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성격이 흥미로운 건
이 기질을 가진 사람들 대다수가 성인이 되고나서도
자신의 성격에 대해 제대로 된 인지를 하기가 힘들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유추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또는 자기 자신)을 관찰할 때, 먼저 행동을 보고 그들의 성격을 짐작해내려 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예민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자연스럽게 예민한 성격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생겨나게 되지만,
(ex. 왜 저렇게 별나게 굴어? 진짜 예민한 성격이야. 이 정도도 못 참는다고? 진짜 예민한 사람이네)
진짜 예민한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예민성을 절대 드러내지 않습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까지 흡수할만큼 감정에 굉장히 민감하기 때문에,
살면서 내 감정 뿐만이 아니라 주변인들의 감정까지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ex. 내가 기분 좋더라도, 내 배우자가 기분 나쁘면 그 즉시 나도 기분이 나빠짐,
따라서 항상 배우자의 기분을 생각하며 맞춰주려고 노력하게 됨,
그렇지 않으면 언제 또 배우자의 나쁜 기분에 전염될 지 모르니까. )
따라서, 괜히 틱틱대며 부정적 기운을 내뿜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주변인들 기분 상하게 해 봤자, 결국 나만 더 힘들어지니까.
이처럼 극도로 예민한 감각 때문에, 항상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맞춰주며 살다보니,
드러나는 행동이 꼭 무던하고 성격 좋은 "곰돌이 푸우"처럼 비춰지는 겁니다.
이러니 다른 사람들이나 그 자신이나 어떻게 이 사람이 사실은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곰돌이 푸우에서 자각 HSP로
대다수 HSP(Highly Sensitive Person)들의 삶은 가시밭길 그 자체이지만,
사실, 성인이 되고나서도 본인의 성격 정체성을 오인하며
쭉 미운오리새끼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더 힘든 측면도 있습니다.
실은 누구보다도 예민한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무던한 사람처럼 살아왔으니 그 고초가 오죽할까요?
제가 센터에서 일하며,
그리고 예민한 사람에 대한 글들을 쓰며 겪었던 놀라운 사실은
이 가짜 푸우들이 자신이 실은 HSP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말 놀라울만큼 삶의 대한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점입니다.
이제껏 안갯속 같았던 내 삶이 성격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밝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단순히 나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내가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삶이 왜 이렇게 고된 지 이해하게 된 것만으로도,
인간이 지니는 불안도는 극적으로 낮아지고 안정화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종이 지도 하나 없이 먼 길을 떠나는 것과 구글맵을 켜고 먼 길을 떠나는 것만큼의 현격한 차이인 것입니다.
인간의 뇌에 아웃풋 없는 인풋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제가 예민한 사람들에 대한 재밌는 사실 한가지를 말씀드릴께요.
HSP들은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극도로 민감한 감각을 타고 나며,
어린 시절부터 끝도 없이 밀려 들어오는 자극의 인풋들을 어찌저찌 처리해 온 결과,
정보 처리 능력이 보통 사람들 대비 꽤나 좋은 편입니다.
인간의 뇌는 자극이 유입되면 그걸 반드시 해석해야 되거든요?
※ 그 자극이 위협 자극인지 안전 자극인지를 판명해 내야 함.
새로 인풋된 자극이 안전 자극으로 판명될 때까지 인간은 불안을 느끼게 돼 있음.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사건사고들이 남아 있으면, 그게 인지적으로 종결될 때까지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돌게 되는 것임,
이러한 현상을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함.
그런데 HSP들의 뇌는 인풋된 자극을 어떻게든 이해시켜 아웃풋으로 정리하는 데 굉장히 능숙합니다.
왜? 어린 시절부터 쭉 자극의 과부하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터득해 왔으니까.
따라서, 내가 사실은 예민한 사람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HSP들의 뇌는 예민한 성격에 대한 인지적 종결을 위해 계속해서 정보의 탐색을 요구하게 돼요.
즉, 어? 나 예민한 사람이었네? 라는 걸 인지하게 된 순간부터,
인터넷을 뒤적인다거나, HSP에 대한 책을 찾아본다거나 하며
본능적으로 예민한 성격에 대한 개념 정립을 시도하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처럼요.
왜 가짜 푸우들이 자각 HSP가 되는 것만으로도 안정화되는가?
머릿속에 또아리를 튼 채 지독히도 날 괴롭혀 왔던 미지의 불편감이
HSP라는 정체성 요소 하나로 인해 인지적으로 종결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아하 모먼트"에 이르게 된 것이죠.
영화 결말이 이해 안 가 답답했었는데,
결말 해석 리뷰를 찾아본 뒤 그동안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만 같은 느낌.
아 내가 이래서 그랬구나.
그 때 그렇게 힘들었던 게 당연했었네.
와. 내가 이렇게나 예민한 사람이었구나.
심리학자들은 어지러운 머릿속 정리를 어질러진 방 정리에 비유하곤 합니다.
잔뜩 어질러진 방이 말끔하게 정리됐다고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게 놓여있어야 할 곳에 딱딱 정리돼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
이처럼 머릿속이 명확해지고 내 심정이 차분해 진 이후에야,
내가 가진 예민한 기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 또한 나의 숙명임을 수용할 수 있게 돼요.
이 때부터가 바로 예민한 사람으로서의 인생 제 2막, 그 시작인 것입니다.
※ 무명자 블로그 : https://blog.naver.com/ahsune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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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던황제 작성시간 24.08.16 이거야말로 제 경험담이군요. 저는 제가 꽤나 무던한 사람인줄 알고 살았는데 극도로 예민한 사람인줄 검사 받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와이프도 겉보기에 제가 무던한 줄알았는데 감각이 꽤 예민해서 속았다고 할 정도..; 특히 오감의 예민성이 나이드니 더 심해지더군요, 다행인건 그나마 나름대로 관리하는 방법을 찾아서 스트레스를 덜받게 됐다는거..특히 체온을 낮추는게 도움이 많이 되더군요
아마 온도 때문에 감각이 둔해져서 그런가 봅니다
어쨌든 스스로를 알게돼니 지금껏 의문이었던 부분이 모두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도무지 이해가 안가던 사람들도 이해가 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
작성자용룡이 작성시간 24.08.16 전 엄청 투덜거려서 별명이 투덜이였던 적이 있네요 ^^;
좋아 하는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네요.
늘 좋은글 감사 드립니다 ^^ -
작성자디트와 함께 춤을 작성시간 24.08.16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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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클레이 탐슨 작성시간 24.08.16 어쩌면 이 글을 읽은 순간이 저의 아하 모먼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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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키드가 되고싶어요~~^^;; 작성시간 24.08.16 저도 최근에서야 제가 예민한 사람이란걸 깨달았습니다 ㅎㅎ 글에 있는대로 예민하다는걸 인지하니 확실히 스트레스가 많이 줄어들더라도요
언제나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