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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임진왜란때 초반에 무너지게 된 이유. ( 조선쪽의 원인으로)

작성자moko|작성시간04.04.26|조회수871 목록 댓글 12
우리들의 인식에는 한국이 외국과 싸우면 무조건 진다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현재의 역사교육이 한몫했다고 본다.
그럼, 어디에서 시작했다고 볼까...? 물론, 조선시대다. 그 이전시대 아니 조선중기만 해도,한국은 약소국이라는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한국이 한번도 침략하지 않은 역사를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보면 우리 조상들이 바다를 건너 열도로 진격을 했고, 한반도를 넘어 만주를 공격했고, 내몽고에서 우리 조상들은 달렸고, 거기에 만리장성을 넘어 깊숙이 들어가 약탈을 했던 역사가 있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우리를 공격한 오랑캐들은 단단히 보복을 당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돌궐,, 거란이 그렇고, 여진이 그렇다. 지나인들도 괜히 우리를 침략했다가 왕조 자체가 흔들렸고, 황제의 한쪽 눈이 손상당하지 않았나! 몽고인들도 고려시대에 40년동안 우리를 굴복시키는냐고 많은 고생을 하였고, 백년 후에 공민왕은 그들한테 당한 설움을 무력으로 깨끗이 갚아 주었다. 왜구들도 마찬가지다. 고려나 조선을 괴롭히던 왜구들은 그들의 강력한 무력 응징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고를 일으킨 건수는 29건이 전부만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일으킨 사고 중에는 대마도인들이 무역이 원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고를 친 것이 많았다. 결국 왜구를 조선의 질서로 편입한 조선은 명나라보다 왜구를 다루는 데서 더 능숙하였다. 명나라는 북로남왜라는 말이 있듯이 왜구의 문제로 조선보다 더 골치를 아파했고, 왜구 두목 왕직을 회유하기 위해서 갖은 아양을 떨기도 한 만큼 명나라는 14세기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왜구에 몸살이 걸렸다.
이런 한국이 약소국이라는 편견을 가진 것은 아무래도 임진왜란이 그 시초로 생각한다. 명나라가 참전하여 일본군과 맞붙어 한반도가 중국과 일본의 각축장이라는 오명을 받기도 한다. 또한 20일만에 한양을 함락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있다.
왕까지 도망가니 우리의 인식속에 임진왜란을 필두로 하여 결국 무조건 진다는 편견, 즉 약소국이라는 자괴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왜 조선이 이렇게 일본군에게 초반에 무너졌을까?
우선 나는 조선쪽의 문제점을 걸고 넘어가서 그 이유를 설명을 하겠다.

첫째, 현지 장수들의 무능.
일본군이 대규모로 부산에 상륙하고 나서부터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맞게 된다.이때, 최소한 이러한 적들을 맞이하여 적절하게 대응하는 현지 관리들이 있었다면, 이렇게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산진을 지키는 정발은 일본군이 상륙할 당시, 절영도로 사냥을 나간 것과 경상 좌수사 박홍은 싸워 보지도 않는체 병사와 전함을 남겨놓고 동래를 걸쳐 도망을 갔다는 점,( 결국 와해되고 맘.)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전함을 불태우고, 수군들을 해산시키고 최소한의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주함, 경상 좌병사 이각은 울산 병영에서 그 소식을 듣고 동래로 왔다가 도주함, 조령이라는 천혜의 요충지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전면전을 벌인 신립, 용인전투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와해되게 만든 이광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원칙대로 하지 않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이러한 관리들에 의해서 2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본군은 (도보로 보름 걸리는) 한양을 점령하였다. 그 여파로 인해서 평안도의 평양은 점령당하고, 함경도는 그 국경까지 일본군의 손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둘째, 조선 조정의 對日의 안일한 인식.
당시 아무리 무능한 조정이라도 대마도에서 자꾸 찔러 주고, 통신사로 다녀온 보고로 인해서 대충이나마 일본군이 침략할 것임을 눈치는 챘다.
