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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옛날에 4 '핸디 꼬임 현상'

작성자공룡|작성시간20.09.19|조회수355 목록 댓글 16

옛날에 옛날에
군복무 시절이었습니다.
사나이로 대한민국에 태어나 기왕 한 번 가는 군대, 폼나게 갔다 오자 하는 마음으로 대학교 다닐 때 학군장교(R.O.T.C.)를 신청해 졸업 후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최후방에 배치되어 소위 때는 바닷가에서 회 떠 먹으며^^ 해안소초 소대장을 했고 중위 때는 사단신병교육대 교관을 했습니다.

해안 소초 근무는 3개월 단위로 중대 단위 근무교대를 했습니다.
최전방 지역의 경계근무와 같은 개념인데 3개월은 해안 소초로 투입되어 야간 경계근무를 하고 3개월은 내륙에 있는 예비대로 빠져나와 주간 교육 훈련을 하는 시스템이죠.
해안에서야 시간이 없지만 예비대로 나와 있는 3개월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휴식 기간이라 시간이 여유로웠습니다.
다른 소대장들이 퇴근 후 음주가무를 즐길 그 시기에 저는 뭘 했을까요.
네, 당연히 탁구를 치러 갔겠죠.^^

버스를 타고 조금 나가면 시내 탁구장에 갈 수 있었고 당직근무가 없는 날에는 거의 탁구장 죽돌이였습니다.ㅋ
자연스럽게 관장누님과도 친해졌고(혹시 상상하시는 그렇게 친한 거 아닙니다.ㅋ) 손님 뜸한 시간에는 둘이 연습파트너가 되어 공을 주고 받곤 했겠죠.
어느 정도 기간을 지속적으로 다니면서 관장누님과 연습하고 게임하다 보니 그 분의 게임 패턴이 자연스레 읽혀지더군요.
구력도 상당하고 스매쉬와 보스커트도 날카롭고 상당히 잘 치는 분이었습니다만 뜻밖에도 게임 패턴은 참 단순했습니다.
이런 코스로 이런 구질의 공이 가면 돌아오는 공은 늘 이랬습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 그 누님은 제 밥이 되었다는..
(표현이 좀 그래서 죄송합니다. 혹시 또 생각하시는 그런 내용 아닙니다.ㅋ)
둘이 치는 시간이 늘어날 수록 핸디도 늘어나서 처음엔 서너 개로 시작했던 핸디가 나중엔 15개까지 드리게 되었습니다.
당근 21점 한 게임일 때 얘기입니다.
관장누님의 게임 운영 습관을 알고 나니 회전과 타이밍만 조금 신경쓰면 거의 모든 공을 받아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도 일중호에 임파샬을 쓰던 시기였는데 제가 굳이 강하게 치지 않고 받아 넘기기만 해도 이미 파악한 단순한 게임 패턴 덕에 15개 핸디로도 제 승률이 높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 지역 고수 한 분이 오랜만에 구장에 찾아오셨습니다.
사실 제가 한 서너 점 이상 잡혀야 하는 실력의 고수였는데 관장누님과 먼저 게임하며 핸디 8개를 주시더군요.
박빙의 게임이 있은 후에 그분은 음료 한 잔 하고 쉬시고 제가 누님과 게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수분이 채점판을 만지며 누님께 묻습니다.

'핸디 줘?'

'아뇨, 제가 받아요.'

'아, 그래? 젊은 친구가 오목대(핌플러버^^) 잘 치나 보네. 몇 개? 세 개? 네 개?'

'아뇨.. 열 다섯 개..'

순간 얼음 된 그 분 표정.ㅋㅋ
내내 안 그러시다가 갑자기 공손히 제게 물어오시길

'선수세요?'

'아녜요, 관장님하고 자주 쳐서 그래요. 저 잘 못 쳐요.'

