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인과의 무역이 활발하던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 당시에 일본의 다이묘들은 서양인과의 교역으로 얻게 된 각종 신기한 문물에 경탄해 하면서도 성능좋은 화기와 과학기술을 보유한 서양군대가 일본땅에 상륙해 백성들을 살육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과의 무역이 활발하던 전국시대 당시에도 오다 노부나가는 남만인들이 언젠가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정복하러 오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에서 프로이스나 발리냐노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그런 질문을 종종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일본땅까지 오는데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으며 폭풍과 악천후로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한 두번이 아닌데 어떻게 수만명의 병사들이 그 먼거리를 무사히 통과해 일본에 상륙할 수 있겠냐는 말로 안심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대답을 들은 노부나가도 오랜 항해로 쇠약해진 군대가 도달한다면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막아낼 수 있겠다는 대답을 함으로써 자신감을 드러냈다고 하죠.
1596년, 도사의 우라토에 표착한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호"의 승무원이 "스페인왕은 기독교로 먼저 인심을 끌어모은 후 그나라를 정복한다"고 떠들어 댄 말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어 다음해 2월 프란시스코회 신부와 기독교인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건도 있었습니다.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초창기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들도 예전의 지배자들처럼 남만인과의 무역과 기독교 전파에 대해서 호의적이던 태도가 점차 돌변하여 적극적인 기독교 박해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일본내 크리스찬이 거의 70만명에 육박하고 기독교의 교리가 사무라이 계급이 최상층의 위치를 차지하고 그 밑으로 농민과 상공업자가 자리하는 일본의 봉건적 사회구조를 뒤흔드는 평등사상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커다란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죠. 게다가 일본과의 무역관계를 독점하고 싶어했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아메리카와 필리핀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았듯이 일본 또한 선교사들을 앞세워 정복하려고 흉계를 꾸미는 중이라는 유언비어를 흘림으로써 쇄국정책은 점차 확고해지고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점점 극심해지게 됩니다.

1623년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3대 쇼군으로 등장하자 크리스찬 탄압을 철저히 제도화하게 됩니다. 그해 10월 두 선교사를 체포하는 한편 에도에서 이름있는 크리스찬 46명을 잡아들여 세 조로 나누어 거리에 조리 돌리다가 가장 번화한 곳에서 화형에 처하는 등 크리스찬 말살정책을 강행합니다. 12월 4일에 처형당한 이 사건을 '에도의 대순교'라고 합니다. 이어 전국적으로 기리시탄 수색을 강화하여 신자를 숨겨준 사람까지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규슈에 잠복해 있던 외국인과 일본인 사제는 모두 색출되어 사형을 받았습니다. 일반 신자에게는 세뇌공작과 잔인한 고문으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죠. 그 결과 1630년에는 일찍이 '소(小)로마'로 불리던 나가사키에도 신자가 거의 전멸된 상태로 변합니다.
1633년에는 지도급의 기리시탄(吉利支丹)에 대하여 '구멍 매달기'라는(귀 뒤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구덩이에 처박아 거꾸로 매달아 놓는 고문방식. 이렇게 거꾸로 매달린 이들은 그 구멍과 코와 입에서 피를 조금씩 흘리면서 죽음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서히 숨이 끊어지게 됩니다.)이라는 잔인한 고문방식이 채용되었는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여 예수회 관구장 대리이며 주교대리인 페레이라가 배교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회의 수사인 나가하라같은 이는 나흘간의 생매장에도 굴하지 않고 고결하게 순교합니다.
-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이 '구멍 매달기’형벌을 받고 배교한 다음, 일본 여인을 아내로 맞아 생활하다가 1685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는 포르투갈 선교사 요세페 캘러를 모델로 한 로드리고라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죽어 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침묵만 하고 계신 하나님, 신학적으로 해결하기 난해한 문제,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문제를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의 내면 묘사를 통해 조용하지만 가슴 뜨겁게 그리고 있습니다.