그러나 ( 예상되는) 일본군의 침입을 다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대략 명나라가 조공무역을 폐지한 이유로 그 분풀이를 조선한테 한다는 인식 속에 대규모의 침략이 아닌 왜구의 침략 수준으로 보고 있었다.( 그 예로 당시 조선인의 기록에는 호남에서 대략 1만명 정도의 일본군의 침입이 예상한다고 씌어있다, 또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의 공격에 대한 첫 보고에도 조정은 그런 인식을 견지한 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조선정부는 안일한 태도를 가지다가 일시에 일본군의 공격을 맞게 되어 허둥지둥 어찌할 줄 몰라 제대로 된 방어시스템을 발휘되지 못했다.서울은 민간인들에 의해서 약탈이 자행되어 궁궐이 불타고, 임금은 쫓겨 평양을 걸쳐 의주로 도망을 하였으며, 지방에서도 수령들이 일본군의 공격에 무작정 도망만 치니 도성이나 지방이던가에 행정의 공백이 생기니 일본군의 진격에 더욱 가속도를 달아주는 격이 되었다.
셋째, 방왜육전론으로 인한 수군의 형해화가 초기 전투의 패인.
다소나마 일본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조선 조정은 이일과 신립등 여러 사람들을 호남과 영남을 중심으로 파견하여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시키고, 성을 수축하는 등 맡겼다. ( 그러나 그것도 현지 파견된 장수들의 비리와 횡포로 인해서 큰 효과도 보지 못하고 민초들의 원성만 듣게 되었고, 중간에 그만했다.)
파견된 이들은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들을 격파시키는데, 바다보다 육지가 더 낫다는 판단으로 인해서 수군의 증강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군을 폐지하자는 소리까지 했다. 이러한 인식은 중앙의 관리에게도 퍼졌다.
결국 수군이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여파로 영호남의 병력 33000명을 위시하여 전국각지에 있던 수군의 병력이 문서상으로 5만이지만, 실상은 20%의 가동력을 보여주는 수군의 형해화를 낳게 되었다. 다만 이순신만이 전라도 좌수영에 임명되어 그마나 다행이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전쟁이 막상 터지자, 경상도 수군은 싸움도 하지 못한체, 자멸을 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넷째, 인재등용의 실패.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 한다는 명분아래에 대소신료들이 많은 이들을 추천했고, 곧 그들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발생하여 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다만, 유성룡의 천거로 권율과 이순신이 성공한 케이스가 되어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다섯째, 제승방략 체계에 있었다.
제승방략 이전에는 조선에서는 진관체제가 있어 병력들을 주위에 분산시켜 국방을 담당했다. 그러나 분산된 병력들이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에 제대로 방어를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으로 바꿔었다. 즉 어느 곳에 왜구가 침략했다면, 한 곳으로 병력을 집중적으로 모아 그 대병력으로 하여금 왜구를 막는 다는 것이다.( 다만 지휘관은 경장 즉 서울에서 파견된 장수로 한다는 원칙이다.)
이러한 체계는 임진왜란 초기까지 이어졌다. 당시 일본군의 공격에 제승방략의 방식대로 경상도의 수많은 병력들이 대구에 모였다. 그리고는 한성에서 파견된 이일을 기다렸지만,기다리는 시간이 오래되고 일본군의 급속한 진격에 보급의 부족으로 결국 스스로 와해되고말았다. 그 결과 일본군은 초반의 부산, 김해 외에는 제대로 된 반격도 받지 않는 체, 경상도 내륙을 통과하였다.
또한 신립은 충청도 병력들을 모아 충주에서 전투를 벌였지만,제승방략 방식으로 모은 병력이라서 여러 가지 요인으로 패전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 후, 조선정부는 그 제승방략이 전란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판단으로 진관으로 복구하고 속오군 체계로 개혁하였다.
