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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의, 허재에 의한, 허재를 위한 대회 - 1984년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작성자Doctor J| 작성시간21.02.20| 조회수4254| 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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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 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1.02.20 리오타 최철권 선수가 84년 당시 고대 3학년이었죠. 그 때가 최전성기였다고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리오타 작성시간21.02.20 Doctor J 허재가 덩크했다는 건 저도 기억하는데요, 허재가 덩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네요, 본인이 직접 얘기한 건데, 굳이 경기중에 덩크슛으로 힘뺄 필요가 없다고, 그래서 자기는 주로 레이업으로 쉽게 마무리 한다고요. 허재가 그리고 자기는 김승현처럼 개인기를 부리는 스타일보다 이상민처럼 쉽게 감각적으로 하는 스타일을 선호한다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허재가 이상민과 강동희를 많이 좋아했죠.
  • 답댓글 작성자 리오타 작성시간21.02.20 Doctor J 허재가 단국대와의 경기에서 75점을 넣은 이후 고대 최철권 선수가 99점을 넣어서 우리나라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정말 대단한 슈터들이 많았죠. 슛이라면 떨어질 게 없는 허재 조차도, 이충희 김현준 박인규 이민현 황유화 최철권 같은 선수들한테는 한수 아래로 평가를 받았을 정도니까요.
  • 답댓글 작성자 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1.02.20 리오타 최철권의 기록은 97점인데, 이게 전국체전 경기에서 기록한 거라 사실 큰 의미나 가치는 없습니다. 그 기록 자체는 대단하지만요.
  • 답댓글 작성자 리오타 작성시간21.02.20 Doctor J 쳄벌레인의 100점 기록을 생각하면 최철권 선수도 대단한 기록이다 싶었죠. 상대팀이 워낙 약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요. 허재는 당시에 단국대와의 경기에서 전반에 중앙대가 넣은 모든 득점을 혼자서 넣었었는데요. 단국대 측으로부터 공식적인 항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학생 스포츠에 비신사적인 플레이라는 거죠. 허재가 대단한게, 아무리 잘한다 해도 혼자서 전반전 50여 득점을 혼자서 해낸다는게, 참 대단한 거 같습니다
  • 작성자 휴~~ 작성시간21.02.22 와....소중한 자료 정말 잘 봤습니다.

    이런 형님이 이제는 예능을 하고 계시니...

    세월 참...ㅋㅋ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 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1.02.22 휴~~
  • 작성자 sang장 작성시간21.02.27 저도 이 경기 중계로 본 기억이 납니다. 허재의 미친듯한 활약에 당황한 중국감독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중국감독이 한국 스탭에게 내가 많은 선수를 키워봤지만 이런 선수는 처음 본다고 했답니다.
  • 답댓글 작성자 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1.02.27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감독이 그런 소리를 했을 거란 확신은 안 들지만, 88년 올림픽 때 유고전을 마치고 유고감독과 드라전 페트로비치가 허재를 칭찬한 적은 있습니다.
  • 작성자 농구좋아ㅎ 작성시간21.02.27 그냥 딴딴한 느낌에 스피드가 충만해서, 동작 동작 하나가 임펙트 가득합니다. 정말 불세출의 농구선수인 거 같아요.
  • 작성자 Larry Legend 작성시간21.02.27 Dr. J 형님, 제가 이경기를 라이브로 삼촌이랑 보면서 허재선수에 대해 너무 강렬한 인상을 받았죠. 근데 오히려 저당시의 한국농구가 국제대회 나가서 오히려 선전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80년대 당시 한국농구를 보면 뭔가 한국만의 느낌이란게 있었어요. 그래서 외국팀과의 경기를 해도 비록 지기는 해도 종종 탄탄한 패스웍과 정확한 중거리로 그 팀컬러만큼은 확실히 유지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내에서도 80년대에는 연휴나 결승전 경기가 있는 날엔 많은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쥐고 응원하는 열정적인게 있었는데 요즘 오히려 국내농구가 그당시보다 여러모로 사랑을 못받고있단 생각이 듭니다.
  • 답댓글 작성자 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1.02.27 그럼요. 요즘 농구부터 접하신 분들은 콧방귀를 뀌실 지 모르겠으나, 80년대 한국농구 수준 무시 못합니다. 비록 2미터 넘는 빅맨들은 없었지만, 국내경기든 국제경기든, 그 깡과 배짱이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투지와 근성은 정말 뛰어났었고요.

