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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엄친아', '잽 스텝의 원조', 키키를 소개합니다.

작성자Doctor J|작성시간10.07.31|조회수4,743 목록 댓글 29

 

 

 

'진정한 엄친아', '잽 스텝의 원조', 키키 밴더웨이 이야기

 

글: Doctor J

 

 

 

    

  

 

 

이미 아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80년대의 명 포워드였던 키키 밴더웨이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은 듯 해서 짧게나마 소개하는 글을 올려 봅니다. 이 80년대가 워낙에 역대급 스몰 포워드들이 난무했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출중한 실력을 자랑했던 키키 밴더웨이 급의 스몰 포워드들이 그냥 묻혀버리는 듯한 안타까움이 사실 좀 많았습니다. 

 

 

1958년에 독일(당시의 서독)에서 출생한 키키 밴더웨이의 본명은 Ernest Maurice Vandeweghe (키키는 독일어로 곱슬머리란 뜻입니다) 입니다. 뉴욕 닉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고 마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와 자랐습니다. 키키의 아버지, 어니 밴더웨이는 6년 간의 NBA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독일에서 이미 의사였던 사람입니다. NBA를 은퇴한 후 그는 본연의 직업이었던 의사로 돌아갔습니다.

 

키키의 어머니는 1952년 Miss America의 영예에 빛나는 콜린 케이 헛친스죠. 건강하고 잘 생긴 아버지와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키키 또한 좋은 신체와 출중한 외모를 유전적으로 물려 받았습니다. 키키의 여동생, 타우나는 올림픽 국가대표 수영선수를 두 번이나 지낸 바 있는 어여쁜 모델입니다. 키키의 형인 브룩은 94년 비치발리볼 세계 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딴 바도 있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키키는 어릴 때부터 모든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낸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며, 또 동시에 공부 또한 항상 상위 클래스에 있던 수재였습니다. 상당히 높은 SAT 점수를 받고 들어간 UCLA 대학에서도 키키의 이런 면은 빛을 발했고, 여대생들 사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1980년엔 UCLA에서 농구팀을 지도했던 래리 브라운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토너먼트 평균 20점으로 UCLA 대학을 NCAA 토너먼트 결승전까지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탑 5 픽으로 거론되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키키 밴더웨이는 11번 픽까지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댈러스에 의해 드래프트가 된 키키 밴더웨이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덴버 너겟츠로 트레이드가 되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그의 커리어가 끝날 때까지, 댈러스의 팬들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댈러스 홈구장에 들어오기만 하면 야유를 퍼부어 댔고, 물건들을 집어던지는 통에 경기가 중단되는 사태도 많이 일어났었죠. 그가 왜 신인인 주제에 트레이드를 요구했는지에 대해선 여러가지 가설만 난무할 뿐, 공식적인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983년과 1984년, 2년 연속으로 NBA 올스타에 뽑힐 정도로 키키 밴더웨이의 성장속도는 빨랐습니다. 83년 시즌엔 평균득점 26.7점으로 리그 2위, 그리고 84년 시즌엔 29.4점으로 리그 3위에 오르기도 했죠. 당시 득점왕이었던 알렉스 잉글리쉬와 한솥밥을 먹었던 키키였습니다. 사실, 이 두 포워드가 경기당 60점 가량을 합작했었기 때문에, 상대팀들의 수비수들은 이 둘을 동시에 막느라 애를 많이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당시, 키키 밴더웨이의 특이한 몸 동작 하나가 농구인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 스텝'이죠.

 

키키 밴더웨이가 스스로 만들어낸 공격 기술이었습니다. 하프코트 오펜스 상황에서건, 얼리 오펜스 상황에서건, 키키의 순간적으로 내딛는 잽 스텝으로 인해 수비수들이 움찔거리며 타이밍을 잃거나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키키는 이런 스텝을 이용해 수비수들이 자기로부터 떨어지면 여유있게 외곽슛을 쏘았고, 자기에게 들러붙으면 여유있게 돌파해 들어가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덩크를 꽂았습니다.

 

당시엔 키키의 이런 스텝에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키키 스텝' 또는 '키키 무브'라고만 했었죠. 나중에 어느 TV 해설자가 키키의 스텝이 복서들이 사용하는 잽 스텝과 그 원리가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잽 스텝'이란 용어로 일반화가 된 것입니다. 요즘엔 키키 밴더웨이의 구단 후배이기도 한 카멜로 앤써니가 수비수들을 떨어뜨릴 때 많이 사용하고 있는 동작이기도 하지요.

 

 

2년 연속으로 올스타에도 선정된 그였지만, 영원히 잉글리쉬와 호흡을 맞출 수는 없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전형적인 스몰 포워드였는지라, 두 선수가 함께 할 때의 너겟츠는 상대적으로 리바운드나 골밑 수비가 약해질 수 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83-84 시즌이 끝난 후, 키키 밴더웨이는 포틀랜드의 올스타 파워 포워드, 칼빈 네트, 블라킹이 뛰어났던 센터, 웨인 쿠퍼, 그리고 잠재력이 넘쳤던 포인트 가드, 라파옛 리버와 트레이드가 됩니다.

