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기고자
도재국
- 밀양시지명위원회 위원
- 밀양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 밀양향토사연구회 위원(전)
-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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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파일
고려시대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목 차]
Ⅰ. 머리말
Ⅱ. 고려시대를 관통(貫通)해 본 지배층의 하층민 천역(賤役) 동원
Ⅲ.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1. 효심(孝心)과 김사미(金沙彌)의 출신 배경
2. “효심의 난” 발생지 “초전(草田)”은 어디인가
3. 밀양(密陽)의 군호(郡號) 및 領域 변천
4. 慶尙道 道別軍額과 民亂 鎭壓 官軍 추정
5. 孝心의 亂 前後 中央과 密城(密州)의 시대적 배경
6. 孝心.金沙彌 亂 발생지 연계성 考察
7. 이건형(李建衡) 초전의고(草田疑考) “저전촌지(楮田村址)”
8. 밀양 “화봉리 초전(草田)”은 “효심의 난”과 관련이 없다
9. 효심군 웅거(雄據)와 관군(官軍)과의 전투 의고(疑考)
10. 효심 농민군의 산성(山城) 축조의 이론적 근거
11. 운문지맥 “효심의 난” 관련 인명(人名)
12. 효심의 난 관련 지명.문헌 기록과 언전(諺傳)
13.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밀양의 部曲 흔적들
14. KBS 역사스페셜 “김사미와 효심의 난” 방영(放映)
15. “김사미의 난” 발생지는 청도 운문사 주변
16. 청도민란(淸道民亂 : 金沙彌의 亂, 雲門山.東京民亂 등)
17. 삼별초난(三別抄亂)과 청도(淸道)
18. 주.군.현간(州.郡.縣間) 정보수집, 감시활동 지역 설정
19. 新增東國輿地勝覽 울산군,언양현 古蹟 條 부곡(部曲) 미등재
XV. 맺는말
[본 문]
고려시대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Ⅰ. 머리말
『고대노예제사회(차전환,한울아카데미)』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종속되고, 어떤 사람은 타인을 지배한다”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 천성론”은 노예제를 자연적인 질서로 인정한 것이었다. 2세기 로마법에서 “포로는 살해되기보다 매각되어 목숨이 살려지기 때문에 노예(=목숨이 살려진 자)로 불린다” 라고 규정한 것은 포로를 노예로 삼던 일반적인 관행을 보여준다. 고대 서양의 노예제를 고려시대 최하층민인 노비제도와 결부시키는 것은 무리이지만, 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초기로 이어지는 시기의 기존 노비의 시원(始原)과 통일전쟁으로 발생한 포로.피로인 등을 최하층민과 노비로 만든 것을 생각하면 위의 인용 문장을 염두에 두면서 이 글을 쓴다. 이러한 문장의 내용은 노비가 발생한 원인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줌과 동시에 어떤 내용은 필자가 오랫동안 생각한 것과 유사하다.
본 글의 주제(主題)는 고려 명종대(明宗代)에 일어난 “효심(孝心)의 난(亂)”을 고찰(考察)하는 글로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역사(歷史)로부터 전개(展開)시킨다. 이렇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이유는 이 민란(民亂)의 원인이 하루아침에 발생한 것이 아닌, 후삼국의 각축전(角逐戰)을 거쳐 고려가 통일전쟁을 수행한 후 국가 통치를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재정(財政) 확보를 위해 신라시대 이래 기존 향(鄕).소(所).부곡민(部曲民)과 통일전쟁에서 획득한 포로와 피로인, 또 신료(臣僚) 특히 무신(武臣) 등의 살육과 정권 탈취 과정에서 적몰(籍沒)된 자들과 민란으로 발생한 수많은 왕화(王化) 이탈자 등을 끊임없이 천민(賤民)과 노비(奴婢)로 만들었고 또 태조의 유훈(遺訓)에 의해 특유의 국법으로 그들의 신분을 옭아매고 신분의 상승을 막아 그러한 하층민으로부터 이중(二重)의 천역(賤役)을 착취(搾取)하여 왔기 때문이다
필자가 천역(賤役)이라 규정하는 것은 고려왕조가 하층민의 신분구조를 끊임없이 생성.유지시켜 비참할 정도로 조세(租稅)와 노역(奴役)을 수취(收取)했기 때문이다. 또 신료(臣僚) 특히 무인(武人)들의 탐욕이 정권 탈취로 이어져 더 많은 천역(賤役)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즉 위정자들은 왕조 대대로 입(口)으로만 나라와 지방을 다스리고, 피지배층들은 천역의 피와 땀으로 그들을 먹여 살리고, 정권을 유지시켜 주고, 끊임없는 외침(外侵)을 축성(築城) 등 군역(軍役)으로 대비하고, 피로써 참전(參戰)했기 때문에(외침에 대한 국가 총력전쟁 수행은 어쩔 수 없었지만) 민초(民草)들에 대한 과도한 착취로 하늘을 찌르는 원망은 대대로 이어져 후대(後代)의 어느 한 시기에 활화산처럼 분노가 분출되었다.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실정(失政)과 탐욕스러운 위정자(爲政者)들은 탐학(貪虐)이 누적되어 피지배층인 수많은 백성들을 유망농민(流亡農民)으로 만들었고, 유망농민들은 계속되는 학정(虐政)과 굶주림을 피해 대량으로 산속 등으로 잠입(潛入).웅거(雄據)하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는 연명(延命)이 불가능하여 도적질이 시작되었고, 왕조와 무신독재권력은 이를 민란(民亂)으로 몰아부쳐 진압(鎭壓)의 정도(程度)를 넘어 도륙(屠戮)시켰다.
그리고 이의민(李義旼) 같은 독재권력자는 자신의 더 큰 탐욕(貪慾)을 채우기 위해 굶주린 백성들을 감언이설로 속여 “신라부흥(新羅復興)”이라는 반역(叛逆)을 도모(圖謀)하려 했다. 이러한 대표적인 민란이 운문지맥(雲門支脈) 밀성(密城) 고을에서 발생한 “효심(孝心)의 난(亂)” 즉, 고려시대 대표적인 민란(民亂)의 전말(顚末)이다.
그러나 왕조와 위정자들은 그들의 실정과 학정을 숨기기 위해 민란을 진압할 때는 양민을 역적(逆賊)으로 몰아 굶주린 백성들을 도륙(屠戮)시키고, 마지막으로 역사를 파묻어버릴 때는 초적(草賊)으로 비하(卑下)시키는 이중적인 비열(卑劣)한 짓을 했고, 또 그러한 불행한 역사를 송두리째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앞뒤가 맞지 않는 고려 백성에 대한 이중적 취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관군(官軍)에 의해 도륙(屠戮)당한 백성이 역적(逆賊)이 아니고 양민(良民)이라는 것을 고려정부가 스스로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밀양지(密陽誌).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등에는 밀양에서 일어났던 효심의 난을 직.간접적으로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학자와 교수 분들이 저작(著作)하신 역사서에는 효심의 난을 직.간접적으로 기록한 것이 일부 저서 외는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그분들의 저서 내용을 발췌. 인용하는 것은 왕조와 폭압적인 독재권력이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반의 국가권력과 제도가 하층민의 피와 땀으로 구축되었고, 또 그러한 것이 대(代)를 이은 왕조별로 신라말에서 고려전기를 거쳐 고려후기가 시작되는 무인독재권력의 등장 이래 의종.명종.신종대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속된 것이 그분들의 역작(力作)인 저서(著書)의 내용에서 군데군데 어렴풋이 감지되고 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효심의 난에 대해서 사서(史書)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향토문헌, 사학자(교수) 등이 발굴.저작한 귀중한 저작과 사료(史料) 등에서 직.간접적인 민란의 원인(原因) 등을 발췌하고, 필자의 생각을 함께 적어 이 글을 만든다. 특히 사학자(교수) 분들의 저서에서 글의 줄거리와 의도하는 방향이 “고려시대 민란 특히 효심의 난”과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필자는 그러한 귀중한 저서에서 고려시대 민란의 직.간접적인 증거로 추정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는 내용이므로 발췌.인용하는 것을 양지해 주시기 바란다
일반적으로 “증거(證據)가 없는 역사(歷史)는 역사가 아니다” 라고 말을 한다. 왕조(王朝)와 왕조독재권력이 “효심의 난” 때 그들이 저지른 죄악(罪惡)을 숨기기 위해 증거를 파묻어버린 이래 팔백여 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증거가 없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비운(悲運)의 역사 즉, 우리의 선조들이 당한 억울한 역사를 발굴하지 말고, 그냥 묻힌 채로, 양민(良民)을 역적(逆賊)으로 둔갑(遁甲)시킨 상태로 그냥 두어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파묻힌 그대로 두어라” 라는 것은 향토사와 역사를 사랑하고, 조사.연구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역사의식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를 사랑하는 후세(後世)의 우리들은 왕조의 실정(失政)과 권력을 탈취한 위정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고려백성으로서 양민(良民)인 경상도(慶尙道) 장정(壯丁) 7,000명이 “효심의 난”으로 억울하게 참살(斬殺).도륙(屠戮)당한 파묻힌 역사를 발굴하여야 하는 도덕적인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고려시대 포악(暴惡)한 권력자들이 저지른 반역(叛逆)의 역사(歷史)와 민초(民草)들이 학정(虐政)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왕화(王化)를 이탈(離脫)한 것을 “같은 꾸러미”로 엮어 역사를 왜곡(歪曲).고착화(固着化) 시켜 정의(正義)로운 역사의 흐름에 역행(逆行)하는 부류들에게 경종(警鐘)을 울려야 한다는 점도 머리말에 적어 본 글을 시작한다
필자는 효심의 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 즉, 배경(背景) 등에 대해서 한 마디로 말하기가 매우 어렵고, 그 것이 명종대(明宗代)에 일어났지만 명종대의 왕정의 실정 등만을 살펴보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사유가 고려 태조 왕건이래로 너무나 많은 사유들이 축적되었고, 또 효심의 난을 시작으로 그 이후 신종대(神宗代)에는 전국적으로 마치 들불처럼 일어 난 것이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문화원(文化院)으로부터 50쪽 분량 정도로 원고를 내달라는 요청에 의해 필자가 기존에 작성한 15개 분야 200쪽 이상 되는 『고려시대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글을 50여 쪽 정도로 축소하여 13개 부문(시대적 배경)은 제목 정도로만 기록하고, 핵심 부분인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부문”도 일부를 줄여서 다음과 같이 작성한다
Ⅱ. 고려시대를 관통(貫通)해 본 지배층의 하층민 천역(賤役) 동원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멸망한 후 부터 후삼국의 각축전(角逐戰)을 거쳐 고려통일전쟁과 건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군역(軍役)의 이름으로 하층민을 동원했고, 고려 건국 이후부터는 새로운 지배질서 속에 피지배층에 대한 천민대우와 천역(賤役)으로 지배층을 먹여 살리고 국가를 지탱시켰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필자가 지면(紙面)의 제약 상 본문을 생략하고 “고려시대를 관통(貫通)해 본 피지배층과 천민에 대한 제반(諸般) 사항을 대강(大綱)의 제목”만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왕건(王建)의 통일전쟁과 고려(高麗) 건국(建國)과정의 하층민.노비정책
고려초기(高麗初期) 하층민(천민.노비)의 증가, 토성분정(土姓分定).본관제(本貫制)로서의 하층민 신분 구속, 태조(太祖) 훈요십조(訓要十條) 유훈(遺訓)의 폐단(弊端)
2. 거란.여진 침략과 축성(築城).방어(防禦)에 하층민 천역(賤役) 동원
거란(契丹)의 침입 여진(女眞)의 침입, 고려의 년도별 외침(外侵) 현황, 고려의 축성(築城) 내용
3. 역대왕(歷代王)들의 대표적인 국력(國力) 낭비(浪費)와 천역(賤役) 동원
국왕(國王)의 빈번(頻繁)한 유람성(遊覽性) 행차(行次), 팔관회,연등회,백좌도량,불우건립,경전판각의 국력 낭비, 년도별 팔관회,연등회,백좌도량,불우건립과 하층민 賤役동원
4. 통일전쟁 과정의 포로.반역 무리의 노비화(奴婢化)의 근거
원천적(源泉的) 노예(奴隸), 전쟁포로(戰爭捕虜) 등의 노비화(奴婢化), 국가제도와 권력하(權力下)의 농민의 노예화, 모반(謀叛) 실패 가족과 부류의 노비화(奴婢化), 채무(債務)와 압량(壓良)으로 노비화
5. 천민.노비의 신분상승(身分上昇) 억제와 세습화(世襲化) 증거
고려의 신분제도 속에 나타난 고려의 노비정책, 태조의 노비(奴婢) 관리 훈계(訓戒), 천인(賤人)의 신분 상승을 방지, 노비 관리의 종류 및 거주. 취급 사노비. 매매. 증여. 상속. 탈취의 객체, 거주 및 담당, 노비의 취급, 노비적(奴婢籍) 세습(世襲), 고려의 양민(良民)인 백정농민(白丁農民), 천사양민(賤事良民), 천역양민(賤役良民), 향(鄕). 부곡민(部曲民), 소민(所民), 사노비(私奴婢) 발생 계기인 일반 양인(良人)이 경제적 이유로 인해 몸을 판 경우, 전쟁포로, 불법적인 압량(壓良 : 양민을 강제로 노비로 만듬), 공노비(公奴婢)의 발생 원인 및 충당.역할
6. 국가재정 수취(收取).관리상의 민중(民衆).천민(賤民)의 부담이 된 정책들
고려전기(高麗前期) 국가재원, 전조(田租)와 토지 중심의 재정구조, 현물 수취와 재정원(土地) 배분과 재정원으로서의 토지분급 문제점으로 된 세부 항목으로 역(役)에 대한 반대급부로 분급한 토지(군인전, 향리전), 공직담당 대가와 신분예우로 분급한 토지, 산관(散官)과 무산계(武散階)에 토지분급 등과제(登科制), 사원(寺院)에 토지와 노비 지급, 지역별 수취와 지역 지배의 존속 세입.세출의 특징과 관리 체제, 세입 내용 세출 계획, 세출 내용(문종 30년 기록 근거 산출 내용), 문종대 부세(賦稅) 수취 時, 답험(踏驗)조사 및 災免制度, 세입 활동의 과중한 비용의 납세자 부담 고통, 세입 수취 과정상 관리의 농간(弄奸)과 횡렴(橫斂), 국가재정 운영상 하층민에 대한 세역(稅役)의 과중한 수취, 조선시대 밀양의 군정(軍丁) 중, 선군(船軍) 현황, 조선초기 밀양의 호구(戶口) 및 군액(軍額) 현황, 토지 면적단위 “결(結)의 규모와 수확량”에 대한 이해
7. 천민.노비의 착취로 유지된 토지.녹봉(祿俸)제도
공전(公田)인 내장전(內莊田) 장.처전(莊.處田), 공해전(公廨田), 둔전(屯田), 학전(學田), 적전(籍田), 사전(私田)으로서 공음전(功陰田, 한인전(閑人田), 구분전(口分田), 향리전(鄕吏田), 군인전(軍人田), 궁원전(宮院田), 사원전(寺院田). 관리녹봉(官吏祿俸)과 공해전시(公廨田柴) 분급액 관련인 국가소유지 수조율(高麗史 食貨志), 품계별 전시과, 지역별 토지분급액
8. 가렴주구(苛斂誅求).戰災.災害 등으로 流亡農民 대량 발생 원인과 현황
신라말부터 유망농민(流亡農民) 발생, 고려조에도 이어진 내용으로 신라말(新羅末) 농민의 몰락, 신라말 몰락농민의 기아(飢餓),도적,정치화와 국가 대응사례, 탐학(貪虐)과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유망농민 발생, 하층민(下層民)의 천역(賤役)으로 수탈한 공부(貢賦)와 토산공물(土山貢物)인 공부(貢賦), 토산공물(土山貢物). 유망농민(流亡農民) 방지의 고육지책인 감무제도(監務制度) 감무(監務) 설치(設置) 원인, 감무설치(監務設置) 현황
9. 과중한 군역(軍役), 고려 전기(前期) 병제(兵制) 붕괴 원인
고려(高麗)의 군사제도(軍事制度)인 경군(京軍), 부병제(府兵制), 경군(京軍)의 군반제설(軍班制說)과 부병제(府兵制)의 절충설, 주현군(州縣軍)과 주진군(州鎭軍,) 고려군의 과중한 동원근무, 군인,가족의 생계 타격. 고려의 새로운 병제(兵制)인 별무반(別武班) 운영. 고려(高麗)의 병제(兵制)인 경군(京軍)과 주현군(州縣軍)의 서북변방 방수(防戌) 복무, 변경방수(邊境防戌)의 고통과 본관(本貫), 군인호(軍人戶)의 생활고, 주진입거군인(州鎭入居軍人)과 가족.양호(養戶), 孝心의 亂 발생지 “초전(草田)의 위치”에 대한 조사, 양인(良人)과 노예(奴隸)의 참전(參戰) 보상의 차이, 선군급전제(選軍給田制)를 문란시킨 관리들, 민란(民亂)을 도륙(屠戮)으로 진압(鎭壓)한 관군(官軍) 규모.
10. 國事 팽개치고 황음기태(荒淫奇態)로 叛逆民亂 自招한 의종(毅宗)
20세 즉위 의종(毅宗) 격구.수박희.방탕으로 정사(政事) 팽개침, 의종(毅宗) 환관(宦官) 정함에게 정사 맡기고 방탕한 생활, 의종(毅宗) 민가(民家).신료(臣僚)의 집 헐어 별궁지어 방탕한 생활, 의종(毅宗) 행차(行次) 회궁(回宮) 중 만취(滿醉)해 길거리에 유숙(留宿), 의종(毅宗), 유람행차(遊覽行次).방탕(放蕩).황음(荒淫), 신료(臣僚)들은 백성을 가렴주구(苛斂誅求),핍박받던 무관(武官) 이의방(李義方)이고, 문관(文官).내관(內官)들 척살(刺殺), 정중부(鄭仲夫) 일당(一黨), 의종(毅宗) 폐위(廢位)시킴.
11. 明宗의 국정포기(國政抛棄), 武臣天下속에 일어난 民亂 등
정중부(鄭仲夫) 정변(政變), 의종(毅宗) 내쫓고, 익양공(翼陽公) 호(皓) 명종(明宗) 옹립(擁立) 이의방(李義方), 중방(重房) 설치, 정권 탈취 및 이고 살해, 동북면병마사 김보당 난 실패, 이의방 권력 강화, 승려.조위총의 난 실패, 이의방 피살 정중부 정권장악, 공주 명학소의 망이 망소이 난, 서경(西京)의 조위총 잔당 반란, 청년 將軍 경대승(慶大升) 등장, 무신정변(政變)에 국정(國政) 포기, 여색(女色)에 빠진 의종(毅宗), 전주(全州) 관노(官奴) 반란, 경대승(慶大升) 병사(病死), 김보당난(金甫當亂) 진압 이의방(李義旼) 승승장구(乘勝長驅), 이의민(李義旼)이 명종(明宗)을 폐위(廢位), 최충헌과 최충수의 정변(政變).
Ⅲ.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의종대(毅宗代)에 왕의 실정(失政)과 향락, 사치, 방탕(放蕩)속에 신료(臣僚) 특히 환관의 국정 농단(壟斷) 또 명종대(明宗代)는 무신(武臣)들의 반란으로 승자는 기세등등하고 패자는 피바람에 쓰러져 갔다. 일자무식과 칼잡이들이 정권을 탈취하고 권문세가가 하루아침에 적몰(籍沒)되고, 수많은 신료가 참살당하고 남은 가족은 노비(奴婢)로 전락하였다. 또 무신들의 겁박(劫迫)과 살해 위협으로 국왕은 정신분열증세가 되어 국사(國事)를 포기하고 황음(荒淫)에 빠졌고, 정권을 탈취한 신료와 무신들은 의종대보다 더 심각한 국정농단과 인사전횡 사익(私益) 추구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수많은 백성들은 유랑걸식(流浪乞食)하는 지경으로 몰아 결국은 도성(都城)과 지방의 주.현.부곡.향.소(州縣部曲鄕所)에는 도적(盜賊)이 횡행(橫行)하고, 변방인 양계(兩界)에도 반역이 속출하고, 민란 발생과 진압에 수십 년간 농민이 징발(徵發)되므로서 농민없는 농지는 진황(陳荒)되고 남은 가족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권세가(權勢家)와 재력가의 노비(奴婢)로도 압량(壓良)되고 팔려가는 등으로 나라는 있으되 정상적인 국가 통제력이 상실된 무법천지로 변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조의 덕치(德治)는 사라진지 오래였고 목숨을 연명(延命)하기 위한 백성들의 유랑(流浪)과 왕화(王化)의 이탈(離脫)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먼저 정사(正史)에서 “효심(孝心)의 난(亂)”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상각 선생의『열정과 자존의 오백년, 고려사』 등의 1193년(명종 23) ~ 1194년(명종 24) 기록을 다음과 같이 살펴본다.
○ 1193년(명종 23)
7월에 남방에 도적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 강한 자(者) 김사미(金沙彌)는 운문(雲門)에 웅거하고, 효심(孝心)은 초전(草田)에 웅거하여, 망명(亡命)한 자들을 불러 모아 주(州)ㆍ현(縣)을 협박하고 약탈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근심하여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을 보내어 장군(將軍) 이지순(李至純)ㆍ이공정(李公靖)ㆍ김척후(金陟侯)ㆍ김경부(金慶夫)ㆍ노식(盧植) 등을 거느리고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지순은 이의민의 아들이다. 이의민이 일찍이 붉은 무지개가 양쪽 겨드랑이에서 일어나는 꿈을 꾸고서 자못 자부하였고, 또 옛날 참서(讖書)에 “용손(龍孫)이 12대 만에 끊어지고 다시 십팔자가 나온다” 는 말이 있다는 것을 들었으니, 십팔자(十八子)는 곧 이(李) 자이다. 이로 인하여 반역의 뜻을 품었는데, 본적(本籍)이 경주(慶州)이므로 몰래 신라(新羅)를 흥복(興復)시킬 뜻이 있어 김사미(沙彌)ㆍ효심(孝心) 등과 서로 통하니, 적(賊)이 또한 막대한 재물을 보내었다. 이지순은 탐욕이 한이 없어 적(賊)이 재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 재물을 낚아 취하려고 몰래 그들과 서로 연락하며 의복ㆍ양식ㆍ신ㆍ버선을 대어주어 적(賊)의 세력을 도와주고, 적(賊)은 도적질한 금은보화를 주니, 이런 까닭으로 군중(軍中)의 동정(動靜)이 문득 누설되어 여러 번 패전하게 되었다. 전존걸(全存傑)이 분개하며 말하기를, “만약 법으로써 이지순을 다스린다면 그 아버지가 반드시 나를 해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적이 더욱 성할 것이니, 죄가 장차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하며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사신이 말하기를, “의(義)를 보고서도 실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전존걸이 왕명을 받아 출정하였으니, 살리고 죽이며, 상주고 벌주는 권한이 그 손 안에 있었다. 이지순이 적에게 군사의 기밀을 누설시키는 것을 알았으면 이를 목베어 군중(軍中)에 돌려야 했거늘 이를 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의민을 두려워하여 독약을 마시고 죽음에 이르렀으니, 비겁함이 이보다 심하랴. 세상에서 전존걸을 지혜와 용기가 있다고 일컫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닌가." 하였다.
8월에 이공정(李公靖)ㆍ김경부(金慶夫) 등이 적을 치다가 패전하였다.
9월에 창고를 열어 서울의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다.
11월에 상장군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로 삼고, 대장군 고용지(高湧之)를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로 삼아, 장군 김존인(金存仁)ㆍ사량주(史良柱)ㆍ박공습(朴公襲)ㆍ백부공(白富公)ㆍ진광경(陳光卿)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12월에 남방 적의 괴수(魁帥) 득보(得甫)가 대궐에 나아와서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기를 청하므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놓아 돌려보내어 병마사의 처리에 맡겼다.
○ 1194년(명종 24)
2월에 남방 적(賊)의 괴수 김사미(金沙彌)가 스스로 행영(行營)에 나아와서 항복하기를 청하니, 이를 목베었다.
