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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상록자원봉사단 영상반, 호국보훈의 달 맞아 다부동전적기념관 참배

작성자내일의 어제|작성시간26.06.06|조회수70 목록 댓글 4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영상반, 호국보훈의 달 맞아 다부동전적기념관 참배

-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 이른 아침 투표 마치고 호국영령의 넋 기려... 월남참전용사 동참해 숭고한 의미 더해 -

 

  대경상록자원봉사단(총단장 하종성) 영상반은 2026년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지난 6월 3일(수) 경북 칠곡군에 위치한 다부동전적기념관을 찾아 호국영령들을 참배하고 넋을 기리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날은 마침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이었으나, 참석한 회원들은 이른 아침에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 뒤 지체 없이 참배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나라 사랑과 국민의 의무를 동시에 실천하는 모범을 보였다.

 

주요 참석자 및 행사의 의미

  이번 참배 행사에는 영상반을 이끌어가는 주요 임원진과 함께, 특히 국가의 부름을 받고 헌신했던 월남참전용사 회원들이 직접 동참하여 호국보훈의 달이 가지는 숭고한 의미를 한층 더 깊게 만들었다.

구분성명비고
월남참전용사김성길 회원국가를 위한 헌신과 노고
월남참전용사정승진 회원국가를 위한 헌신과 노고
월남참전용사이태희 회원국가를 위한 헌신과 노고
봉사단 임원임영태 단장행사 인솔 및 참배 동참
봉사단 임원김성호 단장행사 인솔 및 참배 동참

  다부동 전투는 6·25 전쟁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낸 구국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월남참전용사인 김성길, 정승진, 이태희 회원과 임영태, 김성호 단장이 나란히 참배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다부동전적기념관 내외부를 숙연한 마음으로 둘러보며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겼다. 또한, 앞으로도 건강한 모습으로 지역 사회를 위한 다양한 봉사와 활발한 영상 기록 활동을 이어나가며 선한 영향력을 전파할 것을 다짐했다.

당시 유엔(UN)의 결의에 따라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수많은 국가가 병력과 의료진을 파견하였습니다.

 

1. 유엔(UN) 전투 병력 파병국 (16개국)

  직접 지상군, 해군, 공군 등의 군대를 파견하여 전투에 참여한 국가들입니다.

    북미 및 남미 (3개국): 미국, 캐나다, 콜롬비아

    유럽 (7개국): 영국, 튀르키예(터키),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4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아프리카 (2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2. 유엔(UN) 의료 지원국 (6개국)

  전투 병력 대신 야전 병원과 병원선 등을 통해 의료진을 파견하고 군인과 민간인 부상자를 치료한 국가들입니다.

  지원 국가: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독일

*참고: 독일(당시 서독)은 휴전 직후인 1954년에 병원을 설립해 구호 활동을 펼쳤으나, 2018년에 그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6.25 전쟁 의료지원국으로 추가 지정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병력이나 의료진을 파견하지는 못했으나, 식량, 의복, 의약품 등 필수적인 물자를 지원한 국가가 약 40여 개국에 달합니다.

 

3. 공산군 측 참전국

  반대편에서 북한을 지원하며 전쟁에 개입한 국가들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 1950년 10월부터 대규모의 '인민지원군'을 파병하여 지상전에 직접 개입했습니다.

  소련(당시 러시아): 공식적으로 지상군을 파견하지는 않았으나, 전쟁 발발 전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고 막대한 무기와 군사 고문단을 지원했습니다. 또한, 비밀리에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을 투입하여 공중전에 참여했습니다.(글:AI(제미나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전 대통령에 대해 주요 역사적 사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가장 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그 생애와 업적에 대해 명암이 뚜렷하게 교차하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주요 생애와 활동

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젊은 시절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 활동을 하며 개화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에서 수학하며 국제 정치를 공부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며, 주로 미국에서 외교적 노력을 통한 독립운동(외교독립론)에 주력했습니다.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5년 광복 후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이끌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습니다.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고, 여기서 간접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초대 제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3. 주요 정책 및 6.25 전쟁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여러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농지개혁 (1949년): 소작농에게 토지를 분배하여 지주 중심의 농업 사회를 근대적인 구조로 개편한 것은 경제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습니다.

