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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中通信>

작성자정대재| 작성시간18.01.01| 조회수118|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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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도재국 작성시간18.01.02 정 선생님이 지극정성으로 돌본 쌍둥이 외손이 강남구와 서초구 67개의 초등학교 학생 가운데 40명을 선발하는 영재에 내리 2년이나 들었다니 정말로 행복한 보람입니다

    또 고려대 영재교육원에도 선발되었다니 겹 경사입니다

    영재란 본인의 노력과 천재적 기질이 양친으로부터 유전되는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 작성자 도재국 작성시간18.01.02 저가 재악산, 운문산, 구만산 등 깊은 산속을 등산하다 보면 트럭이 다닌 50~60년 전 산판 길이 지금까지도 군데 군데 희미하게 보입니다.

    재악산 사자평의 산판길은 습지보호구역의 물 유입 공사로 거의다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산판길도 보수를 하면, 훌륭한 등산길로서 또 현대문화유산으로 남길 수도 있습니다
  • 작성자 도재국 작성시간18.01.02 댓글을 보니, 중앙(내무부)에서 근무하다, 울산에서 부구청장 하셨던 김병길 선배님도 보입니다
  • 작성자 도재국 작성시간18.01.02 보통 사람 같으면, 퇴직 후 여유로운 전원생활 하실텐데, 퇴직 후가 더 바쁘시니 잘 가꾸어 놓으신 주말농장 집이 잡초에 묻혀 가군요
  • 작성자 도재국 작성시간18.01.02 범도리 뱃물(산동초교 부근)에서 시전리 도감수마을(표충사 상가마을)까지 시오리길을 초등학생이 등하교길을 다닌 그 강인함이 인생의 초창기 어려운 길을 헤쳐나가게 한 힘을 만들게 한 것이라 봅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코흘리는 초등학교 저 학년들이 겪었을 등하교길 전경이 눈에 선합니다

    저도 가슴에 손수건을 이름표처럼 달고, 어머님 손잡고, 봄이라지만 겨울 끝자락 볼을 때리는 찬 바람이 불고, 보리잎 피어오르던 들판길을 친구들과 입학식하러 가던 그 모습이 눈에 훤합니다. 60년 전의 일입니다.

    그 고우시던 어머님도 10년 전에 고인이 되셨고, 세월은 유수와 같습니다

    정 선생님 글 보니 옛 추억이 떠 오릅니다
  • 작성자 정대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8.01.02 제가 우리 고향 밀양에 대해서 거의 신앙에 가까운 수준의 상사병에 왜 걸렸는지,그 까닭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를 것입니다.
    제가 여덟 살 때였습니다. 제가 감기에 걸린 걸 핑계삼아 학교에 안 간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제 바로 아래의 다섯 살 바기 동생을 데리고 개울 건너편 꿀밤나무 숲속의 <천일여객> 버스 종점 정류장에 남아 있던 모닥불 가로 놀러 나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밤새 얼어붙었던 엔진을 녹이기 위해 표충사와 밀양읍을 내왕하던 천일버스 기사 양반이 피웠다가 아침 첫차를 몰고 떠난 자리에 남겨 둔 것이었습니다.
  • 작성자 정대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8.01.02 그것을 본 마을 조무래기들이 사방에서 떼로 몰려들어 숲속 나무 그루터기마다 지천으로 쌓여 있는 가랑잎들을 한 아름씩 안아다가 불놀이 장난을 시작한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개울 건너편에서 우리 어머님이 부르는 바람에 제가 그 자리를 떠나 버린 일이었지요, 제가 떠난 뒤에 그 중 가장 머리가 굵은 이웃집 아이가 네댓 살 된 조무래기들에게 계속 가랑잎을 긁어 오게 시켰고, 그리하여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 위에 가랑잎을 내려놓던 내 동생의 옷 소매에 그만 불이 옮겨 붙고 만 것이었습니다.
  • 작성자 정대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8.01.02 그것을 본 어린 아이들이 겁을 잔뜩 집어 먹고 저마다 도망을 친 것은 당연지사였지요. 불이 붙은 내 동생의 왼쪽 소매에서는 점점 더 연기가 심해지면서 윗쪽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울며불며 집을 향해 숲속 길을 아장아장 걸어오는 내 동생의 처참한 모습을 거너편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우리 어머님이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소매 끝에 불이 붙은 채 걸어오는 내 동생의 모습을 발견한 우리 어머님의 심정이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근 일백 미터나 되는 개울가의 반석길을 아무리 달려도 달려도 근육이 굳어 버려서 제대로 뛰어갈 수도 없었답니다.
  • 작성자 정대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8.01.04 우리 아버님이 그 아이를 둘러 업고 부산으로, 대구로, 용하다는 병원이란 병원마다 다 돌아다녀 보았으나,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이 왼팔 절단수술밖에 대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멀쩡하던 내 자식을 불구자로 만들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다시, 부산 대구 마산으로, 진주로, 밀양읍내로, 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세월이 무려 만 20년이었습니다. "이놈아, 네 밑에 들어간 돈을 모두 합치면 장골의 지게에 한 짐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들으며 사투를 벌이던 내 동생은 화상을 입은 지 만 20년이 되던 해에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 작성자 정대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8.01.04 그때 제 나이 스물여덟-
    “엄마, 인자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죽으면 독수리가 될 기이다. 우리 엄마 콩밭 보리밭 맬 때 제가 발갈퀴로 대신 다 매어 줄게.”
    임종할 때 제 동생이 남긴 유언이었습니다. 동생이 안 되겠다는 말을 했을 때, 동생의 죽음을 직감한 우리 어머님은 옆에서 울고 있던 저더러 밖으로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저는 땅을 치며 통곡하는 어머니의 절규를 문 밖에서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로부터 시작된 우리 가족들의 기나긴 20년 통한의 세월들-.
  • 작성자 정대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8.01.04 하지만 제 고향 생가 앞 개울 한복판의 드넓은 <자라방우> 소(沼)는 여름과 겨울철의 주요한 놀이터로서 제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모든 추억들이 어려 있는 곳이기도 하니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저의 그리운 추억담은 대하장편소설 하나를 쓰고도 남을 정도로 무궁무진 하니 이 가슴 저미도록 아프고도 그리운 추억들에 대하여 들끓는 애증(愛憎)의 본능을 대체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작성자 도재국 작성시간18.01.02 독수리님이
    하늘 높이 마음껏 영원토록 날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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