일본의 기독교사에서「시마바라의 난島原の亂」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기독교인의 수난사건입니다. 1562년경부터 74년간 기독교가 부흥을 이룬 곳이 시마바라였죠. 시마바라의 영주(領主) '아리마 요시나오(有馬義直)'와 그 아들 '하레노부(晴信)'는 포르투갈 선교사를 초빙하여 세례를 받고 신학교까지 세웠습니다. 그런데 1637년 도쿠가와 막부는 금교령을 선포하고 기독교인의 탄압과 무거운 세금을 과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항거하여 '아마구사 시로(天草四郞)'와 3만 7천명의 기독교인이 '하라성(原城)'에서 농성하여 막부군과 90일간의 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막부군은 12만 대군을 동원하여 기독교인의 씨를 말리듯이 어린이, 노인 할 것 없이 3만 7천명 모두를 학살하였습니다. 이것이 「시마바라의 난(島原의 亂)」입니다.
기록에는 당시 3만7천의 군사와 부녀자, 노약자들이 모두 전투 중 죽거나 포로로 잡혀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편 발굴 및 복원 작업이 한창인 하라성터에서 발굴되는 유골 대다수가 메달을 입에 물고 있어 놀라움을 준다는 군요. 쓰다 남은 총탄으로 만든 메달은 대부분 성모마리아나 십자가 모양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당시 신자들은 전쟁 중 성체를 모시지 못함을 죄스럽게 생각해 이를 대신해 메달을 입에 물고 전투에 참가했다고 하는군요. 하느님의 몸을 모시고 기꺼이 순교하겠다는 3만7천 순교자들의 거룩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성중에서 싸우는 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것이며 구원의 은총을 얻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땅을 흔들림 없이 굳건히 지키는 것도 하느님에게 봉공(奉公)하는 것이다
아마쿠사 시로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에게 당부한 말이라고 합니다.
만만치 않았던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여 많은 교인을 학살한 도쿠가와 막부는 기리시탄을 국적 제 4호로 삼고,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구실로 이용하게 됩니다.
이처럼 지독한 기독교 박해와 기리시탄 색출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1635년(인조 13년)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성대한 환대를 받았으며 통신사를 수행한 재인 2명이 쇼군 이에미쓰 앞에서 마상재를 선보여 극찬을 받기도 합니다. 에도 막부의 쇼군들은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어 버린 조선과의 국교를 정상회복시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에 다시 편입하고자 노력하고 있었으며 조선왕조의 통치제도인 유교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사농공상적 사회제도가 무사계급이 농민과 상인 계층을 다스리는 막부의 정치적 지향점과도 부합된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통신사들이 전해주는 성리학적 학술이론등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도쿠가와 정부는 또 기리시탄을 뿌리뽑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일정한 절의 소속이 되도록 의무화시켜 출생, 결혼, 사망, 이전등 가족의 모든 동태를 신고하게 함으로써 신자들을 철저히 감시하는 일종의 불교국가를 형성합니다. 그들은 오인조 제도라는 것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다섯가구를 한 단위로 편성하여 서로를 감시케 하고, 상금제도와 각처에 게시판을 세워 기리시탄 밀고를 장려합니다.
기리시탄을 색출하는 방법으로 성모 마리아 화상을 밟고 가게 하여 주민의 표정으로 신자를 가려내는 후미에(踏繪)라는 악랄한 수법까지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17세기 후반기에 이르자 일본 기리시탄 교회는 공적 활동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렇게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메이지시대를 맞이하기까지 2세기반이란 세월에 걸쳐 규슈 도서지방에서 대를 물려 은밀히 신앙을 지킨 신자들이 있어 전세계의 교회를 경탄케 하기도 합니다.
(일본에 있는 아마쿠사 크리스찬 박물관에는 성모마리아를 닮은 불상, 부처의 몸체를 분리하면 십자가가 등장하는 불상 등 시마바라의 난 이후 박해를 피해 숨어서 종교를 지켜내야 했던 신자들의 처절하면서도 끈질긴 신앙을 엿보게 하는 다양한 유물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10가구 내지 20가구의 교우촌 점조직을 이루어 겉으로는 불교를 믿는 듯이 가장하여 은밀히 신앙생활을 고수하였다과 하는군요. 이들을 '가쿠레 기리시탄'(hidden christian)이라 합니다.
