 채우려고 소망하는 대상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돈은 내 마음을 채움에 상관이 없습니다. 건강이나 장수가 내 마음을 채움에 상관이 없습니다. 명예, 가족, 성공 등은 내 마음을 채우는 데 상관이 없습니다. 내 마음을 채울 대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세상을 사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 중에서는 어떤 것도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불필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필수적인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여 자기를 죽이는 의로움과,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없으며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마음을 채우실 수 있다는 완전함이 전제될 때 나타납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갈 때 내 생각은 없고 의로움이 유지됩니다.

반대로 내가 세상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죄악이고 부패이고 이로부터 포악함이 나타납니다. 내 생각을 관철하려는 성향이 포악함이기 때문입니다. 부패는 시체가 썩는 것입니다. 시체는 곧 하나님의 생각이 없는 대상입니다. 사업을 하는데 하나님 생각에 없는 일이라면 시체를 다루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생각 속에 없는 이야기를 자녀에게 한다면 시체를 다루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인도하심이 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시체는 더 이상 하나님의 생각이 없는 대상입니다. 이로부터 썩음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없는 곳에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며 일하고 만지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시체를 만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세상은 시체의 썩음으로 가득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구상의 80억 인구가 일을 할 때 그 일이 하나님 생각 속에 있는 것인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80억 인구가 시체를 만지며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야말로 세상은 부패로 범람하고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는 하나님의 생각 속에 없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시체를 만지며 사는 나는 죽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찾아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 되신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당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삼박자 은혜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어야 이 세상에 범람하는 부패함과 포악함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빠지지 않습니다. 다시 9절을 보면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서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말씀드렸듯이 의로움이란 나의 죄악 된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여 나 같은 존재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연합을 통해 의로움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완전함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소망함으로부터 발생합니다. 그럴 때 동행은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몸을 장갑 삼으시는 상태가 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심은 곧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함입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내 몸을 움직여 가시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의로움은 예수님과 하나 될 때, 완전함은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 될 때, 동행은 성령님과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에 둘러싸인 삼각주 안으로 마음이 들어가야 이 세상에 범람하는 부패함과 포악함과 죄악으로부터 내가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본문은 노아의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함을 제시한 이후에 방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본문 15절에 기록된 방주의 크기를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자면 길이는 약 136m이고, 폭은 22m가 넘고, 높이는 13.6m 정도 됩니다. 노아와 그 가족은 이러한 방주를 지음으로써 홍수 속에서 살아남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범람하고 있는 부패와 포악함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삼박자 은혜가 내 마음이 세상의 부패와 포악함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방주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의로움을 입고, 아버지만을 소망하며, 성령님의 장갑이 됨으로써만 부패와 포악함과 죄악의 홍수로부터 마음이 보존될 수 있고 지켜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있습니다. 자꾸 돈 문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만큼 돈이 마음을 빼앗아 가기 쉬운 대표적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대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배우자를 겸하여 섬길 수 없고, 하나님과 자녀를 겸하여 섬길 수 없고, 하나님과 건강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굳이 재물을 말씀하신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서 공통적이고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라이벌이 되는 대표적 대상이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 문제가 발생하면 즉각적으로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어떻게 헤쳐 나가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미 홍수에 휩쓸리게 된 것입니다. 돈 문제든 인간관계의 문제든 삶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문제를 마음으로 끌어안으면 안 됩니다. 문제를 걱정하고 염려하게 되었다면 이미 문제를 끌어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끌어안은 내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돈 문제가 생긴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돈 문제를 마음에 받아들인 상태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못된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문제를 마음에 끌어안고서 걱정하고 근심하는 나를 밀고 나가고 지속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잘못된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함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성령님, 천사들을 다 불러 모으시고는 ‘돈 문제가 발생했는데 돈 문제가 자기 마음에 들어온 것이 잘못되었다고 십자가에서 죽이는 쟤 좀 봐라! 나는 쟤가 마음에 쏙 든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돈 문제 앞에서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건강 문제가 있으면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 문제 앞에서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 곧 의로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는 다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마음에 담고 스스로 걱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 따위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생각을 내팽개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자기의 죄악 된 모습을 지속하는 동안 자기 잘못을 옳다고 하고 하나님의 옳음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두 가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대부분은 마음에 즉각적으로 문제가 들어옵니다. 그럴 때 ‘이래서는 안 된다. 나의 과제는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 문제가 생긴 이 상태에서 노아처럼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 건강 문제가 걱정되고 근심되고 해결하고 싶은 마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내가 예수님과 죽었다면 돈을 벌어 만족하겠는가? 건강하고 장수해서 마음을 채우겠는가? 자녀의 형통을 보고 마음을 채우겠는가? 쇼핑을 많이 해서 마음을 채우겠는가? 아니다. 내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다. 아버지!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대면하게 하시고, 오직 아버지만으로 내 마음이 가득 차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울 뿐만 아니라 완전하기까지 하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방주를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 범람하는 죄악과 부패와 포악함에 휩쓸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 같은 존재는 죽어야 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의로움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채워져야 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당면한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마음은 채워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으로 마음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여 소망하고 간구하여 기도할 때 완전함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의로움과 완전함이 발생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돈 문제, 건강 문제, 가족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 지금 당장 내가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은 생각을 넣어주시고, 지혜를 넣어주시고,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대로 방주에는 방향키가 없기에 물결이 넘실거리는 대로 떠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방주의 모양을 보면 높이가 13.6m입니다. 대략 아파트 6층 높이 정도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 층으로 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한 규빗이면 45.6cm입니다. 천장 바로 45.6cm 아래에 창문을 내고 안에서 밖으로 열 수 있는 창문을 내게 하셨습니다. 방주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시선은 항상 하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 안에서 하늘을 보는 동안에 방주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방향을 정하고 떠다녔던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 따위는 우리가 염두에 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늘만 바라보며 의로움과 완전함을 유지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려면 마음이 세상을 끌어안거나 세상을 보고 있는 상태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마음에 돈 문제를 가득 안고 근심하면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서 하늘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돈 문제를 보고 있는 것이지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보고 있으면서 돈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려면 마음 자체가 돈이 아닌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완전함입니다.