    특히 82년 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전 경기 보면, 한국팀의 조직력과 패싱, 오프더볼 무브먼트 등이 혀를 내두르게 하죠. 이충희, 박수교, 신동찬, 임정명, 신선우, 이민현, 6인 로테이션이었는데, 6명 모두가 모든 포지션을 돌아가면서 봅니다. 6인 중 4인이 190 언저리 선수들이었으며, 6인 모두가 리바운드에 참여하고 패스하고 슛을 하고 돌파까지 하죠. 중국 수비진이 정신을 못차렸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리오타 작성시간21.02.27 지금은 농구에 있어 키와 운동능력 등이 중요해 졌지만 8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구는 슈터의 농구였죠. 기본적으로 슛을 못하면 선수취급을 받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지도자들도 센터는 피봇, 박스아웃, 슈터에 공내주는 역할 정도만 시켰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게 당시에는 센터의 키가 너무 작았습니다. 70년대 국대 선수 센터 중에 한분은 "비행기를 타는 순간 내가 센터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슈터들끼리의 경쟁도 치열했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이충희와 김현준만 알고 있지만, 당시 현대 삼성이 아닌 기업은행에 입단한 이민현선수도 슛으로는 대단한 선수였고 국대 주전급 포워드였습니다. 박인규선수나 황유화 선수 역시 슛 정확도에서는 빠질 수 없는 선수였고 리딩가드의 교과서였던 신동찬선수나 박수교 선수도 슛이 매우 좋은 선수들이었습니다. 오히려 김동광 선수의 약점이 슛이었죠, 김영기씨나 신동파씨 같은 불세출의 슈터들이 끼친 영향력도 있었겠지요.
  • 답댓글 작성자 리오타 작성시간21.02.27 리오타 이 당시 우리나라의 농구는 신장이 작다보니 국제대회에 나가면 2가지 전술이었습니다 지공으로 상대팀의 공격 횟수를 최소화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슈터들에게 슛찬스를 만들어 주는 전술. 그래서 당시 저도 82년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 중공과의 경기를 기억합니다, 베스트 5 전원이 정확한 슈팅에 빠르고 똑똑하고 공 운반능력에 팀에 대한 헌신까지 정말 대단한 선수들이었죠. 철저한 지공을 통해 장신 중공의 공격횟수를 줄였고, 도대체 센터가 누군지 가드와 포워드가 누군지 모를 정도의 올라운더들의 대활약이었습니다

    물론 중국의 신장도 당시에는 대단했으나 요즘에 비하면 엄청나지는 않았습니다. 180대 가드1, 190초반 가드1 나머지 3명은 2미터 ~2미터5 사이의 운동능력 탁월한 포워드와 센터로 베스트5가 구성됐던 걸로 기억납니다, 그 유명한 목철주(238로 알려졌으나 228이 정확함)선수의 신장이 압도적이었죠, 물론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의 평균신장도 지금처럼 10센치 이상 차이가 났죠.
  • 작성자 B.ROY 작성시간21.03.22 참 세련된 무브네요 지금 기준으로 봐도
  • 작성자 kobe_hj 작성시간21.07.03 다른 것보다도 여유가 진짜 돋보이네요. 저 나이에 클러치타임을 책임지면서 플레이 하나하나에 여유가 보입니다. 미드레인지 슛 1,2에서 보면 충분히 드리블을 하고 주변 찬스를 살피면서 가장 좋을 타이밍에 딱 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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