여섯째, 군사들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조선은 16세부터 60살에 이르는 양인들은 모두 군대에 가야 한다는 양인개병제라는
의무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실상은 양인 세 명을 기준으로 하여 1인은 군대가고, 나머지 2인은 군대간 사람을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면전이 없는 평화로운 200년을 보내면서, 군대에 간 병사들은 각종 노역에 시달리면서 군대가는 것을 기피하는 성향이 심해지고 있었다. 불법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군대에 안 가는 대신에 적당히 값을 쳐줘 다른 이를 보내는 것이 성행하였다.
국가에서는 이런 것을 방지하고자 많은 수사를 벌였지만, 효과도 보지 못했고, 오히려 국가에서 값을 법적으로 매기는 상황에 도달했다. 그 결과 군대에 들어오는 장정들의 질은 떨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양인들 특히 농민계층에서 많은 피해를 입는다. 더욱이 평화가 계속되니 들어온 질 떨어지는 병사들은 훈련도 될 턱이 있겠는가!
이런 결과로 인해서 조선전기의 군사제도는 붕괴된 상태로 임진왜란을 맞게 되니 조선이 초반에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 사실상 조선에서 제대로 된 부대는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여진과 전투를 벌이던 국경수비대뿐이었다.
일곱째, 조선군의 무장수준이 형편없다는 점.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무능한 장수에 무지렁이 약골 병사로 일본군을 맞이하여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칼이면 창, 활과 기타 전통적인 재래식 무기들은 녹슬고 수량이 매우 적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석기로 싸웠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조선은 무기들이 많지 않는 상태다.
조선보병이 사용하는 창은 일본군의 장창에 비해 길이가 짧았고, 칼은 일본도에 비해 날카로움이 떨어지니 백병전을 하는데 열세였다. 유일하게 능가하는 궁시도 일본의 철포 즉 조총에 밀려 야전에서는 밀리는 상황이고, 그나마 그런 것도 전쟁 초반에 크게 써먹지 않았다. 전통적인 재래식 무기 말고 조선은 화약을 이용한 여러 화포 기술에서는 일본군에 앞선 상황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조선군의 이런 화포기술에 두려움과 부러움을 느낀 만큼 조선에서는 다양한 화기가 많았다. 그러나 주로 대형화기 위주로 편성한 조선의 화포들은 일본군이 소유한 개인화기 즉 철포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초반 육지전투에서)
행주대첩이나 진주성 싸움, 경주성 탈환전등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이 쓰는 철포를 조선군의 화력으로 제압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일본군의 철포에 익숙한 상태에서 벌인 승전이므로 초반의 , 실질 여러 전투에서는 그다지 큰 위력을 발생하지 못했다. 거기에 평화로운 시절이 지속된 관계로 그 수량이 미비했고, 녹슨게 많아 전쟁 초반에 그다지 이용하지 못했다.
더구나, 육군에서 쓰는 화포들은 대개 여진이나 왜구들의 기세를 꺾을 목적으로 위력용으로쓰는 것이 주목적이다. 즉 화력이 거의 없는 적들에게 화포의 위력을 보여주어 그들의 기를 꺾어 놓아 그 틈을 나서 조선군이 달려들어 전투를 벌여 승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대인 살생용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설상가상으로 전쟁 초반에 화포에 쓸 화약들이 부족한 상황이다. 평소의 관리로 인해서부족한 면도 있지만, 서울에 있던 화약 27000근이 폭도들에 의해서 불타 없어져 조선은 전쟁 내내 화약 부족에 시달려 그나마 있던 화기들도 제대로 응용도 못했다.
