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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라 하는 이유(산명 유래)는 《밀양 사람들의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작성자도재국|작성시간20.12.11|조회수853 목록 댓글 11

★1569.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라 하는 이유(산명 유래)는 《밀양 사람들의 생명을 담고(載命)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재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크게 세 지역으로 흘러 내려 마지막에는 울산 땅에 단 한 방울도 흘러가지 않고 모조리 칠십여 리(70여 리)를 흘러 밀양강에 합류하여 또 삼십여 리(30여 리)를 흘러 모두 합쳐 밀양 땅의 일백여 리(100여 리)를 적시면서 낙동강으로 들어갑니다

즉, 《1》재악산의 북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전부 밀양시 산내면 얼음골을 지나 국가하천인 동천(東川)으로 흘러 사십여 리(40여 리)를 지나 경주산(競珠山, 금곡교 부근) 북쪽에서 국가하천 단장천(丹場川)에 합류하고

《2》재악산 남쪽과 서쪽에서 흘러 내린 물은 전부 표충사와 구천리 삼거마을을 지나서 구천(九川)이 되어 이십여 리(20여 리)를 흘러 단장면 범도리에서 밀양댐에서 흘러온 국가하천인 단장천에 합류되고

《3》재악산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전부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를 십여 리(10여 리)를 흘러 또 양산시 원동면 선리를 십여 리(10여 리)를 흘러(배내천=梨川) 밀양댐 물 머리에서 전부 밀양댐에 모여들어 국가하천 단장천이 됩니다

이 단장천은 칠십여 리(70여 리)를 흘러 밀양시 용평동과 활성동의 경계인 월연정 부근에서 또 국가하천인 밀양강(凝川)에 합류되어 영남루 앞을 지나 삼십여 리(30여 리)를 흘러 모두 합해서 일백여 리(100여 리)를 흘러 민족의 강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큰 국가하천인 낙동강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재악산에서 일백여 리(100여 리)의 밀양 땅을 적셔 부지기천의 수많은 밀양 사람에게 문전옥답을 만들어 주고 생명수로서 온갖 것을 제공해 주는 재악산 물에 밀양 사람의 모든 것이 매여(달려) 있다 라는, 뜻의 재명(載命) 즉, 재악(載嶽=載岳), 재악산(載嶽山=載岳山)입니다

밀양 땅이 생기고 난 후 억만 년 동안 또 앞으로도 억만 년 동안 밀양 사람들의 목숨과 삶을 지켜주는 재악산 산명을 되찾고 지켜야 합니다

이제 밀양시민의 대표인 밀양시의회와 밀양시는 주저하지 마시고 재악산 산명 복원에 하루빨리 나서야 합니다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밀양시와 밀양시의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에 왜 침묵을 지키는지 매우 궁금해 합니다.

또 밀양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는 듯한 인상에 매우 궁금해 합니다.

또 그분들은 밀양의 당연한 권리인 재악산 원래의 이름 찾기에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응원을 보내드릴 때 행동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밀양시와 밀양시의회, 표충사, 시민단체》는

1. 재악산(載嶽山=載岳山) 깃발을 하나 만들어 선두 차에 세우시고, 시장님과 시의회의장님, 표충사 주지 스님, 시민단체 대표자님께서 같이 승차하셔서 국토지리정보원에 가셔서 국토지리정보원장님을 만나 아래의 수많은 재악산 증거를 보여드리고 설명을 하십시오

2. 표충사 산문(2개)과 일주문(1개)에 걸린 재악산 등이 표시된 현판 3개를 사진찍어 "대형 액자"로 만들어 차에 싣고 가십시오

3. 표충사에 있는 재악산 산명이 새겨진 국가보물 제1944호인 개수탑기비(載岳山 靈井寺 三層石塔 改修碑)를 차에 싣고 가십시오.

●●●3-1. 도재국과 손흥수가
(A) 1995년 6월 중순부터 2002.4.5까지 7년 가까이 행방불명된 재악산 영정사 삼층석탑 개수비(載岳山 靈井寺 三層石塔 改修碑, 일명 개수탑기비)를 찾아 표충사 일대를 헤매었고,

(B) 무이거부 스님께서 2002.4.5 땅 속에서 개수탑기비를 발견한 후부터 2017.10.31까지 무려 15년 동안 도재국과 손흥수는 또 개수탑기비를 국가보물로 지정해야 한다고 인터넷과 만나는 사람마다 알렸습니다

(C) 이러한 무이거부 스님의 개수탑기비 발견과 도재국과 손흥수의 22년 간의 노력의 바탕으로

(D) 2015년에 표충사가 조계종 총무원을 통해 문화재청에 국가보물 지정 신청을 하여

(E) 2017.10.31에 개수탑기비를 국가보물 제1944호로 지정했습니다.

(F) 지난 1995.6.2 개수탑기비가 표충사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후에 표충사 주지 스님이 개수탑기비를 땅속에 숨긴 후로 부터 도재국과 손흥수는 끊임없이 이 비를 찾아야 한다고 온 천지에 여론 조성을 했고, 또 땅 속에서 발견된 후로도 사흘이 멀다하고 철저한 보존과 봉안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고, 또 보물지정의 여론을 환기시켰습니다.
도재국과 손흥수의 이런 노력이 없었디면 개수탑기비는 보물 지정은 커녕 아마도 영원히 사라졌을 른지도 모릅니다.

