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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 2020.12.21(월) 기고문 교정작업과 국사편찬위원회 대구.경북 사료조사위원 면담

작성자도재국|작성시간20.12.21|조회수26 목록 댓글 0

★1575. 2020.12.21(월) 기고문 교정작업과 국사편찬위원회 대구.경북 사료조사위원 면담

도명섭. 박위호 선생이 정오경에 밀양에 도착하셨다

전날에, 오늘 오전에 언제라도 시간이 나면 《재악산 기고문 교정작업》을 할 것이라고 대기해 달라해서 기다리던 중에 갑자기 대구에서 전화가 와서 두 분 선생이 밀양으로 출발했다 하셨다

년말이라서 출판사가 바쁜 모양이다

다른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대기 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동행을 못하니까 향인 선생에게 연락이 닿았고 마침 시간이 나신다 해서 전화로 소개시켜 안내 협조를 부탁드렸다

출판사에서 기고문 최종 교정 작업을 13:15 ~ 17:45까지 했다. 단 1분도 지체없이 4시간 30분을 출판사 사장님과 했다. 다 마치고 나니까 사장님과 내가 지친 상태가 역력했다.

아래에는
18시경에 식당에서 네 분을 만나
식사 시간에 두 선생으로부터 잠깐 설명을 들은 내용이다

●●●普覺國師 一然스님

두 분은 삼국유사 관련 일연 스님의 행적 조사차 밀양에 오셨다

●●●도명섭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군위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직을 맡고 계신다
호 福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대해서 많은 조사와 연구를 진행 중이다
오랜 조사와 연구로 비문과 행력 등에 오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군위군 군위읍과 대구 두 곳에 거주하며 활동하신다 하셨다

●●●박위호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하셨다
《동방금석문연구회》를 운영하고 계신다
一山 朴偉浩
대구 수성구 유니버시아드로 거주
금석문 조사와 탁본에 대한 많은 경험이 있고 금석문 책을 편집한 경험이 많다 하셨다

향인 선생과 박 선생께서 저녁식사에 같이 참석하셨다

●●●새로운 사실 설명 (도명섭 선생)

밀양이 《密州》로 있을 때 청도와 창녕의 많은 지역이 밀주의 관할로 되어 있었다

밀주가 지금의 밀양과 청도, 창녕의 일부 지역을 관할 할 때 일연 스님의 전 생애 중에 무려 50여년을 밀주에서 보냈다 하셨다

일연 스님의 생애 대부분을 밀양, 영원사(혼구), 창녕, 청도, 운문사, 비슬산 등지에서 보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고 그 발자취를 처음으로 수 년째 조사를 하고 있다

(주)도재국 : 조선시대 말기까지 청도군의 동쪽과 서쪽 끝까지 밀주의 영역이었고 창녕군의 영산현과 밀진현도 한 때는 밀주의 영역이었다

앞으로 이 지역에서 일연 스님의 행적을 계속 조사할 계획이다

군위 인각사에서는 짧은 생애를 보냈고 삼국유사를 탈고 했고 입적했다

밀양 無量院의 지명 유래가 일연 스님과 관련이 있다
일연 스님이 무량원에 거주한 것이 확실하다

일연 스님이 영정사에 주석한 것은 밣혀지지 않았다

해양과 무량원이 연결되어 있었다
해양은 낙동강이다
해양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 설명을 하셨다

일연 스님은 성이 金씨가 아니고 全氏로 밝혀졌다
비첩과 비문에 옮겨 적을 때 실수로 全을 金으로 오기했다

일연 스님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시 조사하고 있다
기존의 간행물 일부에 오류가 있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많은 절을 빼앗고 승려들을 내쫓아 驛院으로 이용했다

삼국유사의 오기된 부분이 많아 오류에 대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三國에 대해 :
삼국은 3개의 나라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삼국은 三韓을 지칭한다
삼한에는 수많은 작은 나라가 있었다

고구려 부분이 거의 없고 광개토대왕에 대한 내용도 없다

군위에는 일연 스님 관련한 문헌 자료가 많다

두 위원은 금석문에 대해 탁본과 조사, 책 편집 경험과 지식이 해박하다

밀양문화원이 요청하면 현재 진행 중인 밀양의 금석문 발간 작업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

