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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의, 허재에 의한, 허재를 위한 대회 - 1984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작성자Doctor J|작성시간21.02.20|조회수4,450 목록 댓글 36

1984년 아시아 청소년 농구 선수권 이야기입니다.

 

전두환 독재에 항거해 대학생들이 연일 시위를 하던 1984년 4월에 잠실체육관에서 벌어진 대회였죠.

 

중국(중공) 선수들이 대한민국 땅을 밟은 최초의 대회였기에 화제거리도 많았습니다. 입장식 때 중국이 중국기를 들고 입장하자 대만 선수들이 입장식에 참가 안 하겠다고 해서 소란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고요. 중국 선수들과 대만 선수들이 혹여라도 충돌하는 불상사라도 일어날까봐 많은 경찰들까지 출동해 있었죠.  

 

한국팀은 2년 동안 대부분의 전국대회를 제패한 천하무적 용산고 3인방인 허재 (중앙대), 이민형 (고려대), 한만성 (연세대), 그리고 광주고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끈 센터 김종석과 투지와 허슬이 뛰어난 리딩가드 강인태(단국대)가 주축인 팀이었습니다.

 

중국(당시 중공)은 송리강, 205센티의 떠오르는 신예 빅맨, 송타오, 그리고 그와 함께 트윈타워를 이룬 왕하이보가 중심이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워낙 신장과 윙스팬이 좋고 유연하기까지 해서 골밑 수비가 너무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키는 작지만 뛰어난 피벗플레이를 선보인 이민형, 투지넘치는 허슬과 빠른 볼배급으로 완급을 조절한 강인태, 그리고 전천후 올라운더 폭격기, 허재의 활약에 힘입어 한국팀은 5~10점차의 리드를 경기 내내 가져갔습니다. 193센티의 센터 김종석도 자기 몫을 다 해줬고요. 다만 믿었던 고 한만성 선수가 너무 부진해서 일찌감치 가져갈 수 있었던 승리의 분위기가 막판까지 접전으로 갔던 점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허재는 대회 내내 30점 전후의 득점력, 8개 정도의 리바운드, 7개 정도의 어시스트, 2~3개의 스틸을 보여주며 맹활약했고, 중요한 일본전에서도 33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7스틸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아래 GIF 영상들은 결승전 중국(중공)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허재의 플레이입니다. 보존되어 있는 영상이 후반전 마지막 7분 정도 밖에 없어서 매우 아쉽지만, 클러치 상황에서의 허재의 활약상을 맛뵈기(?) 정도 할 수는 있을 듯 합니다. 

 

 

1. 허재 스텝백

지금에 와서 보면 흔한 플레이라 별 감흥이 없으시겠지만, 80년대 당시만 해도 훼이크 동작에 이은 저런 보폭이 큰 스텝백 점퍼를 구사한 국내선수는 없었습니다. 당시에 내노라 하던 슈터들, 박수교, 박인규, 황유하, 이충희, 최철권, 오동근,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스텝은 볼 수 없었습니다. 작고한 김현준 선수가 스텝백 비슷한 점퍼를 가끔씩 구사하곤 했었지만, 영상에서처럼 완전히 방향과 각도를 틀면서 공간을 창출해내는 플레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허재는 한국농구에 있어서 스텝백 점프슛의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2. 허재 오른손 돌파

이 경기 내내 허재가 보여준 돌파력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습니다. 중국의 장신 수비수들이 버틴 골밑으로 과감하게 치고 들어가며 오픈된 팀원에게 킥아웃 패스를 해주거나 본인이 직접 해결해버림으로써 중국팀의 수비진을 다 헤집어놓은 선수가 허재였습니다. 한국팀의 공격을 풀어줄 플레이메이커가 없었기에 3번으로 출전한 허재가 포인트가드 역할까지 맡아야 했고, 지공일 경우엔 이민형과 함께 재치있는 피벗 플레이와 픽앤롤 플레이로 한국팀의 공격찬스를 많이 창출해 냈었죠.

 

이 경기 후반전에선, 80년 NBA 파이널에서 닥터 J가 선보인 그 유명한 베이스라인 스쿱샷을 허재가 직접 구사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장신 수비수들이 페인트존을 다 가로막고 서있던 상황에서 베이스라인을 따라 치고 들어오던 허재가 그들 앞에서 붕 뜨며 백보드 아래쪽으로 들어가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리버스 레이업을 올린 것이었죠. 제 눈을 의심했던 순간입니다. 공이 림을 한 바퀴 돌아나오면서 슛은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말이죠. 

 

위 영상은 허재의 왼쪽 돌파에 속수무책으로 뚫리던 중국선수들이 허재의 왼쪽 방향을 견제하며 막고 서있다가 허재의 오른쪽 돌파에 허를 찔리는 순간입니다. 

 

 

3 허재 클러치 샷 1

경기 종료가 5분 안쪽으로 들어오자 중국의 추격이 매우 거세졌습니다. 빠른 속공과 얼리 오펜스를 이용해 4~5점 차까지 한국을 추격해왔는데, 그 때마다 터진 허재의 안정된 클러치 슛들입니다. 이건 자유투라인 근처에서 시도한 풀업 점퍼.