(G) 분명하게 말하지만 1995.6.2 표충사 삼층석탑에서 개수탑기비가 춭토되자 문화재관리국에서 근무하던 우리나라의 석탑문화재의 최고 권위자인 강우방 문화재실장님이 표충사 현장에 파견되어 첫 마디가 《이 명문석은 우리나라의 사찰 석탑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국보급 유물이다》 라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 이 명문석은 다름 아닌 《재악산 영정사 삼층석탑 개수비, 일명 개수탑기비》입니다

(H) 그 때 표충사 삼층석탑 현장에는 밀양시청 문화재 담당직원과, 경남도청의 문화재 담당직원 등 10명 이상이 참석을 했으며 그 직원들 7명의 명단을 저가 가지고 있습니다

(I) 이렇게 많은 공무원들이 현장에 있었는데 개수탑기비가 1995.6.2 발견 직후 행방불명된데 대해서 밀양시와 경남도가 무려 7년 가까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J) 이런 어려운 과정 속에 도재국과 손흥수는 《개수탑기비》를 찾아내도록 여론 조성을 하여 찾아내도록 했고, 또 보존.봉안토록 여론 조성을 했고, 기어이 국가보물 제1944호로 지정토록 여론조성을 하는 큰 공을 세웠음을 스스로 당당하게 말씀을 드리며, 우리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스러운 발자취를 표충사의 역사의 한 장으로 남기려는 것입니다

4. 표충사에 있는 재악산 산명이 새겨진 경자갑보월비(庚子甲補月碑)를 차에 싣고 가십시오

5. 영정사(표충사)에서 개판(開板)한 재악산이 기록된 불교경전인 묘법연화경(法華經)을 차에 싣고 가십시오

6. 영정사(표충사)에서 개판(開板)한 재악산이 기록된 불교경전인 원각경(圓覺經)을 차에 싣고 가십시오

7. 영정사(표충사)에서 개간(開刊)한 재악산이 기록된 동계집(東溪集)의 "밀양 재악산 영정사 전후 창건기(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와 재악산기(載岳山記)"와 "간행기(刊行記)"와 "태허당 행적기(太虛堂 行蹟記)"를 차에 싣고 가십시오

8. 재악사(載岳寺)가 기록된 장경(藏經=해인사 팔만대장경) 배부 관련 서류"를 가지고 가십시오

9. 재악사(載岳社)가 기록된 "산립(山立)의 인각사(麟角寺)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스님 관련 비(碑) 음기(陰記) 책"도 차에 싣고 가십시오

10. 저희들이 35년째 찾아 밀양광장에 올려놓은 재악산이 기록된 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梵宇考)와 대동여지도와 밀양의 향토지리지인 밀주구지(密州舊誌)와 밀주지(密州誌), 밀양군지(密陽郡誌), 밀양지(密陽誌) 등등 수십 가지의 증거를 차에 실어 국토지리정보원에 가셔서
이렇게 많은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까 천황산을 없애고 재악산으로 복원시켜 달라 하십시오.

11. 이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산명의 변경"이 아니고 "산명의 복원"입니다. 원래(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산명을 말살하고 천황산으로 조작했기 때문입니다.

12. 이런 일은 지자체와 국가가 할 일인데 안하니까 저희들이 수많은 사비와 피땀을 흘려 35년간 찾아낸 증거들입니다

13. 국토지리정보원의 지각이 있는 국가공무원들이라면

14. 국가지명위원회의 지각 있는 위원님들이라면
단 한 마디도 거부, 반대를 못할 것입니다

15. 경상남도지사님도 밀양시와 같이 국토지리정보원에 재악산 산명 복원을 추진해야 합니다

16. 일반적으로 지자체(기초와 광역)의 지명위원장은 지자체의 장이 맏습니다

17. 2015년에 천황산 지명 심의(회의) 때 울주군보다 울산광역시가 천황산을 더 옹호하며 활동했습니다

18. 그러나 2015년에 재악산 지명 심의(회의) 때 경상남도 지명위원장은 도지사가 아닌 행정부지사였고, 지명 심의(회의) 때는 무슨 사유가 있어 행정부지사 마저도 회의 주재를 못하고 담당 국장이 대신 심의(회의) 주재를 했습니다.
그때 경상남도지사님이 얼마나 이 업무에 관심을 가졌는지도 매우 궁금합니다.

19. 몇년 전에 고흥군과 여수시는 양쪽 지자체를 연결하는 《대교》의 명칭 문제로 국토지리정보원에 각각 여러 번 찾아가서 많은 좋은 로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팔영대교》로 확정되었습니다

20. 몇년 전에 남해군과 하동군은 양쪽 지자체를 연결하는 《대교》의 명칭 문제로 국토지리정보원에 각각 여러 번 찾아가서 많은 좋은 로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노량대교》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21. 밀양시도 위와 같은 수많은 재악산 증거를 국토지리정보원에 가져 가셔서 좋은 로비를 하십시오

22. 역사적 사실대로 미리 상세한 설명을 하는 것은 매우 좋은 로비입니다

23. ●●●《울산 측》은 이렇게 많은 "명백한 증거"를 "부정하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면 천황산이라고 입도 떼어서는 안됩니다

24. 울산 측은 "영남알프스 9봉" 완등자에게 메달을 수여하고 있는데, 내년에도 또 그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고 예고 하고 있습니다.
울산 측은 메달에 새긴 일제가 조작한 제1봉 천황산과 제2봉 재약산(載藥山) 산명을 지우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25. ●●●《밀양 표충사》는
수십 년 전에 일주문에 걸렸던 《天皇山 表忠寺》 현판과 숙충루에 걸렸던 《天皇 第一樓》라는 현판에 새겨진 天皇이 일제 天皇을 상징한다는 국민적 비난을 받아오다가 오래 전에 2개의 현판을 철거했습니다

26. ●●●●●《한국도로공사》에 하나 물어봅시다.

엊그저께(2020.12.11)에 《함양~울산간 고속도로》 중, 일부인 《밀양~울산 구간》이 개통되었습니다.

당신들의 사업으로 공사를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피땀에 의한 세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백마산(白馬山) 산 속 아래로 통과하는 터널의 명칭을 《재약산(載藥山)터널》로 했더군요

《백마산(白馬山)》을 통과하는데
왜 《재약산(載藥山)터널》로 했습니까?
똑바로 하면 《백마산(白馬山)터널》로 해야 되지 않습니까?