기병들도 문제였다. 아무리 일본군이 조총을 이용한 근대전술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기병들이 전쟁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관계로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시기에도 기병들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보다도 화력이 약한 임진왜란 시기에 기병의 중요성은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일본군은 말이 적어 대부분이 보병이었고, 왜란을 참전한 일본군의 기록에도 조선의 기마술이 뛰어나다는 기록이 있고, 명나라 장수들도 평안도 기병 즉 토병들이 재주가 뛰어나 전투에 뛰어난 활약을 한다고 칭찬한 기록이 있을 만큼 왜란에서는 기병들의 위치가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 한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평양에서 멈춘 고니시군은 이후, 국지전에서 평안도 기병과 여러 차례 맞붙어 다소 밀리는 형세를 보여주었다. 조선의 정예병과 맞붙어 싸워본 일본군은 조선군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내내 조선은 기병을 이용하여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말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한반도는 명나라로 많은 말들을 수출했다. 태조시절부터 시작된 말의 수출은 조선의 말 생산에 큰 차질을 보여주었다. 특히 명나라 영락제와 건문제가 황제권을 놓고 한판 내란을 벌이때, 양측에서 조선에 말을 요구했고, 그 결과 많은 말들이 많게는 1만 마리까지 중원으로 흘러갔다. 명나라가 몽고를 정벌하러 갈 때에도 세종시절에 조선은파병 대신 말 5천여 마리를 대신 공급해주는 경우가 있었다.
(* 당시 제주도에의 조랑말의 숫자가 1만 마리가 약간 안 되는 상황이므로 대단한 수치다.)
이런, 과도한 대륙으로의 말 수출은 조선의 말 생산을 크게 줄어들게 했고, 설상가상은 조선은 명나라의 말 수출이 중단된 시기 이후에도 목장 관리에 소홀하여 임진왜란을 맞게는 즈음에 도달하여 말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이제까지 나는 전쟁 초반에 조선군이 패배를 당한 이유를 조선쪽에서 찾아보고 분석을 하였다.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조선군이 패전한 것임을 금방 알게 된다.
한마디로 결론을 말하면, 무능한 조정과 어리숙한 현지 장수들과 그 밑에 있는 약골 병사들이 빈약한 장비로 가지고 훈련이 안 된 상황에서 일본군과 맞붙어 크게 패하고 평양까지 밀렸다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할까... 유이오 전쟁때도 북한군에 밀린 한국군을 생각하니 그 말이 사실이고 진리임을 깨닫는다. 앞으로 이런 모습을 한국역사에 보여주지 않았음을 한 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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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The oak and ash | 작성시간 04.05.02 제가보기엔 철제의 부족때문같네요 .철로된 총통이나,대포를 대량생산하지 못했거든요.임진왜란때 육상전에서 일본에게 밀린이유는 화승총도있지만 일본장궁(길이220cm)의 위력에 맥을 못춰서 이기도하죠.
  • 작성자The oak and ash | 작성시간 04.05.02 또,일본은 일반보병들도 간편한 갑옷을 전부입고 싸웠는데 조선은 장군이외엔 갑옷을 입지 안았죠.역시 철부족이라 그렇습니다.
  • 작성자흑태자 에드워드 | 작성시간 04.05.02 제가 보기에는 사림의 성장, 지주전호제의 전개도 거기에 한몫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농경사회 생산력의 근간이 되는 향촌사회를 중앙정부대신에 재지향반들이 장악해 나가면서. 세종때 최고로 올라섰던 세수가 이후 채감하는 것을 봐도 그렇죠. 일본같은 경우는 다이묘가 영국을 확실히 장악해 나가던것에 반해 반대죠.
  • 작성자흑태자 에드워드 | 작성시간 04.05.02 조선 전기에 이룩해둔 체재는 분명 중앙집권 관료사회임에도, 양분을 공급하는 뿌리가 서서히 갉아 먹히는 실정이라고나 할까요? 근데 일본 장궁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 등나무로 만든 활이라 길어도 그렇게 고장력을 기대할 수 없거든요.
  • 작성자素軒 | 작성시간 04.08.20 군사력이란 指揮官의 능력과 意志. 兵士들의 훈련정도. 武器體係 .전략과 전술등이 승패의 주요 요건으로 작용되는 바 모든 면에서 일본에 劣等했으며 특히 黨爭으로 인한 지휘계통의 혼선등이 패인을 자초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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