여름 4월에 남로병마사가 적을 밀성(密城 : 밀양)에서 쳐서 머리 7천 급을 베고, 무기와 우마(牛馬)를 얻었다. 우도병마사가 적을 쳐서 40명을 사로잡아 목베고, 또 3일 동안 연달아 싸워 적이 패배하였다. 장군 사양주(史良柱)가 남방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었다. 좌도병마사 최인(崔仁)이 날랜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적을 칠 때, 강릉성(江陵城)에 이르러 복병하고 기다렸다. 적이 이르러 한 여자를 잡아 묻기를, “병마사가 어디 있느냐?" 하니, 여자가 말하기를, “성 안에 있다." 하였다. 적이 놀라 물러가므로 복병이 일어나 추격하여 머리 1백 50급을 베었다.
가을 8월에 남방 적(賊)의 괴수가 그 무리 이순(李純) 등 4 명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와서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이순 등에게 대정(隊正)을 임명하고 베[布]를 내려주고 돌려 보냈다. 남로병마사가 적의 처.자(妻子) 3백 50여 명을 잡아 얼굴에 먹물을 넣고 서해도(西海道)로 귀양보내어 여러 성(城)의 노비에 충당시켰다.
윤월(閏月)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좌도병마사 최인(崔仁)이 일찍이 스스로 퇴각하여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세월만 오래 지체하여 비용을 소비한 것이 한이 없으니, 관직을 파면시켜 죄를 다스리고, 우도병마사 상장군(上將軍) 고용지(高湧之)로 하여금 겸해 거느리도록 하옵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적(賊)도 백성이니 어찌 많이 죽임이 목적이랴. 은혜로써 복종시킴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유사가 굳이 청하므로 그 말을 따랐다.』
12월에 남로병마사가 적의 괴수 효심(孝心)을 사로잡았다.
1. 효심(孝心)과 김사미(金沙彌)의 출신 배경
필자는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을 노비(奴婢)로 본다. 먼저 효심(孝心)에 대해서 보면 그는 조상대대로 노비로 보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노비는 원래 성(姓)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효심(孝心)은 원래부터 노비이며, “효심(孝心)”이라는 이름 자체가 부모에게 지극이 효성스러운 노비로 보인다. 어릴 때는 이름없이 개똥이.막둥이.이놈.저놈 등으로 불리다가, 커가면서 부모에게 효성(孝誠)이 지극하므로 주인이 종의 자식에게 “孝心”으로 이름을 지어준 것 같다. 다음에 “김사미(金沙彌)”에 대해서 보면 원래는 노비가 아닌데 그의 조상이 역모(逆謀) 등에 연루되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집안 출신으로 보인다. 노비는 원래 성(姓)이 없는데 성이 있다는 것은 이런 추측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그리고 절에 맡겨진 노비의 자손 또는 절의 사원전 전호(佃戶)로 본다. 고려시대 사원(寺院 : 절)은 오늘날의 사찰과 관청에 가까운 복합기능을 했다고 보며, 그런 사원에 분급(分給)된 노비는 그 조상이 글자를 모르는 무식한 노비가 아닌 원래는 상당한 신분(身分)의 소유자가 어느 날 무슨 사유로 몰락한 집안의 자손으로 보인다.
2. “효심의 난” 발생지 “초전(草田)”은 어디인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명종 23년(1193)”에는 효심이 난 발생 지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을 7월에 남방(南方)에 도적(盜賊)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 강한 자(者) 김사미(金沙彌)는 운문(雲門)에 웅거하고, 효심(孝心)은 초전(草田)에 웅거하여, 망명(亡命)한 자들을 불러 모아 주(州)ㆍ현(縣)을 협박하고 약탈하였다』
또 “명종 24년(1194)”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2월에 남방 적(賊)의 괴수 김사미(金沙彌)가 스스로 행영(行營)에 나아와서 항복하기를 청하니, 이를 목베었다.
○ 장군(將軍) 사양주(史良柱)가 남방(南方)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었다.
○ 좌도병마사(左道兵馬使) 최인(崔仁)이 날랜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적을 칠 때, 강릉성(江陵城) 전투 참전
○ 여름 4월에 남로병마사가 적을 밀성(密城 : 밀양)에서 쳐서 머리 7천 급(級)을 베고, 무기와 우마(牛馬)를 얻은 것도 이와 같았다.
○ 우도병마사가 적을 쳐서 40명을 사로잡아 목베고, 또 3일 동안 연달아 싸워 적이 패배하였다.
○ 가을 8월에 남방 적(賊)의 괴수가 그 무리 이순(李純) 등 4 명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와서 항복하기를 청하므로, 이순 등에게 대정(隊正)을 임명하고 베[布]를 내려주고 돌려 보냈다.
○ 남로병마사가 적의 괴수 효심(孝心)을 사로잡았다.
『밀양지(密陽誌)』 489P 이건형(李建衡) 초전의고(草田疑考) “저전촌지(楮田村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밀성(密城) 저전촌(楮田村)에서 관군에 토벌된 초적은 대개가 효심 배하(配下)의 민중군사(民衆軍士)로서 7천여 명이 도륙(屠戮)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김사미의 웅거지 운문산(雲門山)과 효심의 웅거지 저전촌(楮田村)이 초적의 거점(據點)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地理的)으로 관군(官軍)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천험적(天險的) 요새(要塞)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 두 곳의 요새는 당시 경주.울산.언양.금주(김해) 등지를 연결하는 교통로의 간도(間道)로서 초적(草賊)들이 많은 도당(徒黨)을 거느리고 활동하기에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밀성(密城) 저전촌(楮田村)에서 관군에 토벌된 초적은 대개가 효심 배하(配下)의 민중군사(民衆軍士)로서 7천여 명이 도륙되었다는 기록은 이 전투가 얼마나 격심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아마도 효심은 이에 앞서 김사미의 항복으로 전세(戰勢)가 불리하게 되자 자기의 군세를 총동원하는 한편 운문(雲門)의 잔당(殘黨)들까지 합세하여 관군(官軍)에 대한 최후의 항전(抗戰)을 기도(企圖)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명종 23년 추(秋) 칠월 조(條)에 “시남적봉기그극(時南賊蜂起其劇) 김사미운문효심초전(金沙彌雲門 孝心據草田) 소취망명표략주현(嘯聚亡命標掠州縣)”이라고 하여, 초전(草田)을 효심의 웅거지(雄據地)로 기록하고 있는 바, 이 초전(草田)은 현재 그 소재지가 확인되지 않는다. 경북 성주(星州) 초전설(草田說), 울산설(蔚山說)이 있고, 밀양(密陽) 화봉리설(華封里說)도 있다. 그러나 초전(草田)과 저전(楮田)의 발음 중 의사점(疑似點)이 지명(地名) 혼동의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참고 :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전적지조(戰績地條)에는 “초전재화봉이고려명종계축효심반거차지(草田在華封里高麗明宗癸丑孝心叛據此地) 여운문적김사
미호응(與雲門賊金沙彌呼應) 남로병마사격지참칠천여급(南路兵馬使擊之斬七千餘級)“이라는 기록이 있어, 지금의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에 있는 초전(草田) 마을“을 효심의 반란 본거지로 보고, 1193년(명종 23년)과 1194년(명종 24년) 두 차례의 토벌 사건의 현장으로서 결부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대규모의 초적 집단이 둔소(屯所)로 삼아 막강한 관군과 싸울만한 지형적(地形的) 조건이 되지못할 뿐 아니라 7천여 급(級)의 초적의 목을 베었다는 1194년 4월 전투 현장에 대하여는 고려사 명종(明宗) 24년 조(條)에 ”밀성(密城) 저전촌(楮田村)“이라는 명백한 기록이 있는 만큼 지금의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龍田里)“가 정확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봉리 초전마을의 효심 반거지설(叛據地設)”은 더욱 확실한 출전(出典)과 앞으로의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고려사절요』의 “명종 24년(1194)” 『2월에, 좌도병마사 최인(崔仁)이 날랜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적을 칠 때, 강릉성(江陵城)에 이르러 복병하고 기다렸다』기록을 볼 때 좌도병마사 최인(崔仁)이 밀성 등 운문산 일대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역을 넘어 강원도 지역까지 토벌 적전을 광범위하게 펼쳤다는 것을 볼 때, 김사미와 효심의 주력부대를 운문산과 밀성(밀양) 저전촌 일대에 결집시켜 최후의 항전을 벌인 것으로 보며, 이러한 사유로 볼 때,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서 효심의 난이 울산 초전(草田)에서 일어났다는 기록은 오기(誤記)로 보인다. 또 초전(草田)은 저전(楮田)과 글자의 형상(形象)과 음(音)이 유사(類似)하여 혼돈을 일어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며, 이러한 지적은 「밀양지(密陽誌)」에서도 있으며, 밀양의 향토사학 자료에도 보인다.
이 기록을 볼 때, 필자의 생각은 농민군이 봉기한 지역은 경상도 전역으로 광범위하며, 좌도병마사의 남적(南賊) 소탕 영역은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밀성 저전(楮田). 청도 운문(雲門). 울산 초전(草田) 지역과 경상우도(慶尙右道)의 경북 성주(星州) 초전(草田)뿐만 아니라, 강원도의 강릉성(江陵城)까지이며, 이러한 모든 지역에서 관군이 진압작전을 펼쳤다고 보아진다.
따라서 경북 성주군 초전. 울산 초전 등 경상도 각지의 농민군들이 마지막으로는 운문지맥의 밀성[密城 : 고려시대 밀양의 군호(郡號)]과 운문사 일대로 몰리게 되었다고 보여지며, 경상도 농민군 최후. 최대의 웅거지이자 내몰린 지역이 운문지맥 밀성(밀양) 저전촌 일대라는 것이다
“운문사를 근거지로 한 김사미 농민군이 먼저 패전하고 그 잔당(殘黨)이 효심의 농민군에 합세한 것”을 보면, 농민군의 최후의 항전지는 밀성(密城)의 저전(楮田 : 초전 草田)이라는 것이 더욱 명백해진다.
지형적으로 볼 때 경북 청도군 운문면과 경남 밀양시 산내면(용전리 저전촌)은 하나의 운문지맥(雲門支脈)으로 바로 연결된 농민군이 웅거하기에 적합한 천험(天險)의 산악지역이며. 특히 가지산(迦智山 : 밀성.언양.청도 접경). 운문산(雲門山 : 밀성.청도 접경). 억산(億山 : 밀성.청도 접경). 구만산(九萬山 : 밀성.청도 접경). 종지봉(種子峰 : 밀성.청도 접경). 오치(烏峙 ; 밀성 저전촌 부근). 소천봉(小天峰 : 밀성 저전촌 부근). 용암봉(龍岩峰 : 밀성 저전촌 부근). 백암산(白岩山 : 밀성 저전촌 부근). 천지(天池 : 밀성 저전촌 부근). 중산(中山 : 밀성 저전촌 부근 도덕봉). 낙하산(落霞山 : 밀성 저전촌 부근). 보두산(步斗山 : 밀성 저전촌 부근)은 김사미 농민군이 웅거한 운문사(雲門寺) 일대와 산악으로 연결된 지역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밀성(密城)”은 고려 명종대의 밀양의 명칭(군호 : 郡號)이다
밀양지(密陽誌) 489P 이건형의 저전촌지(楮田村址)에는 『효심은 이에 앞서 김사미의 항복으로 전세(戰勢)가 불리하게 되자 자기의 군세를 총동원하는 한편 운문의 잔당들까지 합세하여 관군에 대한 최후의 항전(抗戰)을 기도(企圖)한 것이다』
3. 밀양(密陽)의 군호(郡號) 및 領域 변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효심(孝心)”이 “밀성(密城)“에서 패(敗)하여 사로잡혔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 밀주(密州)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밀성(密城), 밀주(密州)”가 “밀양(密陽)”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 밀양의 군호(郡號)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 밀양의 군호(郡號) 변천(變遷)
밀양 관련 지리서 등을 살펴보면 밀양의 명칭(郡號)은 다음과 같이 변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 三韓時代(3세기) (密陽地名攷)
2) 추화군(推火郡) : 新羅時代(6세기 初 智證王代) (密陽地名攷)
※ 한자 표기에 따라 미리미동국(“밀불” 등)에서 추화군(推火郡)으로 변경
3) 밀성군(密城郡) : 新羅 景德王 16년(757년) 以後 (密陽地名攷)
4) 밀주(密州) : 成宗 14년(995년), 밀성군수, 밀주자사(密州刺史), (密陽地名攷)
5)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 : 高麗 顯宗 9년(1018년) (世宗實錄地理志)
6) 귀화부곡(歸化部曲) : 忠烈王 2年(1276년) (密陽地名攷)
※ 趙仟殺郡守以應珍島叛賊三別抄降爲歸化部曲/鷄林府 隸屬 (世宗實錄地理志)
7) 밀성현(密城縣) : 歸化部曲에서 郡號 회복 과정 (密陽地名攷)
8) 밀성군(密城郡) : 歸化部曲에서 郡號 회복 과정 (密陽地名攷)
9) 밀양부(密陽府) : 恭讓王 2年(1390년) (世宗實錄地理志)
※ 曾祖益陽侯朴氏內鄕陞爲密陽府 (世宗實錄地理志)
10) 밀양군(密陽郡) : 朝鮮 太祖 元年(1392년) (世宗實錄地理志)
11) 밀양부(密陽府) : 太祖 甲戌(1394년) (世宗實錄地理志)
※ 郡人宦者金仁甫入侍大明奉使而來復陞爲密陽府 (世宗實錄地理志)
12) 밀양군(密陽郡) : 太宗 元年(1401년) (世宗實錄地理志)
13)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 太宗 乙未(1415년) (世宗實錄地理志)
※ 千戶以上陞都護府縣二守山本穿山部曲豊角本上火村右二縣高麗改今名鄕一來進部曲豆也保伊冬音今音勿 (世宗實錄地理志)
14) 밀양군(密陽郡) : 高宗 32년(1895년),대구부 밀양군 (密陽地名攷)
15) 밀양군(密陽郡) : 高宗 建陽 元年(1896년),경상남도 밀양군 (密陽地名攷)
16) 밀양시(密陽市) : 1989. 1. 1 (密陽地名攷)
17) 응천(凝川), 밀산(密山) : 조선시대 이전 異名 (密陽誌,密州誌 등)
※ 군호(郡號)는 世宗實錄地理志 및 密陽地名攷, 密陽誌 등에 의함
나. 밀성(密城)의 영역(領域) 변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향토지리서 등을 살펴보면 김사미와 효심의 난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 당시 밀양의 군호인 밀성의 영역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고려초(高麗初)에는 중앙권력(中央政府)의 권력이 포략(胞弱)하고 지방에 대한 통치체제(統治體制)가 확립되지 못하여 대체로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주군(州郡)을 그대로 두게 되었다. 밀양(密陽)도 “신라(新羅)의 밀성군(密城郡)”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983년 성종(成宗) 2년에 비로소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였고 이어서 14년에는 다시 전국을 4 도호부(都護府) 10 도(道)로 구분했는데 지금의 경상도(慶尙道) 지방은 영동도(嶺東道). 영남도(嶺南道). 산남도(山南道)의 3도로 나누어지고 밀성군(密城郡)은 경주(慶州)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밀성군(密城郡)을 밀주(密州)로 고쳐 일단 격(格)을 높이고 군수(郡守)를 자사(刺使)로 개칭(改稱)하였다. 그리고 주위의 여러 현(郡縣)들을 관하(管下)에 두었는데 무릇 속군(屬郡)이 2개, 속현(屬縣)이 4개나 되었다
1) 속군(屬郡) : 창녕군(昌寧郡), 청도군(淸道郡)
2) 속현(屬縣) : 현풍현(玄風縣 : 現 경남 창녕군), 계성현(桂城縣 : 現 창녕군), 영산현(靈山縣 : 現 창녕군), 풍각현(豊角縣 : 現 경북 청도군)
위의 6 개의 군현(郡縣) 중에서 청도군(淸道郡)은 신라(新羅) 때의 속현(屬縣)인 오악(烏岳). 형산(荊山). 소산(蘇山)이 합쳐진 것이고, 영산현(靈山縣)은 마찬가지로 종래의 속현(屬縣)인 상약(尙藥) 그것이다. 그러나 창녕군(昌寧郡)과 현풍(玄風). 계성(桂城). 풍각(豊角) 3현(縣)은 모두 새로 귀속(歸屬)된 것들이다.
밀주(密州) 자체가 큰 고을인데다가, 이 2군(郡) 4현(縣)을 관할하는 밀주자사(密州刺使 : 밀주를 다스렸던 최고의 地方官)의 권위(權威)는 실로 대단하였다. 뒤에 현종(顯宗) 때에 밀주자사(密州刺使)는 다시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로 개칭(改稱)되었지만 그 권위(權威)는 여전하였다
당시 밀주(密州)의 전결(田結 : 조세를 부과할 수 있는 토지 면적) 결수(結數)와 공부(貢賦) 관계가 어떠했는지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 주현군(州縣軍)에 의하여 밀성도내(密城道內)의 병종(兵種)과 군액(軍額)을 살필 수 있다. 밀성도(密城道)라는 도(道)는 방면(方面)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밀성방면(密城方面) 내에 있는 군대(軍隊)라는 것이다
4. 慶尙道 道別軍額과 民亂 鎭壓 官軍 추정
『高麗史』 1990, 韓國文獻硏究所 編, 서울亞細亞文化社 刊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三 卷 第八十三 二十六 ~ 二十七에는 경상도의 군액(軍額 : 軍人의 숫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효심의 난 때 처음에는 남로착적병마사가 밀성을 비롯한 주변 주군(州郡)의 군인을 동원했을 것으로 보이며, 지방의 군대로 농민군 진압이 불가능하자 중앙의 경군(京軍)을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경상도(慶尙道) 군현(郡縣) 주둔 총 병력 : 13,148人이며, 보승(保勝) 2,610명, 정용(精勇) 4,819명 一品 5,702명, 보승행수병(保勝行首幷) 17명이다. 도별 군액은 다음과 같다
가.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에 기록된 도별 군액(軍額)
1) 蔚州道內 : 保勝(134人), 精勇(145人), 一品(181人)
2) 梁州道內 : 保勝(57人), 精勇(147人), 一品(173人)
3) 金州道內 : 保勝(188人), 精勇(278人), 一品(431人)
4) 密城道內 : 保勝(245人), 精勇(427人), 一品(532人)
5) 尙州牧道內 : 保勝(665人), 精勇(1,307人), 一品(1,241人)
6) 安東大都護道內 : 保勝(591人), 精勇(953人), 一品(1,018人)
7) 京山芙內 : 保勝(54人), 精勇(801人), 一品(647人)
8) 晉州牧道內 : 保勝(277人), 精勇(404人), 一品(730人)
9) 陜州道內 : 保勝(373人), 精勇(229人), 一品(448人)
10) 巨濟道內 : 保勝(-人), 精勇(58人), 一品(128人)
11) 固城道內 : 保勝(26人), 精勇(53人), 一品(109人)
12) 南海道內 : 保勝行首幷(17人), 精勇(17人), 一品(64人)
위 군사 편제 중, “밀성도내(密城道內)”는 지금의 밀양, 청도, 창녕을 관할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밀양, 청도, 창녕의 군정(軍丁)을 전부 합하여 병종별(兵種別)로 편성한 것 같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세종실록지리지 밀양도호부편에 기록된 호구수와 군액을 위 고려시대 밀성도내 군액과 비교해 보면, 인구의 대규모 이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 인구의 자연증가분으로 추정해 보면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본부와 수산현과 풍각현 2개의 현(縣)의 호구수(戶口數)로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편성된 밀양도호부의 군액을 충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조선초기의 밀양도호부 호구수는 본부(本府) 1,612호(戶) 5,522구(口)이며, 수산현(守山縣)은 93호(戶) 356구(口)이고, 풍각현(豊角縣)은 294호(戶) 907구(口)이다
효심의 난 등 민란 진압을 위해 처음에는 중앙에서 병마사(兵馬使)와 휘하 장군들을 파견한 것은 고려사절요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후 관군의 전세가 불리하자 중앙군을 개경(開京)에서 먼 남도(南道) 밀성(密城)까지 동원했다는 것을 주변 주.현(州縣)의 농민군 진압 활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군제(軍制) 상황에서 1품군(品軍)은 농민으로 편성된 노역부대(勞役部隊)인 만큼, 또 전국적으로 농민이 대량 유망(流亡) 상태인 점을 감안 할 때, 1품군은 거의 다 해체된 것 같고, “효심의 난 진압” 등을 위해 밀성도내(密城道內) 병력을 동원하였을 때도 동원 가능한 보승(保勝)과 정용(精勇)을 동원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경군(京軍)이 합세하여 농민군을 도륙했다고 보여진다
5. 孝心의 亂 前後 中央과 密城(密州)의 시대적 배경
『밀양지(密陽誌)』에 기록된 다음의 글은 밀양에서 일어난 대 사건인 “효심의 난”의 역사적, 시대적, 지리적, 사회적 배경을 파악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밀양 향리층(鄕吏層)의 생활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므로 밀양지(密陽誌) 등에서 요약 발췌하고, 일부 내용은 필자가 추가하여 게재를 한다. 出處 : 密陽誌 42쪽 ~48쪽
가. 2016년 밀양 “저전(楮田), 골안마을” 풍경
밀양지에 기록된 고려 효심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대상을 들여다 보기 전에 효심 농민군과 관군의 대 전투가 벌어졌던 저전촌과 오치마을 등을 필자가 다음과 같이 먼저 한 번 둘러보았다
법정리(法定里)인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의 남쪽에는 용암마을 등이 있고, 북쪽에는 저전마을. 골안마을. 오치마을 등이 있다. 효심이 관군에 사로잡혔던 곳이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소재 “저전.골안마을 일대”이다. 필자는 가끔 이 지역을 지나다닌다.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어느 가을날, "저전 골안마을"의 풍경은 무척이나 평화롭다. 저전마을에서 오치마을 쪽으로 산길을 오르다 보면 골안마을이 나온다. 저전마을 일대는 효심농민군과 관군과의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저전마을에서 오치마을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산중(山中) 마을인 골안마을에서도 대 혈전이 벌어졌다. 효심은 저전촌에서 관군과 항전을 하다 사로잡혔고, 상동면 오실마을. 승학산 역적평지. 도곡리. 천지. 백암산 등 운문지맥에서 효심 휘하 농민군 7,000명이 관군에게 도륙을 당했다. 오치마을로 오르다가 뒤로 돌아다 보면 동천(東川) 건너 멀리 우측으로 뻗은 승학산 산정(山頂)의 평지(平地)가 보인다. 그곳 또한 관군과 효심농민군이 대회전을 한 역적평지(逆賊平地)이다
[사진 1] 효심(孝心)의 마지막 항전지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저전(楮田)"
나. 고려(高麗) 밀주(密州) ~ 귀화부곡시대(歸化部曲時代)]
출처 : 密陽誌 42 ~48
고려(高麗) 전기(前期)에 있어서 수군(首郡) 개성(開城)을 포함한 중부 이북은 거란(栔丹). 여진(女眞) 등 북방민족(北方民族)의 구량(寇椋)과 압박(壓迫) 때문에 전쟁(戰爭)과 방비(防備)에 따른 출혈(出血)이 심하였고, 뒤이어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 무신(武臣)의 정변(政變)으로 소란(騷亂)과 희생(犧牲)이 연속되었다. 이에 비하여 남쪽 지방은 그런 피해가 적었으므로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 속에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밀양(密陽)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물론 천재지변(天災地變)이 가끔 일어나기는 하였다. 예를 들면 1035년 정종(靖宗) 원년(元年)과 1061년 문종(文宗) 15년 양차(兩次)에 걸쳐 대수(大水)로 인해[낙동강 洛東江의 창일(漲溢)인] 수산(守山)을 비롯한 속현(屬縣)인 창녕(昌寧) 땅의 주민들이 큰 손실을 입었고(고려사 高麗史 권 卷80 식화 食貨3)
1025년 현종(顯宗) 16년에는 또 청주(淸州). 안동(安東) 등지와 함께 밀양(密陽)에 지진(地震)을 당한 것이 조정(朝政)에 보고된 바 있었다. [고려사 (高麗史) 권(卷) 5 현종세가(顯宗世家)]
그러나 이러한 자연재해(自然災害)는 외침(外侵).내란(內亂)에 의한 출혈(出血)과 희생(犧牲)에 비하면 별 것이 아니었다.