 

이후, 벤더웨이는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짝을 이루며 포틀랜드에서도 매 시즌 꾸준히 평균 25득점 가량을 올리는 맹활약을 하게 됩니다. 1986-87 시즌엔 성공률 48.1%로 3점슛 1위를 하기도 했죠. 그러다가 1988년에 입은 심각한 허리부상 이후 전성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고, 뉴욕 닉스에서 커리어 말년을 보낸 후, 1993년에 은퇴를 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할 사항이 있습니다.

 

20대 초중반에 자신만의 잽 스텝을 고안해 내어 돌파나 외곽슛으로 점수를 올리던 키키 밴더웨이가 나이가 들고 부상으로 운동능력이 줄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공격기술을 창안해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개인적으로 저는 이 선수가 정말로 천재였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잽 스텝의 스피드와 위력이 떨어진 키키가 만들어낸 또 다른 기술이 일명 '키키 베이스라인 1' 무브입니다. 미국의 농구 클리닉이나 고등학교, 대학교 농구팀에서 어린 선수들에게도 반드시 가르치는 기본적인 공격기술입니다. 일종의 '스텝 백 점프슛'이죠.

 

 

이 동작은 기본적으로 1회의 드리블과 3회의 스텝으로 수비수를 떨어뜨리며 슛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스스로 창출해내게 하는 고급 기술입니다. 

 

공을 받은 공격수가 피벗을 하거나 짧은 잽 스텝을 내디딘 후, 왼발을 축으로 오른쪽이나 뒷쪽 공간으로 원 드리블을 치며 빠져서 순식간에 수비수를 자기로부터 떨어뜨리는 기술이죠.

 

키키 밴더웨이가 창안해 낸 기술이고, 미국의 웬만한 농구 클리닉에선 다 강조하는 기본기이지만, 현실적으론 유럽에서 농구를 배운 선수들이 경기 중에 더 잘 써먹고 있습니다. 

 

 

'잽 스텝'과 '키키 베이스라인 1 무브'... 현재 웬만한 스윙맨들은 다 터득하고 잘 구사해야만 하는 고급 슈팅기술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키키 밴더웨이가 농구계에 남겨놓은 소중한 유산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은퇴를 한 키키 밴더웨이는 선수 시절 동안에 혹독하도록 미움을 샀던 댈러스 홈관중들, 그리고 매버릭스 구단과 극적인 화해를 하며, 매버릭스의 프런트와 어시스턴트 코치 직을 떠맡게 됩니다. 그가 댈러스에 머무는 동안, 그는 매버릭스 구단 사상 가장 획기적이고도 위대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하나 터뜨리고 맙니다.

 

유럽을 돌며 농구 클리닉을 하던 그가 1994년 경에 일찌감치 눈독을 들인 선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돈 넬슨 감독을 설득시켜 매버릭스가 자신과 같은 독일 출신의 이 어린 선수를 영입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가 바로 덕 노비츠키였습니다. 선수들 드래프트와 트레이드에 타고난 본능을 지닌 돈 넬슨 감독은 결국 노비츠키를 댈러스로 영입해 왔고, 그 노비츠키가 프로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옆에서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사람이 바로 키키 밴더웨이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그가 댈러스 농구팬들에게 지은 죄값(?)은 갚고도 남을 지경이 되었죠?

 

 

 

 

 

 

그 후 2001년부터 덴버 너겟츠의 GM을 맡게 된 밴더웨이는 곧바로 너겟츠를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공헌을 했고, 카멜로 앤써니의 드래프트와 마큐스 캠비 트레이드, 그리고 조지 칼 감독의 영입 등을 진두지휘하며 너겟츠 구단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물론, GM으로서, 또 넷츠의 헤드코치로서, 실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수로서, 또 GM으로서 그가 남겨놓은 업적이나 유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타고난 신체능력이나 운동능력은 없었지만, 대신 두뇌로 농구를 했던 사나이, 그가 '진정한 엄친아' 키키 밴더웨이입니다.  

 

 

  

 

 

타이밍을 빼앗는 스텝과 큰 손을 이용해 치고 들어가던 키키 밴더웨이의 전형적인 돌파 무브입니다.

 

 

 

 

 

미스 USA인 어머니와 NBA 출신으로서 의사가 된 아버지 사이에서 나온 아이들 넷이 모두

신동들이었고, 다양한 스포츠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꿈나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특별한 밴더웨이 가족이 출연한 비누 CF 광고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앞줄에 농구공을 들고 서있는 아이가 키키 밴더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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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8.05 불행히도 키키의 제대로 된 동영상 믹스는 없습니다. 80년대 경기를 찾아 보셔야 되는데... 하일라이트 영상은 시간이 되는대로 제가 한 번 만들어 볼까 합니다.
  • 작성자파워테크니션 | 작성시간 10.08.05 좋은자료 감사히 스크렙 하겠습니다.
  • 작성자야오 | 작성시간 10.08.14 슈터로서 욕심스러운 기술이네요. 꼭 익히도록 노력을... ㅋ
  • 작성자바람둥이소닉4 | 작성시간 10.12.18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특히 "여대생들 사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면서 부럽네요. ^^
  • 작성자LaPhonso | 작성시간 13.03.14 이름은 자주 들었었는데 이런 훌륭한 선수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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