●●●아래는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에 위치한 백마산과 바드리 마을 바로 아래로 통과하는 고속도로 노선과 위성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산속의 각 자연마을과 박명복 의병장의 묘소와 결성현감의 묘소와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직접 확인하여 인공위성 사진을 연계해서 만든 것입니다.

★1250(1271). 백마산터널, 백마산, 백마산성, 임진왜란 의병장 박명복 의병장 묘소 그래픽
http://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2736?svc=cafeapp

한국도로공사는
밀양 땅에 고속도로 뚫어면서 《밀양 땅의 백마산》을 통과하는 터널 명칭을 즉각
《백마산터널》로 돌려놓으시오.
※백마산성(白馬山城)이 왜적에 의해 피로 물들었다해서 단지산성(丹地山城)이라고도 불렀으며 밀양시 단장면(丹場面)의 지명유래도 여기에서 생겨났습니다.

27. 작년에 터널 뚫을 때
저(도재국)가 터널 명칭을 載藥山터널로 하지 말고 《백마산터널》로 해야 한다고 하고

또 백마산 의병장과 남한산성 등에서 오랑캐와 싸운 밀양박씨 충헌공파 족보상의 후손들과 전적지 등을 찾기위해 밀양에 있는 사단법인 한국족보보존회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박동욱 회장님과 한나절을 족보를 열람해도 확인이 안되었습니다
밀양박씨 족보가 광대하기 때문에 지파가 확인되어도 회장님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27-1. ●●●그날 저(도재국)는 박동욱 회장님으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도재국 동장, 얼마 전에 시청 문화관광과에서 젊은 직원 한 사람이 나한테 찾아와서 "백마산성의 유래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것이 있으면 좀 알려주십시오" 하더라. 그래서 "내가 백마산성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어야 이야기를 해주지" 그랬더니 그 직원이 아무 말도 안하고 가더라》하셨습니다.

저(도재국)가
왜 이런 이야기를 여기에 적느냐 하면
밀양시청 문화관광과에서 표충사 문화재 업무를 수십 년간 담당하는데 천황산을 고수했습니다

●아래는 문화관광과가 천황산을 고수하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1563. 밀양시가 가까운 거리에 《천황산 표충사》 간판을 굳이 2개나 세워야 했나?
http://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3512?svc=cafeapp


그런데 도재국과 손흥수 선생이 《천황산》을 《재악산》으로 선전하는 일을 하였기에
문화관광과에서 손흥수와 도재국과는 서로 전혀 소통을 안하고 매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손흥수와 도재국은 문화관광과에 대해 마음 속에 섭섭함이 수십 년간 쌓여 있습니다. 문화관광과도 역대 시장의 지시에 의해 천황산을 고수한 것은 사실입니다.

27-2. 그 젊은 직원이 박동욱 회장님한테 백마산성에 대해서 문의하러 올 무렵에 저(도재국)는 백마산과 백마산성과 의병장 송재공 박명복에 대한 글을 이 게시판에 수십 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 정도이니까
문화관광과의 그 젊은 직원이 시청의 상사 누군가로부터 업무상 백마산성과 박명복 의병장에 대해서 조사를 해오라는 지시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그 젊은 신규 직원은 이런 수십 년 간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 과(課)의 누군가가 그 젊은 직원한테 《박동욱 회장님 한테 가서 백마산성 유래를 한 번 조사해 오너라》했을 것입니다.

27-3. 그러면 그 직원이
손흥수 선생이나 저에게 왔으면 상세하게 알려주었을 텐데 도재국과 손흥수 선생에게는 절대로 안오는 것입니다

손흥수와 도재국은
백마산과 백마산성, 의병장 박명복에 대해서 수십 년 전부터 조사하고 있는 원조나 마찬가지이고 가장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데도 밀양시청의 문화관광과 직원은 우리에게 절대로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시는 박동욱 회장님한테 알아보러 왔던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7-4. 35년째 도재국과 손흥수는
밀양시로부터 이런 취급을 받아왔습니다. 이것은 천황산을 재악산으로 변경하자는데 대해서 밀양시가 도재국과 손흥수를 대하는 태도의 상징적인 한 단면입니다.
밀양시 문화관광과는백마산성 조사에 대해서 연목구어식인 것입니다.

27-5. 작년(2019년)에 저는 몇 달 동안
족보에 《戰亡했다》라는,기록이 있는 박한립의 충헌공파 후손을 찾기위해
밀양과 창녕, 수원, 용인 등에 거주하는 후손들과 또 양산 원동면사무소, 배내골의 이천보건진료소, 창녕읍사무소, 창녕문화원, 경기도 수원문화원 등에도 수소문 했습니다.

※박길문 선배님과 부산에 계시는 충헌공파 대표님이 가지고 계시는 족보에 기록된 박한립 등의 후대 족보가 없었고, 족보를 수보할 때 수단작업이 복잡하여 그 후손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밀양박씨가 너무 많고 족보도 지파별로 했기 때문에 몇백만 명을 망라한 해당 년대에 수보한 대동보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즉, 수백만 명을 한꺼번에 수록한 대동보를 찾기 어려운 상황은 씨족이 수백만 명인 김해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가 같은 상황입니다.
※사실상은 수백만 명을 한꺼번에 수록하는 대동보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27-6. 몇 달을 이렇게 찾아도 안되어 그때까지 모은 모든 자료를 가지고 경모재를 찾기로 했습니다
관리하시는 박 선생님과 미리 약속된 날 오후에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에 있는 밀양박씨 충헌공파 총 본부인 경모재를 찾아가서

박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우선 밀성박씨 충헌공파 삼세(三世)의 각 신위 마다 큰 절로 참배를 하고,

다음으로 경모재 뒷산의 밀양(밀성)박씨 충헌공파 중대광 보문각 대제학공(重大匡寶文閣大提學公) 묘소에 큰 절로 참배를 하니까 날이 어두워 졌습니다

관리사에서 전기불을 켜서 소장된 족보를 무려 두 시간여를 열람하여
13세 의병장 송재공 박명복과
13세 나주목사 박한립(朴漢立)을 확인했습니다

※송재공 박명복 의병장의 족보는 이 이전에 바로 확인을 했으나 경기도 용인을 세거지로 하는 박한립(목사)의 족보와 후손들을 확인하는 것은 위와 같이 대단히 어려윘습니다.

