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아나키스트[我行]작성시간04.04.26
좋은 의견입니다. 다만 한가지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 조선 초기의 말 소유량에 대한 부분인데, 성종 때의 기록에 의하면 개인소유 말을 제외한 국유목장에서 방목하던 말의숫자가 약 4만마리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실록 원문 확인은 못하였고, 남도영씨가 쓴 '韓國馬政史'(한국마사회))
작성자산들바람작성시간04.05.01
모두 좋은 의견인데 몇가지... 우선 조선중기까지 조선이 약소국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조선초기때까지만 원-명에 대등한 위치를 점하고 만주의 안주인행세까지 할 정도였지 조선중기로 넘어가면서 서원출신 대신들이 정권장악에 성공하고 명에 대한 사대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군사,정치,외교
작성자산들바람작성시간04.05.01
모든 분야에 있어 명나라에 기대기 시작하면서부터 조선은 약소국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결국 스스로 아우를 자청하고 명의 군대가 없으면 자주국방조차 하지 못하는 약소국으로 전락해 버렸고 이는 명이 무너진 후 후금에게 연달아 두번 연타를 얻어맏고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는 것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작성자산들바람작성시간04.05.01
기병을 말씀하셨는데 왜군이 이미 기병전술에 대한 적응도가 높았다는 것은 벽제관전투에서 명 기병이 왜군에게 포위되어 쪼개친 채 박살났었다는 점과 비록 정예기병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탄금대에서 신립의 기병전술이 왜군에게 먹히지 않은채 개박살났던점과 신립 사후에 함경북병사였던 신립의 동생 신할이
작성자산들바람작성시간04.05.01
함길도에 남아있던 기병(정규군이라고 할수는 없습니다.)들을 끌고 내려왔다가 역시 왜군의 동일한 전략에 걸려 개박살난 예로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기병의 숫자가 많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왜군은 기병에 대한 적응도가 높았기 때문에 기병으로 무조건 휘젓는 전투는 적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작성자흑태자 에드워드작성시간04.05.02
제가 보기에는 사림의 성장, 지주전호제의 전개도 거기에 한몫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농경사회 생산력의 근간이 되는 향촌사회를 중앙정부대신에 재지향반들이 장악해 나가면서. 세종때 최고로 올라섰던 세수가 이후 채감하는 것을 봐도 그렇죠. 일본같은 경우는 다이묘가 영국을 확실히 장악해 나가던것에 반해 반대죠.
작성자흑태자 에드워드작성시간04.05.02
조선 전기에 이룩해둔 체재는 분명 중앙집권 관료사회임에도, 양분을 공급하는 뿌리가 서서히 갉아 먹히는 실정이라고나 할까요? 근데 일본 장궁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 등나무로 만든 활이라 길어도 그렇게 고장력을 기대할 수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