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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탁구의 미래상에 대해 - (5) 유럽의 귀족 문화

작성자TAK9.COM|작성시간16.04.26|조회수762 목록 댓글 10

독일의 탁구 문화에 대해서 적다가 유럽 역사 이야기로 잠시 샜어요.

그렇지만 제가 얘기하고 싶은 기조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시는데 지난 편 글이 도움이 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은 돌로 된 집을 짓고 여러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한 곳에 눌러 앉아 사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일 뿐만 아니고 대다수 유럽인들의 최근 삶의 형태가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형태의 삶이 그들의 마음 속에 보편적인 삶의 형태로 자리 잡았을까요?


유럽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키가 되는 것은 귀족 문화입니다.

귀족 문화는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동양의 귀족 문화와 다르기 때문이지요.


동양의 귀족 문화는 혈통적 귀족 문화의 측면도 있지만 중앙집권적인 왕권, 혹은 황제권에 근거합니다.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왕에 반항하는 것은 쉽게 생각하기 어려웠고 상하 지배 관계는 하늘이 내려준 지배 관계라고 이해되었지요.

그러므로 왕이나 황제라는 일점의 축을 향하여 집중하는 권력 구조 속에 귀족이 된다는 것은 왕의 신하가 된다는 것, 혹은 관직에 나아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가진 재산도 사유 재산의 성격보다는 왕에게 하사 받은 봉토의 성격이 강했지요.

우리 나라의 경우 왕의 직속 명령을 받는 암행 어사가 전국을 돌아 다니면서 탐관 오리를 관리했다는 것은 곧 지방 영주라는 것이 부재하고 왕의 권력 하에 복속되어 누리는 권력의 형태가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유럽의 문화는 영주의 자율권이 훨씬 더 높습니다.

중세는 종교 권력과 왕의 권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이루어 집니다만, 유럽 전역의 통치 형태는 기독교라는 정신적 유대 관계가 하나의 컨센서스로 존재하는 가운데 각 지방의 영주들은 독립적인 권력을 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형태도 굉장히 느슨하지요. 교황권 아래 전 유럽이 하나의 정신적 유대감 속에 유지되었기 때문에 중앙 집권적인 왕의 출현이 꼭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각 지방의 영주들은 자기 나름의 영토를 가지고 독자적인 통치를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유럽의 동화들은 성의 성주가 왕으로 불리우고 이웃 나라의 왕자들이 계모에게 구박받는 공주와 결혼하여 공주를 계모의 손에서 구해내는 백설공주식의 테마들이 자주 다뤄 지는데요, 이런 동화 속에서 왕은 일정 지역을 다스리는 성의 영주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성의 영주라는 사람들이 누리는 권력이 어마무시하지요.

땅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노들(농노라고 불리우는 만큼 그들의 삶은 노예적이었습니다.)에게 수많은 세금을 거둬갈 권력을 지녔습니다.

그들은 높은 마차를 타고 영지를 돌아 다니면서 거들먹 거렸지요.





(뮌헨의 님펜부르크 성 안에 있는 영주의 마차입니다. 대략 16~17세기 정도에 사용했던 마차들이 이 방에 전시되어 있지요.)


이처럼 화려한 마차를 타고 영지를 돌 때 귀족들 앞에서 일반 백성들은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성은 너무 화려해서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감히 바라보기에도 황홀했을 것입니다.


유럽의 성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요, 그 하나는 왕궁의 형태를 가지고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전투 요새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럽의 귀족들은 100~200여개의 방을 가진 대저택을 지어 놓고 끝이 안 보이는 넓은 정원에 가득 꽃을 채웠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 가져온 도자기에 음식을 담고 그 비싼 후추 가루로 범벅을 한 닭 요리를 먹었습니다.


(뮌헨의 님펜부르크 성입니다. 대표적인 귀족의 저택형 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안의 메인 홀 모습입니다.)