※남들은 《경모재》로 바로 찾아갔으면 되었을 것인데 할 것이지만 이렇게 둘러둘러 《경모재》에 찾아간 사연이 있으나 여기에 다 적을 수가 없습니다.

27-7. ●●●송재공 박명복 의병장과 아들 박봉일의 족보에는 백마산성에서 왜적과 싸운 사실이 기륵되어 있습니다.
송재공의 후손인 결성현감 문중은 국풍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멸문지화의 문 앞까지 갔다가 누명을 벗고 임금으로부터 묘석까지 하사받았으며그 묘소가 백마산 서록의 박명복 의병장 묘소 아래에 있습니다

손흥수와 도재국은
송재공 박명복의 부산에 계시는 후손들과 밀양에 계시는 후손들을 만나 송재공과 아드님 박봉일공께서 백마산성에서 왜적과 싸웠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27-8. ●●●끈질긴 노력과 추적으로 찾아낸 새로 수보한 (문충공, 목사) 박한립의 족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朴漢立》:
(신라 시조왕으로 부터 54世)
(충헌공파 中祖 陟으로 부터13世)
字 漢祐 甲午生 乙卯 進士 羅州牧使
丙子 戰亡 墓所 京畿道 華城郡 南陽面 水花里 三台峰 庚坐 諡 文忠公
※나주목사를 하셨고, 병자년에 전사를 하셨고, 나라로부터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목사"란 지금의 기초자치단체의 시장과 광역자치단체의 시장의 중간 정도의 직위입니다

위와 같이 남한산성에서 인조대왕을 구한 박한립 목사 등의 족보를 최종적으로 확인했습니다. 그 때 경모재를 지키시던 예비역 영관 출신의 박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박길문 선생님께서
충헌공파의 오래된 족보를 맨 처음 보여주셨습니다
저가 몆번이나 자택을 방문하여도 공무원 선배님 되시는 80대 고령으로 몸이 대단히 불편하신 데도 친절하게 낡은 족보를 보여주시고 설명을 해 주신데 대해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밀양박씨 삼세 제단
★1258(1279). 경모재에서 밀성박씨 충헌공파 삼세 제단(三世 祭壇)에 참배<1>
http://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2754?svc=cafeapp

27-9. 위와 같은 상황에서 관련 기관에 전화통화하는 과정에서 저(도재국)가 이 게시판을 통해서 수십 개의 글을 올리면서 《한국도로공사》를 향해 《백마산터널》로 해달라고 수없이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한국도로공사 당신들은 기어이 《백마산》을 말살하고 엉터리 일제식 터널 명칭으로 붙였더군요.
다시 강조하지만 제2봉 載藥山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조작한 산명입니다.

한국도로공사 당신들은 누구 말을 듣고 이 엉터리 터널 명칭을 붙였습니까?
해명하십시오.

28. 손흥수와 도재국은
수십년 전부터 백마산에 대해서 조사해 왔습니다

《백마산》 정상과 그 둘레에는 밀양의 고대읍락국가인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시대에 낙동강을 거슬러 양산 원동을 거쳐 지금의 《밀양댐 물 머리》에서 밀양 땅으로 침략하는 왜구를 방어하는 《백마산성》이 있었습니다

백마산성은
또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에는 위 경로를 통해 밀양양 땅을 침략해 오는 왜적을 방어했습니다

도재국과 손흥수는
밀양 사람 아무도 챙기지 않았던 백마산성의 유래를 찾아 수십 년을 헤맸습니다.

임진왜란 때
백마산성 아래의 고례리의 평리마을의 아래 박미마을 등에 세거(世居)하던 밀양박씨 충헌공파(忠憲公派) 송재공(松齋公) 박명복(朴命馥) 의병장은 그의 아들 박봉일(朴鳳逸)과 주변 백성들과 규합하여 물 밀듯이 쳐들어오는 왜적을 백마산성에서 맞아 싸웠습니다.

백마산 주변은 단장(丹場, 피로 물들인 전장터인 단장 땅) 면민(面民)들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백마산 서쪽의 밀양댐 바로 위에는 밀양을 지켰던 박명복 의병장의 묘소(墓所)가 있습니다.

★1246(1267). 임진왜란 백마산성 박명복 의병장 및 三男 박봉일 묘소 참배 <6>
http://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2729?svc=cafeapp

위의 사진에는
사진을 찍느라고 저(도재국)의 사진은 없습니다

작년에 도재국과 손흥수는
부산에 계시는 밀양박씨 충헌공파 박명복 의병장의 후손 문중대표들과 송재공 박명복 의병장의 묘소에 참배를 했습니다.
그분들의 선조님들께서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는 증거가 지파의 명칭이 《충헌공파(忠憲公派)》입니다

밀양박씨 충헌공파 문중은
남쪽에서는 북으로 침략해오는 왜적을 이같이 백마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면서 피를 흘렸고

북쪽에서는
남한산성 등에서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오랑캐와 싸우면서 나라를 지켰던 국가와 민족에 충성스러운 문중입니다

작년에는
도재국과 손흥수는 밀양박씨 충헌공파 문중원들의 애국적 역사의 발자취를 찾느라고 많은 노력을 했고, 그 수많은 내용을 밀양광장에 올려놓았습니다.