다. 鄭仲夫 亂을 피해 開城을 脫出한 林椿의 密州 유숙기(留宿記)
[ 밀양지(密陽誌) 발췌 내용 ]
무신정변(武臣政變 1170년)에 죽지 않고 개성(開城)을 탈출(脫出)한 방랑시인(放浪詩人) 임춘(林椿)은 이곳(밀양 密陽)에 와서 오래 머물면서, 여러 시편(詩篇)을 통하여 이 고장의 자연 풍광(自然風光)과 인재(人才). 문물(文物) 등 당시의 정황(情況)을 잘 표현해 놓았는데, 그의 오언시(五言詩) 유밀주서사(遊密州書事)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밀주(密州 : 밀양)에서 놀면서 보고 듣고 한 일을 적는다” 라는 이 시는
첫머리에 山郡多佳麗 이 “산군(山郡)은 가려(佳麗)한 곳이 많아 명성(名聲)이 일방(一方)의 으뜸”이라고 말한 뒤에 지기(地氣)는 신령(神靈)스러워 인재(人才)가 걸출(傑出)하고 전야(田野)는 비옥(肥沃)하여 해마다 풍년(豊年)인데 교통은 열려 주(舟). 거(車)가 집합하는 요충(要衝)이고 풍속(風俗)은 순후(淳厚)하여 예의(禮義)의 고장이라는 것, 선비가 많기로 촉군(蜀郡)과 같고 경치(景致)는 뛰어나 항주(杭州)를 능가한다, 고까지 칭찬하였다.
그는 이어서 사시절(四時節)의 취죽(翠竹)과 천문(千門)의 세류(細柳),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배경으로 해륙진미(海陸珍味)의 배반(杯盤)과 궁상묘곡(宮商妙曲)의 관현(管絃)을 즐기는 것을 묘사(描寫)하였다. 당시 중앙(中央) 무신(武臣)들의 피비린내 나는 정권 싸움을 생각하면 임춘(林椿)의 시(詩) 속에 나타나는 이 고장(밀양)의 모습은 마치 태평성대(太平聖代)와 같은 느낌이다.
임춘(林椿)은 제영남사(題嶺南寺). 영남사죽루(嶺南寺竹樓) 등의 시(詩)도 있는데, 제영남사(題嶺南寺)는 고시체(古詩體)로서 그 중에 물 위에 뜬 도화(桃花)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케 하는 “수범도화출동중(水泛桃花出洞中)으로 시작하는 시에 ”수양버들 속에 천백(千百)의 가옥(家屋)들이 해 저문 교외(郊外)에 한가롭게 돌아오는 우마(牛馬)들과 그 번화(繁華)스럽고 평화스러움“을 한 결 더 잘 보여 준다. 임춘(林椿)은 이러한 자연풍광(自然風光)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이 고장의 인재(人才). 문물(文物)에 관해서도 찬미(讚美)를 마지 않았다. 이는 효심의 난이 일어나기 전의 향촌(밀양) 상류층의 생활상인데, 평민, 하층민의 생활상은 알 길이 없어 매우 안타깝다. 다만 개경의 창과 칼로써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무신정권하(武臣政權下)에서 이 고장의 상류층 사람들의 문아(文雅)와 예절(禮節)에 접한 임춘(林椿)은 충심으로 감열(感悅)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는 반대로 수도(首郡) 개성(開成)을 비롯한 전국 각 지방의 정세(政勢)는 날로 동요(動搖)와 불안(不安)으로 흘러갔다. 무신정권(武臣政權)이 등장한 뒤에 상하(上下)의 신분질서(身分秩序)가 크게 문란(紊亂)해져서 비록 미천(微賤)한 자라도 기회를 잘 잡으면 정부(政府) 요위(要位)에 오를 수 있었다. 한 때 정권(政權)을 잡았던 이의민(李義旼)은 연일(延日) 사비(寺婢)의 소생(所生)이었으며 그 이전에도 노비(奴婢) 출신(出身)으로 공경대부(公卿大夫)가 된 자가 많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 노비(奴婢). 천민(賤民)들의 반란이 각처에서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1198년 만적(萬積)의 난(亂)은 노예 해방(奴隸解放)의 격렬한 외침이었다. 수도(首都) 개경에 있어서의 만적(萬積)의 난(亂)은 실패로 끝났지만 지방(地方)에 있어서의 민중(民衆)의 소요(騷擾)는 일파이파(一波二波) 그칠 줄 몰랐다. 특히 동남지방(東南方面)에서의 군도(群盜)의 봉기(蜂起)와 창궐(猖獗)은 국가의 행정력(行政力)을 거의 마비시키다시피 하였다.
강원도(江原道)의 명주(溟洲). 삼척(三陟)과 경상도(慶尙道)의 경주(慶州). 의성(義城)이 한 때는 적(賊)에게 점령(占領)당했는가 하면, 진주(晉州)에서는 이민간(吏民間)의 폭동(暴動)으로 살육(殺戮)이 적행(籍行)되었고 청도(淸道)에는 운문산(雲門山)을 근거지(根據地)로 한 김사미(金沙彌) 일당(一黨)이 1198년에 이어, 1202년에 재차 반기(叛旗)를 들고 나왔다.
민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가 없었을 것이며 쌓이고 쌓인 사회의 모순(矛盾)이 전국적 풍조(風潮)의 파급(波及)에 의해 촉발(觸發)된 것이다. 표면적 안정(安靜)과는 달리, 내부로부터 위기(危機)의 온양(醞釀)이 오래된 것이다.
이 무렵 주앙(中央)에서는 모든 반대 세력을 제거(除去)하고 대권(大權)을 한 손에 잡아 그 나름의 정국(政局)을 주도하면서 지방의 반란(叛亂)을 철저히 진압(鎭壓)하였다. 이리하여 1176년경으로부터 1205년경에 이르기까지 무려 30년 동안 연달아 일어났던 각처(各處)의 반란이 일단 종식(終熄)되었다.
고려(高麗)는 내우(內憂)가 겨우 종식되자 또 외환(外患)이 시작되었다. 광고(曠古)의 외환(外患)이라 할 몽고(蒙古)의 대구(大寇)가 쳐 들어온 것이다
라. 30년간 몽고침입과 抗蒙 三別抄軍에 呼應한 밀성인(密城人)
효심의 난이 진압된 후 즉, 고려(高麗)는 내우(內憂)가 겨우 종식되자 또 외환(外患)이 시작되었다. 광고(曠古)의 외환(外患)이라 할 몽고(蒙古)의 대구(大寇)가 쳐 들어온 것이다. 1231년 고종 18년으로부터 시작된 몽고의 兵火는 전후 또한 30년에 가까운 장기간에 걸친 것으로 국토의 대부분을 황폐(荒廢)시킬 정도의 큰 상처를 입혔다. 이 과정에서 최씨정권은 도괴(倒壞)되고 고려왕실 및 타협주의 관료들의 책동으로 몽고에 대한 講和와 강화도에서 개성으로의 환도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중앙 최고의 위치에서 그것을 종합하고 집중적으로 파악해야 할 무신정권은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점차 역량의 한계를 노정(露呈)하면서 오직 후방에서 소비적인 생활과 권력 유지만을 일삼아오다가 필경 내부 분열에 의하여 최씨정권은 도괴(倒壞)되고 고려왕실 및 타협주의(妥協主義) 관료들의 책동으로 몽고에 대한 강화(講和)와 개성으로의 환도(還都)가 결정되었다
몽고에 대한 일방적인 굴종(屈從)으로 고려 국민의 27.8년간의 장기 항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고려왕실과 반동적(反動的) 관료(官僚)들의 처사는 국민에 대한 엄청난 배신이며 국민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지금껏 전쟁의 주력부대였던 삼별초군(三別抄軍)의 장교들이 장군 배중손(裵仲孫)의 지휘아래 분연히 궐기(蹶起)하였다. 우선 개성 환도를 거부하고 왕족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擁立)하여 정부를 조직한 뒤에 관리 군인 및 그 자녀 노비 기타 공사 재화(財貨)를 천여척의 배에 싣고 남하하여 진도(珍島)에 본거(本據)를 정하고 남해 거제 제주 등 30여도를 지배하여 일부 해상왕국(海上王國)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전국민을 향하여 몽고에 대한 최후까지의 항전을 호소하였다. 이때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백성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일어났다. 그동안 몽고의 병화(兵禍)에 대한 민족적 적개심이 격렬한 데다 삼별초군의 행동이 대의명분에 합치했기 때문이다
이 위세에 놀란 지방 수령들은 바람에 쓰러지듯 동조하였고, 개중에는 진도로 찾아가 새 왕을 알현(謁見)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수령(守令)들은 아주 고립되거나 백성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대하여 밀양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
고려사와 여러 문적(文籍)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당시의 군인인 방보(方甫).계년(桂年).박평(朴平).박경순(朴慶純).박경기(朴慶祺) 등이 고을사람들을 숙취하여 삼별초군에 호응하려 하는데 군(郡)의 부사[副使 : 부군수(副郡守)]인 이이(李頤)가 말을 듣지 않아 드디어 그를 죽이고 개국병마사(開國兵馬使)라 칭하여 여러 군현에 첩문(牒文)을 발송하는 한편, 다시 그 당(黨)을 보내 비협조적인 청도감무(淸道監務) 임종[林宗:혹은 최양수(崔良粹)]를 죽였다. 마침 본군(本郡) 출신인 조천(趙阡)이 일선(一善 = 선산(善山) 현령(縣令)으로 가 있었는데 방보(方甫) 등은 조천에게 연락하여 그를 귀향시킴과 동시에 함께 거사(擧事)하게 되었다
조천은 현직 지방관으로 관인(官人) 신분의 소유자인 만큼 지방사회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이 컸으므로 우두머리로 삼은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안렴사(按廉使 : 지금의 도지사) 이숙진(李叔眞)은 겁이 나서 금주(김해)로 도망주해 버렸다. 방보 등의 행동이 불법이고 반역(叛逆)이라고 생각한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지금의 김해시장) 김훤은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이 사건은 이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의 밀양에 대한 고려 정부의 보복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주민들은 모두 전전긍긍하였다. 고려 정부는 1276년 충렬왕 2년 에 드디어 밀양 전체를 반역향(叛逆鄕)으로 규정, 밀성군을 일반 주군(州郡)의 서열에서 완전히 격하시켜 귀화부곡으로 만들어 계림부(鷄林府:경주)에 예속(隸屬)하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 밀양으로서 전무후무한 큰 변고(變故)였다. 부곡이라는 것은 원래 신라 때 주.군(州郡)을 편성하면서 인구와 전정(田丁)이 한 개의 현(州郡制에 있어서 최소의 행정단위)으로 만들기에 부족한 지방은 향 또는 부곡으로 만들어 군(郡)이나 현(縣)의 임내(任內 : 관하 管下)에 두었던 것이다
부곡에는 중앙에서 파견돼온 관원이 없고 오직 부곡의 이(吏)가 있어(部曲長이라 칭함) 부곡의 행정을 맡아 있어면서 상급기관인 군현의 리(吏)에게 통제를 받아야 했다. 지방행정 말단의 하나의 단위이긴 하지만 독립성이 전혀 없고 군.현(郡縣)에 예속된 존재일 뿐이었다
밀양 자체가 수많은 향(鄕)과 부곡(部曲)을 경내에 가지고 있는 터에 이제 고을 전체가 송두리째 부곡(部曲)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제 지군사(知郡事:郡守)도 부사(副郡守)도 없어지고 오직 귀화부곡(歸化部曲)의 리(吏) 즉 부곡장이 계림부(鷄林府=경주)의 통제 아래 조세(租稅) 역력(力役) 등에 관한 사무를 보게 이르렀다
부곡은 여러 종류가 있어 일반 양민이 사는 부곡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부곡 중에는 포로(捕虜) 역적(逆賊) 특수천민(特殊賤民)들의 부곡이 끼어 있어서 대체로 부곡은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귀화부곡의 경우 귀화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화외(化外)의 백성으로 다시 왕화(王化)에 돌아오게 하려는 엄혹(嚴酷)한 처벌이었던 만큼 주민들의 고통이 심하였다. 부곡인(部曲人)이 되어 불명예스러운 것은 차치하고 계림부(鷄林府)쪽으로부터 예속인시(隸屬人視)에 따른 부당한 징수(徵收)와 주구(誅求)에 견딜 수 없었다
소복별감을 둔지 얼마 뒤에 귀화부곡에서 간신히 밀성현으로 승격되었고, 1285년 충렬왕 11년에 비로소 밀성군(密城郡)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한번 입은 오명(汚名)은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특히 정부 지배층의 입장에서 늘 백안(白眼)으로 보아 왔다. 고려를 거쳐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그러하였다
삼별초군(三別抄軍)의 행위를 의거로 인정하고 그들의 최후 왕쇄지(王碎地)인 제주(濟州)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우게 된 오늘의 사관(史觀)으로 볼 때에 삼별초군(三別抄軍)에 호응한 방보(方甫) 등의 행동도 또한 의거(義擧)에 해당하는 것이며, 아름다운 밀주(密州)를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격하(格下)시킨 고려정부(高麗政府)의 보복(報復) 처사(處事)가 비열한 짓일 뿐이다
6. 효심(孝心).김사미(金沙彌) 난(亂) 발생지 연계성 고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을 살펴보면 “효심(孝心)의 난(亂)”과 “김사미(金沙彌)의 난(亂)”은 같은 시기에 밀성(밀양)과 경북 청도에서 일어났다. 청도와 밀성(밀양)은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험준한 운문지맥(雲門支脈)을 남북으로 경계하면서 북쪽은 경북 청도이고 남쪽은 경남 밀양(밀성)이다. 즉, 운문산(雲門山) 산마루 하나 사이로 서로 연접(連接)해 있어 옛날에는 지맥(支脈)의 수많은 산중대로(山中大路)를 통해서 왕래했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진 2] 효심(孝心)과 김사미(金沙彌)의 난(亂) 발생 지역 위치도
관군의 토벌작전으로 김사미가 먼저 항복하고 그 잔당(殘黨)이 운문지맥의 고개를 넘어 효심 농민군에 합류했다는 기록을 볼 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효심의 난 발생지를 “울산 초전(草田)”이라 기록한 것은 오기(誤記)로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운문사(雲門寺)와 밀양 저전촌은 운문산(雲門山)을 경계로 하고 있다.
후세 일부 사람들은 효심의 난 발생 장소를 저마다 밀양 산내면 저전촌(楮田村)과 울산 초전(草田), 밀양 무안면 화봉리 초전(草田), 경북 성주 초전(草田) 등으로 모호하게 기록하거나 거론하고 있어, 이를 근거로 오늘날의 역사학자 또는 각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 각각의 장소를 유력한 장소로 주장하고 있으나, 밀양 산내면 저전촌(楮田村)을 제외한 나머지 주장들은 근거가 없거나 현실성이 없는 주장이다. 운문산과 운문지맥으로 바로 이어진 밀양 산내면.상동면.산외면 일대가 효심의 난 발생지가 맞다는 것을 필자가 조사한 문헌의 내용과 이 일대의 전해오는 이야기와 유적지 등을 통해 본고(本考)에서 입증한다
“효심(孝心)의 난(亂)” 발생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운문지맥의 경남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와 밀양시 산외면 희곡리와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매화리. 도곡리. 고정리,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김사미(金沙彌)의 난(亂)”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雲門寺) 일대에서 일어났다. 또 운문지맥은 경남 밀양시 산내면과 경북 청도군 운문면과 금천면, 매전면과 경계로 하고 있으며, 특히 운문지맥상의 아랫재는 밀양시 산내면과 청도군 운문면을 경계하는 대표적인 고개로 근세(近世)까지만 해도 이 고개는 양산 통도사와 밀양 표충사, 청도 운문사, 경주 불국사를 이어주는 산중대로(山中大路)이다.
또 효심 농민군과 김사미 농민군이 웅거한 운문지맥(雲門支脈)의 주요 산명과 산성. 구간 등을 살펴보면 가지산(迦智山)에서부터 운문산(雲門山)과 석골사(石骨寺), 억산(億山), 구만산(九萬山), 구만계곡(九萬溪谷), 오치(烏峙:오태)마을, 저전촌(楮田村), 소천봉산성(小天峰山城), 대암산성(臺巖山城), 용암봉(龍岩峰), 백암산(白岩山), 천지(天池), 중산(中山), 낙하산(落霞山,낙화산:洛花山)을 거쳐 보두산(步斗山), 보두산성(步斗山城)까지 이어지며, 오치(烏峙:오태)마을부터 저전촌(楮田村), 소천봉산성(小天峰山城), 대암산성(臺巖山城), 용암봉(龍岩峰), 백암산(白岩山), 천지(天池), 중산(中山), 낙하산(落霞山,낙화산:洛花山)을 거쳐 보두산(步斗山), 보두산성(步斗山城)까지 이다
7. 이건형(李建衡) 초전의고(草田疑考) “저전촌지(楮田村址)”
다음은 『밀양지(密陽址)』에 게재된 저전촌지 전문(全文)내용이다
『저전(楮田)은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를 구성하는 산중(山中) 촌락이다. 고려 명종대의 대표적인 초적(草賊)의 괴수 효심(孝心)의 마지막 항전지(抗戰地)이며 관군(官軍)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적지(戰迹地)이다 (이건형 李建衡 초전의고草田疑考에 依함). 고려는 무신(武臣)정권이 성립된 이후 문민체제 대신에 무인(武人)들에 의한 독제체제가 등장하였다
무력적인 권력기반은 토지의 국유(國有) 원칙을 무너뜨리고 농민들의 생활을 궁핍(窮乏)으로 몰아넣었으며, 정권의 유지 장악을 위하여 취해진 그들의 강권정치는 종전의 무신귀족정치보다 더 포악(暴惡)한 것이 되었다. 무인들은 비록 정권을 잡기는 하였으나 내부의 분열과 반목으로 지방의 구석구석까지는 침투하지는 못하였다.
지배질서의 문란은 곳곳에서 농민봉기를 불러 일어켰고, 천민계급의 반란도 잇따랐다. 그러던 중 1192년(明宗22년)을 전후하여 경상, 전라, 충청도 일대에 흉년이 들자 기민(飢民)의 속출을 계기로 민심은 더욱 동요되고 각지의 망명(亡命) 초적(草賊) 집단들도 유랑(流浪) 농민과 합세하여 치열한 반란 봉기를 유발하였다
초적들 중에서도 가장 맹렬한 것이 운문(雲門, 경북 청도)에 웅거(雄據)한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을 근거로 한 효심(孝心)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유민(流民)을 규합하여 주현(州縣)을 약탈하고 관군과도 정면으로 충돌할 수 있는 강력한 무력집단이었다
1193년(명종23년) 7월에 조정에서는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에 명하여 장군(將軍) 이지순[李至純, 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등을 인솔하여 남도(南道)의 초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지순이 도리어 적군에 내응하여 관군은 일대 패배를 당하고 책임자인 전존걸은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11월에 상장군(上將軍)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로 삼고 대장군(大將軍) 고용지(高湧之), 장군(將軍) 김존인(金存仁).사양주(史良柱) 등을 인솔하여 남방(南方)의 초적을 정토(征討)케 한 결과, 이듬해인 1194년(명종 24년) 2월에 운문의 초적 수령인 김사미(金沙彌)가 투항하여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운문의 초적이 항복한 후에도 관군의 토벌(討伐)은 진행되었으나 또 한 사람의 괴수(魁首)인 초전(草田)의 효심은 좀처럼 투항하지 아니하고 장군 사량주는 그들의 도당(徒黨)에게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관군은 계속적인 토벌을 진행하여 1194년 4월 7일에 이곳 저전촌(楮田村)에서 반적(叛賊)을 완전 포위하고 일대 격전을 벌인 결과 초적 7천여 명을 사상시키고 많은 병기와 우마(牛馬)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밀성(密城) 저전촌(楮田村)에서 관군에 토벌된 초적은 대개가 효심 배하(配下)의 민중군사(民衆軍士)로서 7천여 명이 도륙되었다는 기록은 이 전투가 얼마나 격심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아마도 효심은 이에 앞서 김사미의 항복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자기의 군세를 총동원하는 한편 운문의 잔당들까지 합세하여 관군에 대한 최후의 항전(抗戰)을 기도(企圖)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전을 계기로 효심의 군세는 하루아침에 꺾이어 이해 8월에는 일당인 이순(李純)을 관군에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고, 4개월만인 12월 7일에 더디어 효심이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에 체포됨으로서 남방 초적의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으니, 관군이 토벌을 시작한지 전후 2년이 걸린 셈이다
평소에 전투훈련이 없던 유망(流亡) 농민들이 2년간이나 관군을 상대로 싸워서 조정(朝廷)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군사집단이 얼마나 큰 것이고, 그 항전이 얼마나 결사적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또 그로 인하여 당시 위정자(爲政者)들에게 일대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교훈을 남긴 사건이라 하겠다
김사미의 운문산과 효심의 저전촌이 초적의 거점(據點)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으로 관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천험적(天險的) 요새(要塞)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 두 곳의 요새는 당시 경주.울산.언양.김해 등지를 연결하는 교통로의 간도(間道)로서 초적들이 많은 도당을 거느리고 활동하기에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명종23년 추(秋) 칠월 조(條)에 시남적봉기기극(時南賊蜂起其劇) 김사미운문효심초전(金沙彌雲門 孝心據草田) 소취망명표략주현(嘯聚亡命標掠州縣)이라고 하여 초전(草田)을 효심의 웅거지(雄據地)로 기록하고 있는 바, 이 초전(草田)은 현재 그 소재지가 확인되지 않는다. 경북 성주(星州) 초전설(草田說), 울산설(蔚山說)이 있고, 밀양(密陽) 화봉리설(華封里說)도 있다. 초전(草田)과 저전(楮田)의 발음 중, 의사점(疑似點)이 지명 혼동의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이곳(지금의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저전) 저전촌(楮田村) 서쪽은 상동면 도곡리(道谷里)와 접경(接境)하고 있는데 도덕령(道德嶺 : 산내면과 상동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라는 산이 분계(分界)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 발간된 밀주지(密州誌)에는『도덕령상세칭천지주파랙십삼간구폐위경지동인화(道德嶺上世稱天池周八白十三間久廢爲耕地洞人貨) 즉, 오래 전에 동인(洞人)이 돈을 들여 천지(天池)를 폐하고 경작지로 했다. 지이축제저수진산상영구(之而築堤儲水眞山上靈區)한 기록이 있다. 도덕령 위에 천지(天池)라는 못이 있어 그 둘레가 813간(間)이나 되었으나 오래 전에 폐지하여 경작지로 삼았다는 것과 그 후 동인이 그곳에 저수지를 만들어 “산상(山上)의 영구(靈區)”로 불리었다』 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효심이 수많은 유랑 농민을 통솔(統率).웅거(雄據)하여 관군에 항전한 곳이라는 것을 상상할 때 매우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저전촌 자체도 비교적 지대가 높은 산중 마을이지만 이웃에 더욱 지세가 험한 산상(山上)에 둘레 팔백 간(약 1400m)이 넘는 천연적(天然的)인 못이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 지형이 하나의 요새적(要塞的)인 철옹성(鐵甕城)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도덕령(道德嶺:도덕고개), 도덕지(道德池:天池의 이명(異名)와 같은 지명도 그것이 “초전골 도적”을 뜻하는 도덕령.도적못에서 기인하여 한자음으로 표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거니와 산상의 영구(靈區 : 신령스러운 구역)로 까지 기록된 이러한 이색적인 산령(山靈)과 저전촌 일대에 대한 역사 유적의 연구가 긴요한 것 같다
참고 :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전적지조(戰績地條)에는 초전재화봉이고려명종계축효심반거차지(草田在華封里高麗明宗癸丑孝心叛據此地) 여운문적김사
미호응(與雲門賊金沙彌呼應) 남로병마사격지참칠천여급(南路兵馬使擊之斬七千餘級)』이라는 기록이 있어 지금의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에 있는 “초전(草田) 마을”을 효심의 반란 본거지로 보고, 1193년(명종 23년)과 1194년(명종24년) 두 차례의 토벌사건의 현장으로서 결부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대규모의 초적집단이 둔소(屯所)로 삼아 막강한 관군과 싸울만한 지형적 조건이 되지못할 뿐 아니라 7천여 급의 초적의 목을 베었다는 1194년 4월 전투현장에 대하여는 고려사 명종 24년 조(條)에 밀성(密城) 저전촌(楮田村)이라는 명백한 기록이 있는 만큼 지금의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龍田里)가 정확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봉리 초전마을의 효심 반거지설(叛據地設)”은 더욱 확실한 출전(出典)과 앞으로의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출처 : 『밀양지(密陽誌)』 밀양문화원 편찬위원회 편(編) 발행 밀주지(密州誌) 489P ~ 491P 1987년 초판 발행, 2006.4.20 재발행
8. 밀양 “화봉리 초전(草田)”은 “효심의 난”과 관련이 없다
“효심(孝心) 농민군”이 청도 운문사(雲門寺) 일대에서 일어난 “김사미(金沙彌)의 난(亂)”에 호응을 했다는 것은 운문산(雲門山)과 밀양 저전촌(楮田村) 지역이 험준한 산악(山岳)으로 서로 가깝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운문산(雲門山) 북록(北麓)은 청도 운문사(雲門寺) 지역이고, 운문산의 남록(南麓)은 밀양 저전촌(楮田村)과 바로 고개 하나로 직결되어 있다. 지형이 이렇게 가깝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김사미 농민군이 패하자 그 잔병(殘兵)이 운문산 남록(南麓)으로 고개를 넘어 효심의 농민군에 합류했다.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에 “효심의 난이 화봉리 초전에서 일어났다” 라는 기록이 있으나, 필자가 여러 번 두 지역을 확인한 결과,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 초전(草田)은 운문산 및 산내면 저전촌(楮田村)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지형적으로도 별도로 떨어져 있고, 수천(數千) 명(名)의 농민군이 웅거(雄據)할 만한 지역도 전혀 아니다. 또 화봉리 초전에서 “효심의 난”이 일어났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다른 역사적인 실증(實證) 자료가 전혀 없다. 밀양지역 향토사학계에서도 무안면 화봉리 초전은 효심의 난이 일어난 지역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 중론(衆論)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지명을 조사. 연구하면서 사회. 정치. 군사. 종교 등의 영향(세력)에 의해 시대적으로 지명(地名)이 미화(美化) 또는 왜곡(歪曲).거부(拒否).인용(引用)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발견하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①지명의 사회적 미화는 군사적(전투적) 명칭인 밀성(密城)이 따뜻한 인상을 주는 밀양(密陽)으로, 밀양 상동면 도적골이 도덕골(道德谷) 등으로 변화 ②정치.군사적 힘에 의해 변화된 사례는 베트남의 통일으로 사이공시(市)가 호치민시(市)로 변경 ③종교적 세력에 의해 변경된 사례는 양산 취서산(鷲棲山)이 영축산(靈鷲山), 천화산(穿火山)이 가지산(迦智山), 비잔티움시(市)가 콘스탄티노플시(市)로 개칭되었다가 이스탄블시(市)으로 변경 등 ④토착민의 향토사랑 등에 의해 민란.반역 등과 관련된 지명이 거부. 왜곡. 미화되는 일이 있고, 향토축제 개최. 지역경제 활성화 등에 호재(好材)가 되는 경우에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설화 주인공을 서로 자기지역 출신이라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유명한 허준(許浚)이나 효(孝)의 표상인 심청전의 발생. 활동무대를 역사적 실체와 달리 서로 자기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토착민의 중론에 의해 시대를 거쳐 오면서 변경된 지명은 그 유래를 분명하게 (기록)하므로써 역사의 왜곡을 방지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의 실체를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본래의 지명을 거부, 왜곡 또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지역으로 떠넘기는 맹목적 향토사랑 등 이기적 역사의식 즉, “달면 삼키고 쓰면(이용가치가 없으면) 뱉아버리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기존 지명 보존 등에 대한 역사의식”이다
9. 효심군 웅거(雄據)와 관군(官軍)과의 전투 의고(疑考)
필자는 효심이 웅거하고 관군과 전투를 한 지역을 역사.지리문헌(文獻)과 인근 주민의 진술, 지명, 전해오는 이야기, 추정 등을 통해서 지역의 지형을 감안하여 전투지역을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본다
가. 효심 농민군의 웅거지(雄據地) 및 전투지역
관군(官軍)의 저전촌(楮田村) 진입로(進入路)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 대암산성(臺巖山城)을 통과하여 저전촌.오치(烏峙) 방면으로 진입
2) 대암산성을 통과하여 운문산.석골사 방면으로 진입
3) 상동면 오실(烏谷)을 통과하여 산내면 오치 방면으로 진입
4) 산외면 엄광.상동면 가곡에서 보두산성(步斗山城) 방면으로 진입 등
나. 주요 추정 격전지(激戰地) 지명
1) 천지(天池)
천지는 중산(中山) 동록(東麓) 해발 400미터 산속으로 생활용수가 있는 자연 및 인공 저수지로 효심농민군이 웅거(雄據)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밀양 향토사료인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에는 “산상(山上)에 수많은 영혼(靈魂 : 주검)이 서려있는 영구(靈區)”로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효심의 난 때 천지 주변에서 관군에 도륙된 수많은 농민군의 영혼이 서려 있다” 라는 뜻이다.