(성 안에는 귀족에게 고용되어 평생을 일해 온 도자기 공이 만들어 놓은 예술품 같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도자기는 유약을 발라 구웠기 때문에 수백년이 지나도 만든 당시의 색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백년이 지난 그림들은 안료의 색이 바래 지금 보면 화려했던 옛 모습을 그대로 볼 수가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지요. 도자기 속의 그림들을 보면서 그 당시 미술품들의 색이 얼마나 화려했을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집을 꾸미기 위해 유명한 화가나 조각가를 평생 고용하기도 했고 유명한 음악가들을 고용해서 밥 먹을 때마다 연주를 하게 했지요. 즉 유럽의 유명한 도자기공들은 귀족의 밥 그릇을 만드는데 평생을 바쳤고, 유럽의 유명한 화가들은 귀족의 집을 장식하고 귀족의 테이블을 조각하는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외적과의 전쟁을 위해서 높은 산에 성을 짓기도 했는데, 그 성은 피신용이기도 했지만 세간의 평판을 피하기 위해 숨는 은둔용이기도 했고, 때로는 자기 연인을 위해 화려하게 치장한 선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독일의 퓌센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성)


이런 귀족들의 삶은 일반 백성들의 마음 속에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것이었겠지요.

귀족들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를 우리가 지금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1789년에 발발한 것을 보면 일반 백성들이 귀족에 대해서 마치 신이 내린 특별한 인종 정도로 생각하고 아예 범접할 생각을 하지 못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민주화를 얘기할 때 영국의 권리 장전과 명예 혁명 등의 사례가 등장하면서 17세기로 민주화의 시기를 끌어 올려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사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는 귀족의 막대한 권력에 대해 동경하기만 했지 귀족에 대해 평민이 맞설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 했습니다. 오히려 우리 나라의 경우 고려 시대 때 망이 망소이의 난이 있었던 것을 보면 한국의 봉건 사회가 더 앞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176년에 발발한 망이 망소이의 난 때 슬로건은 왕후장상에 씨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아무튼 유럽의 귀족 문화는 한국에서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런 화려함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파티 문화입니다.


유럽의 귀족들은 전 유럽을 대상으로 귀족들만의 좁은 혍통적 관계를 기반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이루었는데요, 이들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하면서 전 유럽을 대상으로 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족 가문끼리 결혼 하기도 하고 또 이혼하거나 전쟁을 하기도 하면서 유럽 역사를 쥐고 흔들었지요.


이런 귀족들의 문화가 점차 봉건 사회를 지나고 근대화 되면서 조금 더 넓은 계층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는데요, 그것은 산업 혁명과 함께 등장한 브루조아 계층의 영향이었습니다. 즉 혈통적 개념의 귀족 층에도 공장을 소유하여 부를 거머쥐게 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도박과 전쟁 등으로 재산을 날리고 빈털털이가 되는 귀족들도 등장하면서 기존의 귀족 개념에서 조금 더 인원 규모가 커진 새로운 귀족층을 기반으로 한 사교계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사교계는 귀족들이나 혹은 귀족에 속하고 싶은 신흥 부르조아 계층이 형성한 것으로, 과거 귀족층 만의 폐쇄적인 최상류층 문화를 흉내낸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농부들처럼 바쁘게 할 일이 없으므로 각 집마다 돌아 가면서 여는 파티를 중심으로 서로 서로를 알게 되고 파티에서 맺은 인연으로 집으로 초대하여 차를 마시고 잡담을 나누는 것으로 자기들만의 자칭 고고한 사교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교계는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집을 방문하여 안주인의 품격 높은 치장 문화를 감상하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지요. 이 그림은 어느 시대 것인데 언제 어떻게 구입했다느니 하는 재산 자랑 겸 안목 자랑, 꽃이 화려하고 예쁘다느니 하는 집안 치장 자랑 등에서 시작하여 대화의 실마리가 이루어지지요.


이런 사교계의 문화가 사실은 유럽의 탁구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탁구 문화로 넘어 가기 전에요, 사교 문화의 중심이 집을 축으로 한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러므로 유럽인들에게 집이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좋은 집을 가지면 높은 수준의 인맥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집이 초라하면 노는 물도 초라해 집니다.

그러므로 집이란 자신의 사교계의 수위를 결정하는데 매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따라서 집은 곧 재산적인 가치 외에 자신의 인맥의 수준을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고, 집안의 명예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대대로 집을 가꾸어 가면서 재산을 불려 가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요.


티바와 스티가를 만나면서 자주 그런 면을 느껴요. 처음 만나면서 하는 얘기가 처음에 어떤 정도 규모의 집으로 시작했는데, 몇 년도에 사무실을 늘리고 몇 년도에 창고를 늘리고 하는 얘기를 장황하게 얘기합니다.

사실 티바와 스티가는 거리 상으로도 상당히 떨어져 있잖아요? 그런데 집에 대한 애착, 혹은 그것의 규모로 자신의 회사를 봐 달라는 태도 같은 것은 매우 유사합니다.


