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국사 국왕시해자 리스트>를 만들던 중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령 고구려의 다른 국왕시해자들의 경우-두로, 명림답부, 연개소문 등-자신들 나름의 살해동기가 있었고 그것을 명분으로 해서 국왕을 살해했고 이는 고구려로 귀화한 장수였던 고이만년, 재증걸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괴유의 내력은 고구려에 속한 집단보다 부여에 속한 귀족인데 귀부한 경우였을까? 아니면 어떤 내력이 있었을까 궁금해져서 살펴보기로 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괴유의 행적
A-1)4년(서기 21) 겨울 12월.....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났다. 그는 임금에게 절을 하며 말하였다.
“저는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는 말을 들었사오니, 제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임금은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A-2)5년(서기 22) 봄 2월, 임금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곳에는 진흙 수렁이 많았으므로 임금은 평지를 선택하여 병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들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부여왕은 온 나라의 군사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대비하지 않는 동안 불시에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말을 급히 몰아 전진하였으나 진창에 빠져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때 괴유가 임금의 지시로 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가니, 부여의 1만여 명의 군사들이 넘어지고 쓰러져서 버틸 수 없었다. 괴유는 곧바로 달려가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부여 사람들은 이미 왕을 잃고 기세가 꺾였지만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 군사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임금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게 되자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A-3) 겨울 10월, 괴유가 죽었다. 앞서 그의 병이 위독했을 때 임금이 직접 가서 문병을 하였다. 그때 괴유가 말하였다.
“저는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같사오니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않겠습니다.”
임금이 그 말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그에게 큰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북명산(北溟山) 남쪽에 장사 지내고, 담당 관리를 시켜 철따라 제사 지내게 하였다.
괴유의 출신인 북명은 어디인가?
괴유의 등장장면은 대무신왕이 ‘부여정벌’을 하려는 도중에 만난 몇 명의 신비한 인물들 중 1명으로 등장한다. 괴유에 대한 묘사를 보면 9척의 키, 흰 얼굴, 광채나는 눈을 가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괴유의 출신지인 북명(北溟)이 효소왕 시기에 언급된 북명과 동일한 지명인지 모르겠으나 동일지명이라면 지금의 강원도 강릉이 옛지명으로는 명주(溟州)였기에 그리보아야할 듯 싶지만 그렇다면 또한 의문이 든다. 그가 직접 했던 말을 다시 살펴보면..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는 말을 들었사오니, 제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북쪽에 있는 부여에 대한 언급이 있었고, 심지어 종군하여 공을 세우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처음 추측한 북부여 출신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남쪽에 위치한 상태였다. 당시 대무신왕이 위치한 고구려의 수도는 국내성(國內城)이다. 유리왕때 천도한바 있으며, 그 위치에 대한 통설은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통구성(通溝城)이라고 설명되기에 대략 아래 지도와 같은 모습을 보일것으로 보인다.
[지도(물론 위치는 정확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괴유의 출신이 북부여와 연관이 있다고 하기에는 괴리감이 있으며 무엇보다 동기도 불분명하다. 훗날 장수왕 시절 고이만년, 재증걸루의 경우에는 출신국가가 백제였기에 개로왕에 대한 보복이 목표였다면, 괴유의 목표는 알수 없다. 무엇보다 말을 타고 오지 않았다면 매우 먼지역일 뿐만 아니라 국왕이 수행하는 목적을 미리 알아내고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니 더욱 의문일 수 밖에 없다. 마치 이를 끼워맞추려고 하자면 그가 둘러된 출신지역이 허위였고 실제 목표는 숨기려고 한다.. 라고 끼워맞추거나 혹은 사이비 역사학(pseudo-history)을 주장하는 사람의 방법을 써서 ‘괴유의 출신지인 북명(北溟)은 사실 중국 대륙에 있었고 한반도에 비정하는건 식민사학자들이나 하는 짓이다!’라고 하는 방법 정도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면 신라 효소왕때의 북명은 무엇이냐고 물을 때는 신라의 북명에 대해 잘못기록되었다고 하거나 끼워맞추려고 신라 역시 대륙에 있었다고 하는 경우까지 있을 것 같기에 그 주장은 추론에 끼워넣지 않도록 하고 진행하려 한다.
괴유 공을 세우다
국왕과 만난 1년 뒤에 부여왕 대소와 전쟁을 치루면서 엄청난 공을 세운다.
칼을 뽑아서 달려들며 고함을 치니 적국 1만명이 넘어지고 쓰러진다. 마치 삼국지연의의 장비처럼 호통을 치니 적장이 죽어버리는 묘사와 비슷하다고 할 정도이다. 심지어 부여왕의 목을 베어버리는 전공을 얻게 된다. 물론 그 전투이후 고구려에도 큰 타격을 입었지만 생각 이상의 공을 세웠기에 그가 그 전투 이후 병을 얻었을때도 왕이 친히 그를 문병하는 등의 호의를 보인다.
그의 유언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풀어보자면
“저는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산 것과 같사오니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않겠습니다.”
①자신의 낮은 신분을 언급-전쟁 종군에 참여하기 어려운 자신의 원래 신분을 말한다.
②임금의 두터운 여러번의 은혜-종군에 참여하게 함은 물론이고 부여와의 전쟁에서 직접 어명을 받고 적에게 달려들어 공을 세우게끔 배려받게 된다.
③죽은 이후에도 은혜를 갚을 것을 다짐-고구려의 내세사상을 보여줌.
죽은 뒤에 북명산에 무덤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볼때 고향땅에 무덤을 만들고 귀족의 무덤처럼 대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해도 꽤 특이한 인물이었다.
물론 짧은 기록으로 그의 생애나 그에 대한 추론 및 결론을 지을 수는 없겠지만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한국사에서 국왕을 죽이려는 목표를 가진 수많은 인물 중에서 유독 특이하게 신체적으로는 거인이었다.
1척 25cm의 '남조척(南朝尺)'기준과 1척이 29.5㎝의 당척을 비교해보면
1척=25cm인 경우 9척:225cm
1척이 29cm인 경우 9척: 261cm
작게 잡아도 200이 넘는 키에 엄청난 괴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역사속 이외에 창작물에서 그를 표현한다면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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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외형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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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화염폭탄 작성시간 17.12.17 그 북명이란 곳이 강원도란 설도 있고, 중국 고전인 장자에 곤이라는 커다란 물고기가 사는 바다가 북명이라고 되어 있는 구절도 있어서, 혹시 같은 곳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어서 아직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북명이라는 지명이 북쪽 바다라는 뜻인 걸 보면, 웬지 장자에서 말한 북명과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아리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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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삼한일통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12.17 장자이야기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런 관점을 보면 북쪽인근의 바다가 보이는 지명을 북명으로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아, 작가님의 책은 잘 받았습니다.^^
실업이 바꾼 세계사를 읽으면서 오늘날과 그시대와 여러가지로 비교해가면서 잘 읽었네요. ㅎ -
답댓글 작성자화염폭탄 작성시간 17.12.17 삼한일통 장자에서 북명이란 지명은 다분히 신화-공상적인 뜻이라서 실제의 지명과 연관시키기는 조금 어렵지만, 만약 실제로 북명이란 지명의 원형이 된 곳이 있었다면, 아마도 부여와 가까운 만주 지역의 큰 강이나 바다 쪽과 연관이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적합해 보입니다. 저의 최신작인 실업이 바꾼 세계사도 읽고 계신다니, 더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