  의무교육 도입: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의 문맹률을 크게 낮췄습니다.

  6.25 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6.25 전쟁 당시 국군을 통수하며 전쟁을 치렀고, 휴전을 반대하며 미국을 압박해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현재까지 이어지는 굳건한 한미 동맹과 안보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4. 장기 집권과 4.19 혁명

  하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헌법 개정을 강행하면서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짙은 오점을 남겼습니다.

  발췌 개헌(1952년)과 사사오입 개헌(1954년): 자신의 연임을 위해 억지로 헌법을 고쳤습니다.

  3.15 부정선거와 하야 (1960년): 장기 집권을 위한 유례없는 부정선거가 발단이 되어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국회와 국민의 요구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 26일 자진 하야(대통령직 사임)를 발표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으며, 1965년 그곳에서 서거했습니다.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트루먼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냉전 시대의 개막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이끌었으며, 무엇보다 6.25 전쟁 발발 직후 신속하게 미군과 유엔(UN)군의 참전을 결정하여 대한민국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주요 업적과 역사적 결정

1.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원자폭탄 투하 (1945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라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 트루먼 독트린과 냉전의 시작 (1947년)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적극 지원하겠다는 선언으로, 이후 미국의 핵심 외교 정책이자 냉전 체제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3. 6.25 전쟁 참전 결정 (1950년)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자유 세계에 대한 공산주의의 직접적인 도발'로 규정했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 즉각적으로 미군 지상군 투입을 지시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내어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맥아더 장군과의 해임 갈등

  6.25 전쟁 중 트루먼 대통령이 내린 가장 논쟁적인 결정 중 하나는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의 해임(1951년 4월)이었습니다.

갈등의 원인: 중공군이 개입하자 맥아더 장군은 중국 만주 지역에 대한 폭격과 원자폭탄 사용 등 확전을 주장했습니다. 반면,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거나 소련을 자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반도 내에서만 싸우는 '제한전'을 원했습니다.

해임 결정: 맥아더 장군이 대통령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선출된 민간 권력(대통령)이 군대를 통제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문민통제)에 따라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감수하면서도 국민적 영웅이었던 그를 전격 해임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

  한국전쟁을 함께 치르며 같은 반공주의 노선을 걸었지만, 두 지도자 사이에는 갈등도 적지 않았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굳건한 동맹이었으나, 휴전 협상이 시작되면서 마찰을 빚었습니다. 미국(트루먼 행정부)은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싶어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반대 및 북진 통일'을 강력히 주장하며 미국의 정책에 자주 맞섰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평가: 재임 중에는 맥아더 장군 해임과 한국전쟁의 장기화 등으로 인해 인기가 매우 낮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냉전 초기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결단력 있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서방 세계의 방어선을 구축한 훌륭한 대통령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글: AI(제미나이))

2023.7.5 지게부대원비 제막식에서(대경상록자원봉사단 영상반 회원.이남.김성호.김성길.백선엽장군 장녀 박남희여사.정승진.이태희)
2023.7.5 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식에서(대경상록자원봉사단 영상반. 이태희.김성호.김성길.정승진. 이남 회원)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래 최초로 4성 장군(대장)에 오른 백선엽 장군(1920~2020)

 

주요 공적: 6.25 전쟁과 다부동 전투

  백선엽 장군의 가장 큰 군사적 업적은 1950년 8월, 국군 제1사단장으로서 치렀던 다부동(현재 경북 칠곡군) 전투입니다.

대구 방어선 사수: 당시 북한군은 임시 수도였던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쳤습니다. 다부동이 뚫리면 대구와 부산까지 무너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전투 중 미군이 후퇴하고 국군마저 동요하자, 백 장군은 권총을 빼 들고 "우리가 밀리면 나라가 망한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라며 직접 돌격을 이끌어 전선을 유지한 일화로 유명합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고, 훗날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전후의 주요 활동

  전쟁 중과 그 이후에도 대한민국 국군의 뼈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952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953년,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대장(4성 장군)으로 진급했습니다.