이런 형태의 태도는 동양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요. 우리는 회사의 규모를 파악하는데 건물의 크기를 기준으로 삼지는 않지요? 대부분 직원이 몇 명이냐 라는 것을 묻지요. 그런데 유럽의 회사들은 회사를 소개할 때 건물의 크기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아요.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귀족 문화, 그리고 사교계의 영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유럽 사람들은 친구를 사귀어도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집을 가꾸었기 때문에 또 손님을 집으로 데려 와야 집을 구경시킬 기회가 있지요. 그리고 과거의 풍습인 파티도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 동양 사람들이 그런 파티에 초대 받기도 어렵지만, 사실 그런 파티가 저희들에게 맞지도 않아요.


우선 파티라고 하는 곳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초대되는 곳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 외에 아주중요한 임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온 낯선 사람들을 서로 서로 엮어 주어 같이 얘기하도록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 소개하는 일을 잘 해야 그날의 파티가 성공적이 됩니다. 낯선 사람들은 주인을 축으로 하여 한 곳에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인은 낯선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같이 만나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간단하게 서로에 대해 얘기해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낯선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게 되면 적당한 수준에서 서로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가벼운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 그 낯선 사람은 자기가 아는 또 다른 사람을 불러 다시 소개 시켜 주기도 합니다.


이제 이해 되시지요? 왜 우리가 영어를 처음 배울 때  This is Mr. Baker 하는 식으로 사람 소개하는 것을 먼저 배우는지 말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대화에 있어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서로 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의 바르게 대화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정형화된 문화로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파티 문화를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굳이 그런 파티 문화가 부럽지도 않을 뿐더러 한국에 잘 맞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서로 견주는 경쟁 의식이 있지요. 그래서 남의 집에 가서도 그 집이 너무 좋으면 괜히 주눅이 들고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또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대화 하는 것도 조금 어렵습니다. 존대말이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나이나 직급 등으로 관계를 설정하기 때문이지요. 서로 높낮이를 정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얘기하는 것은 왠지 불편합니다. 친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구요...


그래서 한국의 인간 관계는 선후배 관계로 얽힙니다. 유럽처럼 평등한 입장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는 형태 보다는, 알게 되면 형 동생, 모르면 서로 인사도 하지 않는 그런 관계가 일반적입니다. 사실 서로 알면 급속히 가까와 져야 편해지는 것이 한국의 문화이기 때문에 낯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낯설게 대합니다. 유럽처럼 엘리베이터에 모르는 사람이 탔을 경우 미소 짓고 인사하는 문화가 한국에서는 좀 어렵지요. 서로 인사하고 알게 되면 통성명 하고 형님 동생 정하는 것이 우리 문화이니까요...


여기까지 읽으시니까 유럽의 탁구 문화와 한국의 탁구 문화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 조금 짐작이 가시나요?


글 여기서 자르고 다음 편에서 또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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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TAK9.COM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4.26 중국과 한국, 일본의 문화 차이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얘기들이 생각나네요.
    본 글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 발견되면, 그 내용도 추가할께요. 요즘에는 댓글들 통해서 제 글이 더 풍성해 지는 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탁구왕김제빵 | 작성시간 16.04.26 삼국의 비교 또한 흥미롭겠죠. 중국과 일본은 사실 유럽의 봉건 영주와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아요.
    특히, 일제시대만 해도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는 과정만 보더라도 본국(일본)과 많은 갈등을 낳았죠. 반면 우리 조선은 철저한 중앙집권제였고요.^^
  • 답댓글 작성자TAK9.COM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4.26 예...~^^ 생각해 봐야겠네요.
  • 답댓글 작성자슈미아빠 jw | 작성시간 16.04.26 무신들이 하극상을 해서 문벌들을 처리하고 노비신분인 이의방이 권력을 잡는것을보니 용기가 생겼겠지만......
    진나라때 말을 알고 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지는 알수 없겠죠.. 이미 죽었으니까요^^;
  • 답댓글 작성자TAK9.COM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4.26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시각과 견해,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죠. ~^^
    그래도 왕후장상에 씨가 없다는 말은 엄청난 것입니다.
    서구 역사에서는 18세기 이전에 그런 류의 사건이 거의 없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스파르타쿠스의 혁명이 위대한 것이기도 한데, 그것이 그런 혁명의 정신을(사람 가운데 높낮이가 없다는)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폭압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도 그 사건에 큰 의미를 두고 스파타쿠스 블레이드를 만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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