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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침 먹다가 뜬금없이 생각나더군요.

작성자TAK9.COM|작성시간16.01.06|조회수1,355 목록 댓글 27
저희 집 아침 식사 시간은 불규칙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들어오는 시간이 불규칙 하다 보니 저희 아이들이 아빠 기다린다고 늦게까지 안 자는 날은 아침이 늦어지기 마련이구요... 어떤 날은 여러가지 일 걱정 때문에 갑자기 새벽에 정신이 말똥말똥 해 져 버리는 날도 곧잘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저 혼자 일어나서 주섬 주섬 채려입고 아침밥도 별 생각 없이 집을 나오는 경우도 있죠.
오늘은 아침상에 두 아이들과 같이 앉아 아내가 급하게 채려주는 밥을 대충 떠 먹고 있었습니다.
제 아이는 사진으로 보신 분들이 계시겠지만 첫째는 5살 예림이구요, 둘째는 3살 예지입니다.
둘째 예지는 참 떼쟁이입니다.
아빠 무릎에 앉아서 밥을 먹겠다고 버티다가 바쁜 아침 시간이라 제가 안 받아 주니 드러누워 바동 거리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참 그치지 않고 오래도록 울지요.

그런데 참 뜬금없이 옛 생각이 하나 나더군요.

예전에 제가 새카만 코흘리개였던 시절.... 저희 집에는 친척 누나가 한분 계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아마 6살 쯤 되었을 것 같구요... 그 누나 나이가 그때 한 9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집에 불이 나서 가족이 다 죽고 혼자 남은 고아 처지였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잠결에 까묵 까묵 졸다가 문득 문득 들리는 얘기가 주변에 거둬 줄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우선 우리가 데리고 있자 하시는 부모님들 말씀이 들리더라구요.

그래서 그 누나가 저희 집에 한 1년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몇달 이었는지... 몇 일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생각에 한 1년은 안 되고 그래도 6개월은 넘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촌수로 따져도 계산 안 나오는 아주 먼 친척이었던 듯 합니다.

그 당시 저희 아버지는 교사로 재직하고 계셨고 한 해가 멀다 하고 옮겨 다니는 전셋방 시절이었으니 한 식구 더 거둔다는 것이 부모님에게는 참 쉽지 않은 노릇이었을 듯 합니다.
그렇지만 워낙 딱한 처지에 놓인지라 저희 부모님께서 나서신 듯 해요.

저와는 세살 터울이니 매일 장난치며 지냈죠. 그때 아마 학교를 다닐 나이였을 텐데 학교도 안 다녔던 듯 합니다.
기억이 많이 나지는 않아요. 지금도 그 누님 성함도 모르고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후 부모님에게도 한번 여쭤본 적이 없어서... 까마득히 제 기억에서 지워지다시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 그 생각이 나는지....

그 누나는 생면부지 알지도 못하는 집에 와서 지내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참 힘들었을텐데... 어두운 표정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매일 같이 놀면서 깔깔대고 웃었던 얼굴이 기억 나네요.

그런데 가슴 아픈 기억이 딱 2가지 있어요.

하루는 그 누나가 밥 그릇에 밥을 담아서 저와 제 동생에게 쥐어 주고 길 거리에 나와 같이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저희 어머니께서 무척 화가 많이 나셨어요.
무슨 동네 거지도 아니고 밥그릇을 들고 나와 길거리에서 먹는다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나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어려운 살림살이에 숟가락, 밥그릇, 밥상만 들고 달랑 분가하여 셋방 살이를 전전긍긍하는 와중에 저희 어머니께서는 심적으로 매우 지쳐 있었던 듯 합니다.
시집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팔바지로 서울 명동 거리를 쓸고 다니셨다고 하는데 시골 촌 구석에 시집와서 3년 시집 살이 호되게 치르시고 그나마 셋방 살이일지언정 분가하여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아야 할 시기에 덜커덕 한 식구가 더 늘어 셋이서 집안을 어지럽히니 마음이 좋지는 않으셨겠죠.
어머니는 그 누나에게 불호령을 하셨습니다. 아마 매질도 했을런지도....

어머니는 양반 가문을 들먹이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엄청난 예절 교육을 받으셨던 분이시라 도저히 그런 일은 견디질 못하기도 하신 듯 합니다.
왜 우리 애들까지 거지꼴을 만드느냐... 그러셨던 것 같아요.