[사진 3] 효심(孝心) 농민군 웅거지(雄據地) 천지(天池)
2) 저전촌(楮田村)
효심이 사로잡힌 곳으로, 대암산성과 오실(烏谷)방면에서 저전촌으로 진입해 오는 관군과의 합류 지역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효심이 사로 잡혔다.
3) 대암산성(臺岩山城) 주변
대암산성은 지금의 국도 24호선이 통과하는 곳으로 밀양부(密陽府) 남쪽의 관군이 지금의 산내면으로 진입하는 관문 역할을 한 곳으로 보이며, 이곳에서 농민군은 관군을 막았을 것이다. 그 당시 산내면 전역(全域)은 효심 농민군에 의해 접수(接收)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오실(烏谷) 주변
이 골짜기는 밀성군(密城郡:밀양군) 북쪽인 청도군 및 그 이북(以北)의 관군(州.縣軍)과 중앙군(中央軍)이 오치마을과 저전촌으로 진입하는 길목이고, 오실 남쪽의 소천봉산성(小天峰山城)은 효심농민군이 밀성군 북쪽에서 진입하는 관군을 막는 역할을 한 곳으로 보인다
5) 보두산성(步斗山城)
보두산성의 남쪽은 밀성군 관아(官衙)와 통하는 지금의 산외면 엄광리와 남기리, 상동면 가곡리 등지이다. 이 산성은 효심농민군이 밀성군(密城郡) 관군(官軍)이 진입하는 것을 방어한 산성으로 보인다
6) 소천봉산성(小天峰山城)
이 산성은 지금의 상도면 도곡리(道谷里) 솔방마을과 신곡리 오실마을과의 사이에 위치한 소천봉 정상에 있는 산성으로 밀성군의 북쪽인 청도군 및 그 이북에서 진입하는 관군을 방어하는 산성으로 보인다
7) 역적평지(逆賊平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관군과 효심농민군이 대(大) 혈전(血戰)을 벌인 승학산(乘鶴山) 산정(山頂)의 평지이다.
8) 운문산(雲門山)
운문산의 정상을 기준하여 북쪽은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 바로 뒷산이고, 남쪽은 밀양시 산내면 얼음골.석골사 등이 있는데, 산내면 저전촌과 바로 연결된다. 청도군 일대에 주둔한 김사미를 토벌하는 관군이 운문사 일대에 웅거한 김사미 농민군을 진압하자 김사미 농민군이 운문산을 넘어 밀성군 방면으로 달아났고, 김사미의 잔병(殘兵)을 추격한 지역이다. 김사미의 잔병이 효심 농민군에 합류했다는 기록이 있다.
9) 오치(烏峙)
오치마을은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오실(烏谷)마을과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저전(楮田)마을의 중간에 위치하고, 효심의 난 때 관군에 도륙된 효심농민군의 수많은 시체가 산을 이루어 오치마을 주변의 산을 주검의 산 즉, 시산(屍山)으로 불리며, 시체를 쪼아먹는 까마귀(오 : 烏)와 관련해서 마을명칭이 오치(烏峙)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10) 천화산내면(穿火山內面)
지금의 밀양시 산내면의 옛 명칭이다. 호리병(물병) 안의 지형의 산내면과 험준한 운문지맥 및 고사백마.승학지맥 주변은 효심농민군이 관군으로부터 떨어져 웅거하는 데 필요한 식량과 군수품의 보급지역으로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즉, 효심 농민군이 접수한 지역으로 보인다.
다. 효심 농민군과 관군(官軍)과의 전투 기간
1) 전투 기간 : 1192(명종 22) 2월 ~ 1194년 12월
2) 초기 전황 : 효심 농민군의 숫적 우세
3) 전투 경과 : 관군(중앙 토벌군)과 장기전으로 효심 농민군 전투력 약화
4) 토벌 작전 : 관군(김사미 토벌군)의 합세로 효심 농민군 전멸
10. 효심 농민군의 산성(山城) 축조의 이론적 근거
밀양시 관내에는 다른 지역보다 많은 산성들이 있다. 그중에서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 산성인지 기록한 내용도 없고 확인되지 않는 산성이 있다 즉, 누가 언제 왜 축성했는지 확인되지 않는 보두산성(步斗山城), 대암산성(臺岩山城), 소천봉산성(小天峰山城)이 있다. 필자가 밀양에서 평생 향토사를 조사하는 손흥수 선생과 함께 답사한 결과 이 산성은 효심농민군(孝心農民軍)이 쌓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산성의 유래가 확인되는 것을 제외하면 즉, 확인이 되지 않는 나머지 산성이 이 3개의 산성이며, 그 산성의 위치가 효심농민군의 웅거지로서의 항전지인 깊은 산속인 보두산(步斗山)과 소천봉(小天峰)에 있는 산성은 기초가 대단히 허술한 것으로 보아 급하게 축조했고 위치가 효심 농민군 웅거지에 해당하며, 또 하나의 산성인 대암산성(臺岩山城)은 효심 농민군의 식량 등의 물자와 군수품 등을 보급해 줄 수 있는 지역인 산내면을 지킬 수 있는 진입 관문(關門)인 승학산(乘鶴山)과 백암산(白岩山)의 끝자락인 동천변(東川邊) 대암(臺巖)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가. 밀양 관내 시대별 산성 현황
밀양 관내 산성은 시대별로 보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초기(初期)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의 산성(山城)
○ 자씨산성(慈氏山城), 호두산성(虎頭山城), 추화산성(推火山城), 청운산성(靑雲山城)은 지금의 밀양시 시내 5개 동(洞)지역과 부북면(府北面)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일명(一名) 밀양분지(密陽盆地)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이다. 필자는 이 지역이 초기의 미리미동국의 영역이라 본다
이러한 산성들은 밀양의 지리서인 밀양지명고에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필자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며, 그렇게 보지 않는 이유는 삼국 중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산성은 아님이 명백하며, 신라의 산성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신라가 밀양의 인근 고대국가인 이서고국(伊西古國 : 지금의 청도군 지역)을 점령하면서 오례산성 인근 마전암 등에 침공한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 고대 신라가 밀양 경역에 침공한 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그 이후 신라가 가야제국(伽倻諸國)들을 정벌할 때 매우 빠르게 서진(西進)하면서 미리미동국을 무인지경으로 저항을 받음이 없이 접수하고 낙동강변인 파서막(밀양시 하남읍 파서리)에서 일단 대치한 후, 낙동강을 넘었고 지금의 밀양시 초동면 지역에 있었던 이궁대(離宮臺)에 잠깐 주둔한 기록이 있으나, 신라군이 위에서 말한 초기미리미동국의 영역에 주둔하면서 이러한 산성을 축조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은 명백하다. 또 그 이후 고려시대에 이곳에 산성을 쌓을 이유가 전혀 없다. 따라서 자씨산성(慈氏山城), 호두산성(虎頭山城), 추화산성(推火山城), 청운산성(靑雲山城)은 초기미리미동국의 산성이 확실해 보인다
2) 후기(後期) 미리미동국의 산성
덕대산(德大山)에 있는 덕대산성(德大山城)과 단장면에 있는 백마산성(白馬山城)은 대체로 지금의 밀양시 경역의 경계에 있는 산성으로 미리미동국이 최대의 영역이었을 때 산성으로 보인다
3) 이서고국(伊西古國) 산성(山城)
철마산성(鐵馬山城)과 오례산성(烏禮山城)은 대체적으로 밀양시와 청도군의 경계에 있는 산성으로 지금의 청도군을 영역으로 했던 이서고국의 산성으로 보인다. 이서고국은 신라 법흥왕 때(539년) 신라의 이서군(伊西郡)으로 편입되었다.
4) 조선시대 임진왜란 산성
삼랑진읍 미전리의 입성(立城), 화성(火城), 상동면 옥산리 여수마을 남쪽의 불덩어리산(火山城)은 임진왜란 때 이용한 산성으로 밀양지명고에 기록되어 있다.
5) 밀양읍성(密陽邑城)
현존하는 읍성으로 조선 초기에 축성한 것으로 밀양지에 기록하고 있다
6) 고려시대 효심(孝心) 농민군(農民軍)의 산성
소천봉산성(小天峰山城), 대암산성(臺岩山城), 보두산성(步斗山城)은 밀양지명고 등에 흔적을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 언제, 왜 성을 쌓았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특히 나라에 반역(叛逆)을 한 인물이나 그러한(반역한) 지역. 그러한(반역 관련) 인공시설물(山城) 등에 대해서는 왕조(王朝)나 사학자들이 그 유래나 흔적을 잘 기록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왕조(王朝)는 반역의 역사를 숨겨야 했고, 또 그러한 반역의 역사를 언급하거나 기록하는 사학자들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후대의 향토지리지 등에는 그 잔상(殘像)만을 기록을 할 뿐,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1) ~ 5)의 산성들은 그 유래가 위와 같이 대략 밝혀졌으나, 위 3개의 산성은 그 유래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가 여러 정황을 근거로 하여 추정한 결과 위 3개의 산성은 그 유지(遺址)를 살펴.추측해 본 결과 효심농민군이 급조(急造)한 산성으로 보인다. 효심농민군이 그렇게 급박하게 산성을 축조하지 않고 평시에 적군을 대비하기 위해 튼튼하게 쌓았다면 산성의 기초가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날(효심의 난 진압한 날) 이후로 나라에서도 더 이상 쓸모없는 산성이 되어, 조잡하게 쌓은 산성의 돌마저 몇 백 년의 비바람에 무너져 굴러 내리고, 주변의 묘지의 축대로 빼내가고, 천수답의 축대돌로 다 빼가고 겨우 몇 개씩의 흔적만이 보일 뿐이다. 천민의 인권과 민권 보장을 부르짓다 쓰러져간 민중의 역사 흔적인 이 산성들! 이것이 진짜 우리 향토역사이고 민족역사이고 민중의 역사이다. 향토사와 민족사의 희미한 흔적을 하루 빨리 복원하여 후대에 길이 보존해야 할 것이다
11. 운문지맥 “효심의 난” 관련 인명(人名)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에 나타나는 효심의 난 관련한 인물은 당대 최고의 실권자 이의민을 비롯한 무인(武人) 상위 서열인 대장군 등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가. 효심(孝心 : 초적(草賊) 괴수(魁帥)
나. 최인(崔仁) :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다. 전존걸(全存傑) : 대장군(大將軍)
라. 고용지(高湧之) : 대장군(大將軍)
마. 김존인(金存仁) : 장군(將軍)
바. 사량주(史良柱) : 장군(將軍), 전사(戰死)
사. 이의민(李義旼) : 무인 실권자(경주 은둔)
아. 이지순(李至純) : 장군(將軍)
자. 김사미(金沙彌) : 운문적(雲門賊) 괴수(魁帥)
[근거 : 高麗史, 1989.밀양문화원.密陽誌.489쪽]
12. 효심의 난 관련 지명의 문헌 기록과 언전(諺傳)
필자는 지명의 변화는 미화(美化) 등의 과정을 거친다고 이 글에서 주장했다. 밀양문화원에서 발행한 밀양지명고에 기록된 밀양의 산내면, 상동면, 산외면의 지명과 효심이 사로잡힌 산내면 저전촌(楮田村) 주변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토대로 조사한 효심의 난 관련 지명은 미화.변화된 지명과 함께 다음과 같다
가.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1) 저전동(楮田, 苧田)
○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1170 ~ 1197) 대표적인 초적(草賊)의 괴수 효심(孝心)의 마지막 항전지로서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밀양지(密陽誌) P 489 저전촌지(楮田村址) 참조]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72P
2) 오태[오티. 오치(烏峙)]
○ 용암(龍岩)에서 북쪽으로 저전(楮田) 마을을 지나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매전면(梅田面)과 경계 지점에 있는 오태는 산상(山上)의 분지이다.
서쪽에 있는 오태고개 너머에는 밀양시(密陽市) 상동면(上東面) 신곡리(新谷里)에 소속된 오곡리(烏谷里)란 마을이 있고,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배산(背山)을 오두산(烏頭山)이라고 하며, 서북쪽 매전면(梅田面) 경계 안에는 삼국시대의 오례산성(烏禮山城)이 자리잡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일대의 지명이 까마귀와 연관된 것이 많은데, 오태고개의 산봉우리 모양이 까마귀가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생긴 것이라고 한다. 옛날 이곳을 답사한 감여가(堪輿家)들은 마을 앞에 있는 산을 “주검의 뫼” 곧 시산(屍山)이라 하였고, 까마귀가 그 시체를 쪼아먹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烏오두작시(烏頭嚼屍)”의 명당자리로 꼽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는 자족한 부자가 끊임없이 나왔고, 천석(千石)지기의 최씨성(崔氏姓)을 가진 장자(長子)가 살았다고 한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97.398P
※ 감여(堪輿) : 하늘과 땅. 천지(天地). 건곤(乾坤)
※ 감여가(堪輿家) : 풍수지리에 관한 학문을 연구한 사람
※ 장자(長子) : 큰 부자를 높이어 부르는 말. 거부(巨富)
■ “효심의 난” 때 관군과의 격전지 중 한 곳인 밀양 오치마을
“효심(孝心)의 난(亂)” 이래 800여 년이 흐른 지금, 관군과의 격전지 중 한 곳인 오치마을은 운문지맥의 백암산과 구만폭포 중간 위치하며, 아름다운 농부들이 평화롭게 농사짓는 마을로 바뀌었다. 마을은 해발 400미터 안팎의 산상 분지형 마을로서 평화로운 산중 마을로서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오실마을, 산내면 용전리 저전마을은 산내면 봉의리 봉천마을, 청도군 예전리 마을과 산길로 연결되어 있는 20여 호가 살아가는 아늑하고 매우 평화로운 마을이다. 아래쪽(동남쪽)으로 뻗은 오치들판은 해발 400여 미터 산중인데도 특이하게 산중(山中)에 저수지가 있고, 그 저수지 아래로 경지정리가 잘 된 들판이 펼쳐지고 들판의 수구(水口)는 용전리 저전마을 쪽으로 병목처럼 좁게 뚫여 있다. 마을은 사람들은 사철 내내 사과농사에 매달리면서 사과농사를 짓고 있다. 가을이 되면 들판 전체가 빨갛게 익은 탐스러운 사과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을 보면, 파란 가을 하늘과 함께 여기가 산상의 천국임을 연상케 한다. 오치마을 사람들은 오늘도 부농(富農)의 꿈을 가꾸면서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밀양얼음골사과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면서 전국의 팔려 나간다. 오치마을은 언제 들려도 평화롭고 정겨운 마을이다.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을 사진으로 많이 올리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올리지 못한다
3) 저전촌(楮田村)
○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를 구성하는 한 산중(山中) 촌락이다
○『密陽誌』1989, 密陽文化院,
※ (40), (41) 항목과 동일한 지명임
4) 『楮田 → 草田』
○『密陽誌』1989, 密陽文化院, 787P(總索引)
※ 787P 總索引에 楮田을 草田으로 표기한 것은 저전과 초전이 동일 지명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며, 491P 상단의 기록과 필자가 본고(本考)에서 조사한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의 초전(草田)은 효심의 난 반거지(叛據地)가 아님이 확실하게 밝혀졌음
※ 『密陽誌』에서 "효심의 난" 반거지(叛據地)가 산내면 용전리 저전촌(楮田村)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확인하고 있음
5) 『草田(楮田) 489 ~ 491P』
○『密陽誌』1989, 密陽文化院, 791P(總索引)
※ 『密陽誌』의 본 기록 내용은 별도 기록을 함
※ 『密陽誌』에서 효심의 난 반거지(叛據地)가 산내면 용전리 저전촌(楮田村)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확인하고 있음
6) 『孝心 489 ~ 491P』
○『密陽誌』1989, 密陽文化院, 795P(總索引)
※ 『密陽誌』에서 효심의 난 반거지(叛據地)가 산내면 용전리 저전촌(楮田村)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확인하고 있음
7) 『孝心의 亂과 密城楮田村 489』
○『密陽誌』1989, 密陽文化院, 795P(總索引)
※ 『密陽誌』에서 효심의 난 반거지(叛據地)가 산내면 용전리 저전촌(楮田村)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확인하고 있음
8) 고려사(高麗史) 1193년(명종 23) 계축(癸丑) 조(條)
○ 7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 이지순(李至純) 등으로 남적(南賊)을 치게 함
○ 11월 최인(崔仁),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가 되어 남적을 침
○『國史大事典』 1974, 百萬社, 2018P
9) 고려사(高麗史) 1194년(명종 24) 갑인(甲寅) 조(條)
○ 2월 남적괴(南賊魁) 김사미(金沙彌), 항복을 청했으나 참살(斬殺)함
○ 12월 남로병마사, 적을 밀성(密城)에서 격파함
○ 8월 남적괴, 이순(李純) 등 4인을 보내어 항복을 청함
○ 12월 남로병마사, 적의 괴수 효심(孝心)을 사로잡음
○『國史大事典』 1974, 百萬社, 2018P
※ 효심이 사로잡힘으로써 민권, 생존권 쟁취를 이해 운문지맥에 몰려왔던 경상도 장정 7,000명이 전부 도륙되어 효심의 난이 막을 내리게 되었음
10) 고려사(高麗史) 1196년(명종 26) 병진(丙辰) 조(條)
○ 4월 최충헌(崔忠獻), 이의민(李義旼)을 죽이고 그 삼족(三族)을 주멸(誅滅)함
○ 4월 최충헌, 많은 조신(朝臣)을 죽임
○『國史大事典』 1974, 百萬社, 2018P
※ 이로써 “효심의 난”과 이 난을 이용해서 더 큰 역모를 도모하려 했던 이의민의 반역(叛逆)이 막을 내렸다
11) 역포(逆賊 捕虜, 逆賊 魁帥) 무덤
○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백암산(白岩山 : 흰듬) 8부능선 동록(東麓)에 오래된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이 “효심의 난”과 관련한 “역포(逆賊 捕虜, 逆賊 魁帥) 무덤”이라 전해 오며, 마을 주민들이 수백 년 동안 벌초를 해 왔다고 했다.