그리고 박해를 이겨내며 끈질기게 지켜온 신앙은 260여년이 지난 1865년, 비로소 세상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잠복신자들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가사키현의 오우라 천주당이었습니다.


P.S -1638년, 시마바라(島原)의 난.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에 대항하는 마지막 몸부림.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3만 7000명의 농부에 대해 12만명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한다.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를 필두로 한 기독교 집단의 요술(妖術)에 대한 두려움이 일으킨 과민반응이었다. 100일에 거친 살육이 끝났을 때 그 땅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머리는 잘려 있었다. 그곳에 신은 없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천하는 3대 장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치세. 그 평화로운 시대에 도쿠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만은 야심과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남해의 용'이라고 불릴 정도로 용맹하지만 차기 장군 자리를 노리기에는 현실적인 힘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절치부심하는 요리노부의 앞에 10년 전 죽었다던 시로가 나타나 천하를 그에게 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반신반의하는 요리노부에게 시로는 소문으로 듣던 '마계전생(魔界轉生)'의 비술을 보여준다. 동굴 속 제단, 가슴에 역십자가의 상처가 있는 나체의 여자가 누워있다. 시로의 주문과 함께 여체는 조금씩 동요하며 그 내부에서 누군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여체가 찢겨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야규류(柳生流)의 호걸 아라키마타에몬(荒木又右衛門)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마계의 무리가 되어 다시 한번 세상을 접수하러 나타난 것이다! 시로를 따르는 의문의 여성 크라라 오시나(クララお品)는 말한다. "무념, 무념무상만이 이 세상에 환생하는 방법입니다."
저 세상으로 간 영웅들을 환생시킨다는 계획을 위해 기슈번(紀州藩)으로 모여드는 여자들 중에는 야규(柳生) 무리의 오히로(おひろ), 오히나(お雛) 자매도 끼어있다. 기슈번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던 야규 무리는 은밀히 잠입했다 큰 상처를 입은 오히나의 증언으로 가공할 만한 계획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드디어 야규 쥬베에(柳生十兵衛)가 나선다.
기슈번의 음모를 막기 위해 요리노부를 쫓아 에도로 향하는 쥬베에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한 시대를 호령했던 검호 아라키마타에몬(荒木又右衛門), 호조인 인슌(寶藏院胤舜),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그리고 야규 다지마노카미(柳生但馬守). 그리고 쥬베에마저 마계의 무리로 포섭하기 위해 암약하는 시로. 쥬베에는 검호들과의 처절한 전투를 통해 무언가를 자각하기 시작하는데...
- 일본 영화읽기에서 인용(http://www.tojapan.co.kr/culture/movie/index.asp) -
'마계전생'은 야마다 후타로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우리에게는 '배틀 로얄'로 잘 알려진 야쿠자 액쑌 영화의 형님이셨던 고(故)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작품입니다.
'킬 빌'의 핫토리 한조로 낯익은 치바 신이치(Sonny Chiba)가 쥬베이 역을 맡고 잇습니다.
지금은 중후한 매력을 내는 그 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우리의 중견배우 이계인을 연상시키는 걸걸한 목소리로 시원스런 검술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사와다 켄지가 연기한 아마쿠사 시로입니다.
보라빛의 하늘에 거대한 십자가와 수많은 잘려진 목들의 아비규환에서 절규하는 아마쿠사 시로는 강렬한 인상을 주죠.
끝없는 사랑과 복수심 때문에 스스로 신에 대항하는 자가 되는 혁명가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드라큘라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최근 자살기도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고, 보아의 이상형이라서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고(Go)'의 주인공 스기하라로 친숙한 쿠보츠카 요스케가 아마쿠사 시로를 연기하고, '학교괴담'의 히라야마 히데유키가 감독한 2003년작 리메이크도 있습니다.
포르투갈과의 무역이 활발하던 전국시대 당시에도 오다 노부나가는 남만인들이 언젠가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정복하러 오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에서 프로이스나 발리냐노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그런 질문을 종종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일본땅까지 오는데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으며 폭풍과 악천후로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한 두번이 아닌데 어떻게 수만명의 병사들이 그 먼거리를 무사히 통과해 일본에 상륙할 수 있겠냐는 말로 안심시켰다고 합니다. 이런 대답을 들은 노부나가도 오랜 항해로 쇠약해진 군대가 도달한다면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막아낼 수 있겠다는 대답을 함으로써 자신감을 드러냈다고 하죠.