  예편 후에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타이완,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했고, 교통부 장관 시절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습니다.(글:AI(제미나이))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영상반 참배 모습

다부동전적기념관 바라보면서
구국용사충혼비에서(김성길 월남참전용사.임영태 단장. 정승진 월남참전용사.김성호 단장.이태희 월남참전용사)
구국용사충혼비에서 기념 촬영
월남참전용사(정승진. 김성길. 이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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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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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가야돌 | 작성시간 26.06.08 호국의 달을 맞아 다부동 전적지를 다녀와서

    2026년 6월 3일, 전국동시지방선거일 아침. 저희 용사 일행 5명은 국민의 신성한 의무인 투표를 마치고, 경북 칠곡의 다부동전적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6월 보훈의 달과 현충일을 전후하여 참배객들이 붐비면 호국영령들 앞에 온전한 진심을 바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 노병들은 다소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오전 일찍 전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어느덧 76년이라는 모진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피로 물들었던 다부동의 능선들은 이제 울창한 수풀과 청명한 하늘 아래 평화로운 강산으로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러나 이 산하를 지키기 위해 산화해 간 젊은 넋들의 피맺힌 절규와 숨결은 여전히 귓가를 때리는 듯 생생하기만 했습니다. 우리 노병들은 진심어린 외침을 영령들 앞에 바쳤습니다.

    "이곳을 찾은 저희 용사들의 간절한 참배와 추모의 마음이 영령들의 곁에 닿기를 소망합니다.
    피로써 지켜낸 이 조국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도 이 나라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일행들이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종합하여 작품을 만드신 김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청암 | 작성시간 26.06.08 호국영영들에게 참배하신 여러분! 수고 했습니다. 대부분 그때 그 시절 월남전에 참전했던 용사 출신인것 같네요. 누구보다도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장의 모습과 음악을 들으면서 나의 젋은 시절도 강하게 느껴 오네요.
    1960년대 후반 월남 참전 용사들이 부산 제3부두에서 환송 환영행사를 매주 한두 차례 거창하게 이루어 졌던 것을, 현장에서나 전국 뉴를 통해 보도되어 당시 생활했던 분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참전용사 못지 않게 강한 추억의 감회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것은 3부두 행사를 위해 부산 주재 현역 병사를 동원해 열병식이아 월남 관계 군가를 크게 부르게 했던 일입니다.
    당시 환송.환영 인솔 및 관리장교로 임명되어 여러차례 참여헸던 기억입니다.
    위에서 배경음악으로 들려진 곡이나, 월남의 달밤 등은 아직도 기회가 되면 흥얼거리기도 합니다.
    8순에 가까운 님들이여, 잊지 않고 현장을 찾아나선 의지와 노력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늘 건강과 즐거움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가야돌 | 작성시간 26.06.08 청암님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맨 마지막 사진 베트남 참전자 사진 3명 중 중간에 계신 분은
    80대가 훨씬 넘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헤 등이 휘고 고개도 굽어 꾸부정 합니다.

    이 분이 얼마 전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해야하는 어려운 때가 있었는데
    청암님과 김성호 단장님이 앞장서셔서
    영상반 여러 명과 같이 문병한 덕분으로
    오늘 이처럼 일어섰습니다.

    부디 100세가 넘도록 장수하셔서 군에서 직장에서 피땀 흘렸던
    전설적인 실전을 전해주소서

    그리고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영상반들이 촬영한 자료들을
    여기 동우회 카페에도 많은 기록들을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행사를 동우회 카페에 올린 시간이 현충일 당일 이른 새벽 3시 40분이라고 하니
    김성호 교수님께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박순호(대봉, 중구 ,애기호) | 작성시간 26.06.15 저가 85년 말 대구시로 전입 오기전
    칠곡군청 재직시에 예산 부족으로 군청 직원들이 노력 부담한 추억의 장소이며
    지금은 많은 정비 보수가 되었지요.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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