수많은 기록 중의 하나가 아래에 있습니다

★1264(1285). 병자호란 때 인조대왕 남한산성, 세자 강화도 피신, 박한립.박창문의 호군 격파와 최신 족보
http://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2784?svc=cafeapp

밀양의 동쪽을 지켰던 백마산과 백마산성
또 백마산과 백마산성에서 밀양 땅을 지켰던 의병장 송재공 박명복의 역사에 대해서 밀양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29. 손흥수와 도재국은
아득한 미리미동국시대부터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이 왜구와 왜적에게 피바다로 사라져간 원혼이 서려있는 역사의 헌장인 백마산과 백마산성, 박명복 의병장과 백마산에서 전사한 그의 아들 박봉일(朴鳳逸)과 수많은 의병을 기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밀양시에서는 《백마산 정상》에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담은 조그마한 비석 한 개라도 세워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밀양의 경계에 그 많은 커다란 산 표지석은 있어도 이곳에는 없습니다.
백마산 너머 《전사이대 땅》은 밀양 땅이지만 양산 사람들이 대대로 살고 있습니다.
이 《전사이대》 지명은 전죽 즉, 시누리 대나무가 변한 지명입니다.
이 지명의 전(箭) 자(字)가 《백마산 전투》와 관련한 전쟁물자로 공급했던 요즘으로 치면 소총의 총알과 같은 재료였던 전죽(箭竹)의 전(箭) 자(字)입니다.
옛부터 산속에 전죽(시누리 대밭)이 있는 곳은 대부분 바로 그곳 또는 근처에 반드시 산성이 있었습니다.

백마산 바로 아래에는 "바드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손흥수 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바드리마을의 지명유래는 옛말로 "군진(軍陣)을 치다" 즉, "바오달을 치다" 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강조를 하면
바드리마을 바로 위의 백마산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왜구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산성을 쌓고 《바오달》을 치고 놈들과 싸워 흘린 피가 고야천(古射川=단장천)을 붉게 적셨습니다.
지금의 백마산을 옛날에는 고야산(古射山)이라 했고, 또 단장천을 옛날에는 고야천이라 했고, 고예라는 마을의 명칭도 고야(古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30. 한국도로공사는
위와 같은 거룩한 우리 선현들이 이 땅을 지켰던 역사가 있는 백마산과 백마산성, 의병장 박명복, 왜구와 왜적에 의해 도륙당한 수많은 밀양 사람들의 역사를 말살하는 행위인 "재약산(載藥山)터널의 명칭 표지"를 즉각 철거하시고 白馬山터널로 새로 만드십시오.

제1봉의 천황산은 왜구와 왜적의 후손인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조작했고, 제2봉의 재약산(載藥山)도 왜구와 왜적의 후손인 "사이토 마코토"가 조작했습니다.

당신들은
왜 자꾸 밀양 땅의 산명을 왜구와 왜적과 일제의 핏줄이 배인(연결된) 명칭으로 만들어 갑니까?

31. 국토교통부와 국토지리정보원과 한국도로공사는
●제1봉 천황산을 재악산(載嶽山)으로 복원하십시오
●제2봉 재약산(載藥山)을 수미봉(須彌峰)으로 변경하십시오
●재약산(載藥山)터널 명칭을 백마산(白馬山)터널로 바꾸십시오.

한국도로공사는
《배내골 IC》는 만들어 주면서도
《천년고찰 載嶽山 표충사》가 그토록 원하던 《표충사 IC》는 못 만들어 줄 망정 《터널 명칭》에 백마산을 말살하고 일제식 산명이 붙은 터널 명칭은 왜 붙입니까?

32. ●한국도로공사는
임진왜란 때 백마산과 백마산성과 밀양 땅을 지키다 전사한 수많은 의병들의 피와 원혼이 느껴지는 아래의 《밀양박씨 충헌공파 박명복 의병장의 족보》를 보십시오

★1242(1263). 임진왜란 戰亡 박한립.박창문 선.후대 족보 찾기 <2> (답글 확인요망)
http://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2725?svc=cafeapp

※위 박한립과 박창문의 戰亡을 다시 확인한 결과 임진왜란이 아니고, 병자호란으로 확인되었습니다

33. ※위 제목에서 《박한립 지파 문중》은 《병자호란》 때 북쪽 오랑캐와 싸웠고, 《박명복 지파 문중》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웠음을 바로 잡습니다.

34. 일제식 터널 명칭 앞에서 개통식 테이프를 컷팅한 위정자들은 그 터널 명칭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위 사진 설명 : 표충사에서 올려다 본 재악산 사자봉 정상》

●《위 사진 설명 : 재악산 사자봉 정상과 표충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의 명칭과 위치》

지금까지 재악산(載嶽山=載岳山, 해발 1189m) 산명의 유래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태허 동계 경일(太虛東溪敬一) 선사님이 영정사(표충사)에 3년간 주석하면서 지은 《밀양 재악산 영정사 전후 창건기(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와 《재악산기(載岳山記)》에 의해서 《재악산은 밀양 사람들의 생명을 영위토록 해 주는 산 즉, 생명 줄을 이어주는 산》으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밝혀졌습니다.

이로써 우리 민족왕조의 수많은 지리문헌에 재악산을 밀양의 산으로 규정, 기록한 것과 함께 밀양의 산 이라는 것이 한층 더 명확하게 밝혀 졌으므로 울산 측은 더 이상 천황산(天皇山)이라고 주장하면 안됩니다


●●●《재악산기 원문 일부와 번역문 1》

載岳之根遠自白頭楓岳五臺太白而下
재악산의 근원은
멀리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금강산.오대산.태백산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와

東抵于海,
동해쪽으로 뻗었다가

窮隆積翠
하늘 높이 솟아 푸른 산이 되어

盤絡於淸密梁彦數百里間
청도와 밀양.양산.언양(울산) 땅을 수백리 휘감았다.