박위호 선생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회에서 7년째 활동 중이다

●●●도재국

향인 선생은 무량원 출신이고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으로 밀양 금석문 편찬 작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계신다

밀주 역사의 계승자인 밀양시가 밀주에서 일어났던 역사 인물인 일연 스님의 일대기를 조사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스럽다

밀양에서는 그런 내용도 모르고 또 시도도 없고 도서관의 도서외는 전용으로 관리하는 문헌도 없다

도명섭 선생의 조사가 완료되어 발표되면 밀주에서의 일연 스님의 행력이 많이 부각되어 밀양의 문화유산의 큰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군위군은
군청에 《삼국유사 담당 직제》를 신설하여 운영 중이고, 도로 명칭에 《삼국유사로》를 붙여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일연 스님》의 행력과 삼국유사 탈고를 기념하는 일들을 《군위군의 문화유산으로 보존, 전승》시키고 있고 또 국.도.군비를 많이 투입하고 있고 일연 스님에 대한 문헌과 홍보자료를 많이 발행하고 있다

특히 일연 스님이 입적하여 다비식을 하고 비를 세울 때의 일을 기록한 비문에 밀양의 《재악사에 주석하셨던 선염 선사님》의 법명이 기록되어 있고 그 기록에는 대선사 다음의 직위군에 《산립의 인각사 보각국사 비 음기》에 《載岳社 禪燄》 으로 새겨져 있어 이 《재악사》가 《영정사의 배산인 재악산》의 가장 오래된 문헌상의 증거로 확인되었다

●●●★210. 인각사 보각국사 비첩 「재악사 載岳社 선염 禪燄」 탁본(왕희지 필체 집자)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578?svc=cafeapp


두 분 선생께서
향인 선생과 점심 식사 후에 면담을 마치고

나를 만나 얼굴이라도 보고 가시려고 저녁시간까지 오래 기다려 주신데 대해 매우 고맙다

저녁시간까지 안내 대기해 주신 향인 선생도 매우 고맙다

향인 선생이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으로 일연 스님의 행력에 대해 두 손님과 면담을 함께 해 주신데 대해서도 거듭 고맙다

재악산 건은 높은 여러 곳까지 깊히 관련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내 개인의 바램으로는 국토지리정보원장님이 선생과 동향이므로 어떤 매개 역할이 가능할지 생각해 본다

밀양이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설 때만이 또 울산이 원만하게 헙조해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울산의 역사학자 송 교수님의 고육지책의 의견 제시는 매우 고맙지만 역사적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고 그것이 실체이기 때문이다

지경 선생은 《사실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 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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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주요 교정 내용

작업 일자와 시간 2020. 12. 22(화) 13:15~17:45 교정 작업

366쪽 상단에 붙여넣기

★1569.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라 하는 이유(산명 유래)는 《밀양 사람들의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3538?svc=cafeapp


★1569.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라 하는 이유(산명 유래)는 《밀양 사람들의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태허 동계 경일(太虛東溪敬一)의 동계집(東溪集) 중에서 재악산기(載岳山記) 일부 :
●不知其幾千萬區赖以活/부지기천 명의 밀양 사람들이 이(재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다
●則密府之人, 非咸載命於此山者耶/밀양 사람들의 삶(목숨, 命 줄)은 재악산에 실려(載 달려) 있다
●然則此山/재악산이 이러한즉
●非密城一府之人所可寶歟/밀양 사람들의 보배가 아닌가!
●密人亦國之民, 則此山亦非僞國之寶歟/밀양 사람들이 역시 나라의 백성이므로 재악산은 역시 나라의 보배이니라
●然則密人與國人, 皆名此山, 僞載岳宜矣/그러므로 밀양 사람과 나라의 백성은 모두 이 산의 이름을 《재악》이라 하는 것이 마땅하느니라.
●載藥則藥於病者惟宜 《중략》豈徒療病之是求哉, 乃長生不老蜕凡登仙之藥耳, 余曰不死之藥/『 載藥』은 환자에게 약이 되지만, 《중략》어찌 오로지(한낱) 병 치료이겠느냐? 장생불로하여 허물을 벗고 대체로 보아 신선에 오르게 하는 약인 것이지, 죽지 않게하는 약은 아니니라.
※(주)도재국 :
『 載岳』의 뜻은 크게 보아 수많은 밀양 사람의 삶(목숨, 命 줄)이 載岳山과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달려(載 실려) 있는 것이지, 오로지 환자의 병 치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 밀양광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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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쪽 하단에 붙여넣기