눈에 보이는 좋음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 대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의로움을 얻었다면 의로움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완전함이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기독교 종교의 문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믿고 의로움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까지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완전함이 뒤따르지 않기에 결국 다시 죄로 돌아갑니다. 죄란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 외의 이 세상 것들로 채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 싶어 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죄 사함을 받았다면 다시 세상 것으로 채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서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예수님을 믿어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자들이 다시 세상 것을 담고 살아가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의로움 뒤에 완전함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함이란 하나님만을 소망함입니다. 내 마음의 채움과 만족을 위해 이 세상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여러분의 입으로 선언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지만 무엇이 옳은지는 알 수 있습니다. 동서남북 교회에서 ‘돈이 내 마음을 채울 수 없다. 배우자가 내 마음을 채울 수 없다. 자녀가 내 마음을 채울 수 없다.’라고 내 말로 선언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면 죄 사함으로 인한 의로움은 아무 소용 없이 무효가 되고 맙니다.

동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것에 대해서 바라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됐으면 좋겠고, 저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상황이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일에 대해 감사가 나오지 않고 이래저래 불평이 나오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생각이 주어지는 동행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더는 바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의 생각은 툭툭 던져지기 시작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과 동행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쁘시게 여기시는 바를 우리에게 소원의 형태로 주시고 이루어 가십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의로움, 완전함, 동행이라는 삼박자 은혜는 십자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붙잡기만 하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서 해결하려고 했던 그 어떤 과제나 문제보다 제일 쉽습니다. 삼박자 은혜의 방주를 타시고 하나님 주권의 물결 위에서 넘실넘실 세상을 물놀이하듯이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노아의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함이 나의 방주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부패와 포악함으로 가득 찬 홍수의 세계 속에서 노아와 그 가족들이 방주 안에서 지켜졌듯이 우리도 지켜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 땅에 아버지의 뜻을 오늘도 홍수 나듯이 가득히 가득히 이루어 드리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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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푸초 | 작성시간 24.05.16 목사님 감사합니다. 예전 제가 청년에 예수님 처음믿고 한얼산에서 거듭난 이후 마장동 터미널에 도착 하기전 까지 창문밖 사람들을 보며 눈물만 흘리고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언 30년이 넘게 이곳 뉴질랜드에 와서 정착하고 예배당을 구역장으로 섬겨 오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갈증이 심해서 마음의 병에 시달리는 가운데 ..........
    다음 이야기는 목사님 이메일로 나누겠습니다. 이 시대의 목마른 영혼을 위해 바른 신앙의 메세지 계속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솔리데오 글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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