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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탁구 - (6) 그림자 인간과 한국 사회

작성자Oscar|작성시간17.04.05|조회수388 목록 댓글 18

지킬 박사와 하이드" 라는 소설이 있지요?

소설에서는 과학자인 지킬 박사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을 분리해 내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다가 악을 없애는 약을 개발해 냅니다.

그리고 지킬 박사는 이 약을 자신이 직접 마십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악을 일삼는 한 범죄자가 이 도시에 출현하게 됩니다.

악을 분리해 내겠다고 했지만, 약을 마시고 분리된 악은 사라지지 않고 하이드라는 새로운 악한 인물로 재탄생한 것이지요.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으며 이성은 곧 이 세계를 이상적인 곳으로 만들어 갈 것이라고 믿었던 20세기 초반, 인간에게는 이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의 세계가 있음을 알린 심리학자가 있지요.

프로이트는 꿈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고 우리가 행하는 많은 행동들이 의식하지 못한 이성 저편의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무의식의 영역은 이성에 의해 억압되는 영역이며 인간을 일상적으로 악하게 만들지는 못 하겠죠.

어떤 특정한 순간, 예를 들면 트라우마가 있어 갑자기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우 같이, 어떤 특정 상황에서 인간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끈다던가, 혹은 우리가 무심코 하는 행동 들에서 무의식의 영역이 우리 행동에 관여하는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그것보다는 더 얕은 차원일지는 모르지만 무의식의 영역보다는 보다 더 의식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을 뜻하겠지요?


인간이 악을 행하게 되는 것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답변을 한 프로이트와 동시대 심리학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는 구스타프 융입니다.

융은 프로이트와는 조금 시각이 달랐어요.

프로이트의 제자이면서 스승과 다른 의견을 펼쳐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지요?


융이 던진 이론이 하나 있어요.

융은 사람이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 지나치게 착하게 살려고 하면 오히려 그 속에 악이 고인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이 의식적인 영역에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그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 인격이 형성된다고 해요.

이 그림자 인간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야기와 무척 닮아 있습니다.

하이드를 분리해서 없애 버리려고 하지 않았으면 지킬 박사는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살았을 거에요.

하지만 완벽한 선을 이루려고 한 순간 오히려 악이 맺혀서 하이드씨가 등장한 것이지요.


융의 그림자 인간에 대한 이론은 제가 설명한 단순한 문장보다는 보다 더 복잡한 개념입니다.

다만 본 글에 있어서는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고 인용해도 전체 문맥에서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


우리는 그림자 인간의 사례를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지나치게 착하게 살라고 간섭하고, 또 그 부모의 바램을 따르려고 애를 쓴 아이는 사춘기때 심한 반항을 하고 못된 짓을 하기 쉽습니다.

다이어트를 하려고 하루 종일 노력하다 보면 인내심이 고갈되지요. 그래서 한 입만 먹겠다고 했다가 폭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직자들은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모습만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런 성직자들이 죄를 지으면 깊이 타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들에게 그들이 할 수 없는 정도까지 착함을 요구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린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이 약해서 어른들이 평가하는 대로 자신을 받아 들이거든요.

어른들이 착하다고 하면 자기는 착하고 가치 있는 사람인 것 같고, 반대로 나쁘다고 하면 자신은 악하고 형편없는 사람 같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런 아이들에게 착하게 살으라고 자꾸 얘기하고 지켜 보고 있다고 하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계속 노력합니다.

그런 노력이 좋은 인격을 형성하면 모르겠는데, 결국 자신 안에 그림자 인간을 만드는 수가 많지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융이 부르는 리비도 라는 영역이 우리 안에는 존재하지요.

그런데 이 무의식의 세계는 개인적 경험이나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만, 사회 전체의 모습과도 상당한 관련성을 지닙니다.


융의 설명을 적용하면, 억압적인 기재가 많은 사회에서는 우리 안에 그림자 인간이 더 짙게 드리우게 되지요.

그래서 그것이 폭력과 연결되기 쉽습니다.


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예로 들면, 한 동안은 히틀러와 괴벨스의 선동 정치에 의해 선한 독일 국민이 악한 나찌가 되었다는 이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만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던 사례) 최근 들어서는 독일 국민들이 정말 통채로 악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 조직 속에서 악한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도 받아 들이지만, 2차 대전 직전의 독일 사회는 전 국민이 심각한 폭력성에 경도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일본과 독일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구요, 독일도 대단히 억압적인 사회입니다.


일본의 경우는 대표적으로 사무라이를 들 수 있지요.

사무라이는 칼을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을 베고 나서 던지는 말은 "베어 버려서 미안"이라는 정례화된 말 한 마디 뿐입니다.

이런 절대적 권한을 가진 사무라이에 의해 지배되던 일본 사회는 개인이 존재하기 어려운 억압적인 사회입니다.

지금도 일본 사회는 그런 일면을 완전히 걷어 내지 않았죠.


일본의 한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왜 일본 사회는 전쟁에 대해서 독일처럼 사과하지 않는가 하고 질문한 적이 있어요.

그분의 대답이 참 뜻밖이었습니다.

독일은 히틀러가 죽었지만, 일본은 전쟁 이후에도 천황이 살아 있었다고 대답했어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일본 사람들에게는 천황이 "절대"로 존재하고 있었고, "절대"인 천황을 두고 전쟁을 과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살육한 것보다도, 천황의 명예, 혹은 절대성을 더 높이 두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요.