※(주)도재국 1 :
옛날에는 재악산을 영남의 산무리(山群, 山塊, 산 덩어리 : 소위 말하는 영남알프스)의 주산(主山)으로 불려졌음

●《위 사진 설명 : 표충사 산문 안쪽 현판(載嶽山門 재악산문) 사진, 35년째 밀양의 향토사와 밀양의 지리를 공부하며, 재악산 고산준령을 헤매며 '재악산 산명복원 운동'을 벌이는 고령의 손흥수》

※저(도재국)가 스승님과 나란히 같이 사진을 찍었으면 좋은데 지나가는 휴대폰 눌러 줄 사람이 없어 스승님 혼자만 찍었습니다

●35년 전에 도재국과 함께 본 재악산 산명복원운동을 시작할 때는 원기왕성한 장년이었으나 이제 연세 80의 고령이 되셨습니다


●●●《재악산기 원문 일부와 번역문 2》

其高則萬丈餘
산은 한없이 높아

上侵于箕房之宿
위로는 동쪽의 수많은 별(별 자리)에까지 치솟았고

※(주)도재국 2 :
箕房之宿에서 箕房은 밀양도호부 관아를 기준한 방위임

其洞壑之深邃
산골짜기는 한없이 깊고

岩(巒만)之豊麗
산꼭대기의 수많은 암석은 매우 아름다워

不是與他山之比
그 어떤 산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위 사진 설명 : 표충사 산문 바깥쪽 현판(護國聖地表忠寺 호국성지표충사) 사진, 35년째 밀양의 향토사와 밀양의 지리를 공부하며 '재악산 산명복원 운동'을 벌이는 손흥수》


●●●《재악산기 원문 일부와 번역문 3》

溪澗之壯
산골짜기의 계곡은 장관을 이루는데

泉瀑之美, 根於萬壑千岩
천폭의 아름다움의 근원은 수많은 골짜기와 수많은 암봉과 암벽이다

窅窕之間, 其源浩浩, 其派洋洋,
으슥하고 깊숙한 산의 근반은 광대하며

而自千萬古流而不歇
산골짜기의 물은 천만년을 흘러

雖七年之旱, 不爲枯(涸후)
칠년의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溶溶然出於洞
산골짜기를 콸콸 흘러내려

抵府五十里, 南入於洛
밀양 땅 오십 리를 남쪽으로 흘러 (밀양 땅을 적시면서) , (영남루 앞에서 다시 몇십 리를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주)도재국 3 :
오십 리(50里)란 재악산에서 밀양도호부 관아까지를 그 당시에 조사한 거리이며(요즘 실측한 거리와는 조금 차이가 남)
관아 바로 앞에 있는 영남루 앞에서 다시 남쪽으로 밀양 땅의 몇십 리를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 갑니다.
그러니까 재악산에서 밀양 땅의 백리(100리) 정도를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갑니다

즉, 재악산에서 발원한 강물이 흘러가는 지역이 밀양시 단장면, 산내면, 산외면, 활성동, 용평동, 내일동, 삼문동, 내이동, 가곡동, 남포동, 상남면, 삼랑진읍등 12개 지역입니다. 밀양시 전체 17 개 읍면동 중에서 무려 12개 읍면동 지역을 적시면서 흘러갑니다.
농업이 거의 100%였던 근대 이전의 밀양 사람들의 농업과 생활의 대부분을 떠 받친 재악산 물줄기는 밀양 사람들의 생명의 줄이었으며 앞으로도 재악산 물줄기는 밀양 사람들을 영원히 먹여 살리는 생명 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其間膏沃之田, 良潤之畦
(고을의) 땅은 기름지고 윤택하여

不知其幾千萬區赖以活
부지기천 명의 밀양 사람들이 이(재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다

則密府之人, 非咸載命於此山者耶
밀양 사람들의 삶(목숨, 命 줄)은 재악산에 실려(載 달려) 있다

然則此山
재악산이 이러한즉

非密城一府之人所可寶歟
밀양 사람들의 보배가 아닌가!

密人亦國之民, 則此山亦非僞國之寶歟
밀양 사람들이 역시 나라의 백성이므로 재악산은 역시 나라의 보배이니라 《끝》

●《위 사진 설명 : 표충사 일주문 현판(載岳山表忠寺 재악산표충사) 사진,
35년째 밀양의 향토사와 밀양의 지리를 공부하며 '재악산 산명복원 운동'을 벌이는 손흥수》

●●●태허 동계 경일(太虛東溪敬一) 약력
○1636년 인동부 약목현에서 조선(朝鮮) 세조대왕의 후손으로 출생.
○7세 때 어머니를 여의다.
○'금강산 유점사'의 벽암대사의 문하생이 되다.
○1657년 '영남관찰사 조계원'의 천거로 금오성장(金烏城將)이 되다.
○벼슬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다.
○ '가야산 해인사'에서 산승(山僧, 出家)이 되어 수행하다.
○영정사(표충사), 감로사, 중봉사 등에서 수행하다.
○밀양 재악산 영정사 전후 창건기(密陽 載岳山 靈井寺 前後 創建記)와 재악산기(載岳山記) 등을 짓다.
○1695년 임종계를 남기고 '비슬산 용천사'의 극락암에서 열반하시다.
○1711년 문인(門人) 등 55명이 영정사(표충사)에서 동계집을 개간함

※(주)도재국 4 :
동계집에 실린 '태허당 대사 행적'에는
대사님의 사리탑이 세워졌다고 적혀 있습니다
효봉대종사사리탑의 뒤에는 영정사(표충사)에 주석하셨던 많은 고승님의 사리탑이 있습니다.
태허당 대사란 《태허 동계 경일 선사님》을 말합니다

●출처 : 韓國佛敎全書 第十二冊, 敬一東溪의 載岳山記(2014년, 동국대학교출판부)

●《위 사진 설명 : 표충사 일주문 현판 사진, 35년째 밀양의 향토사와 밀양의 지리를 공부하고 재악산을 헤매며 '재악산 산명복원 운동'을 벌이는 손흥수와 도재국》

