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상 신부]2026년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화) 말씀 묵상 (1열왕 17,7-16) (이근상 신부)

작성자박베드로SJ|작성시간26.06.08|조회수44 목록 댓글 1

2026년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화) 말씀 묵상 (1열왕 17,7-16) (이근상 신부)

그 무렵 엘리야가 숨어 지내던 7 시내의 물이 말라 버렸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8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9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 10 그래서 엘리야는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1열왕17,7-12)

그 무렵 시내의 물이 말라 버렸다. 엘리야가 잘못 선택한 길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고집으로 그곳에 숨어든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물은 말랐다. 주님이 보내신 자리에서도 물은 마를 수 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길에서도 생계는 옹색해지고, 마음은 위태로워지고, 내일은 자꾸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이 대목은 묘하다. 믿음의 길은 때로 너무 분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초라해서 알아보기 어렵다. 주님이 주신 길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우연히 밀려난 길 같고, 길을 찾은 사람의 길이 아니라 길을 잃은 사람의 길 같다.

더 기막힌 것은 그다음이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하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 그런데 엘리야가 만난 사람은 넉넉한 후원자가 아니었다. 밀가루 한 줌과 기름 조금을 가지고,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으려던 여인이었다. 주님이 마련해 두신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도움을 줄 사람이라기보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엘리야의 길은 여기서 더 신산스러워진다. 물 마른 시내에서 굶어 죽기 직전의 과부에게로 가는 길. 이것이 주님의 명령에 따른 길이었다.

그러니 엘리야가 귀가 밝은 사람이었기에 망정이다. 그가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기에 망정이다. 귀가 닫힌 사람이었다면 이 모든 길은 하느님이 이끌어 오신 섭리의 자취가 아니라, 하느님 부재의 증거로만 보였을 것이다. 시내가 마른 것도, 사렙타가 먼 것도, 과부가 가난한 것도, 빵 한 조각조차 구하기 어려운 것도 모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느님은 여기 계시지 않다.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면 이 길이 이렇게 옹색할 리 없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길이라면 적어도 이렇게까지 초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정반대로 증언한다. 바로 그 마른 시내가 주님의 길 안에 있었다. 바로 그 사렙타가 주님의 길 안에 있었다. 바로 그 과부가 주님이 마련하신 만남 안에 있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넉넉함의 얼굴로만 오지 않는다. 때로는 다 말라 버린 자리로 오고,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통해 오고,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궁핍 속에서 온다. 하느님은 풍요로운 자원을 먼저 마련해 두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난이 만나는 자리에서 생명을 열어 보이신다. 밀가루 한 줌과 기름 조금, 그것이 전부인 자리에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이상한 의심 하나를 품게 한다. 혹시 우리 삶의 신산스러운 길들도, 엘리야를 사랑하시고 그의 길을 마련하신 주님이 하나하나 선택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길인지 모른다는 의심이다. 우리가 실패라고 부른 자리, 우연히 밀려났다고 생각한 자리, 아무 도움도 없다고 여긴 자리, 오히려 내가 도움을 청하기도 미안한 사람들 앞에 서게 된 자리, 그 모든 길이 정말 아무 뜻 없는 길이었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물론 쉽게 섭리라고 말하면 안 된다. 가난과 고통을 미화하면 안 된다. 그러나 너무 빨리 하느님 부재의 증거로만 써 버려서도 안 된다.

선택받은 사람의 길이 늘 반듯하고 넉넉한 길은 아니다. 엘리야도 선택받았으나 그의 길은 신산스러웠다. 사랑받았으나 시내의 물은 말랐다. 보내심을 받았으나 그가 만난 이는 죽음을 준비하던 과부였다. 그러니 우리도 조용히 물어야 한다. 혹시 주님은 지금도 이런 길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것은 아닌가. 길이 너무 초라해서, 너무 옹색해서, 너무 무너져서 알아보지 못했을 뿐, 그 안에서도 주님은 이미 누군가를 준비시키고, 나를 준비시키고, 우리 둘의 가난이 만나는 자리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생명을 준비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선택받았으나 길은 신산스럽다. 사랑받았으나 물은 마른다. 그러나 바로 그 마른 자리에서, 주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라. 거기에 머물러라. 내가 이미 길을 마련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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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함께 | 작성시간 26.06.09 믿음의 길은 때로 너무 분명해서가 아니라, 너무 초라해서 알아보기 어렵다.
    주님이 주신 길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우연히 밀려난 길 같고,
    길을 찾은 사람의 길이 아니라 길을 잃은 사람의 길 같다.

    하느님은 풍요로운 자원을 먼저 마련해 두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가난이 만나는 자리에서 생명을 열어 보이신다.

    정말 그래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는데
    그 조건을 따지지도 않고 먼저 그분이 이끄는 대로 살았는데
    다 주시고 차서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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