지금도 일본 사회는 굉장히 억압적이지요.


독일 사회도 대단히 억압적입니다.

독일은 시스템을 중시하고 시스템에 대한 반기를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시스템은 곧 사회 전체를 유지하는 근간이고, 개인은 그 시스템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요.

시스템을 무너 뜨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프랑스와, 시스템 밖의 사회를 상상도 할 수 없는 독일은 서로 이해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독일에서는 제복 입은 사람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주고, 제복 앞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지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모르지요.


이런 두 나라에 비교하면 한국은 대단히 융통성이 큰 나라입니다.

무슨 일 터지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이지요.

이것이 대단히 부정적인 면이기도 하지만, 또 대단히 좋은 면이기도 하지요.

여러 나라를 오가다 보면 이것에 대해서 무작정 비판하는 의견이나, 혹은 그런 융통성 없는 사회들을 무작정 비판하는 의견들을 접하게 되는데, 저는 이런 한국의 일면에 대해서 대단히 이율배반적인 입장을 가지고 양면적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독일 사회가 전쟁에 돌입할 당시 독일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1360억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1차 대전의 패망 전쟁 배상금으로 물어야 하는 상태에서, 독일 경제는 한도 끝도 없는 인플레이션의 나락으로 빠져 버렸습니다.

지금 상황으로 말하면 수천억을 가지고 가야 감자 한개를 살 수 있다고 하면 우리 나라 국민들이 어떻게 변할까요?

그런 말도 안되는 혼란 속에서 히틀러가 등장하지요.

그리고 전쟁 배상금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독일 국민은 위대한 국민인데, 우리가 지금 고생하는 것은 유태인들 때문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그 돈으로 군비를 마련하지요.

그 모습 속에서 그런 억압 속에 쌓여 왔던 독일 국민들의 리비도는 결국 집단적인 폭력의 광기 속에 휩싸여 버립니다.



제가 지금까지 써 온 글들을 잘 따라와 주신 분들이라고 하면 이쯤에서 제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조금은 짐작하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국 사회는 대단히 억압적인 사회입니다.

어떤 한계가 주어지지 않는 "예"에 의한 사회, 동양 어느 나라보다도 오랜 세월 유교적 질서, 가부장적 질서를 중시해온 나라로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예"에 대한 강조가 사회 전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Yes, No가 아닌, 한도 끝도 없는 깊이를 지닌 예를 신경 써야 하지요.


교육 구조 또한 대단히 억압적입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등수가 정해지고 경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교육이 진행되면서 사교육 열풍은 유치원 때부터 어린 자녀들의 삶을 엄습하지요.


이런 억압적인 분위기는 모든 남자들이 거의 다 거치는 군대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옳든 그르든 따질 수 없는 계급 사회에서 남자들은 눈치 보는 법, 이유 없는 폭력과 억압에 굴복하는 법을 배우지요.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하지요?

현재 한국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SNS를 통해서 빈부의 격차는 고스란히 피부에 와 닿는 형태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과 타인을 비교합니다.

빈부차만 아니고 외모나 키, 직업, 학벌 등 모든 면에서 우리는 비교되는 프레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억압적인 한국 사회의 모습은 결국 우리 속에 있는 인내심의 창고를 고갈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분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다만 분노를 표출할 방법이 없고, 그것을 표출했을 때 나에게 손해가 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쩌면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현재의 한국 사회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분노를 세련되게 표현하는 법을 지난 몇 번의 촛불 집회를 통해서 경험해 왔습니다.

이것은 충분히 성숙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발전이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하이드씨를 완전히 지우는 것은 아니며 우리 안에 그림자 인간은 여전히 살아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분노는 집단화 되지 않고 개인적 차원에 머물러 있을 때 그래도 통제 가능하고 사회적 영향력으로 전환되지 않는 수준에서 관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노를 집단화 되도록 내버려 두면 그것은 폭력과 연결될 수 있지요.



저는 이런 그림자 인간의 모습들을 SNS에서 많이 접해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분노가 맺히지 않도록, 혹은 집단화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요?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이번 글은 완결짓지 않고 다음 글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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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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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붉은돼지 | 작성시간 17.04.05 저는 사람의 행위는 인지하거나 인지못하더라도 스스로의 목적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아들러에 빠져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나오니 또다른 재미가 있네요
  • 답댓글 작성자Osca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4.05 예~^^ 아들러는 잘 몰라요.
    좋은 책 있으면 알려 주세요.
  • 답댓글 작성자붉은돼지 | 작성시간 17.04.05 Oscar 작년에 한국을 강타한 '미움받을 용기' 그 뒤로 나온 '미움받을 용기2' , '사는게 용기다'
    이런 책들이 있는데요. ^^

    심리학 전문서적도 있지만, 그냥 대화식으로 기술한 책이라 재미나게 읽은 거 같습니다.
    아들러도 프로이트랑 같은 학회에 있다가 서로 맞지 않음을 알고 나왔죠.

    의외로 유아심리학에 많이 적용되고, '카네기 인간관계론'도 아들러 심리학에서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 답댓글 작성자Osca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4.05 붉은돼지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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