1596년, 도사의 우라토에 표착한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호"의 승무원이 "스페인왕은 기독교로 먼저 인심을 끌어모은 후 그나라를 정복한다"고 떠들어 댄 말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어 다음해 2월 프란시스코회 신부와 기독교인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사건도 있었습니다.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초창기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들도 예전의 지배자들처럼 남만인과의 무역과 기독교 전파에 대해서 호의적이던 태도가 점차 돌변하여 적극적인 기독교 박해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일본내 크리스찬이 거의 70만명에 육박하고 기독교의 교리가 사무라이 계급이 최상층의 위치를 차지하고 그 밑으로 농민과 상공업자가 자리하는 일본의 봉건적 사회구조를 뒤흔드는 평등사상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커다란 사회적 불안이 야기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죠. 게다가 일본과의 무역관계를 독점하고 싶어했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아메리카와 필리핀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았듯이 일본 또한 선교사들을 앞세워 정복하려고 흉계를 꾸미는 중이라는 유언비어를 흘림으로써 쇄국정책은 점차 확고해지고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점점 극심해지게 됩니다.

1623년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3대 쇼군으로 등장하자 크리스찬 탄압을 철저히 제도화하게 됩니다. 그해 10월 두 선교사를 체포하는 한편 에도에서 이름있는 크리스찬 46명을 잡아들여 세 조로 나누어 거리에 조리 돌리다가 가장 번화한 곳에서 화형에 처하는 등 크리스찬 말살정책을 강행합니다. 12월 4일에 처형당한 이 사건을 '에도의 대순교'라고 합니다. 이어 전국적으로 기리시탄 수색을 강화하여 신자를 숨겨준 사람까지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규슈에 잠복해 있던 외국인과 일본인 사제는 모두 색출되어 사형을 받았습니다. 일반 신자에게는 세뇌공작과 잔인한 고문으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죠. 그 결과 1630년에는 일찍이 '소(小)로마'로 불리던 나가사키에도 신자가 거의 전멸된 상태로 변합니다.
1633년에는 지도급의 기리시탄(吉利支丹)에 대하여 '구멍 매달기'라는(귀 뒤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구덩이에 처박아 거꾸로 매달아 놓는 고문방식. 이렇게 거꾸로 매달린 이들은 그 구멍과 코와 입에서 피를 조금씩 흘리면서 죽음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서히 숨이 끊어지게 됩니다.)이라는 잔인한 고문방식이 채용되었는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여 예수회 관구장 대리이며 주교대리인 페레이라가 배교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회의 수사인 나가하라같은 이는 나흘간의 생매장에도 굴하지 않고 고결하게 순교합니다.
-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이 '구멍 매달기’형벌을 받고 배교한 다음, 일본 여인을 아내로 맞아 생활하다가 1685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는 포르투갈 선교사 요세페 캘러를 모델로 한 로드리고라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죽어 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침묵만 하고 계신 하나님, 신학적으로 해결하기 난해한 문제,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문제를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의 내면 묘사를 통해 조용하지만 가슴 뜨겁게 그리고 있습니다.

일본의 기독교사에서「시마바라의 난島原の亂」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기독교인의 수난사건입니다. 1562년경부터 74년간 기독교가 부흥을 이룬 곳이 시마바라였죠. 시마바라의 영주(領主) '아리마 요시나오(有馬義直)'와 그 아들 '하레노부(晴信)'는 포르투갈 선교사를 초빙하여 세례를 받고 신학교까지 세웠습니다. 그런데 1637년 도쿠가와 막부는 금교령을 선포하고 기독교인의 탄압과 무거운 세금을 과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항거하여 '아마구사 시로(天草四郞)'와 3만 7천명의 기독교인이 '하라성(原城)'에서 농성하여 막부군과 90일간의 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막부군은 12만 대군을 동원하여 기독교인의 씨를 말리듯이 어린이, 노인 할 것 없이 3만 7천명 모두를 학살하였습니다. 이것이 「시마바라의 난(島原의 亂)」입니다.