※ 밀양의 향토사를 조사하는 “밀양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인 손흥수와 도재국”은 수 년 전에 역포(逆捕 : 孝心)의 무덤을 답사하고, 민권(民權) 쟁취(爭取)를 위해 관군(官軍)과 처절하게 항전(抗戰)하다 억울하게 도륙(屠戮)당한 역포(孝心)와 그의 휘하(麾下) 7,000여 농민군(農民軍)의 영령(英靈)께 처음으로 참배를 했다. 전적지(戰迹地)로서의 역사 유적지인 “역포 효심의 무덤 답사기(踏査記)”는 다음(Daum) 카페“밀양광장에 ”역포 효심의 무덤 사진“과 함께 올려 놓았다
■ 800년 묘소(墓所) 벌초는 역적(逆賊)이 아님을 증명
■ 800여 년전, 고려 민중의 중심에 섰던 효심(孝心) 장군의 묘소
주민들에게는 "역적 포로의 묘 즉, 역포(逆捕)"의 무덤"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밀양 향토사를 조사하는 손흥수 선생과 필자는 이 무덤이 효심 장군의 묘소로 추정하고 있다
이건형 선생의 저전촌지에는 효심이 저전촌에서 관군의 수장(首將)인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에게 사로잡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암산(白岩山) 자락에 조상대대로 살고 계셨던 손직수 선생은 작고하셨지만 일족(一族)인 손흥수 선생에게 "오래 전까지는 주민들이 해마다 벌초를 했다" 하셨다. 800여 년이 지났지만 묘소의 축대는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손직수 선생에 의하면 800여 년전 "효심의 난" 때, 관군에게 몰살된 "의(義)로운 영령(英靈) 7,000여 경상도 장정(壯丁)"에 대한 예의로 인근 주민들이 벌초를 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정말로 역적(逆賊)들이었다면, 주민들이 이렇게 벌초를 하였을까 !!!
이토록 민중의 끈끈한 연대의 힘은 800여 년이 지나도 끊이지 않고 있다
역포(逆捕) 묘(墓)가 세상에 많이 알려진 게기는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백암산 자락의 용암마을에 거주했던 일직인(一直人) 손직수(孫直銖) 선생이 손흥수(孫興銖) 선생을 안내하여 역포 묘에 올라 현장을 답사 후에, 손흥수 선생이 필자에게 이야기를 하므로써,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손직수 선생은 몇 년 전에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셨다
그후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손흥수 선생은 필자를 데리고 역포 묘를 알려 주었고, 같이 참배 및 답사를 하게 되었고, 하산하던 중에 또 일직인(一直人) 손태석(孫泰錫) 선생을 만나 역포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고 비로소 밀양광장에 최초로 그 내막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사진 4]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백암산(白岩山)의 역포(逆捕) 효심(孝心)의 무덤"
12) 草田
○ 在華封里高麗明宗癸丑孝心叛遽此地與雲門賊金沙彌相呼應南路兵馬使擊之斬七千餘級 [『密州徵信錄』戰績地條]
○『密州徵信錄』昭和 11, 安秉禧 著
※ ①高麗史 1193(明宗 23) 癸丑 기록 ②“孝心叛遽此地與雲門賊金沙彌相呼應”의 “산내면 용전리 저전(楮田)”와 “무안면 화봉리 초전(草田)의 지리적 연관성을 살펴보면, 두 지역은 아무런 연관이 없음
나. 밀양시 산내면 임고리
1) 작평(깐치밭들, 鵲坪)
이 일대에 야채의 일종인 까시랭이 밭이 많았다고 하여 까시랭이밭들이라 했으나, 부락 이름을 표기할 때 작평(鵲坪)이라 했으므로 그 후로는 깐치밭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마을 뒤에 버드나무 숲이 많아서 인근의 까치떼들이 날아 앉는 곳이라고 하여 작평(鵲坪)이라 했다는 일설도 있다
※ 산내면 임고리 작평 마을은 산내면 용전리 저전 마을과는 동천(東川)을 경계로 하고 있다 즉, 효심 농민군의 항전지인 저전촌(楮田村)과는 하천을 경계로 하고 있다. 까마귀와 까치는 둘다 까마귀과의 새이다
다. 밀양시 산내면 봉의리
1) 오가내(獄안에 : 獄內)
○ 밀양시 산내면 봉의리 봉촌마을 뒷산[오치마을 봉황산(鳳凰山) 동록(東麓)]
※ 수백명의 사람을 몰아 가두기에 적합한 절구통형 지형으로, 언전(諺傳)에 의하면 효심의 난 때 관군에 쫓기던 6백여 명의 효심 농민군이 “오가내”로 몰려(갇혀) 도륙(屠戮)을 당한 장소로 전해지고 있음
※ 산내면 송백리 양송정(兩松亭) 마을에서 서당마(書堂村)로 오르다 보면, 길가 우측에 커다란 비문(碑文 : 묘지석))이 있는데, 그 비문에는 마주보는 산[오치(烏峙) 마을 방향]을 “봉황산(鳳凰山)”이라 기록하고 있다
※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418P 산내면(山內面) 편(篇) 봉의리(鳳儀里) 조(條)에는 봉의리 봉촌(鳳村) 마을 지명 유래를 설명하면서 “이곳 동민들이 마을 이름을 정할 때 봉촌(鳳村) 마을 앞에 있는 ”독뫼“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부근의 땀(마을) 이름도 보다 운치있게 붙인 것이라 한다. 곧 『書經』의 ”虞書 益稷篇“에 나오는 ”簫韶九成에 鳳凰來儀하노라“ 하는 문구를 원용하여 鳳村을 중심으로 九成洞, 洞簫谷, 佳來儀, 韶鼓里 등으로 한자음을 표기한 것이라 전해온다
라.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
1) 도덕지(道德池)
○ 爭德峰上世稱天池周八百十三間久廢爲耕地洞人金相斗貨之而築湜儲水眞山上靈區
※ 湜는 堤의 오기(誤記)로 보임. ①필자가 마을 주민의 말 ②현장을 둘러본 결과 지형 상태(築堤) ③밀주지 본 문장 구성 내용을 종합해 보면 湜이 아닌, 堤의 오기(誤記)가 확실함
○ 『密州誌』 1932, 朴秀憲 著 : 上東面 篇 道谷里 下賤 條 道德池
2) 도곡리(道谷里, 뒤실, 後谷)
①북(北)으로는 소천봉(小天峰), 동남(東南)으로는 도덕봉(道德峰) 사이에 있는 비교적 표고가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산간(山間) 동리(洞里)이다
②신라시대에는 오악현(烏岳縣)에 딸렸던 오곡(烏谷)이라는 지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곧 오곡(烏谷) 뒤쪽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뒷실(後谷)이라 했는데, 당시에는 이곳 일대가 오악현(烏岳縣)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뒷실이 도실로 변음되고, 다시 도곡(道谷)으로 표기된 것이 현재의 지명이다
③또 마을 서쪽에 있는 도덕령(道德嶺) 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도곡(道谷)이라 했다는 말이 있고,
④고갯길에 이른 산 길이 멀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는 다른 일설도 있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0P
※ 필자의 견해는 도둑봉(도덕봉, 도적봉, 도덕령, 도덕치, 도독모치, 도독못째)의 지명을 살펴, 고려 정권은 “효심 농민군”을 도둑. 초적(草賊)으로 몰았고. 천지(天池)를 도적못(저수지)이라는 언전(諺傳)과 효심 농민군의 웅거지라는 언전(諺傳)에 따라 상동면 도곡리의 도곡이라는 지명은 효심 농민군의 도둑. 도적에서 유래된 것이 유력하다고 본다. 후세 사람들은 혐오감이 있는 지명을 미화(美化)시키거나 숨기는 습성이 있어, “도둑골. 도적골”의 미화(美化)된 지명이 도곡(道谷)이라 본다
3) 뒷말리성(소천봉성 小天峰城)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08P
○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高亭里) 모정(慕亭) 부락 동쪽에 우뚝 솟은 해발 634 고지의 산봉우리로 “작은 하늘 방우산” 또는 뒤말리, 소천봉 등 여러 지명으로 불리우고 있다. 성터의 북쪽은 무너져서 확인하기가 어려우나 남쪽에는 기다란 석축(石築)이 군데군데 남아 있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산성(山城) 우물이 있다고 한다. 또 서쪽 산 아래에는 맷돌같이 생긴 맷돌바위, 허망골, 문바위, 봄에 진달래 꽃이 만발한 곳이라 하여 꽃밭등(嶝), 소(牛)를 방목하던 지대인 소바탕골짜기, 갓골, 뒷골꼬지골 등의 지명이 있다.
4) 도둑봉(道德峰, 도적봉, 도덕령, 도덕치, 도독모치, 도독못째)
○ 아래 뒷실에서 산외면(山外面) 희곡(希谷)으로 넘어가는 도덕령(道德嶺) 고개가 있는 산 이름이다. 도덕령(道德嶺)은 도덕치, 도독모치, 도독못째라 하여 도둑과 관련된 지명을 띠고 있다. 밀주지(密州誌)에 도덕봉(道德峰) 정상에는 천지(天池)라 부르는 813간(間)이나 되는 못이 있다고 했으며, 그 못을 중심한 이 일대의 산은 고려시대 때 초적(草賊)들이 관군(官軍)과 대치(對峙)하여 싸운 곳이라 했다. 그러므로 도덕령. 도덕봉. 도독지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도덕령(道德嶺). 도덕봉(道德峰). 도덕지(道德池)로 뜻을 순화시킨 것이라 한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1P
※ 천지(天池)는 오치(烏峙)마을과 함께 효심 농민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천지 바로 동쪽에 있는 백암산(白岩山) 정상의 동록(東麓) 8부 능선에는 700여년 이상 인근 마을 주민들이 벌초를 해왔다는 역포(逆捕 : 逆賊 捕虜, 逆賊 魁帥)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에서 용암봉(龍岩峰)을 거쳐 바로 북쪽에는 효심이 관군과 항전을 하다 사로잡힌 저전촌(楮田村 : 현재의 지명은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저전)이 있다. 또 천지의 바로 서쪽에는 밀성 관아를 지키는 추화산성(推火山城)과 마주하고 있는 보두산성(步斗山城)이 있고, 산내면 호리병 속의 지형의 관문 역할을 하는 동천(東川) 변(邊)의 대암(臺岩)의 서쪽의 백암산(白岩山)과 대암(臺岩) 동쪽의 승학산(乘鶴山)을 연결하는 대암산성(臺岩山城)의 유지(遺址)가 있다. 이 두 개의 산성은 소천봉산성(뒷말리산성)과 함께 효심 농민군이 관군의 진격에 대비해서 급하게 축성한 산성이다
5) 아래뒷실(下道谷, 下後谷)
○ 도덕령(道德嶺) 고개 밑 길목 마을이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4P
6) 매운샘(將軍샘)
○ 하도곡(下道谷) 남쪽 절터 구미(굼텅이 : 골짜기)의 금정사(金井寺) 경내에 있었던 샘이다. 옛날 어느 떠돌이 중이 이 절에 나타나 샘물을 마셨는데 별안간 장군(將軍)으로 변하여 어디론지 가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 이 샘이 상서(祥瑞)로지 못하다 하여 메워버렸기 때문에 매운샘 또는 장군(將軍)샘이라 한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4P
※ 깊은 산속에서 농민군이 웅거(雄據)하려면 반드시 샘이 있어야 한다. 이 우물을 의지하여 농민군이 웅거한 것 같다. 혐오 역사(지명) 흔적 지우기로 매워졌을 수 있다
7) 도둑못(道德池, 天池)
○ 도덕령(道德嶺) 옆에 큰 못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매워졌다. 일명 천지(天池)라고도 했다. 약 80년 전에 도곡리(道谷里)에 거주했던 김상두(金相斗)라는 사람이 돈을 들여 이 못에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다시 못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4P
※ 필자가 보기로는 밀양지명고가 1994년도 발간되었으므로, 밀양 전체 자료 조사. 취합이 3 ~ 4년 정도 걸렸다고 볼 때, 1990년부터 80여년 전이라 하면, 1910년쯤 전까지는 김상두라는 사람이 천지에서 벼농사를 지었다고 보여 진다
■ 사라져간 고려(경상도) 장정 7000명의 울부짓는 원혼이 서린 중산(中山) 북동록(北東麓)의 천지(天池)
8) 천지(天池)
○ 爭德峰上世稱天池周八百十三間久廢爲耕地洞人金相斗貨之而築湜儲水眞山上靈區
○ 『密州誌』 1932, 朴秀憲 著 : 上東面 篇 道谷里 河川 條 “道德池”
9) 도덕봉(道德峰)
○ 『密州誌』 1932, 朴秀憲 著 : 上東面 篇 道谷里 山岳 條 “道德峰”
※ 도덕봉은 상동면 도곡리와 산외면 엄광리를 경계하는 지금의 북(北) 중산(中山)의 북쪽 산록(山麓 : 해발 450미터 정도)에 있다
10) 영구(靈區)
○ 爭德峰上世稱天池周八百十三間久廢爲耕地洞人金相斗貨之而築湜儲水眞山上靈區
○ 『密州誌』 1932, 朴秀憲 著 : 上東面 篇 道谷里 河川 條 “道德池”
※ 영구(靈區) : 진산상 영구[신령한(眞) 산에는 혼령이 모여 있는 곳이다]
즉, 효심 농민군이 이 천지 주변에 주둔하다가 관군에게 억울하게 도륙(屠戮)을 당한 곳으로, 혼령들이 모여 있는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이다
마.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1) 장군뱅이
○ 윗도곡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옛날 장군이 살았다고 한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1P
※ 필자는 이 “將軍”을 “효심 농민군”의 장군으로 보고 있다. 효심 농민군의 규모가 7,000여 명이고, 운문산으로부터 보두산까지 수십리에 걸쳐 웅거(雄據)했고, 그곳에는 경상도 여러 지역에서 몰려온 장정들로 편성된 여러 부대와 그러한 부대의 여러 명의 장군(將軍), 부장(副將)이 주둔했다고 보며, 그러한 장군과 부장 중의 한 명이 여기에 기록된 “장군(將軍)”으로 보고 있다
2) 용담고개
○ 윗도곡에서 산내면(山內面) 용전리(龍田里)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산 정상에는 성터(城址)가 있으며 임진왜란 때 산 아래 사는 주민들이 왜적을 방어하고자 축조했다고 전해 온다. 산이 하늘에 닿일 만큼 높다는 뜻에서 소천봉(小天峰)이라 하지만, 고정리 쪽에서는 옛날부터 “뒷말리 산성(山城)”으로 불리운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1P
※ 필자가 보기로는 이 성터가 매우 조잡하게 축성된 흔적을 보이고 있어, 관청에서 축성한 산성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리고 효심 농민군이 관군과 항전하기 위해 급하게 축성한 산성으로 보고 있다. 임진왜란 때는 박진(朴晉) 밀양부사가 삼랑진 작원관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을 중과부적으로 방어를 못하고, 퇴각하면서 종병탄(밀양강 미전리와 평촌리 사이 하천)에서 너무나 당황하여 강물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건너다가 태반이 빠져 죽고 밀양읍성까지 황망히 퇴각했고, 왜적의 군량미 전용을 막기 위해 읍성의 양곡창을 불지르고 급히 대암산성을 지나 석동까지 허겁지겁 퇴각했다. 밀양 향토사료에 “대암산성에서의 왜적 방어 기록 흔적”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대암산성에서 방어는 고사하고 석동(石洞 : 산내면 원서리 석골사 계곡)까지 순식간에 퇴각했기에, “뒷말리 산성(山城)”을 임진왜란 때 아군 또는 주민이 축성했다는 것은 역사의 기록도 없고, 상황도 전혀 맞지 않다. 따라서 효심 농민군이 급하게 축성한 산성으로 보고 있다
3) 윗뒤실(上道谷, 上後谷)
○ 아래뒷실 동쪽에 있는 부락으로 용암봉(龍岩峰) 기슭에 있다. 상도곡 또는 윗도곡, 뒷실이라고도 한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0P
※ 용암봉(龍岩峰) : 용전리 용암마을과 도곡리 윗도곡 사이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龍岩峰”이란 표지석이 있다
4) 행주소(함지소)
○ 도덕봉(道德峰)에 있는 소택지(小澤地)의 지명으로 함지처럼 생겼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4P
※ 천지(天池)를 말한다
5) 천지등(天池嶝)
○ 하도곡(下道谷)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감나무골. 새청등. 샛들. 정골 등이 이웃해 있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6P
※ 천지(天池)에서 하도곡 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를 말한다
6) 작은하늘산(소천봉 小天峰)
○ 솔방 뒤쪽에 있는 동리(洞里)의 주산(主山)으로 작은하늘산 또는 소천봉이라 한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6P
※ 효심 농민군이 쌓은 소천봉산성이 있다
7) 오치령(烏峙嶺)
○ 『密州誌』 1932, 朴秀憲 著 : 上東面 篇 新谷里 嶺峴 條 烏峙嶺
8) 오실(烏谷)
○ 상동면(上東面) 신곡리(新谷里) 오실(烏谷)마을은 산내면(山內面) 용전리(龍田里) 오태(烏峙)마을과는 오치령(烏峙嶺)을 경계로 한다
신곡리는 오곡(烏谷). 신지(新旨). 절골(寺谷). 안정(雁亭)마을이 있다. 오곡(烏谷)은 오악(烏岳)의 골짜기라는 뜻이며, 이 마을에 있는 산(山) 모양이 “까마귀가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刑局)”이라 하여 오악(烏岳)이 되었다는 일설(一說)도 있다.
○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21P
9) 숨은골(隱谷)
○ 숨은골(隱谷)은 상동면 신곡리 음지마을 뒷산의 골짜기이다. 도적들이 숨어 살았다 하여 은곡(隱谷)이라 하였다
○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23P
10) 안정 마을(雁亭, 안등, 기러기등)
○ 상동면 신곡리 신지(新旨) 부락 동남쪽으로 오치(烏峙) 고개에 이르는 길목의 산속 깊은 고지대 마을이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6P
11) 피리구녕(패랭이굴)
○ 상동면 신곡리 양지마 뒷산에 있는 동굴의 이름이다. 마치 광산의 폐 광굴과 같이 생겼는데, 옛날에 그 굴 속에서 군졸들이 쓰는 패랭이가 나왔다 하여 팽랭이굴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25P
※ 출토된 물건을 보아서는 군인과 관련된 동굴로서, 패랭이가 나오기 전인 더 오래 전에도 군사용으로 사용된 동굴로 보인다
12) 오산(烏山)
○ ①오곡마을 앞에 있는 산으로 ②원래 이름은 오례산(烏禮山)이다. ③산세(山勢)가 아름답고 까마귀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형국(形局)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④오곡(烏谷)이라는 마을 이름은 오산(烏山) 아래 골짜기에서 유례된 것이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26P
※ 필자가 보기로는
『①오곡(烏谷) 마을 앞에 있는 산으로』: 이 문장으로 볼 때는 동창천 건너 오례산(烏禮山)이 아닌, 신곡리 음지마을 뒷산인 소천봉(小天峰 : 소천봉산성)“을 가리킨다
『②원래 이름은 오례산(烏禮山)이다』: 이 문장을 볼 때는 동창천 건너 경북 청도군 매전면 오례산성터가 있는 “오례산(烏禮山)”을 가리킨다
『③산세(山勢)가 아름답고 까마귀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형국(形局)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이 문장을 볼 때는 『밀양지명고 321P 동명(洞名)인 오곡(烏谷)은 오악(烏岳)의 골짜기라는 뜻이며, 이 마을에 있는 산 모양이 까마귀가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 하여 오악(烏岳)이 되었다는 일설도 있다』와 『밀양지명고 397P의 산내면 용전리 오태(烏峙 : 오치)마을 조(條)의 일련의 “시신(屍身)과 이를 쪼아먹는 까마귀 논리”와 상통하는 지명 유래와 같아, 효심 농민군의 전적지로서의 마을 명칭 유래가 유력하다. 烏谷은 밀성군 북쪽의 관군(중앙 남로착적병마사군)이 진입한 길목이다. 후세인(後世人)에 의해 지명의 미화(美化) 의향(意向)에 의해 동창천 건너 오례산(烏禮山)에 끌어 붙이려는 의도로 지명 유래를 왜곡시켰다면 그러한 시도를 한 사람의 역사의식이 의심된다. 뒷 문장인 “오산(烏山) 아래의 골짜기에서 유래한다” 라는 내용을 본다면, 오산(烏山)은 수많은 효심 농민군이 관군에 의해 도륙된 전적지인 소천봉(小天峰 : 소천봉산성)이 확실하다. “강 건너 있는 오례산(烏禮山)을 끌어다 오곡 마을이 그 산 아래의 골짜기로 위치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라 본다
『④오곡(烏谷)이라는 마을 이름은 오산(烏山) 아래 골짜기에서 유례된 것이다』:
이 문장으로 볼 때는 위 논리와 같다
따라서 오곡(烏谷 : 오실)마을 지명 유래는 오치(烏峙 : 오태)마을 지명 유래와 같이 효심(孝心) 농민군(農民軍)의 전적지(戰迹地) 지명 유래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다
13) 마전암(마저남, 馬轉岩)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8P
※ 신라가 이서고국(伊西古國)을 칠 때 말이 바위에서 굴러 강물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전적지(戰績地)이다
※ 효심 농민군의 토벌군인 관군이 청도군 쪽에서 오곡, 오치로 진격해 오는 관문 역할을 했던 곳으로 오악현의 중심마을인 오곡마을 입구의 동창천[경주시. 울주군의 경계인 고헌산(高巘山)에서 발원해 운문댐을 거쳐 청도읍 유천과 밀양시 상동면 옥산리에서 밀양강에 합류하는 지점까지의 하천 명칭] 변에 있는 바위이다
14) 오치고개(烏峙嶺)
○ 절골(寺谷) 마을과 산내면 오치(烏峙)와의 사이에 있는 고개마루 이름이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27P
바. 밀양시 승학산(乘鶴山) 지구(地區)
1) 역적평지(逆賊平地)
○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백암산(白岩山 : 흰듬) 맞은편인 대암산성(臺岩山城) 유지(遺址)의 동쪽인 승학산(乘鶴山) 정상부(頂上部)에 평평한 산지(山地)가 있는데, 이곳에서 효심 농민군과 관군이 크게 전투를 한 지역이라 해서 역적평지(逆賊平地)로 전해져 온다고 마을 주민이 이야기하고 있다
※ 운문산과 연결된 가지산에서 천화령(가지산 터널 상단부)과 재악산(載岳山), 정승동(政丞洞), 정각산(鼎角山), 승학산(乘鶴山)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산악은 효심 농민군이 웅거(雄據)한 지역이며, 역적평지는 밀양부(密陽府)에서 산내면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 역할을 하는 대암산성의 바로 동쪽의 가파른 산이다. 동천(東川)에 의해 양쪽의 가파른 백암산과 승학산이 갈려진다
사. 밀양시 산외면 엄광리
1) 생이방우(喪輿岩)
○ 갓골짝의 위쪽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이곳에는 상여(喪輿) 같이 생긴 바위가 우뚝 서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45P
(주)필자 : “생이방우(喪輿岩)” 자체는 효심의 난과 관련이 없으나, 생이바위에서 사방(북쪽 제외)을 둘러보면 특히 밀성군(密城郡) 관아 방면이 훤히 조망되는 곳으로 초병이 보초를 선 곳으로 보인다
2) 보두산(步斗山)
○ 산외면 중촌마을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보담산이라고도 한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48P
※ 효심 농민군 웅거지(雄據地)인 보두산성이 있다
3) 쟁피밭등
○ 석이방우 동쪽 너머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곳은 금곡리와 경계 지점이다. 이곳에는 샘물이 있으며, 쟁피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은 지명이다. 이 곳에도 옛날에는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쟁피는 창포의 사투리이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48P
※ 위치를 알기 쉽게 표현하면 “엄광리 쪽에서 보면, 산 너머의 산외면 금곡리.희곡리와 상동면 도곡리와 경계를 이루는 ”북(北) 중산(中山)“의 동록(東麓)의 해발 450 고지 깊은 산 속에 있는 창포밭등(菖蒲田嶝)으로 일명 천지(天池)이다”
※ 필자가 늦은 여름에 이 곳(천지 : 天池)을 혼자 답사할 때 해발고도가 높은 깊은 산속이라서 산짐승이 후다닥 뛰쳐나와 덤빌 것 같았고, 또 더 두려웠던 것은 무슨 초혼(招魂)에 이끌리면서 무척이나 두려웠다. 그리고 넓은 습지에 창포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 이곳은 효심 농민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수많은 농민군(양민 : 良民)이 관군에게 도륙(屠戮)을 당한 곳으로 억울한 영령(英靈) 잠들어 있는 곳이다
※ 창포(菖蒲) : 천남성과의 다년초. 못가나 습한 땅에서 자람. 초여름에황록색의 꽃이 핌
4) 낙화산(봉우재, 落花山)
○ 석이암 남쪽에 있는 산으로 봉홧불을 올렸다 하여 생긴 지명인데, 낙화산을 말한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14P
※ 일명 낙하산(落霞山)으로도 불린다. 이 산의 정상에서 보면, 밀성(密城 : 密陽府) 관아 방면에서 효심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관군이 진격해 오는 것을 훤히 볼 수 있는 위치이다. 이곳에서 효심 농민군이 봉화를 올려 백암산, 승학산, 용암봉, 오치, 구만산, 운문산까지 효심 농민군과 김사미 농민군의 웅거지까지 연락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봉우재”란 봉화령(烽火嶺) 또는 봉화재(烽火 고개)의 경상도식(慶尙道式) 발음이다
5) 보두산성터(步斗山城址)
○ 보두산(步斗山) 봉우리의 서쪽 지점에 있는 산성터를 말한다. 뒤쪽에 큰 산이 가로 막힌데다가 앞쪽에는 산이 험하고 암석 투성이다. 산의 정상 중앙부에는 평평한 성채가 제법 기다랗게 남아 있어 성터가 완연하다. 성터 북쪽 등성이에 있는 바위가 문바위이다. 이 산성터에 대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 산 보두암에서 생활한 보담노장이 절과 함께 이 산성을 축조했다는 전설을 남기고 있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280P
※ 이 산성의 북동쪽에 있는 북 중산(도덕봉 : 道德峰) 동록에는 천지(天池)가 있다.
