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에 겨우 눈을 떴다.
어제 이것 저것 장보고, 음식하고, 정리하고 나니 새벽 2시 넘어서야 잠을 잤나보다.
맏며느리 노릇 벌써 18년째 접어들건만 아즉도 분분하고 동동거려진다.
손하고 통만 컸지, 살림요량은 더디게 느는가 보다.
6시 위령미사가 있어 집안 대표로 우리 부부만 참석하러 가야하기 때문이다.
겨우 나름대로 옷매무새 고치고 부랴부랴 성당으로 갔다.
성당안에서는 곱게 한복으로 정장으로 차려입은 많은 분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시집식구 모두 성당을 다니고, 시누이가 수녀님인 관계로다 열심인 신자는 못되도
최선을 다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도 맏며느리로서의 임무인데 쉽지는 않은 일이다.
올해는 시집식구에다가 돌아가실 때만 대세를 받으신 친정부모님도 은근슬쩍 함께
봉헌했다. 하느님은 옹졸한 분이 아니시니 작은 정성에 많은 이들도 안아주시겠지.
7시에 집에 도착해서 어제 덜한 각종 나물과 조기를 장만해서 차례상을 차렸다.
막내 동서는 나에게 전화하면 오랄까봐 둘째동서한테 큰집으로 바로 간다고 잔머리 써대고,
둘째가 거의 준비가 끝났을 때 집으로 들어선다. "빨리 왔네" 맘과 다른 인사말이지만
추석날인 만큼 즐겁게 시작하고 싶어서 웃으며 맞이 한다.
맏며느리의 자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랫사람들이 못했을 때 미안 해서 담 부터 잘 할 수 있게
너그럽게 대하는 맘을 자꾸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부족은 하다.
8시경 큰집으로 가서 차례를 먼저 지내고, 다시 11쯤 우리 집에서 차례를 지냈다.
차례 음식에 질린 사람들은 나에게 점심으로 "갱시기- 콩나물과 묵은김치와 수제비를 넣어 끓이는
일명 꿀꿀이 죽"를 원했다. 내가 아주 잘하는 특별식이기도 하다.
우리밀가루를 쫀득하게 수제비가 되도록 빚는 것은 힘도 기술도 많이 요한다.
오후1시가 되자 손님들이 물밀듯이 밀려오신다.
우리 아버님이 제일 연세가 많으시기고 하고, 윗대에 혼자 생존해 계시기도 하고,
생후 1개월짜리부터 모든 아이들에게 무조건 파란색 용돈을 듬뿍 주는 관계로
항상 4-50명씩은 우리 집으로 몰려 온다.
물론, 남정네들을 위해 음식은 술은 종류별로 박스채로, 술안주는 따로 만들어 둔
- 북어찜이나 가오리 조림, 삶은 돌문어 등이 준비되어 있어야 함은 기본이고
아이들을 위해서는 과일과 한과와 떡은 종류별로 진열해 주어야 한다.
특히, 아녀자들을 위해서는 와인을 준비해 두어야 하고,
종류별로 마실 수 있는 차를 준비해 두어야 한다. 갖가지 차를 맛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이벤트로 "연꽃차"를 마셨다. 모두들 아주 신기해 하고 맛나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끝날 것 같지 않은 모임도 오후 4시가 넘으면 각자 처가댁으로
간다고들 우리 집을 나선다.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려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물론, 여기가 끝이 아니다.
친정을 못가는 시어른과 가까운 사촌 동서네 가족들은 남는다.
이때 난 접대용 "고스톱"을 한 판 쳐주어야 한다.
어떨 때는 재롱도 떨고 술도 한잔해야하고..푼수도 떨어야 한다.
그러다가 저녁은 '칼칼한 칼국수'를 원했다.
지체없이 다시물 맛나게 내어서 마지막에 귀한 송이 버섯을 살짝 찢어 뿌려서 넣고
칼국수를 끓여 냈더니 모두들 한그릇씩 뚝딱이다. 15인분쯤 끓였다.
저녁까지 드신 연후 과일로 입가심을 하고 "너무 수고했네..맏이나 넉넉해서 편했네.."
부족한 것은 제쳐두고 인심좋게 칭찬을 한아름 남겨 두고 가신 시간은 대략 저녁 7시쯤인가 보다.
나머지 청소와 설거지를 대충하고나니 8시 30정도 되었나보다.
"이제 정말 끝났구나.." 싶으니 피로가 몰려온다.
부리나케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족탕과 냉온욕을 하면서 "가족 친지들과 즐겁게 보낸 한가위" 속에서 맏며느리로서의
나의 역할에 대해,부족한 것들에 대해 되돌아 보게 된다.
결론은,
아무리 맏며느리 노릇이 힘들다고 해도, 요즘 세상살이에서 자주 느낄 수 없는
피붙이들의 정겨움, 살가움, 아낌없는 나눔,
조상과 나와 아이들에게 연결되어지는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고마움,
북쩍이면서 서로에게 보내는 상생의 기운들.. 정성들..이 가득한
한가위는 풍성한 맘 하나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를 조금씩 조금씩 괜잖은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귀한 자양분이 아닐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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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석관일 작성시간 07.09.27 비오는 날의 바람 ....여전히 활발함며...시댁 친정 그리고 가정 참 어렵겠어여...난 할말 엄군,부모를 버리고 출가...비오는 날의 바람 님 역시수양/도력이 놉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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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비오는 날의 바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9.28 스님..담번엔 촌로님 방문 하실 때 지도 데불고 가이소...언제쯤 제석사 가볼까나..찬바람 불기 전에 가보고 싶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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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글라라 작성시간 07.09.28 넘~ 힘드셧어여 그래두 맏며느리가 그렇게 수고 하니 집안에 기강이 서는거에여 맏이 그렇게 안하면 집안 콩가루? 된답니ㄷㅏ ㅎㅎㅎ... 그리구 인생에 공짜는 없데여 누군가 꼭 기억하시고 몇배로 축복해 준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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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비오는 날의 바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9.28 다들 저보다 힘들게 보내고도 생색 내지 않는데 지만 벨스럽게 구는 것 같기도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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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바람에 놀고(문영숙) 작성시간 07.10.03 와, 어디서 이런 힘이? 크고도 세심하시네요. 여성들을 위해 와인까지, 입까심으로 연꽃차까지 . . . 몸도 맘도 오지게도 잘 써먹으셨어요. 휴식도 넉넉하게 해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