※마침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휴대폰 사진 셔터 누르는 것을 부탁하여 스승님과 둘이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날도 새로 부임하신 표충사 주지 스님을 뵈로 가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주지 스님을 만나 산명 복원에 많은 협조와 지도를 부탁드리고 산명 복원 관련 밀양향토사연구회가 발행한 '밀양이야기' 책도 한 권 드렸습니다
이 책에는 손흥수와 도재국이 공동으로 집필한 《울산 측이 주장하는 천황산 산명의 근거가 되는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의 허구성 검증'》이라는 231페이지 분량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35년 전에 본 재악산 산명복원운동을 시작할 때는 도재국의 향토사 스승인 손흥수 선생은 원기왕성한 장년이었고 도재국도 원기왕성한 청년이었으나
●이제 손흥수 선생은 연세 80의 고령이 되셨고
저는 70을 문턱에 걸친 69세가 되었습니다
●손흥수 선생과 도재국은 수많은 세월 동안 수많은 노력으로 표충사 일주문에 《載岳山 表忠寺》, 산문에 《載嶽山門》 이라는 헌판을 걸게 할 수 있는 수많은 산명의 증거를 찾아내었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이 본 산명을 복원시킬 때까지 못 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오늘도 산문과 일주문 앞에 서니까 지나간 35년의 세월이 파노라마가 되어 눈 앞에 눈물겹도록 어른거리며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주)도재국 5 :
영정사에서는 일찍이 불교의 중요한 경전인 묘법연화경(법화경)과 원각경을 개판(開板, 改板)했으며
또 위와 같이 55인의 스님 등 사부대중이 합심하여 동계집을 개간(開刊)할 정도로 큰 사찰이었으며
위와 같은 불교경전과 영정사(표충사)의 창건기와 재악산기의 간기(刊記 간행기)에 지금의 영정사(표충사)의 배산을 재악산(載岳山)이라 적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밀양도호부와 청도군 편에는 지금의 국가하천인 단장천과 동천을 재악산의 이름을 따서 재악천(載岳川)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수많은 지리문헌에는 재악산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표충사를 재악사(載嶽寺=載岳寺)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울산 측이 옹호하고 주장하는 천황산이 맞다면 재악천을 천황천으로 기록하고 또 영정사(표충사,재악사)를 천황사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왕조시대로 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지리문헌》에는 천황산과 천황천과 천황사라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제1봉인 사자봉으로서 載嶽山(현행 지도상의 천황산 위치)을 천황산(현행 지도상의 천황산)으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제등실, さいとう まこと)"가 1923년에 황국신민화를 위해 조작했습니다

●●●제2봉인 載藥山(현행 지도상의 재약산)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1923년에 제1봉과 같이 조작했습니다

●●●제2봉인 수미봉을 載藥山(현행 지도상의 재약산)으로 조작한 이유는 표충사의 배산인 載嶽山(현행 지도상의 천황산 위치)을 일제 천황에게 봉헌하므로써 민족의 천년 載嶽山도 없어짐과 동시에 표충사의 배산도 없어지자, 제2봉인 수미봉을 표충사의 배산으로 삼게 하기 위한 일종의 회유책에서 載藥山(현행 지도상의 재약산)으로 조작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표충사가 제1봉을 두고 낮은 제2봉을 배산으로서 載藥山(현행 지도상의 재약산)이라 했겠습니까?

●●●우리나라 전통사찰의 모든 배산은 제2봉은 단 한 개도 없고 모두 제1봉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써 사례도 이 게시판과 밀양이야기 제11호에서 밝히겠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증거는 영정사 주지였던 월파천유가 1839년에 제1봉인 사자봉인 載嶽山(현행 지도상의 천황산 위치)을 載藥山(현행 지도상의 천황산 위치)으로 조작하여 표충사의 배산으로 삼았고, 제2봉만 따로 載藥山으로 하여 표충사의 배산으로는 삼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증거는 밀양이야기 제11호와 이 게시판에 곧 공개를 하겠습니다

●●●제2봉을 사찰의 배산이라 하면
인간 사회로 비교하면
큰집을 작은집이라 하고,
작은집을 큰집이라는 하는 꼴과 같고
또 형과 동생을 뒤바꾼 꼴과 같습니다

이것은 표충사가 이렇게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의 증거는 산문과 일주문 사이의 도로변에 있는 표충사가 세워놓은 載藥山 홍보간판입니다

●●●제1봉을 천황산으로 옹호, 주장하는 세력들이 제2봉을 끊임없이 載藥山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제2봉을 載藥山으로 주장하면 할수록 제1봉이 천황산으로 고착되는 효과를 노리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제2봉을 載嶽山으로 주장하는 것도 제1봉을 천황산으로 굳히기 위한 술책입니다.

●●●울산 측은 더 이상 천황산이라고 옹호,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반면에 밀양시와 밀양시의회는 당당하게 재악산이라 주장하고 산명복원에 즉각 나서야 합니다

////////

●●●載岳山記 원문 일부와 번역문(일부)

●載岳之根遠自白頭楓岳五臺太白而下
재악산의 근원은
멀리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금강산.오대산.태백산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와

●東抵于海,
동해쪽으로 뻗었다가

●窮隆積翠
하늘 높이 솟아 푸른 산이 되어

●盤絡於淸密梁彦數百里間
청도와 밀양.양산.언양(울산) 땅을 수백리 휘감았다.