※ 필자는 이 산성을 효심 농민군이 급하게 축성했다고 본다. 만약에 밀양지명고에 설명한 내용이 맞다면 보담노장이 쌓았다면 효심 농민군은 이 산성을 이용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밀양지명고에 기록된 보담노장은 실존 인물이 아닌 전설 속의 이름으로 보여지므로, 보두산성은 효심 농민군이 최초로 축성한 것이라 본다
6) 문바위(門岩, 문지기 바위)
○ 보두산에는 옛날의 성지(城址)가 남아 있는데 그 입구에 바위가 하나 서 있다. 이 바위 앞을 지나가지 않으면 성지(城址)에 오를 수 없다 하여 문바위 또는 문지기 바위라 한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280P
※ 필자는 아래의 “(24) 생이듬”과 같은 바위로 본다
※ 위 문바위는 밀양지명고 “313P의 문바위(將棋바위, 將棋岩)”와는 다른 바위이다
7) 생이듬(喪輿崖)
○ 가곡쪽의 볼수바위가 있는 지점을 평릉쪽에서 말하는 지명인데, 마치 장사지낼 때 시신(屍身)을 운반하는 상여(喪輿)와 같은 모양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생이는 상여에서 온 경상도식 말이다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280P
※ 필자가 보기로는 밀양지명고의 280P의 생이듬(喪輿崖)와 문바위(門岩, 문지기 바위)는 이명(異名) 동암(同岩)이라 본다. 이유는 상동면 평릉쪽에서는 생이듬으로 보고, 가곡리 내가곡쪽에서는 문바위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엽이 진 뒤(계절 : 季節)에 멀리서 이 바위를 보면 시신을 실은 상여(가마 모양)의 네(4) 모퉁이에 가느다란 막대 기둥을 꽂고, 그 기둥에 줄과 오색 치장을 한 상여 모양으로, 상두꾼이 상여를 메고 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아. 밀양시 산외면 희곡리
1) 장군석(將軍石)
○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72P
자.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
1) 초전(草田)
○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華封里)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변의 지대가 낮아 항상 물이 괴여 풀이 무성했다고 하여 초전이란 말이 생긴 것이라 한다.
○『密州徵信錄」戰績地條에, 在華封里高麗明宗癸丑孝心叛遽此地與雲門賊金沙彌相呼應南路兵馬使擊之斬七千餘級 이라 기록되어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 효심(孝心)의 난(亂)이 었었다고 한다. 즉, 이곳은 고려 정중부(鄭仲夫)의 난(亂)후 사회의 최하층에서 신음하던 노비들이 운문(雲門)의 김사미(金沙彌)와 더불어 민권쟁취(民權爭取)와 민생고(民生苦)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란(民亂)을 일어켜 영남(嶺南) 각지(各地)를 휩쓸은 효심(孝心)의 반거지(叛據地)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에만 기록되어 있고,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져 확실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國譯 密州徵信錄(2013, 밀양문화원)」51쪽 9행에 ”70여급”으로 오기(誤記)되어 있음.
○『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738P
※ 이 기록은 위 “(37)번의 기록”에 의하여 기록되었는데,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 “초전(草田)”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고, “밀주징신록”을 작성할 당시 저자 안병희(安秉禧)의 착오로 기록된 것 같다
13.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밀양의 부곡(部曲) 흔적들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삼국통일 전쟁과 몽고에 부역하는 고려왕조에 저항하는 삼별초군의 대몽항쟁 가담, 신료들의 반역, 민란 등에 연루된 수많은 지역과 사람들로 인하여 지역이 통째로 향(鄕), 소(所), 부곡(部曲)으로 강등되었고 연루된 그 지역과 사람들 또 그 가족들이 천민 또는 노비로 전락했고, 밀양도 그러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밀양사람들의 진도삼별초망명정부를 지원한 사건은 효심의 난 뒤에 일어나 효심의 난과 관련이 없지만 고려시대 천민과 노비 등을 만들어낸 사건이므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즉, 밀성이 귀화부곡으로 강등된 시대는 효심의 난 이후이지만, 불구대천(不俱戴天) 몽고(蒙古)가 우리 강토를 유린하고 나라를 삼킬 때 밀성(밀양)이 일반 주.군.현(州군현)으로서의 최하위의 군호(郡號)로 강등당한 유사한 사례가 고려 원종 12년(1271 : 효심의 난후 79년 만에 발생)에 밀주인(密州人) 방보(方甫), 계년(桂年), 박경순(朴慶純), 박평(朴平), 경기(慶祺) 등이 앞장서서 밀주인(密州人 : 밀양사람들)과 인근 고을민을 규합하여 대몽항쟁에 분연히 일어난 민족 최고의 독립운동인 삼별초군의 대몽항쟁에 전국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호응했던 일이 밀양이 속군(屬郡) 창녕군과 청도군 2개와 속현(屬縣) 현풍현, 계성현, 영산현, 풍각현 4개를 거느린 가장 큰 영역을 가지고 있던 군호(郡號)가 밀주(密州)였을 때였다
몽고에 대한 일방적인 굴종(屈從)으로 30년에 가까운 장기 항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고려왕실과 반동적 관료들의 처사는 국민에 대한 엄청난 배신이며 국민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항몽 전쟁의 주력부대였던 배중손 장군 등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분연히 궐기하여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망명정부를 조직한 뒤 관리, 군인 및 그 가족과 공사(公私) 재화(財貨)를 일천여 척의 배에 싣고 진도(珍島)에 본거(本據)를 정하고 남해, 거제, 제주 등 30여 도(島)를 지배하여 일대 해상왕국(海上王國)을 건설하고, 전 국민을 향해 몽고에 최후까지 항전을 호소했고, 이 때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 백성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일어났다. 이는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이었으나 몽고의 꼭두각시 정권인 그 당시 고려정부는 이를 반역(叛逆)으로 규정하여 거대(巨大) 밀주(密州)의 군호(郡號)를 삭제하고 하루아침에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시켜 인근 고을인 계림부(鷄林府 : 慶州)에 예속(隸屬)시켜 밀주지역과 밀주(密州)사람 전부를 최하층 지역과 최하층민인 부곡민(部曲民)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에 밀주인(密州人 : 밀양사람들)이 선두에 섰던 이 항쟁이 반역(叛逆)이 아니라 위대한 독립운동(獨立運動)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반역으로 몰아버렸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 후의 외세(外勢)에 맞섰던 후대 왕조의 여러 왕들의 국정목표와도 정 반대로 역사를 거꾸로 돌린 매우 부끄러운 한민족의 역사이다
당시 밀주(密州:밀양) 전체가 부곡(部曲)으로 강등된 상태에서 지금 와서 상세하게 어느 지역이 어떤 부곡(部曲)이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후세의 우리들은 향토사(鄕土史)와 민족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 그 당시 강등된 밀양지역의 귀화부곡의 상세한 명칭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고, 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본고(本考)인 “효심의 난”의 선두에 기치를 올리며 민권쟁취를 부르짖었던 그 후손들이 효심의 난의 굶주림으로부터 해방과 민권쟁취 정신이 민족적 자주성으로 승화(昇華)되어 난(亂) 후(後)의 대몽항쟁에도 앞장섰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고 본다
이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편(篇) 고적(古跡) 조(條)에 보면 다음과 같이 여러 지역에 부곡(部曲)의 흔적이 있다. 그것들(상세한 部曲명칭)은 시대는 다르지만 고려시대 삼별초군(三別抄軍)에 호응한 것과 관련하여 밀양이 한 때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군호(郡號)가 삭제된 후의 그 흔적들로 보이며, 또 어떤 것은 태조 왕건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부곡(部曲)으로 강등(降等)된 지역도 일부 있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비고(備考)” 고읍(古邑) 조(條)에 천산부곡(穿山部曲)이 고려 초에 수산(守山)으로 승격하고 현종 9년(1018)에 내속(內屬)한 것이 그것이다. 그 당시의 밀주(密州 : 密城)의 향,소,부곡민들의 생활고와 천역(賤役), 과중한 조세 부담, 부당한 대우 등을 상상해 본다
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편 부곡(部曲), 향(鄕), 소(所) 현황
향(鄕). 소(所). 부곡(部曲)의 주민들이 고려정부의 피지배층 중, 최하층민을 통제하는 토성분정과 본관제, 지방관제, 신분제 등에 얽매여 천역(천役)을 당한 고통을 역사서의 기록에 남은 일부 현황으로 다음과 같이 발췌한다
1) 두야보부곡(豆也保部曲) : 풍각현(현재의 경북 청도군 풍각면)
2) 이동음부곡(伊冬音部曲) : 밀양부 남쪽 20리(현재의 상남면 이듬마을)
3) 금음물부곡(金音勿部曲) : 밀양부 동남 15리(현재의 상남면 금동마을 추정)
4) 내진향(來進鄕) : 밀양부 서쪽 20리(현재의 무안면 來進里)
5) 운막향(雲幕鄕) : 밀양부 남쪽 25리(현재의 상남면 동산리 배죽마을)
6) 저대부곡(楮代部曲) : 밀양부 북쪽 7리(현재의 부북면 추정)
7) 오정부곡(烏丁部曲) : 밀양부의 서쪽 6리(현재의 부북면 오례리)
8) 평릉부곡(平陵部曲) : 밀양부 동북 15리(현재의 상동면 평릉마을)
9) 음곡소(陰谷所) : 밀양부 서쪽 25리(현재의 무안면 추정)
10) 고매부곡(古買部曲) : 밀양부 상거(相距) 95리 [청도군 동촌(東村)과 경주 서촌(西村)에 넘어 들어가 있다] 현재의 청도군 운문댐 연접 운문면 지촌리, 봉하리, 정상리, 마일이다. 청도군지 운문면 연혁조에는 고미부곡(고미부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國譯 密州誌』고며면(古旀面) 편(篇)에는 ①고며리[古旀里 : 밀양부와 80여리 相距] ②두곡[杜谷 : 현재의 경북 경산(慶山)의 남촌(南村)과 경계에 있다] ③자물야[自勿也 : 현재의 경북 청도 동북쪽 50리 위치, 밀양부와 90리 상거(相距)] ④아을읍[阿乙邑 : 경주의 서촌과 이어진 땅, 밀양부와 120리 상거(相距)] 기록이 있다
11) 곡량촌(穀良村) : 밀양부 서쪽 25리[현재의 무안면 양효리 곡량(谷良)마을]
12) 파서방부곡(破西防部曲) : 밀양부 남쪽 30리(현재의 하남읍 파서리)
13) 근개부곡(近皆部曲) : 밀양부 서쪽 25리(현재의 청도면 구기리 근기리)
14) 양량부곡(陽良部曲) : 밀양부 북쪽 10리(현재의 부북면 위양리 陽良마을)
15) 밀진현(密津縣) : 현재의 창녕군 길곡면 죽산(竹山)
16) 천산부곡(穿山部曲) : 밀양부 남쪽 40리(현재의 하남읍 수산리)
14. KBS 역사스페셜 “김사미와 효심의 난” 방영(放映)
2006. 2. 3 KBS는 “제35회 역사스페셜”에서 『무인시대 10년, 고려농민 일어서다』 라는 제목으로 절찬리에 방영하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밀양에서 일어났던 ”효심의 난“이 방영(放映)되어 밀양 향토사 및 우리 민족사의 관심 밖에 있었던 800여년 전의 농민항쟁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고, 우리 역사와 향토사 특히 ”효심의 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던 필자에게는 KBS에 대해 한없이 고맙게 생각하면서, 그 귀중한 사료(史料)인 『무인시대 10년, 고려농민 일어서다』의 대본(臺本) 전문(全文)을 지면상 게재할 수 없어 일부만 다음과 같이 발췌한다
또 필자는 밀양(密陽) 향토사(鄕土史)와 우리 역사상 농민항쟁의 실상을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지나간 영상을 방송을 통해 볼 수도 있지만, 책으로 인터넷으로도 알려 농민항쟁(農民抗爭)의 역사적 의의(意義)를 더 많이 알리고 싶다. 그 당시 농민(農民)이 90% 이상이었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것은 농민(農民)만의 항쟁이 아닌, 고려백성 전체의 항쟁(抗爭)이었다
무인시대와 그 역사를 함께 했던 고려 농민항쟁을 보면, 비록 농민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차별과 수탈의 뿌리였던 제도를 바꾸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 신분에 따라 사는 지역을 나누고 그 지역을 떠나지 못하게 했던 본관제와 이중의 노역부담을 지게 만든 부곡제가 농민항쟁 이후 점차 사라져 갔다. 되돌아보면 우리 역사의 중요한 고비에는 언제나 역사의 잘못된 흐름을 바꾸려는 농민들의 저항이 있었다. 외세의 침략과 양반, 지주들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세기에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주농민항쟁과 동학농민항쟁 등이 잇따라 일어났는데, 그 바탕에는 분명, 800년전 고려 농민들의 항쟁 의지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철권통치기였던 무인시대 100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시기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우리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대기이도 했다
운문사 일대는 경상도 농민항쟁의 허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역사스페셜 방영 전에 밀양의 향토사학자 손정태 선생(현재 밀양문화원장)이 KBS 제작팀과 현장 답사할 때 인터뷰한 내용과 제작팀의 의견 등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곳이 관군과 싸운 격전지였다. 이 일대(운문산 주변 지금의 경남 밀양과 경북 청도 일대)가 "김사미. 효심의 난"의 거점이다. 그래서 여기에 김사미. 효심 세력들이 웅거를 하면서 이쪽 방향으로 넘어가면 산자락을 거쳐서 건천. 경주로 연결이 된다. 그러니까 경주 관군 세력과 운문적 김사미. 효심의 난이 이 지형을 두고 접전을 벌였다고 볼 수 있다. 운문산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은 밀양. 언양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10년간 항쟁은 계속했다. 이 지역에는 900년이나 지난 지금도 당시의 전투 상황이 생생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운문사와 산(山)하나 사이를 두고 있는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오치마을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당시 효심군의 거점이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오치라는 지명은 까마귀 오(烏) 자(字)를 쓰고 고개 치(峙) 자(字)를 쓴다. 그러니까 이 산이 죽음의 산 시체(屍體)가 모여 있던 산이다. 그래서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으니까 까마귀들이 그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그런 얘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효심의 농민군 7천명이 몰살한 곳이 지금 오치 이 현장이라고 본다. 고려 말, 지금의 군(郡) 단위 인구가 1. 2천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전사자(戰死者) 수 7천명은 엄청난 규모이다』
다음은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교수분들의 설명 글이다. 『무신정변으로 시작된 무인시대는 1170년부터 무려 1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그 누구도 함부로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강압적인 철권통치가 이뤄졌는데, 이 시대는 우리 역사 최대의 농민 항쟁기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무신정변 이전의 20년 동안 겨우 두 건에 불과했던 농민항쟁은 무신정변 직후부터 불붙기 시작해 100년 동안 무려 일흔 다섯 건(75건)으로 거의 매년 발생했다.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폭발한 농민 항쟁은 들불처럼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철권통치 무인시대 100년 그것은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조직적이고 격렬한 농민항쟁의 시기였고, 이렇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 온 농민항쟁의 배경은 찌든 가난과 굶주림 속에 신분차별로 고통받던 시대의 "反 신분 항쟁"이었다 즉, 본관이 자신의 핏줄을 나타내는 오늘날과 달리 고려시대에는 실제 거주지를 본관으로 했고 호적에는 반드시 본관을 기록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를 밝히게 했다. 그리고 정부의 허락없이는 절대로 자기가 살고 있는 이 본관 지역을 절대로 떠날 수 없게 했다. 결국 본관제는 신분을 결정짓는 굴레로 작용했다. 고려는 본관제로 사는 지역을 고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 군현과 구별되는 특수촌락을 따로 설정했다. 그것이 바로 향(鄕), 소(所), 부곡(部曲)이라 불리는 부곡제 지역이고, 일반 농민층과 구별시켜서 부곡제 지역으로 영역을 규제하고 이 사람들을 그런 차원에서 일반 농민층과 달리 추가적인 역(役)까지 부담시켰고, 소(所)의 주민들 중에는 본관제를 어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소(所) 지역을 이탈하는 사례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부곡민들이 이런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국가에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전공을 세우는 것은 부곡인이라는 신분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당시 부곡민들의 가장 큰 바람이 부곡의 해체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농민항쟁은 본관제(本貫制)와 부곡제(部曲制)를 통한 차별에 항거하여 일어난 신분 해방운동이었고, 이러한 차별적인 지배체계를 만들었던 고려왕조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또 고려농민의 집안 살림은 초근목피로 연명 했다. 고려사에 “세금 때문에 자식을 판 자는 사면(赦免)하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한 것이었다. 또 신분의 벽이 너무 높아서 대다수의 농민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하기 어려웠고, 이에 비해, 고려 귀족들은 엄청난 부와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무인시대 농민항쟁의 또 다른 이유였다. 당시 농민들의 생활상을 예로 들면 농민들은 궁궐을 짓는 등의 토목사업에 의무적으로 동원됐는데, 이 때 필요한 양식과 도구는 모두 자기 부담이었고, 굶어면서 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고려 귀족들의 사치는 농민들의 가난 위에 이루어졌다. 굶주림에 허덕였던 고려농민의 일년 가계부를 역사의 기록으로 살펴보면 농민들의 한해 평균 수확량은 18석 정도였다. 그런데 5인 가족 기준의 식량만 17석 정도가 되고, 여기에 세금과 공물로 약 다섯 석, 종자곡으로 두 석만 남겨도 여섯 석 이상의 적자가 나서 정상적으로 농사 지어면 적자를 낼 수 밖에 없었는데, 빚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고, 한 해 빚지고 불행히도 그 다음해까지 흉년이 들면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게 되고, 소작으로 살거나 아니면, 유망민이 되어서 떠돌아다니거나, 아니면 도적질을 하는 수밖에 없게 되어가고, 여기에 지배층의 수탈이 더해져 거주지를 이탈하는 농민들의 유망(流亡)은 극에 달했다. 수탈과 가난의 반복이었던 고려 농민의 생활, 이것이 고려 농민의 항쟁의 폭발 원인이었다』
15. “김사미의 난” 발생지는 청도 운문사 주변
2010. 도서출판 들녘. 이상각의『열정과 자존의 오백년, 고려사』에는 명종 23년(1193)에는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이 난(亂)을 일어키기 직전의 정세(情勢)와 난(亂)의 발생지(發生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2월에 두경승(杜景升)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삼았다. 중방(重房)의 여러 장수들이 잔치를 베풀어 하례(賀禮)하는데, 술이 취하자 각기 악기(樂器)를 들었다.
두경승(杜景升)이 노래하자 수사공(守司空) 정존실(鄭存實) 이 작은 피리[小管]를 부니, 이의민(李義旼)이 노하여 꾸짖기를, “어찌 재상(宰相)이 방자(放恣)하게 노래하고 피리를 불어 스스로 광대(廣大)와 같을 수 있으랴." 하고, 곧 연회(宴會)를 파(罷)하고 돌아갔다.
○ 동남로 안찰부사(東南路按察副使) 김광제(金光濟)가 도적을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경병(京兵)을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 3월에 사자(使者)를 경상도ㆍ전라도ㆍ양광도(楊廣道)에 나누어 보내어 창고를 열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救恤)하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근래에 형옥(刑獄)을 맡은 관원이 능히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죄가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옥에 있게 하고, 원통하고 억울함을 펴지 못하게 하여 천문(天文)이 위차(位次)를 잃게 되고, 절기가 고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뒷날에 장차 무슨 변고가 있을지 알 수 없다. 헌대(憲臺)에게 명하여 원통한 옥사를 살펴 다스려 이를 모두 용서하라." 하였다.
○ 가을 7월에 남방에 도적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 강한 자 김사미(金沙彌)는 운문(雲門)에 웅거하고, 효심(孝心)은 초전(草田)에 웅거하여, 망명(亡命)한 자들을 불러 모아 주(州)ㆍ현(縣)을 협박하고 약탈하였다』
16. 청도민란(淸道民亂 : 金沙彌의 亂, 雲門山.東京民亂 등)
[출처 : 淸道郡誌 161P ~ 165]
앞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효심과 김사미의 난은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운문지맥)에서 일어났기에 『청도군지(淸道郡誌)』에서는 이 두 개의 민란을 어떻게 기록하는 지를 다음과 같이 알아 본다
『청도민란(淸道民亂)은 일운(日云) 운문민란(雲門民亂)이라고도 하며 고려(高麗)의 상극기(相剋期)에 있어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명종(明宗) 년간(年間)으로부터 고종(高宗) 년간(年間)에 걸쳐 봉기(蜂起)한 각처(各處)의 민란 사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신란 직후의 김보당(金甫當)의 기병(起兵), 개경(開京) 승도(僧徒)의 난(亂),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 등의 난(亂)과 같은 것은 민란이라 말할 수 없고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무력 행동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것과는 다르게 민란은 사회적 경제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 구질서(舊秩序)의 잔재(殘滓), 유산(遺産)을 타파(打破)한 새로운 민중운동(民衆運動)이라 할 것이다. 봉건(封建) 귀족(貴族)을 배경으로 한 지방 관리(官吏) 중에는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얼마나 많았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래서 유망민(流亡民)이 속출하여 농촌사회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되자 유적(流賊)이 횡행(橫行)하고 일부 지방에 크고 작은 민란의 봉기를 보게 된 것이다.이때 조정에서는 감무관(監務官)으로 각 지방의 유민(流民)을 막고 방지하는데 극력(極力) 도모(圖謀)하였으나 탐관오리(貪官汚吏)의 일소(一掃)와 농민생활의 안정을 확보하는 근본적인 방침이나 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수행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근절(根絶)할 수 없을 지경이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막을 수 있는 정책이나 방법이 수립되지 않았고, 또한 지방관리(地方官吏)들의 태도 역시 여전하여 잇달아 많은 유적(流賊)들과 일부 지방의 민란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1175년(高麗 明宗 5년)부터 역사상(歷史上:高麗史)에 남적이 일어났다고 기술(記述)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민란이 일어난 시초(始初)인 것으로 짐작된다. 사상(史上) 남적(南賊)이라고 기록된 것은 그 당시의 경기(京畿) 이남(以南) 지방에서 일어났던 민란을 총칭(總稱)하는 말로 추측(推測)되기도 한다. 이 당시에 이르러 더욱 많은 민란이 일어났는데 1183년(明宗 13년) 당시의 집권자 경대승(慶大升)이 병사(病死)하고, 이의민(李義旼)이 재기용(再起用)되어 정권을 잡은 후로는 정치가 더욱 혼탁(混濁)해지고 사회가 말없이 문란(紊亂)하였는데, 왕실(王室)은 왕실대로 부패(腐敗)할 대로 부패하였고, 집권자는 집권자대로 탐욕(貪慾)을 자행(恣行)하여 글자 그대로 뇌물(賂物)로써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매관(賣官), 매직(賣職)으로 벼슬을 차지하게 되니 선량하고 뜻이 있는 관리(官吏)들이 지방관(地方官)으로 배치(配置)된다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관리들의 가혹한(苛酷)한 구사(驅使)와 주구(誅求)에 견디다 못한 끝에 민란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는데, 동경(지금의 慶州를 말함)을 중심으로 누차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제1차 민란은 1190년(明宗 20) 正月에 또는 12월 등의 민란은 피차(彼此) 관련성이 있는 것 같으며, 이 같은 동경(東京) 방면 민란의 세력이 꽤 치열(熾烈)하여 조정(朝廷)에서는 남로(南路) 착적사(捉賊使)를 파견(派遣)해야 할 정도였다.