그렇게 15개 핸디를 주고 누님과 치른 게임에서 또 제가 이겼네요.ㅋ
그런 바로 다음에 그 고수분과 게임을 했습니다.
핸디 달라시는 걸 극구 손사래쳐 말려서 겨우 노핸디 게임을 하는데
이 분이 괜히 혼자 쫄아서ㅋ 실수연발.
저는 괜히 쉽게 이겼지요.
실력이 저보다 높은 분인 걸 저는 뻔히 알고 있는데도 저와 관장누님과의 높은 핸디 때문에 그 상관관계로 인해 과장된 추측이 작용하여^^ 저를 선수급 초고수로 오인한 데서 기인한 '괜히 몸 굳음 현상'이었나 봅니다.
중위 달고 신교대로 전출가기 전까지 저와 관장누님과 그 고수분과의 이상한 '핸디 꼬임 현상'은 계속되었습니다.^^
빠른 생일 때문에 친구 선후배 관계 꼬이는 거랑 비슷한가요.ㅋ

한 십여 년 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오픈 1부를 괜히 이긴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구장의 선출 관장님을 찾아 놀러온 손님이었는데 관장님과 이런 저런 얘기하다가 본인은 백핸드 잘 치는 셰이크와는 참 어렵다고, 특히 백을 걸지 않고 앞에서 바로 때리는(백핸드 펀치) 스타일에는 쥐약이라고 너스레를 떨더군요.
관장님이 옆에 앉아 있던 저를 가리키며

'우리 회원이신데 이 분이 딱 그래요. 백을 기가 막히게 때리시는데.. 한 게임 해보세요. 연습되고 좋죠.'

괜히 장난끼가 발동해 한 마디 덧붙이는 관장.

'나랑 맞쳐요.'

당시 그 관장님은 저를 7개 잡아주었습니다.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성사된 친선게임에서 저는 노핸디로 오픈 1부를 무참히 이겼습니다.
제가 백핸드 펀치를 칠 준비만 하면 상대가 바로 긴장해 굳어버리시니..ㅋ
더 재미있는 건 그 게임 후에 관장님이 아까 자기랑 맞친다는 건 뻥이었다고, 이 분 3부 쯤 치시니까 당신이 세 개 잡아주고 다시 해보라고 얘기한 후 한 번 더 하게 된 시합에서는 제가 핸디 세 개 받고도 무참하게 졌다는 사실입니다.ㅋㅋ

이런 경험들을 통해 얻은 생각.
실제 실력 외에 작용하는 정신적인 부분, 특히나 미리 갖는 선입견의 작용이 게임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분명히 있나 봅니다.
선수들 사이에도 비슷한 작용이 분명 있겠지만 그리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우리 아마츄어들 사이에서는 선입견이 꽤 크게 작용하는 것 같지 않은가요.^^

덧붙임: 저는 개인적으로 핸디 반대 입장입니다.
누구나 무핸디로 즐탁하는 게 제일 좋고
혹시 굳이 나누어야 한다면 비슷한 실력의 그룹을 지금 부수보다 훨씬 더 큰 덩어리로 4 개 정도로 나누어 운용하는 쪽이나 개인 레이팅을 적용하는 쪽을 지지합니다.

오늘도 옛날 일들 생각하며 재미있는
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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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재즈핑퐁 | 작성시간 20.09.19 잼나게 읽었습니다 심리상태가 정말 큰 영향을 미치는 종목인거 같아요
  • 답댓글 작성자공룡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9.20 재즈핑퐁님, 오랜만에 댓글로 만나네요.
    이 정신없는 펜데믹 세상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탁구가 워낙 가벼운 공을 다루는 운동이라 그만큼 예민해서 그런가 봅니다.
    참 심리적 영향을 많이 받죠.^^
  • 답댓글 작성자재즈핑퐁 | 작성시간 20.09.21 공룡 그래서 탁구가 어려운 운동인가 봅니다 ㅎㅎ
  • 작성자다같이 셰이크 (구/나홀로 펜홀더) | 작성시간 20.09.20 탁구 시작한지 10년이 지나서야, 탁구가 늘 다른 상대방과 겨루는 운동이라는 것을 깨달은 우둔한 일인입니다. 재미뿐만 아니라 아주 유익한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공룡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9.20 맞습니다.
    탁구 초보자들이나 시간이 많이 지나도 게임 실력이 썩 늘지 않는 분들은 대개 자신의 기술, 자신의 게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봅니다.
    탁구는 상대가 있는 운동인데 말이죠.
    내가 오늘은 레슨 때 배운, 그리고 영상에서 본 멋진 양핸드 드라이브를 시전해야지~ 하는 종류의 마인드로는 절대 그 내용이 나올 수 없죠.ㅎㅎ
    상대에게 맞추어 대응하는 게 가장 우선되는 중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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