 

 

4. 허재 클러치 샷 2

경기 종료가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중국의 공격이 연이어 들어간 직후에 터진 허재의 깔끔한 클러치 슛입니다. 쇼울더 훼이크에 이은 매끄러운 미드레인지 점프슛. 

 

 

5. 허재 클러치 샷 3

막판엔 중국의 계속되는 파울로 자유투를 집어넣어야만 되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한국팀의 우승에 쐐기를 박는 허재의 클러치 자유투 두 방입니다. 

 

 

결국, 허재의 공수에 걸친 엄청난 활약에 힘입어 한국은 74 대 69로 중국을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됩니다. 허재는 만장일치로 대회 MVP에 선정이 됐고요. 또래 중엔 아시아에 라이벌 조차 없는 허재였습니다.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죠.

 

결승전에서의 허재의 스탯은 28득점, 7리바운드, 8어시스트, 4스틸, 1블락 (제가 직접 기록했고 이게 당시 FIBA 기록지보다 더 정확할 겁니다). 

 

허재가 국가대표 선수생활을 하며 중국을 꺾은 적이 딱 세 번 있었는데, 이게 그 중 한 경기입니다. 

 

 

** 제가 지금 외출을 해야 해서 두서없이 기억나는대로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나중에 찬찬히 읽어보며 보충할 내용이 있으면 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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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2.27 그럼요. 요즘 농구부터 접하신 분들은 콧방귀를 뀌실 지 모르겠으나, 80년대 한국농구 수준 무시 못합니다. 비록 2미터 넘는 빅맨들은 없었지만, 국내경기든 국제경기든, 그 깡과 배짱이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투지와 근성은 정말 뛰어났었고요.

    특히 82년 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전 경기 보면, 한국팀의 조직력과 패싱, 오프더볼 무브먼트 등이 혀를 내두르게 하죠. 이충희, 박수교, 신동찬, 임정명, 신선우, 이민현, 6인 로테이션이었는데, 6명 모두가 모든 포지션을 돌아가면서 봅니다. 6인 중 4인이 190 언저리 선수들이었으며, 6인 모두가 리바운드에 참여하고 패스하고 슛을 하고 돌파까지 하죠. 중국 수비진이 정신을 못차렸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리오타 | 작성시간 21.02.27 지금은 농구에 있어 키와 운동능력 등이 중요해 졌지만 8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구는 슈터의 농구였죠. 기본적으로 슛을 못하면 선수취급을 받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지도자들도 센터는 피봇, 박스아웃, 슈터에 공내주는 역할 정도만 시켰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게 당시에는 센터의 키가 너무 작았습니다. 70년대 국대 선수 센터 중에 한분은 "비행기를 타는 순간 내가 센터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슈터들끼리의 경쟁도 치열했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이충희와 김현준만 알고 있지만, 당시 현대 삼성이 아닌 기업은행에 입단한 이민현선수도 슛으로는 대단한 선수였고 국대 주전급 포워드였습니다. 박인규선수나 황유화 선수 역시 슛 정확도에서는 빠질 수 없는 선수였고 리딩가드의 교과서였던 신동찬선수나 박수교 선수도 슛이 매우 좋은 선수들이었습니다. 오히려 김동광 선수의 약점이 슛이었죠, 김영기씨나 신동파씨 같은 불세출의 슈터들이 끼친 영향력도 있었겠지요.
  • 답댓글 작성자리오타 | 작성시간 21.02.27 리오타 이 당시 우리나라의 농구는 신장이 작다보니 국제대회에 나가면 2가지 전술이었습니다 지공으로 상대팀의 공격 횟수를 최소화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슈터들에게 슛찬스를 만들어 주는 전술. 그래서 당시 저도 82년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 중공과의 경기를 기억합니다, 베스트 5 전원이 정확한 슈팅에 빠르고 똑똑하고 공 운반능력에 팀에 대한 헌신까지 정말 대단한 선수들이었죠. 철저한 지공을 통해 장신 중공의 공격횟수를 줄였고, 도대체 센터가 누군지 가드와 포워드가 누군지 모를 정도의 올라운더들의 대활약이었습니다

    물론 중국의 신장도 당시에는 대단했으나 요즘에 비하면 엄청나지는 않았습니다. 180대 가드1, 190초반 가드1 나머지 3명은 2미터 ~2미터5 사이의 운동능력 탁월한 포워드와 센터로 베스트5가 구성됐던 걸로 기억납니다, 그 유명한 목철주(238로 알려졌으나 228이 정확함)선수의 신장이 압도적이었죠, 물론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의 평균신장도 지금처럼 10센치 이상 차이가 났죠.
  • 작성자B.ROY | 작성시간 21.03.22 참 세련된 무브네요 지금 기준으로 봐도
  • 작성자kobe_hj | 작성시간 21.07.03 다른 것보다도 여유가 진짜 돋보이네요. 저 나이에 클러치타임을 책임지면서 플레이 하나하나에 여유가 보입니다. 미드레인지 슛 1,2에서 보면 충분히 드리블을 하고 주변 찬스를 살피면서 가장 좋을 타이밍에 딱 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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