또 동경 지방의 제2차 민란은 과연 무엇일까? 이때는 동경(東京) 부근뿐만 아니라 통(通)히 남적(南賊) 봉기(蜂起)라고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기술(記述)하고 있으니 상당히 광범위하게 여러 곳에서 일어났던 모양이나 그 중에서도 가장 완강(頑强)하게 항쟁(抗爭)한 것이 운문(雲門)의 민란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운문민란(雲門民亂 : 淸道民亂)은 김사미(金沙彌 : 또한 김삼(金三)이라고도 한다)의 도중(徒衆)과 초전(草田 : 蔚州)의 무리인 효심(孝心) 등이 일어킨 민란으로 1193년(明宗 23) 7월에 일어났다고 하고 있으나, 이에 앞서 같은 해(1193년) 2월에 동남로(東南路) 안찰부사(按察副使) 김광제(金光濟)가 이들 적을 토벌(討伐)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경군(京軍)의 파견(派遣)을 조정(朝廷)에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제2차(第二次) 이곳에서 일어난 민란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고 제일차(第一次) 민란이 종식(終熄)되지 않은 연장(延長)이라고 보는 것이 妥當할 듯하다.
[(주)필자 : 효심의 난 발생지 초전은 울주의 초전이 아닌, 밀양 저전촌으로 보아야 하며, 효심의 난이 1193년 2월에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을 하고 있음]
여하튼 이 때 김사미(金沙彌), 효심(孝心) 등이 일어킨 민란은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어느 민란보다 가장 완강(頑强)하고 세력이 큰 것이었던 모양으로 왕(王)을 비롯하여 조정에서는 매우 우려(憂慮)하여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을 하여금 장군(將軍) 이지순([李至純 : 당시의 당로자(當路者)인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이공정(李公靖) 등을 통솔(統率)하고 나아가서 반군(叛軍)을 치게 하였다.
이 운문(雲門)을 중심으로 한 동경[東京 : 지금의 慶州를 말함] 등지(等地)의 적괴(賊魁)들은 신라(新羅) 부흥(復興)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듯하여 이 토벌군(討伐軍)의 종군(從軍) 장군(將軍) 중(中)의 한 사람인 이지순(李至純)의 아버지요, 당시의 권세(權勢)를 잡고 있는 이의민(李義旼)은 그의 본적(本籍)이 경주(慶州)인 점에서 신리(新羅)의 부흥(復興)에 뜻을 품고 김사미(金沙彌), 효심(孝心) 등과 통밀(通密)하여 거만(鋸萬 : 巨額)의 증물(贈物)이 있었다고 전(傳)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이지순(李至純)도 탐욕(貪慾)이 심(甚)하여 적(賊)과의 사이에 많은 재물(財物)의 증수(贈收)가 있었고, 토벌군(討伐軍)의 기밀(機密)을 수(數)없이 통밀(密通)한 것이라고 전(傳)하고 있다.』
17. 삼별초난(三別抄亂)과 청도(淸道)
이 글은 청도 운문사 일대에서 일어난 김사미(金沙彌)의 난과 밀성(밀양) 저전촌 일대에서 일어난 효심(孝心)의 난 때 밀성군(密城郡)은 군호(郡號)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청도군(淸道郡)은 부곡(部曲)으로 군호(郡號)가 강등(降等)되었고, 그후 진도 삼별초망명정부(三別抄亡命政府) 때는 밀성군인(密城郡人)들이 주동이 되어 주변 여러 주.군(州郡)을 독려하여 진도(珍島)의 삼별초망명정부를 호응토록 하였으나 실패로 인하여 밀성군이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한 반면, 청도군은 밀성군의 진도삼별초망명정부를 호응한 주모자들을 주살(誅殺)한 결과 청도군(淸道郡)라는 군호(郡號)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어, 두 개의 역사적인 대 사건으로 인하여 각각 시대는 다르지만 한 번씩 군호(郡號)가 부곡(部曲)으로 강등되어 두 지역민들이 정상적인 주.군민(州郡民)의 자격이 박탈되어 이중의 천역(賤役)을 당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글을 올리며, 향토사 문헌인 『밀양지(密陽誌)와 청도군지(淸道郡誌)』에 삼별초망명정부에 호응한 것이 그 당시로서는 반역(叛逆)에 해당되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항몽독립운동(抗蒙獨立運動)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청도의 김사미와 밀성(밀양)의 효심의 난 또한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인권(人權)과 민권(民權) 쟁취를 위한 농민(국민적)의 항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글을 올린다.
『청도군지』에는 밀성(밀양)과 관련하여 “삼별초의 난”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삼별초란(三別抄亂)은 1270년(고려 元宗 11)에서 1273년(元宗 14) 간에 강화도(江華島)의 삼별초군이 蒙古 勢力에 반대하여 일어킨 反亂 事件을 말하는데, 지금은 主體意識이 투철(透徹)한 민족의 항쟁(抗爭)으로 評價되고 있다. 삼별초군이 진도를 근거지로 삼고 각 주(州), 군(郡), 현(縣)을 침범하고 그 세력을 규합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인 1271년(원종 12)에 밀성군(密城郡:지금의 密陽郡) 사람인 방조(方早:密陽誌에는 “方甫”로 기록되어 있음), 계년(桂年), 박평(朴平), 박공(朴公), 박경순(朴慶純), 경기(慶祺) 등이 장차 진도(珍島)의 삼별초군에 응하려 한다고 공포하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무리를 이루고 곧 밀성부사(密城副使) 이신(李頣)을 죽이고 드디어는 그 우두머리는 스스로 공국병마사(攻國兵馬使 : 密陽誌에는 “改國兵馬使”로 기록)라 칭하고 각 주(州), 군(郡), 현(縣)에 이첩하였다 한다. 한편 그와 같은 무리인 동정(同正) 박경순(朴慶純) 등 밀성인(密城人) 200여(餘) 명을 청도(淸道)로 보냈다. 이들은 그와 청도에 들어와 당시의 청도의 감무(監務:郡守)이던 임종(林宗)을 죽이고 같이 거병(擧兵)하여 장차 진도(珍島)에 이를 것을 강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청도군의 호장(戶長)이었던 백계영(白桂英)이 지휘하여 이들과 응대(應待)하였는데 청도인들이 짜고 거짓으로 항복하여 이들을 환영하였으며 그 무리들에게 환영하는 뜻으로 대주연(大酒宴)을 베풀어 독한 술을 일부러 많이 먹여 만취하게 한 다음, 미리 대기시켜 두었던 군사(軍士)들을 몰아 청도에 침입하여 갖은 난동을 부리던 그 적도(賊徒)들을 모조리 죽여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청도는 비록 감무(監務:郡守) 임종(林宗)은 죽었지만 호장(戶長) 백계영(白桂英) 등의 기책(奇策)을 써서 위급함을 구하게 되었고, 적도(賊徒)들을 살해한 공훈(功勳)으로 청도는 현치(縣治)에서 격식(格式)이 큰 군(郡)으로 승격하여 주군사(知郡事)가 군수(郡守)로 오게 되고, 호장(戶長) 백계영(白桂英)은 호장(戶長)을 면(免)하고 품계(品階)를 받았다고 한다(戶長 白桂英이 받은 品階는 未詳이다). 이때 밀성(密城:지금의 密陽郡) 사람으로 일선(一善:지금의 善山郡)의 현령(縣令)으로 있던 조천(趙阡)을 밀성인(密城人) 적도(賊徒)들이 불러 같이 반란하기로 약정되었으나 마침 그 무리들의 주력(主力)이 청도에서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군인(郡人) 손일(孫逸)과 그를 따라온 적도(賊徒)들을 모살(謀殺)하려 하였다고 한다. 이때 밀성인(密城人)들의 거병(擧兵)은 민족의 자주정신에서 한 것이 아니고 평소의 불평불만을 가진 분자들이 모여 장차 그 불평불만을 풀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여, 이 혼란기에 작용한 영웅심의 결과라고 보는 측도 있는 것이다. 이때 안찰사(按察使) 이오(李敖)는 금주(金州) 방어사(防禦使) 김헌(金憲:밀양지.密陽誌에는 김훤.金暄으로 기록)과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 등을 모여 들게 하니 일선현령(一善縣令) 조천(趙阡) 등은 방보(方甫) 등을 죽이고 항복(降伏)하니 이로서 밀성(密城).청도(淸道) 및 일선(一善)의 적도(賊徒)들은 드디어 평정(平定)되었던 것이다.』
18. 주.군.현간(州.郡.縣間) 정보수집, 감시활동 지역 설정
1994년 밀양문화원 발행 『密陽地名攷』 청도면 편(篇)과 지금(2016년 현재)의 경남 밀양시 청도면사무소 면장실(面長室)의 “청도면(淸道面) 현황판(現況板)”에 의하면 지금(2016년)의 “경남 밀양시(密陽市) 청도면(淸道面 : 九奇里, 杜谷里, 小台里, 槽川里, 仁山里, 古法里, 要古里)”이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 이래 “경북 청도군(淸道郡) 외서면(外西面)”에 편입되어 있다가, 1912. 12. 1부로 일제(日帝) 조선총독부의 전국지방행정구역 개편(改編)에 따라 면(面)의 명칭 변경과 함께 “경남 밀양시(密陽市) 청도면(淸道面)”으로 편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1994년 경북 청도문화원(淸道文化院) 발행『淸道郡誌』 운문편(雲門面) 편(篇)에 의하면 이와 비슷한 시기인 1914년부로 밀양(密陽)에서 120리(里)나 떨어진 운문댐 북쪽 깊숙한 곳(2016년 현재 운문면에서는 이 지역을 水北地區라 함)인 경주시.영천시.청도군.경산군 접경지역인 지금의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 속해 있는 외로운 고도(孤島)처럼 생긴 첩첩산중(疊疊山中) 심산유곡(深山幽谷)의 고미면(古彌面 : 芝村里, 鳳下里, 亭上里, 馬日里”)이 밀양 땅이었는데, 이 면(面)도 역시 1914년에 일제(日帝) 조선총독부가 전국지방행정구역 개편 시에 “경남 밀양군 고미면”에서 “경북 청도군 운문면”으로 편입되었는데, 밀양의 향토사료인 『국역 밀주지(國譯 密州誌)』에도 밀양땅 “고며면(古旀面 : 古彌面과 古旀面은 異名 同一 面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에는 “근기리(近奇里)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오는 근개부곡(近皆部曲)의 옛 마을이다. 부곡(部曲)이라는 것은 향(鄕), 소(所)와 함께 대체적으로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지방의 특수행정구역이었다. 그러므로 근개부곡도 중세 시대(中世時代) 이래 이곳에 있었던 밀양부(密陽府)의 특수행정 구획의 하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지명으로 보아 현재 근기리(近奇里)을 중심으로 내촌(內村), 고장골(古莊洞), 양지호음동(陽地好音洞) 일대가 그 터전으로 여겨진다. <중략> 이 부곡(部曲)은 이미 15세기 중엽에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편찬할 당시에는 이미 소멸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국역 밀주지 지리편(國譯 密州誌 地理篇)』고며면(古旀面) 편(篇)에는 “고며리(古旀里)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고매부곡(古買部曲)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 “근개부곡도 중세 시대(中世時代) 이래 이곳에 있었던 밀양부(密陽府)의 특수행정 구획의 하나였다” 라는 기록과 지금의 경북 청도군 운문면 일대가 운문사를 관할하는 면(面)이고, 운문산과 운문지맥(밀양 저전촌까지 연결)이 지금의 “경주국립공원(慶州國立公園) 단석산지구(斷石山地區)”와 바로 연결된 지형 속의 고미면(古彌面,古旀面,古買部曲)으로 보아, 동일한 시기에 바로 옆에 연결된 산군(山群 : 운문지맥) 속에서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일어났고, 잇따라 진도 삼별초망명정부에 밀성(밀양) 주민이 호응했고 또 밀성(밀양)의 주동세력이 청도 감무와 아전 등을 회유한 것 등을 볼 때, 신라시대 이래 향.소.부곡제와 중세(고려시대) 이래 밀양과 청도의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의 군호(郡號) 강등(降等)에 따른 중앙정부의 부곡민(部曲民) 통제 및 이중의 천역(賤役)과 공부(貢賦) 부과에 따른 고통을 본고(本考)에 연결지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또 밀양지명고의 청도면 편 구기리 조에 “이 마을(近奇 本洞)은 내촌(內村), 고장골(古莊洞), 양지호음(陽地好音洞) 등과 함께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외서면(外西面)의 영역 내에 들어와 있다. 이 지방 고로(古老)들의 전문(傳聞)에 의하면, 위와 같이 경계를 넘어 온 이유는 밀양, 청도 사이에 정보 전달이나 상호 감시를 위해서 경계를 넘어와 있었다고 한다” 라는 기록을 볼 때, 지금은 행정구역이 비록 경남과 경북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밀양과 청도 두 지역이 부족국가 이래 지금까지도 두 지역민이 역사, 문화, 경제, 사회 등의 제(諸) 방면에서 아주 밀접하고 비슷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볼 때, 고려시대 이래 효심.김사미의 난과 항몽진도삼별초망명정부에 호응한 역사적인 사건 등을 고려해서 앞으로도 두 지역의 주민들이 합세하여 반란 등을 모의(謀議)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중앙정부에서 지형적으로 이질적(異質的)인 두 지역주민의 소요.민란 등을 예방하기 위해 행정구역을 이렇게 편성한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19. 新增東國輿地勝覽 울산군,언양현 古蹟 條 부곡(部曲) 미등재
고려사 등에는 “효심의 난이 울산 초전(草田)에서 일어났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필자의 조사 내용, 여러 사학자들의 글 등을 서로 연계하여 살펴보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적(古蹟)에서의 부곡(部曲)은 신라시대와 고려초기 통일전쟁과 그 이후 토성분정.본관제와 관련된 부곡이 있으며, 또 고려시대를 관통(貫通)하면서 민란과 대몽항쟁 삼별초망명정부에 호응한 주.군(州郡)이 반역(叛逆)의 향(鄕).소(所).부곡(部曲)으로 추락된 지역이 있다.
『청도군지』에 보면 청도민란(김사미의 난)과 관련하여 청도군이 부곡(部曲)으로 강등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밀성군은 항몽삼별초망명정부에 호응한 결과, 군호(郡號)가 반역향(叛逆鄕)인 귀화부곡으로 강등되었다. 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가장 대표적인 민란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이 이렇기에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이 두 개의 난과 관련하여 청도군은 효심의 난과 관련하여 이미 부곡(部曲)으로 강등(降等)되었고, 『밀양지』에 의하면 밀성군은 효심의 난 후에 일어난 삼별초항몽망명정부에 호응한 결과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이 이렇기에 “효심의 난이 발생한 지역이 울산 초전(蔚山)이라고 기록한 역사서”에 비추어 본다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지금의 울산광역시가 “울산군과 언양현”으로 되어 있었기에 당연히 울산군과 언양현은 청도군이 김사미의 난으로 인해서 부곡(部曲)으로 강등(降等)된 것과 마찬가지로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군현(郡縣)의 명칭이 부곡(部曲)으로 강등(降等)되었어야 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울산군 및 언양현 편과 울산광역시사(蔚山光域市史) 등 역사.지리서에는 부곡(部曲)에 편입되었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효심(孝心)의 난이 울산 초전(草田)에서 일어났다” 라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기록은 “역사서(歷史書)의 오기(誤記)”로 볼 수 밖에 없다.
XV. 맺는말
고려 무인시대(武人時代)와 그 이후의 민란(民亂)의 윈인은 폭압적인 수탈(收奪) 위에 귀족과 무인(武人) 등 지배계층의 사치와 향락이 극(極)에 달하였고, 무인들의 더욱 가혹한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인한 굶주림과 향.소.부곡제(鄕所部曲制)와 같은 계서적(階序的)인 지배체제에 대한 민권회복의 갈망이 농민봉기로 분출한 것이다. 고려시대 열악한 농사에 기대어 사는 농민의 비참(悲慘)함과 유망화(流亡化)에 대한 과정을 KBS역사스페셜 『무인시대 100년, 고려농민 일어서다』에서 이정신 교수의 인터뷰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극명(克明)하게 말해 준다.
“고려 농민(당시 농민이 90% 이상이므로 고려 백성 전부라 칭함)들의 한 해(1년) 평균 수확량은 18석(石) 정도였다. 그런데 5인 가족 기준의 식량(食糧)만 17석 정도가 된다. 여기에 세금(稅金)과 공물(貢物)로 대략 5석을 납부하고, 종자곡(種子穀)으로 2석만 남겨도 6석 이상의 적자가 난다(모자란다). 정상적으로 농사를 지어면 적자를 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빚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해 빚지고 불행히도 그 다음해까지 흉년이 들면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게 된다. 유일한 생계 수단인 토지를 빼앗기면 소작인(小作人)으로 살거나 아니면, 유망민(流亡民)이 되어서 떠돌아다니거나, 아니면 도적질을 하는 수밖에 없게 되어가는 것이다. 여기 지배층의 수탈(收奪)이 더해지면서 거주지를 이탈(離脫)하므로써 농민들의 유망(流亡)은 극(極)에 달했다”
간혹 효심(孝心)의 난(亂)을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는 여기에 “고려농민이 천역(賤役)과 노역(奴役)을 수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려 연명(延命)을 위한 고리채(高利債)로 인하여 가족(家族)이 해체되었다” 라는 전제(前提)가 없이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위에서 이정신 교수의 고려 농민이 유망화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설명한 바와 같이 즉, “국가가 백성의 유망화(流亡化)를 유발시킨 구조적인 정치.경제.사회 등 제반(諸般) 체제를 만든 국가의 책임을 기저(基底)에 깔고서(국가에 책임을 지우고서) 신라부흥운동의 개연성(蓋然性)을 이끌어 내어야 한다” 라는 농민 유망화의 원인과 책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효심(孝心)의 난(亂)은 “생존의 기반을 빼앗긴 목숨 부지에 절박(切迫)한 유망민(流亡民)에게 당대 최고의 실권자였던 이의민(李義旼)의 강압적인 속임과 회유에 의한 신천지(新天地)를 향한 신라부흥운동에 호응할 수밖에 없었다” 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런 비극적(悲劇的)인 기록이 있다. “세금을 내기 위해서 자식을 팔아먹은 죄는 면해 주어라” 라는 왕명(王命)이 있었다. 국가가 백성(농민)을 굶주리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가족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 무리지어 웅거(雄據)하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하다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식량(食糧) 도적질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집을 떠나기 전에 이미 손바닥한 논밭마저 빚으로 빼앗겼고, 이에 더하여 처.자식(妻子息)은 빚으로 권세가(權勢家에)“의 노비(奴婢)로 팔려갔기에, 인간(人間)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良心)으로서도 빈껍데기 집에 홀로 살아갈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을 떠나 유랑(流浪)하던 경상도 장정(壯丁 : 農民) 7,000명이 마지막에 웅거(雄據)하다 내몰린 곳이 밀성군(密城郡) 저전촌(楮田村) 일대였고, 관군에게 민란(民亂)의 역적(逆賊)으로 몰려 짐승이 도살(屠殺)당하듯이 전부 도륙(屠戮)당했다. 그들에게 죄(罪)가 있다면 굶주림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관청 등의 곡식(穀食)을 훔친 죄일 뿐이었고, 더 큰 역적질을 하기 위해 모의(謀議)한 이의민(李義旼) 일당(一黨)의 폭압적인 강박(强迫)과 회유(懷柔)에 의한 속은 죄(罪)뿐일 것이다
역사서(歷史書)와 사료(史料), 언전(諺傳) 등에서 효심(孝心)과 휘하(麾下) 유망(流亡) 농민군(農民軍)에 대해서 남적(南賊), 적(賊)의 괴수(魁帥), 남적괴(南賊魁), 역적(逆賊), 반역(叛逆), 초적(草賊), 역포(逆捕) 등으로 기록 또는 표현하고 있다.
사전적(辭典的)으로 보면 “역적(逆賊)”은 임금에게 반역(反逆)한 사람이고, “초적(草賊)”은 좀도둑 또는 남의 곡식 단을 훔치는 도둑을 지칭한다. 또 역사적으로 볼 때는 “초적(草賊)이”란 대체적으로 정부의 학정(虐政)에 반대하여 일어난 굶주린 농민과 천민.노비로 뭉쳐진 농민반란군(農民叛亂軍)은 생존을 위해 농민봉기(農民蜂起)뿐만 아니라, 민족의 생존과 자존을 위해서 항몽전선(抗蒙戰線)에 참전(參戰)한 사례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왕조(王朝)의 실정과 무인정권(武人政權).지방관(地方官:수령).아전(衙前).향리(鄕吏) 등의 총체적인 탐욕(貪慾)과 학정(虐政) 등에 의해 발생한 유망농민(流亡農民)과 천민(賤民), 노비(奴婢) 등이 민란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볼 때, 반란군으로 만든 고려왕조가 이들을 남적(南賊), 적(賊)의 괴수(魁帥), 남적괴(南賊魁), 역적(逆賊), 반역(叛逆), 초적(草賊), 역포(逆捕) 등으로 기록 또는 표현한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이러한 원인 제공을 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처절한 항쟁이 벌어졌던 운문지맥(雲門支脈) 밀성군(密城郡) 산하(山河)! 경상도(慶尙道) 7000 장정(壯丁)의 의(義)로운 죽음을 8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역적으로 몰아 땅속 깊숙히 묻어 놓았다. 그리고 7000 장정(壯丁)의 처자식과 부모형제는 천민(賤民)과 노비(奴婢) 신세로 전락하여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즉, 폭압적(暴壓的)인 무신정권(武臣政權)에 의해 도륙(屠戮)되고 살아남은 처자식과 부모형제는 노비(奴婢)로 사라졌지만, 8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7000 경상도(慶尙道) 장정(壯丁)의 영령(英靈)이 지하에서 “굶지 않고 인권(人權)과 백성으로서의 민권(民權)이 보장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지금도 요구하며 울부짓는 소리는 우리의 귀에 쟁쟁하다. 누군가는 모르지만, 살아남은 분들과 그분들의 후손(後孫)들의 피가 후세(後世)의 누군가의 피에 뜨겁게 뜨겁게 면면(綿綿)히 흐르고 있다. 누군가는 모르지만, 살아남은 분들과 그분들의 후손(後孫)들의 영혼(靈魂)이 후세(後世)의 누군가의 영혼(靈魂)에 깊게 깊게 서려있다. 앞으로도 이 땅에 그분들의 피가 영원(永遠)히 흐를 것이고, 그분들의 영혼이 영원히 서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그분들의 후손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역사(歷史) 이래 한반도 전역(全域)에서 일어난 굶주린 백성의 민란은 "효심(孝心)의 난(亂)" 외에도 수없이 많다. 이들의 절규(絶叫)도 효심농민군의 절규와 다름이 아니다.