기록에는 당시 3만7천의 군사와 부녀자, 노약자들이 모두 전투 중 죽거나 포로로 잡혀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편 발굴 및 복원 작업이 한창인 하라성터에서 발굴되는 유골 대다수가 메달을 입에 물고 있어 놀라움을 준다는 군요. 쓰다 남은 총탄으로 만든 메달은 대부분 성모마리아나 십자가 모양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당시 신자들은 전쟁 중 성체를 모시지 못함을 죄스럽게 생각해 이를 대신해 메달을 입에 물고 전투에 참가했다고 하는군요. 하느님의 몸을 모시고 기꺼이 순교하겠다는 3만7천 순교자들의 거룩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성중에서 싸우는 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것이며 구원의 은총을 얻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땅을 흔들림 없이 굳건히 지키는 것도 하느님에게 봉공(奉公)하는 것이다
아마쿠사 시로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에게 당부한 말이라고 합니다.
만만치 않았던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하여 많은 교인을 학살한 도쿠가와 막부는 기리시탄을 국적 제 4호로 삼고,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구실로 이용하게 됩니다.
이처럼 지독한 기독교 박해와 기리시탄 색출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1635년(인조 13년)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은 성대한 환대를 받았으며 통신사를 수행한 재인 2명이 쇼군 이에미쓰 앞에서 마상재를 선보여 극찬을 받기도 합니다. 에도 막부의 쇼군들은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어 버린 조선과의 국교를 정상회복시켜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에 다시 편입하고자 노력하고 있었으며 조선왕조의 통치제도인 유교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사농공상적 사회제도가 무사계급이 농민과 상인 계층을 다스리는 막부의 정치적 지향점과도 부합된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기 때문에 통신사들이 전해주는 성리학적 학술이론등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도쿠가와 정부는 또 기리시탄을 뿌리뽑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일정한 절의 소속이 되도록 의무화시켜 출생, 결혼, 사망, 이전등 가족의 모든 동태를 신고하게 함으로써 신자들을 철저히 감시하는 일종의 불교국가를 형성합니다. 그들은 오인조 제도라는 것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다섯가구를 한 단위로 편성하여 서로를 감시케 하고, 상금제도와 각처에 게시판을 세워 기리시탄 밀고를 장려합니다.
기리시탄을 색출하는 방법으로 성모 마리아 화상을 밟고 가게 하여 주민의 표정으로 신자를 가려내는 후미에(踏繪)라는 악랄한 수법까지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17세기 후반기에 이르자 일본 기리시탄 교회는 공적 활동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렇게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메이지시대를 맞이하기까지 2세기반이란 세월에 걸쳐 규슈 도서지방에서 대를 물려 은밀히 신앙을 지킨 신자들이 있어 전세계의 교회를 경탄케 하기도 합니다.
(일본에 있는 아마쿠사 크리스찬 박물관에는 성모마리아를 닮은 불상, 부처의 몸체를 분리하면 십자가가 등장하는 불상 등 시마바라의 난 이후 박해를 피해 숨어서 종교를 지켜내야 했던 신자들의 처절하면서도 끈질긴 신앙을 엿보게 하는 다양한 유물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10가구 내지 20가구의 교우촌 점조직을 이루어 겉으로는 불교를 믿는 듯이 가장하여 은밀히 신앙생활을 고수하였다과 하는군요. 이들을 '가쿠레 기리시탄'(hidden christian)이라 합니다.
그리고 박해를 이겨내며 끈질기게 지켜온 신앙은 260여년이 지난 1865년, 비로소 세상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잠복신자들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가사키현의 오우라 천주당이었습니다.