●국토지리정보원과 국가지명위원회에 간절히 말씀드립니다

●위 두 가지 방법으로 재악산(載嶽山)으로 결정이 않되면 반드시 아래의 기준과 수많은 재악산 증거로써 지명심의를 해주십시오

①지명의 증거로 왕조(조정, 국가)의 지리문헌의 기록을 절대적인 증거로 인용해야 합니다

②지명의 증거로 당해 지명의 소재지(밀양도호부=밀양시) 또는 사찰의 유물(국가유물 또는 성보유물)로서 비문과 불교경전의 기록, 배산과 관련된 사찰(재악사=영정사=표충사)에 관한 것과 불교를 국교로 하던 시대의 그 사찰의 승려가 사찰과 배산 등에 관련해서 지은 글과 성보(聖寶) 자료에 관한 것을 절대적인 증거로 인용해야 합니다

③지명의 증거로 당해 지역의 군현(밀양도호부=밀양시)과 그 군현의 지방관(밀양도호부사=밀양시장) 또는 역임한 지방관이 작성한 문헌(지리지 등)을 절대적인 증거로 인용해야 합니다
※한 시대가 아닌 여러 시대(역대)의 밀양도호부사(밀양시장)가 지은 지리지 등에 재악산 기록이 많습니다

④지명의 증거로 당해 지명의 소재지(밀양도호부, 밀양시 관내) 또는 역사적인 인물(김종직 등), 씨족의 집합체인 문중의 기록(족보=世譜 등)을 절대적인 증거로 인용해야 합니다

⑤당해 지역의 지명을 관할하는 군현(밀양도호부=밀양시)의 지리문헌(지리지=읍지=밀주지,밀주구지,밀양지,밀양지명고 등)의 기록을 절대적인 증거로 인용해야 합니다

⑥조정의 관료 또는 당해 지역(밀양도호부=밀양시) 또는 출신의 지리학자 등의 역사적인 문헌과 자료를 절대적인 증거로 인용해야 합니다

⑦당해 지역(밀양도호부=밀양시) 역사적 사건에 관한 조정의 문헌(조선시대 해인사와 통도사의 일부 승려들에 의한 표충사당 이건을 위한 사명대사 진영眞影 탈취사건에 대한 禮曹의 完文 등)과 지역 인물의 문헌 등을 절대적인 증거로 인용해야 합니다
※예조의 "完文"이란 공문서를 말합니다

⑧소량으로 또 증거로 인정하기 어려운 자료(울산 측이 제출하는 자료)보다 다양하고 많은 량의 명백한 증거(밀양 측의 증거)를 절대적인 증거로 인용해야 합니다
※밀양 측은 위와 같은 8가지 기준에 해당하는 증거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나 울산 측은 아래와 같은 자료를 증거라고 2015년에 국토지리정보원에 제시했습니다

⑨지명을 심의할 때 역사적인 증거가 되지 않거나(천황산일식명설고찰 등) 당해 지역과 관련 없는 자료(배상협의 천황산 기록이 있는 송려집 등)를 증거로 제출하거나 증거로 되지않는 것(사자봉 정상에 제당이 없었는데 있었던 것 같이 울산 측이 작성한 자료)은 지명 결정에 인용하면 안됩니다

※재악산 산군(山群=山塊=산 덩어리)의 시군별 점유 면적은 밀양시가 60%. 울주군(배내골)이 40%, 양산시(배내골)가 10% 정도입니다

※위와 같이 재악산의 증거는 모두 밀양 쪽에서 발생, 형성되었습니다

●왕조시대에는 신라시대부터 재악산(載嶽山)의 주된 부분은 역대(신라,고려,조선,대한제국)의 왕명(王命)에 의거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밀양시)가 관할하는 산이었으므로 위의 ①번부터⑧번까지의 기준에 해당하는 이 기고문에 제시한 재악산 산명의 모든 증거가 밀양도호부(밀양시)쪽에서 발생 또는 형성되었습니다.