필자는 효심(孝心)의 난(亂)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역사상 수많은 민란 중에서, “KBS역사스페셜의 고려농민항쟁(高麗農民抗爭)의 함축된 메시지”와 “진주시민(晉州市民)들의 진주농민항쟁을 기리는 내용의 교훈”과 함께 필자의 바램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싶다
첫째, KBS역사스페셜 “무인시대(武人時代)와 그 역사(歷史)를 함께 했던 고려농민항쟁(高麗農民抗爭)”의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이 독자 여러분께 전하고 싶다.
『외세(外勢)의 침략과 양반, 지주들의 수탈(收奪)이 극(極)에 달했던 19세기에도 진주농민항쟁과 동학농민항쟁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바탕에는 분명, 800년전 효심(孝心).김사미(金沙彌)의 난(亂) 등 고려농민들의 항쟁(抗爭) 의지(意志)가 면면(綿綿)히 이어져 내려왔을 것이다. 철권통치기였던 무인시대 100년, 하지만 역설적(逆說的)이게도 이 시기는 민중(民衆)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우리 역사상 가장 역동적(力動的)인 시대(時代)이기도 했다』
둘째, 800년전 효심(孝心).김사미(金沙彌)의 난(亂) 등 고려농민들의 항쟁(抗爭) 의지(意志)가 면면(綿綿)히 이어져 내려왔을 반봉건농민항쟁(反封建農民抗爭)의 상징인 진주농민항쟁을 기념하기 위한 진주시민(晉州市民)들의 의(義)로운 농민항쟁 기념물 조성사업을 널리 알리고 싶다.
『진주농민항쟁(晉州農民抗爭)은 조선 철종 13년(1862년) 2월 14일 일어난 최초의 반봉건농민항쟁으로, 조선후기 관가(官家)의 가혹한 수탈에 저항해 유계춘(柳繼春) 등이 농민들을 이끌고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12. 6. 24 경남 진주시농업인단체협의회가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을 세웠다』
우리가 역사를 뒤돌아다보면, 수많은 민란은 인권(人權)과 민권(民權)을 짓밟힌 채, 허기진 배를 욺켜쥐고, 끝없는 천역(賤役)과 수탈(收奪)에 시달리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곡식 한 줌 훔친 죄(罪)로 역적(逆賊)으로 몰린 것이다. 진주시민들은 진주농민항쟁을 봉기한 지역민을 역적(逆賊)에서 양민(良民)으로 복권시켜,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비문(碑文)까지 세우고, 또 후대에 교훈으로 길이 남겨 놓은 것을 볼 때, 밀양인과 경상도 사람들도 “효심 농민군”의 인권과 민권 쟁취를 위한 항쟁을 기념하고 경상도 장정 7,000명의 영혼을 추념하기 위해 경상도(慶尙道) 주민들의 뜻과 정성을 모아 가칭 “효심농민군항쟁기념탑”을 밀양 저전촌(楮田村)에 세웠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효심(孝心)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 밀성군(밀양)의 인구는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효심의 난으로부터 260년 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조선 초기의 밀양도호부 호구수(세대수)는 본부(本府) 1,612호(戶)이며, 인구수는 5,522구(口)이며, 수산현(守山縣)은 93호(戶) 356구(口)이고, 풍각현(豊角縣)은 294호(戶) 907구(口)이다.
밀성군(密城郡) 저전촌(楮田村)에서 관군(官軍)에게 도륙(屠戮)을 당한 효심농민군(孝心農民軍)은 무려 7,000명(戶:壯丁數:세대수)이었고 이들은 모두 유약(幼弱)한 어린이와 노인.부녀자들을 제외한 가장(家長:세대주)인 장정(壯丁)들이었다.
농민의 유망화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밀성군(密城郡)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260년 동안 인구의 자연증가가 전혀 없다고 가정하고 본부와 속현을 합한 1,999호 6.785구의 30% 정도(600戶 2,000口)가 유망화(流亡化) 되었다고 가정할 때, 장정(壯丁) 7,000명 중 밀성군 600호(세대:장정수)를 제외한 6,400호(세대:장정수)는 “밀성군(밀양) 사람들”이 아닌 밀성군 주변인 “경상도(慶尙道) 주.군.현(州郡縣)의 장정(壯丁)들”이다. [반대로 자연증가분을 공제하면 밀성군 외의 경상도 장정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어쨌든 7,000세대(壯丁)를 당시 대가족 제도를 감안하여 호당(戶當) 6명만 잡아도 42,000명의 가장(家長)인 7,000명(장성:세대주)이 도륙당했다는 것이고, 남겨진 가족인 처자식과 부모형제 35,000명은 초근목피(草根木皮).유랑걸식(流浪乞食)하였거나 권세가(權勢家)들의 노비(奴婢)로 팔려갔을 것이고, 주동자의 가족들은 이마에 먹물형을 받고 머나먼 타향의 관노비로 끌려갔다.
필자가 마지막에 이런 글을 남기는 것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또 인권(人權)과 민권(民權) 쟁취를 위해 저항한 선조들의 거룩한 일』에 “역사적인 관심을 갖는 후세의 일(역적을 양민으로 복권시키고 항쟁을 기념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일 등)”이 『밀양(密陽)사람들』만의 일이 아닌 『경상도(慶尙道)지역민 전체』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참고 및 인용, 발췌 문헌(文獻) 및 도서(圖書)
1.『密陽誌』1989, 密陽文化院
2.『密陽地名攷』1994, 密陽文化院
3.『密州誌』1932, 朴秀憲 著 (朴洙憲을 朴秀憲으로 수정)
4.『密州徵信錄』昭和 11, 安秉禧 著
5.『國史大事典』1974, 百萬社
6.『수정.증보판 고려시대사』박용운, 2015, 일지사
7.『高麗時期土地制度硏究』土地稅役體系와 農業生産, 李景植, 2012, 지식산업사
8.『고대노예제사회』차전환, 2015, 한울엠플러스
9. 金潤坤敎授定年紀念論叢『韓國中世社會의 諸問題』중,『高麗時期 寺院田과 國家, 村落, 그리고 農民』배상현, 2001, 韓國中世史學會
10. 金潤坤敎授定年紀念論叢『韓國中世社會의 諸問題』중,『고려전기 재정구조의 성격』안병우, 2001, 韓國中世史學會
11. 金潤坤敎授定年紀念論叢『韓國中世社會의 諸問題』중,『羅末麗初의 沔川과 卜智謙』김갑동, 2001, 韓國中世史學會
12. 金潤坤敎授定年紀念論叢『韓國中世社會의 諸問題』중, 『신라말 향촌사회의 변동과 새로운 계층구조의 형성』구산우, 2001, 韓國中世史學會
13.『高麗史 兵志 譯註 一』李基白, 1969, 高麗史硏究會, 景仁文化社
14.『高麗史』韓國文獻硏究所 編, 1990, 서울亞細亞文化社 刊
15.『열정과 자존의 오백년, 고려사』 이상각, 2010, 도서출판 들녘
16.『譯註 高麗史』1973, 東亞大學校古典硏究室
17.『世宗實錄地理志』
18.『慶尙道地理志』
19.『國譯新增東國輿地勝覽』民族文化推進會
20.『國譯 密州誌 (地理編)』2001, 密陽文化院
21.『KBS 역사스페셜, 제35회 무인시대 100년, 고려농민 일어서다(대본)』
22.『淸道郡誌』1991, 청도문화원
23.『蔚山廣域市史』
24.『蔚州郡誌』 2002.蔚州郡誌編纂委員會
25.『國譯 高麗史節要』 民族文化推進會 韓國古典飜譯院 이재호(譯) 1968
[끝]
이 글은 『密陽文化 (密陽文化院, 2016년, 제17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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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심의 난, 正文 目次]
http://cafe.daum.net/_c21_/bbs_read?grpid=1BHFK&fldid=P517&contentval=00005zzzzzzzzzzzzzzzzzzzzzzzzz
[민란의 원인]
고려시대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 정문(正文)은 차후 사정이 되면 공개를 할 것이며, 우선 다음과 같이 목차(目次)만 공개합니다
[목 차]
Ⅰ. 머리말
Ⅱ. 왕건(王建)의 통일전쟁과 고려(高麗) 건국(建國)
1. 고려초기(高麗初期) 하층민(천민.노비)의 증가
2. 토성분정(土姓分定).본관제(本貫制)로 하층민 신분 구속
3. 태조(太祖) 훈요십조(訓要十條) 유훈(遺訓)의 폐단(弊端)
Ⅲ. 거란.여진 침략과 築城.防禦에 하층민 賤役동원
1. 거란(契丹)의 침입
2. 여진(女眞)의 침입
3. 고려의 년도별 외침(外侵) 현황
4. 고려의 축성(築城) 내용
Ⅳ. 역대왕(歷代王)들의 국력(國力) 낭비(浪費)
1. 국왕(國王)의 빈번(頻繁)한 유람성(遊覽性) 행차(行次)
2. 팔관회,연등회,백좌도량,불우건립,경전판각의 국력 낭비
3. 년도별 팔관회,연등회,백좌도량,불우건립과 하층민 賤役동원
Ⅴ. 통일전쟁의 포로.반역 무리의 노비화(奴婢化)
1. 원천적(源泉的) 노예(奴隸)
2. 전쟁포로(戰爭捕虜) 등의 노비화(奴婢化)
3. 국가제도와 권력하(權力下)의 농민의 노예화
가. 농민의 노예화
나. 사원의 田莊 소유로 경작 노동력으로서의 노비 소유
4. 모반(謀叛) 실패 가족과 부류의 노비화(奴婢化)
5. 채무(債務)와 압량(壓良)으로 노비화
Ⅵ. 천민.노비의 신분상승 억제와 세습화
1. 고려의 신분제도
가. 왕족(王族)
나. 양신분층(良身分層) : 양반과 귀족. 중류층. 양민
다. 천신분층(賤身分層)
2. 고려의 노비정책
가. 태조의 노비(奴婢) 관리 훈계
나. 천인(賤人)의 신분 상승을 방지
다. 노비 관리
3. 사노비의 종류 및 거주. 취급
가. 매매. 증여. 상속. 탈취의 객체
나. 거주 및 담당
다. 노비의 취급
라. 노비적(奴婢籍) 세습(世襲)
4. 고려의 양민(良民)
가. 백정농민(白丁農民)
나. 천사양민(賤事良民)
다. 천역양민(賤役良民)
라. 향(鄕). 부곡민(部曲民)
마. 소민(所民)
5. 사노비(私奴婢) 발생 계기
가. 일반 양인(良人)이 경제적 이유로 인해 몸을 판 경우
나. 전쟁포로
다. 불법적인 압량(壓良 : 양민을 강제로 노비로 만듬)
6. 공노비(公奴婢)의 발생 원인 및 충당.역할
가. 공노비 발생 원인
나. 공노비 충당 및 역할
Ⅶ. 국가재정 수취.관리상의 민중(民衆).천민(賤民)의 부담
1. 고려전기(高麗前期) 국가재원
2. 전조(田租)와 토지 중심의 재정구조
3. 현물 수취와 재정원(土地) 배분
4. 재정원으로서의 토지분급 문제점
가. 역(役)에 대한 반대급부로 분급한 토지 : 군인전, 향리전
나. 공직담당 대가와 신분예우로 분급한 토지
다. 산관(散官)과 무산계(武散階)에 토지분급
라. 등과제(登科制)
마. 사원(寺院)에 토지와 노비 지급
5. 지역별 수취와 지역 지배의 존속
6. 세입.세출의 특징과 관리 체제
가. 세입 내용
나. 세출 계획
다. 세출 내용 (문종 30년 기록 근거 산출 내용)
라. 문종대 부세(賦稅) 수취 시, 踏驗조사 및 災免制度
마. 세입 활동의 과중한 비용의 납세자 부담 고통
바. 세입 수취 과정상 관리의 농간과 횡렴
7. 국가재정 운영상 하층민에 대한 세역(稅役)의 과중한 수취
8. 조선시대 밀양의 군정(軍丁) 중, 선군(船軍) 현황
가. 조선 초기 밀양의 호구(戶口) 및 군액(軍額) 현황
9. 토지 면적단위 “결(結)의 규모와 수확량”에 대한 이해
Ⅷ. 천민.노비의 착취로 유지된 토지.녹봉제도
1. 공전(公田)
가. 내장전(內莊田)
나. 장.처전(莊.處田)
다. 공해전(公廨田)
라. 둔전(屯田)
마. 학전(學田)
바. 적전(籍田)
2. 사전(私田)
가. 공음전(功陰田)
나. 한인전(閑人田)
다. 구분전(口分田)
라. 향리전(鄕吏田)
마. 군인전(軍人田)
바. 궁원전(宮院田)
사. 사원전(寺院田)
3. 관리녹봉(官吏祿俸)과 공해전시(公廨田柴) 분급액
가. 국가소유지 수조율(高麗史 食貨志)
나. 품계별 전시과, 지역별 토지분급액
Ⅸ. 苛斂誅求.戰災.災害 등으로 流亡農民 대량 발생
1. 신라말부터 유망농민(流亡農民) 발생, 고려조에도 이어짐
가. 신라말(新羅末) 농민의 몰락
나. 신라말 몰락농민의 飢餓,도적,정치화와 국가 대응사례
2. 탐학(貪虐)과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유망농민 발생
3. 하층민(下層民)의 賤役으로 수탈한 貢賦와 土山貢物
가. 공부(貢賦)
나. 토산공물(土山貢物)
4. 유망농민(流亡農民) 방지의 고육지책 감무제도(監務制度)
가. 감무(監務) 설치(設置) 원인
나. 감무설치(監務設置) 현황
Ⅹ. 과중한 군역(軍役), 고려 전기(前期) 병제(兵制) 붕괴
1. 고려(高麗)의 군사제도(軍事制度)
가. 경군(京軍)
나. 부병제(府兵制)
다. 경군(京軍)의 軍班制說과 府兵制의 절충설
라. 주현군(州縣軍)과 주진군(州鎭軍)
마. 고려군의 과중한 동원복무, 군인,가족의 생계 타격
2. 고려의 새로운 병제(兵制)인 별무반(別武班) 운영
가. 새로운 병제 운영 원인
나. 기준 병제(兵制) 폐해
다. 새로운 병제(兵制) 신설 및 운영 필요
라. 군인의 인적 구성
3. 고려(高麗)의 병제(兵制)
가. 경군(京軍)과 州縣軍의 서북변방 방수(防戌) 복무
나. 변경방수(邊境防戌)의 고통과 本貫, 軍人戶의 생활고
다. 주진입거군인(州鎭入居軍人)과 가족.양호(養戶)
라. 孝心의 亂 발생지 “초전(草田)의 위치”에 대한 조사
마. 양인(良人)과 노예(奴隸)의 참전(參戰) 보상의 차이
바. 선군급전제(選軍給田制)를 문란시킨 관리들
사. 민란(民亂)을 도륙(屠戮)으로 鎭壓한 官軍 규모
Ⅺ. 國事 팽개치고 荒淫奇態로 叛逆民亂 自招한 毅宗 被殺
1. 20세 즉위 毅宗 격구.수박희.방탕으로 政事 팽개침
2. 毅宗, 환관(宦官) 정함에게 政事 맡기고 방탕한 생활
3. 毅宗, 民家.臣僚의 집 헐어 별궁지어 방탕한 생활
4. 毅宗, 行次 歸鄕 중 만취(滿醉)해 길거리에 留宿
5. 毅宗, 遊覽行次.放蕩.荒淫, 臣僚들은 백성을 苛斂誅求
6. 핍박받던 武官 李義方.이고, 文官.內官들 척살(刺殺)
7. 정중부(鄭仲夫) 一黨, 毅宗 폐위(廢位)시킴
Ⅻ. 明宗의 國政抛棄, 武臣天下속에 民亂까지 일어나다
1. 鄭仲夫 政變, 毅宗 내쫓고, 翼陽公 皓 明宗 擁立
2. 李義方, 중방(重房) 설치, 정권 탈취 및 이고 살해
3. 동북면병마사 김보당 난 실패, 이의방 권력 강화
4. 승려.조위총의 난 실패, 이의방 피살,정중부 정권장악
5. 공주 명학소의 망이 망소이 난
6. 서경(西京)의 조위총 잔당 반란
7. 청년 將軍 경대승(慶大升) 등장
8. 무신정변(政變)에 國政 포기, 女色에 빠진 의종(毅宗)
9. 전주(全州) 관노(官奴) 반란
10. 慶大升 病死, 金甫當亂 진압 李義旼 乘勝長驅
11. 이의민(李義旼)이 명종(明宗)을 폐위(廢位)
12. 최충헌과 최충수의 정변(政變)
XIII. “孝心의 亂”후, 神宗代의 끊임없는 民亂
1. 萬積의 亂 (1198년)
2. 황주목사(黃州牧使) 김준거의 모의(謀議) (1199년)
3. 명주(溟州) 도적 금초의 난 (1199년)
4. 동경(東京) 김순의 난 (1199년)
5. 진주(晉州) 공사노비(公私奴婢)의 난 (1200.4)
6. 진주 아전(衙前) 정방의(鄭方義)의 난 (1200.8)
7. 동경 이의민 친족과 아전(衙前)과의 싸움 (1200.8)
8. 김해(金海) 하층민(下層民) 반란 (1200년)
9. 密城 官奴 50여 명, 雲門賊에 들어 감 (1200.5)
10. 탐라 번석,번수의 독립운동 (1200.10)
11. 동경별초군, 운문난민과 결탁,영주별초군 공격(1200.12)
12. 동경의 의비와 초적(草賊)이 합세하여 반란
13. 정언진, 동경에 파견, 의비.패좌 일당 토벌 (1203.1)
14. 패좌(孛佐) 일당, 기계현에서 1,200명 생포됨 (1203.2)
15. 패좌(孛佐) 일당이 운문산으로 도망, 농성함
16. 정언진, 의비를 체포 (1203.7)
17. 최광의, 태백산 도적(盜賊) 아지(阿之) 생포 (1203.8)
18. 중군판관(中軍判官) 박인석, 동경일대 난 평정시킴
XIV.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
1. 효심(孝心)과 김사미(金沙彌)의 출신 배경
2. “효심의 난” 발생지 “초전(草田)”은 어디인가
3. 밀양(密陽)의 군호(郡號) 및 領域 변천
가. 군호(郡號) 변천(變遷)
나. 밀성(密城)의 영역(領域) 변천
4. 慶尙道 道別軍額과 民亂 鎭壓 官軍 추정
가. 高麗史 兵志에 기록된 도별 군액(軍額)
나. 효심의 난 진압 관군 추정
5. 孝心의 亂 前後 中央과 密城(密州)의 시대적 배경
가. 2016년 밀양 “저전(楮田), 골안마을” 풍경
나. 高麗 밀주(密州) ~ 귀화부곡시대(歸化部曲時代)
다. 鄭仲夫亂 피해 開城 脫出한 林椿의 密州 留宿記
라. 30년간 몽고침입과 抗蒙 三別抄軍에 呼應한 密城人
6. 孝心.金沙彌 亂 발생지 연계성 考察
7. 李建衡 초전의고(草田疑考) “저전촌지(楮田村址)”
8. 밀양 “화봉리 草田”은 “효심의 난”과 관련이 없다
9. 효심군 雄據와 官軍과의 전투 의고(疑考)
가. 운문지맥과 주변 산하 개념도
나. 효심 농민군의 웅거지
다. 관군(官軍)의 진군로(進入路)
라. 효심 농민군과 관군(官軍)과의 2년여 간의 전투
10. 효심 농민군의 산성(山城) 축조의 이론적 근거
가. 밀양 관내 시대별 산성 현황
11. 운문지맥 “효심의 난” 관련 인명(人名)
가. 효심(孝心) : 초적(草賊) 괴수(魁帥)
나. 최인(崔仁) :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다. 전존걸(全存傑) : 대장군(大將軍)
라. 고용지(高湧之) : 대장군(大將軍)
마. 김존인(金存仁) : 장군(將軍)
바. 사량주(史良柱) : 장군(將軍), 전사(戰死)
사. 이의민(李義旼) : 무인 실권자(경주 낙향)
아. 이지순(李至純) : 장군(將軍)
자. 김사미(金沙彌) : 운문적(雲門賊) 괴수(魁帥)
12. 효심의 난 관련 지명.문헌 기록과. 언전(諺傳)
가.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나. 밀양시 산내면 임고리
다.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
라.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마. 밀양시 승학산(乘鶴山) 지구(地區)
바. 밀양시 산외면 엄광리
사. 밀양시 무안면 화봉리
아. 밀양시 산외면 희곡리
13.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밀양의 部曲 흔적들
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편 部曲,鄕,所 현황
14. KBS역사스페셜 김사미와 효심의 난 放映
가. 고려 농민항쟁의 의의
나. 김사미와 효심의 난
다. 제35회 무인시대100년,고려농민 일어서다 臺本
15. “김사미의 난” 발생지는 청도 운문사 주변
16. 청도민란(淸道民亂:金沙彌亂, 雲門山.東京民亂)
17. 삼별초난(三別抄亂)과 청도(淸道)
18. 郡.縣間간 정보수집,감시활동 지역 설정
가. 密陽과 淸道의 異質的인 행정구역 편제
나. 100년전까지 淸道郡 속의 密陽郡 古彌面
다. 鄕土史料에 기록된 고며면(고미면) 내용
라. 100년전까지 密陽郡 속의 淸道郡 外西面
19. 新增東國輿地勝覽 울산군,언양현에 部曲 미등재
XV. 맺는말
1. 대역(大逆)을 도모한 이의민(李義旼)의 최후
가. 賤民 李義旼의 출생과 신분변동(身分變動)
나. 이의민의 폭압적(暴壓的)인 무신(武臣) 변모
다. 이의민의 民亂 惡用과 대역도모(大逆圖謀)
라. 이의민과 일당(一黨)의 최후
2. 신료(臣僚)의 謀叛과 하층민 왕화이탈(王化離脫)
가. 반역(叛逆)과 민란(民亂) 발생 동기
나. 逆賊魁帥와 도적(盜賊)의 두목(頭目)의 구분
다. 草賊은 역적(逆賊)과 괴수(魁首)가 될 수 없다
3. 孝心의 亂은 굶주린 民衆의 처절한 抗拒
4. 후세(後世)의 의무
가.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준공
나. 제주(濟州) 항파리(缸坡頭里) 抗蒙遺蹟地
다. 나라가 굶겨죽이고, 逆賊으로 屠戮한 高麗百姓 7,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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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인구의 43% 정도가 노비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근거는
밀양시립도서관에 소장중인
조선시대 노비 관련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비는
국가, 권문세가, 양반층의 기반 구축을 위해
시대에 따라 그 숫자가 증가 또는 감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후세의 우리들은
조상이 노비가 아닌 사람을 구분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족보는
이러한 비극의 역사를 지난 후에 만들어 졌습니다
노비는
당시에 말 한 마리 정도의 물건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젊은 여자 노비는
주인놈과 주인놈의 종놈과, 옆집 양반놈과
옆집 양반놈의 종놈의 성 노리개였습니다
그러한 놈들의 씨로 태어난 아이들 또한
주인 놈에게는 송아지, 망아지 한 마리 더 생긴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어느 누구도
「우리가 노비의 자손이 아니다, 맞다」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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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도재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11.22 참고 및 인용, 발췌 문헌 3. 의 朴洙憲은 朴秀憲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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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도재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7.31 조선시대 중기에는
전 인구의 43% 정도가 노비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근거는
밀양시립도서관에 소장중인
조선시대 노비 관련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비는
국가, 권문세가, 양반층의 기반 구축을 위해
시대에 따라 그 숫자가 증가 또는 감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후세의 우리들은
조상이 노비가 아닌 사람을 구분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족보는
이러한 비극의 역사를 지난 후에 만들어 졌습니다
노비는
당시에 말 한 마리 정도의 물건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젊은 여자 노비는
주인놈과 주인놈의 종놈과, 옆집 양반놈과
옆집 양반놈의 종놈의 성 노리개였습니다
그러한 놈들의 씨로 태어난 아이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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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도재국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7.31 송아지 새끼 한 마리 더 증식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주인 놈에게는 송아지, 망아지 한 마리 더 생긴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어느 누구도
「우리가 노비의 자손이 아니다, 맞다」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축소판] 고려시대 밀성(密城) “효심(孝心)의 난(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