우리는 같이 재미있게 놀았던 것 뿐인데 어머니께서 화를 내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누나 혼자서만 혼나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혼나도 같이 혼나야 하는 것 아닌가 싶구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우리는 혼나지 않고 누나만 혼나는 것이 저윽이 안심이 되었죠.
그래도 그날 기억이 나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는 않았던 듯 합니다.

그 날은 그렇다고 치구요....

그 이후 얼마쯤 지났을까요?
하루는 제 동생이 돼지저금통을 흔들며 누나와 저에게 왔습니다.
동전을 꺼내 보고 싶다는 거죠.
동생 나이가 5살이니 동전을 꺼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 보다도 그냥 동전을 넣다 뺐다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동전 욕심 보다는 달각달각 거리는 것 꺼내 보고 싶었죠.
제가 안 되니 누나가 달려들었습니다.
쇠젓가락으로 안을 쑤시며 동전을 꺼내려고 애를 썼죠.
그 누나도 돈 때문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냥 동생이 동전을 꺼내고 싶어하니까.. 도와 주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신 어머니께서 그 광경을 보셨습니다.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누나가 도둑질을 하려는 것으로 오해를 하셨습니다.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서 같이 사먹자고 저희를 유혹한 것 정도로 보셨겠죠.

그날 누나는 참 많이 혼났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어야 했지만 어머니의 기세에 눌려서 저희 둘은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누나는 오래도록 손 들고 서 있어야 했구요...

그 이후로 얼마 지나니 않아서 누나는 다른 집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 일 때문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모르지만 어린 마음에 저는 그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참 묘하죠.
제가 나서서 변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누나는 억울한 일을 당했고...
결국은 모든 일이 제 잘못이라고 생각은 했던 것 같은데.... 저는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십수년이 지난 오늘까지 제 머리속에서는 그 누나에 대한 기억이 없었네요.
언뜻 기억의 편린이 스쳐 지나갈 법도 한데... 그닥 신경쓰지 않아서였을까요? 아무 계기가 없어서였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 머리가 부끄러운 기억이니 지워야 겠다 싶었는지 다 지워 버린 듯 합니다.
아예 잊었으면 좋으련만... 갑자기 오늘 아침에 둘째가 떼쓰며 우는 모습을 보다가 그 기억이 고스란히 생각나고 말았네요.

왜 그때 누나가 도둑질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고 한 마디도 못 했을까요?
그렇게 즐겁게 지내던 누나가 그냥 아무 말 없이 집을 떠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요?

지금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계신지도 모르고..
얼굴도 이름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너무 가슴 아프고.. 죄송하고...

오늘 마지못해 내린다 싶을 정도로 애를 먹이던 첫눈이 내렸습니다.
좋은 기억만 살포시 간직하고 살면 좋으련만...
첫눈 오는 날은 항상 기분이 좀 그렇네요.
불현듯 생각난 이 기억이..
어쩌면 깨작 거리다 만듯 물러간 첫 눈 속에...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너무 미안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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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고슴도치 탁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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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종쓰맘 | 작성시간 16.01.07 아침 출근길에 눈물이 났네요 잘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 작성자마징가72 | 작성시간 16.01.07 어떤글 보다도 더 집중해서 읽게되는 글이네요~ 이곳 에선 보기 드문 글이네요^^ 쌀쌀함이 옷깃을 여미게하는 날씨에 왠지 가슴한켠에 묻어두었던 옛이야기가 아침 커피를 더 쓰게 만듭니다^^ 잘 봤습니다 잔잔하게....
  • 작성자파주지니 | 작성시간 16.01.07 마음이 뭉클해집니다ㅠㅠ
    혼나는 것이 두려워 사실대로 말씀하지 못한 것이 오래도록 기억의 한편에 남아 있나봅니다.
    저도 어른들이 일의 전말을 다 듣지 않으시고 눈에 보신 것만 가지고 야단을 치거나 매를 들었던 경험이 있다보니 아이들을 키우면서 반드시 그 일에 관계된 아이들 모두의 얘기를 듣고나서 혼을 내거나 매를 드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또 사실과 다른 질책이 있을 때는 불이익(화나 매)을 감수하고 자초지종을 반드시 얘기해서 매를 벌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덕분에 저도 옛 추억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그 누님께서 어느 곳에 사시던 억울한 일 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 작성자박야탁 | 작성시간 16.01.07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 작성자씽씽카 | 작성시간 16.01.07 어린시절엔 참 잘못한것도 많고 실수도 많지요 미성숙한 기간이니까요 지금은 추억을 회상하는 성숙한 어른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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