●울산쪽에서는 ①번부터⑧번까지의 기준에 해당하는 재악산(載嶽山)이나 천황산(天皇山)의 증거가 전혀 발생 또는 형성되지 않았기에 지명심의 때 증거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울산 측은 재악산과 천황산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제출하지 못하고 증거로 볼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것을 증거라고 제시했습니다

①우리 민족 왕조의 지리문헌에 전혀 기록이 없는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이라는 이상한 글을 1998년에 이유수라는 개인이 임의로 지어 천황산의 증거라고 2015년에 ■지명심의 때 내놓았으나, 그 내용은 우리 민족의 지리역사와 지리문헌에 수없이 기록된 재악산을 부정하는 전혀 인정할 수도 없고 검증된 글도 아닐 뿐만 아니라 재악산을 없애고 그 위치에 지어낸(조작한) 것을 천황산이라 주장하나 전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 글은 1998년 울산향토사연구회가 발행한 향토사보(蔚山鄕土史報)에 ■최초로 실려 있습니다.

②또 개인의 문집인 배상협의 송려집(松廬集,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 古819.56.B145s)에 있는 천황산 자료를 ■2015년 지명심의 때 증거라고 제시했으나 그 천황산은 밀양과 울산 사이에 있는 천황산이 아닙니다

③또 천황산 정상에 있는 돌탑을 증거로 제시했으나 그 돌탑은 1990년경에 등산객들이 돌을 한 개씩 던져 모인 조그마한 돌무지에 어떤 단체가 그 이후에 쌓은 것으로 국립민속박물관이 전국적으로 시.군.구의 읍.면.동 단위로 2003년에 전수조사한 "한국의 마을제당"에도 조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그 당시에 사자봉 정상에 서낭당이나 산왕당, 신사 같은 것이 전혀 없었는데도 있었던 것처럼 서류를 만들어 증거라고 ■2015년에 제시했습니다
※관련 증거를 모은 글이 사진과 함께 밀양광장 ★305, ★460, ★467번 등에 밀양군 단장면 조사내용이 있습니다

●울주군 상북면 마을제당 조사내용은 여기에 있습니다

★469번 :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9fnZ/1079?svc=cafeapp

★305. 재악산(載嶽山, 소위 天皇山) 정상 돌탑의 정체를 말한다

★460. 최근에 쌓은 돌무더기가 천황산의 증거가 될 수 없다

★467. 한국의 마을제당(2003년 국립민속박물관) [밀양시 단장면 고례, 단장, 무릉, 미촌]

★469. 한국의 마을제당(2003년 국립민속박물관) [울주군 상북면 지곡, 오산, 지화, 안몰, 신리, 화천, 명촌, 일동]<3>

●이런 데도 국가지명지위원회가 재악산을 부정하고 천황산을 인정하여 지금까지 존치시키는 것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

342쪽 상단에 붙여넣기

◎(주)도재국 :

천황산 사자봉에 쌓은 돌탑은 1990년대 초반에 등산객들이 하나씩 던져놓은 돌무더기에 어떤 단체가 현재 크기의 돌탑으로 쌓았고, 정상은 산을 넘나드는 고개가 아니었으므로 처음부터 서낭당이나 제단, 신사 등이 없었으며,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305. 재악산(載嶽山, 소위 天皇山) 정상 돌탑의 정체를 말한다

★460. 최근에 쌓은 돌무더기가 천황산의 증거가 될 수 없다

★467. 한국의 마을제당(2003년 국립민속박물관) [밀양시 단장면 고례, 단장, 무릉, 미촌]

★469. 한국의 마을제당(2003년 국립민속박물관) [울주군 상북면 지곡, 오산, 지화, 안몰, 신리, 화천, 명촌, 일동]<3>

/////////

333쪽 하단 붙여넣기

표충사(표충사 :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의 충의 정신을 기리며 향사하는 사당)를 1839년에 현재의 단장면

////////

52쪽 하단에 붙여넣기

8. 인터넷에서 URL을 검색하면 원문이 있는 밀양광장으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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