P.S -1638년, 시마바라(島原)의 난.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에 대항하는 마지막 몸부림.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3만 7000명의 농부에 대해 12만명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한다.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를 필두로 한 기독교 집단의 요술(妖術)에 대한 두려움이 일으킨 과민반응이었다. 100일에 거친 살육이 끝났을 때 그 땅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머리는 잘려 있었다. 그곳에 신은 없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천하는 3대 장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치세. 그 평화로운 시대에 도쿠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만은 야심과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남해의 용'이라고 불릴 정도로 용맹하지만 차기 장군 자리를 노리기에는 현실적인 힘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절치부심하는 요리노부의 앞에 10년 전 죽었다던 시로가 나타나 천하를 그에게 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반신반의하는 요리노부에게 시로는 소문으로 듣던 '마계전생(魔界轉生)'의 비술을 보여준다. 동굴 속 제단, 가슴에 역십자가의 상처가 있는 나체의 여자가 누워있다. 시로의 주문과 함께 여체는 조금씩 동요하며 그 내부에서 누군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여체가 찢겨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야규류(柳生流)의 호걸 아라키마타에몬(荒木又右衛門)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마계의 무리가 되어 다시 한번 세상을 접수하러 나타난 것이다! 시로를 따르는 의문의 여성 크라라 오시나(クララお品)는 말한다. "무념, 무념무상만이 이 세상에 환생하는 방법입니다."
저 세상으로 간 영웅들을 환생시킨다는 계획을 위해 기슈번(紀州藩)으로 모여드는 여자들 중에는 야규(柳生) 무리의 오히로(おひろ), 오히나(お雛) 자매도 끼어있다. 기슈번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던 야규 무리는 은밀히 잠입했다 큰 상처를 입은 오히나의 증언으로 가공할 만한 계획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드디어 야규 쥬베에(柳生十兵衛)가 나선다.
기슈번의 음모를 막기 위해 요리노부를 쫓아 에도로 향하는 쥬베에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한 시대를 호령했던 검호 아라키마타에몬(荒木又右衛門), 호조인 인슌(寶藏院胤舜),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그리고 야규 다지마노카미(柳生但馬守). 그리고 쥬베에마저 마계의 무리로 포섭하기 위해 암약하는 시로. 쥬베에는 검호들과의 처절한 전투를 통해 무언가를 자각하기 시작하는데...
- 일본 영화읽기에서 인용(http://www.tojapan.co.kr/culture/movie/index.asp) -
'마계전생'은 야마다 후타로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우리에게는 '배틀 로얄'로 잘 알려진 야쿠자 액쑌 영화의 형님이셨던 고(故)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작품입니다.
'킬 빌'의 핫토리 한조로 낯익은 치바 신이치(Sonny Chiba)가 쥬베이 역을 맡고 잇습니다.
지금은 중후한 매력을 내는 그 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우리의 중견배우 이계인을 연상시키는 걸걸한 목소리로 시원스런 검술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사와다 켄지가 연기한 아마쿠사 시로입니다.
보라빛의 하늘에 거대한 십자가와 수많은 잘려진 목들의 아비규환에서 절규하는 아마쿠사 시로는 강렬한 인상을 주죠.
끝없는 사랑과 복수심 때문에 스스로 신에 대항하는 자가 되는 혁명가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드라큘라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최근 자살기도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고, 보아의 이상형이라서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고(Go)'의 주인공 스기하라로 친숙한 쿠보츠카 요스케가 아마쿠사 시로를 연기하고, '학교괴담'의 히라야마 히데유키가 감독한 2003년작 리메이크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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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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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teatta 작성시간 04.08.29 오오옷!!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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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호돌이 작성시간 04.08.29 그 시마바라 난의 아마쿠사가 SNK의 유명한 검술 게임 사무라이 스피릿츠의 1기 보스 아마쿠사이죠. 초상화를 한 번 보고 싶군용. 암튼 어디서나 자기가 인정안하는거 탄압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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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아콘 작성시간 04.09.01 도꾸가와 가문은 전통적으로 불교를 숭상하는 가문이었고 전국시대의 대표적 보수세력에 속했습니다. 히데요시사후 전국통일과 쇼군에 취임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예정되었다고 볼수 있죠. 더불어 막부의 전통적인 쇄국정책은 이러한 보수적인 성향을 잘 나타내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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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소비에트 작성시간 04.11.27 기독교가 서양침략주의의 전략적 이용물이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며 '순진한 신도'들과는 달리 서양기도교의 '성직자'들은 침략주의의 선봉에 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참고로 불교를 숭상했다고 기독교를 탄압한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도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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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환수 작성시간 05.09.23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