※(주)도재국 1 :
옛날에는 재악산을 영남의 산무리(山群, 山塊, 산 덩어리 : 소위 말하는 영남알프스)의 주산(主山)으로 불려졌음

●其高則萬丈餘
산은 한없이 높아

●上侵于箕房之宿
위로는 동쪽의 수많은 별(별 자리)에까지 치솟았고

※(주)도재국 2 :
箕房之宿에서 箕房은 밀양도호부 관아를 기준한 방위임

●其洞壑之深邃
산골짜기는 한없이 깊고

●岩巒之豊麗
산꼭대기의 수많은 암석은 매우 아름다워

●不是與他山之比
그 어떤 산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溪澗之壯
산골짜기의 계곡은 장관을 이루는데

●泉瀑之美, 根於萬壑千岩
천폭의 아름다움의 근원은 수많은 골짜기와 수많은 암봉과 암벽이다

●窅窕之間, 其源浩浩, 其派洋洋,
으슥하고 깊숙한 산의 근반은 광대하며

●而自千萬古流而不歇
산골짜기의 물은 천만년을 흘러

●雖七年之旱, 不爲枯(涸후)
칠년의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溶溶然出於洞
산골짜기를 콸콸 흘러내려

●抵府五十里, 南入於洛
밀양 땅 오십 리를 남쪽으로 흘러 (밀양 땅을 적시면서), (영남루 앞에서 다시 몇십 리를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주)도재국 3 :
오십 리(50里)란 재악산에서 밀양도호부 관아까지를 그 당시에 조사한 거리이며(요즘 실측한 거리와는 조금 차이가 남)
관아 바로 앞에 있는 영남루 앞에서 다시 남쪽으로 밀양 땅의 몇십 리를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 갑니다.
그러니까 재악산에서 밀양 땅의 백리(100리) 정도를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갑니다

즉, 재악산에서 발원한 강물이 흘러가는 지역이 밀양시 단장면, 산내면, 산외면, 활성동, 용평동, 내일동, 삼문동, 내이동, 가곡동, 남포동, 상남면, 삼랑진읍등 12개 지역입니다. 밀양시 전체 17 개 읍면동 중에서 무려 12개 읍면동 지역을 적시면서 흘러갑니다.
농업이 거의 100%였던 근대 이전의 밀양 사람들의 농업과 생활의 대부분을 떠 받친 재악산 물줄기는 밀양 사람들의 생명의 줄이었으며 앞으로도 재악산 물줄기는 밀양 사람들을 영원히 먹여 살리는 생명 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其間膏沃之田, 良潤之畦
(고을의) 땅은 기름지고 윤택하여

●不知其幾千萬區赖以活
부지기천 명의 밀양 사람들이 이(재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다

●則密府之人, 非咸載命於此山者耶
밀양 사람들의 삶(목숨, 命 줄)은 재악산에 실려(載 달려) 있다

●然則此山
재악산이 이러한즉

●非密城一府之人所可寶歟
밀양 사람들의 보배가 아닌가!

●密人亦國之民, 則此山亦非僞國之寶歟
밀양 사람들이 역시 나라의 백성이므로
재악산은 역시 나라의 보배이니라

※(주)도재국(위 載岳山記의 일부 번역자) :
원문의 범위 내에서 재악산과 밀양 땅. 밀양 사람들이 현재 재악산과 밀양강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현실을 감안하여 번역을 하고, 번역문 괄호 안에 설명 글을 추가하고, 또 주석을 달았습니다

//////////

●●● 재악산과 재악산에 딸린 여러 봉우리 명칭

위에서 아래로 두 번째 사진 속의 동그라미는 載嶽山 산군(산群)이 표충사를 중심으로 해서 둥글게 생겼다는 표시입니다

아래의 번호는 위의 동그라미 사진 속의 번호와 같은 번호로서
산과 봉우리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아셔야 저(도재국)가 쓴 모든 글들을 이해할 수가 있을 정도로 산명이 헷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 ①載嶽山 ] 은 신라시대부터 사용한 산명임.

[ ③天皇山 ] 과 [ ④天皇峰 ] 은 조선총독이 1923년에 조작.

[ ③天皇山 ] 과 [ ⑦載藥山 ] 은 1961년에 밀양군과 울주군이 조사를 잘못함.

[ ③天皇山 ] 과 [ ⑧載嶽山 ] 은 이유수가 1998년에 조작.

[ ⑤載藥山 ] 은 영정사 주지가 1839년에 조작.

[ ⑦載藥山 ] 은 조선총독이 1923년에 조작.

[ ⑬香爐山 ] 은 등산객들이 조작.

[ ②사자봉 獅子峰 ] [ ⑥수미봉 須彌峰 ] [ ⑨문수봉 文殊峰 ] [ ⑩관음봉 觀音峰 ] [ ⑪향로봉 香爐峰 ] [ ⑬필봉 筆峰 ] 은 표충사가 표기했으며, 밀양군에서 발간한 밀양군지(密陽郡誌)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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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도재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2.14 27번 추가

    ※박길문 선배님과 부산에 계시는 충헌공파 대표님이 가지고 계시는 족보에 기록된 박한립 등의 후대 족보가 없었고, 족보를 수보할 때 수단작업이 복잡하여 그 후손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밀양박씨가 너무 많고 족보도 지파별로 했기 때문에 해당 년대에 수보한 몇백만 명을 망라한 대동보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즉, 해당 년도에 수보한 수백만 명을 한꺼번에 수록한 대동보를 찾기 어려운 상황은 씨족이 수백만 명인 김해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가 같은 상황입니다
  • 작성자도재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2.14 27번 수정
    《의병장 박한립》을 《나주목사 박한립》으로 수정

    관리사에서 전기불을 켜서 관리사에서 전기불을 켜서 소장된 족보를 무려 두 시간여를 열람하여
    13세 의병장 송재공 박명복과
    13세 나주목사 박한립(朴漢立)을 확인했습니다소장된 족보를 무려 두 시간여를 열람하여
    13세 의병장 송재공 박명복과
    13세 나주목사 박한립(朴漢立)을 확인했습니다
  • 작성자도재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2.14 27번

    족보 즉, 대동보는 문중원들에게 배부하는 것이 제일 큰 목적이므로

    거대 문중은 사실상 수백만 명을 한꺼번에 수록하는 대동보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대 문중은 지파별로
    또 세분한 지파별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 작성자도재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2.14 32번 수정
    ※위 박한립과 박창문의 《戰亡》을 다시 확인한 결과 《임진왜란》이 아니고, 《병자호란》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작성자도재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2.14 위 본문 내용을 2020.12.14(월) 11:35 현재 까지 여러 차례 수정, 추가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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