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인데 여기도 올립니다. 문제되면 삭제하죠.
fussycat's Hoopstory(3) 인종의 벽을 넘은 우정
Maurice Stokes와 Jack Twyman 이야기
NBA는 지난 시즌부터 팀동료들이 직접 뽑은 최고의 동료선수에게 시상을 했다. 이 상의 이름은 ‘트와이먼-스톡스 올해의 팀메이트상(Twyman-Stokes Teammate of the Year Award)’이다. 초대 수상자는 L.A. 클리퍼스에서 뛰었던 천시 빌럽스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이 상에 붙어있는 이름의 주인공 바로 잭 트와이먼과 모리스 스톡스의 인종을 뛰어넘은 우정이다.
- ‘빅 모’ 전설의 시작
NBA 무대에 흑인 선수들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흑인 선수들의 공격은 제한적이었다. 흑인 선수들이 많은 득점을 올린다면 관중의 다수가 백인인 NBA의 특성상 흥행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그릇된 시각 때문이었다. 심지어 흑인 선수들은 공격 기술이 부족하다는 편견까지도 생겨났다. 이런 이유로 냇 클리프튼, 척 쿠퍼, 얼 로이드, 돈 박스데일, 심지어 스톡스보다 1년 늦게 데뷔한 빌 러셀 등 초창기 NBA에 진출한 흑인 선수들의 공격 기록은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이런 편견을 깬 선수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모리스 스톡스였다. 스톡스의 등장 이후 엘진 베일러, 윌트 채임벌린, 오스카 로버트슨 등은 NBA 역사를 뒤흔든 흑인 슈퍼스타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스톡스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냐는 그가 ‘매직 존슨 이전의 매직 존슨’으로 불렸다는 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불행히도 스톡스는 NBA에서 단 3시즌만을 뛰고 사라졌다.
스톡스는 1933년 6월17일(이하 현지시간) 펜실베니아州 피츠버그 인근의 랜킨에서 태어났다. 스톡스가 8살이 되던 해 스톡스 가족은 피츠버그로 이사했고 스톡스는 피츠버그 길거리에서 농구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 스톡스와 길거리에서 농구를 했던 인물 중에는 NBA 역사상 최초의 흑인 선수 중 하나인 척 쿠퍼(스톡스의 멘토)와 훗날 스톡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동료 잭 트와이먼 등이 있었다.
스톡스는 웨스팅하우스 고등학교를 2년 연속 피츠버그市 챔피언으로 이끌었지만 에드 플레밍같은 걸출한 동료에 가려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물론 여러 대학에서 장학금 제의도 받았지만 유명 대학(신시내티 대학이 장학금을 고려했지만 결국 하지 않았음)은 없었다. 심지어 일부 감독은 스톡스가 느리다고 평했다. 결국 스톡스는 펜실베니아州 로레토에 위치한 NAIA 소속(이후 NCAA로 승급) 소규모 대학인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로 진학했다.
198cm의 단신 센터 겸 포워드였던 스톡스는 무명이던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당시 학생수 658명의 소규모 대학)를 강호로 이끌었다. 3학년 때 스톡스는 경기당 23.1득점, 26.5리바운드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고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는 21승6패라는 좋은 성적으로 NIT(National Invitational Tournament: NCAA 토너먼트와 함께 대학농구 양대 포스트시즌 토너먼트)에 올랐다. 비록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는 8강에서 탈락했지만 브리검 영 대학과 경기에서 34득점, 24리바운드를 기록한 스톡스는 스타덤에 올랐다.
4학년이던 1954-55 시즌 스톡스의 활약은 계속 이어졌다. 경기당 27.1득점, 26.2리바운드로 맹활약한 스톡스는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를 21승9패로 견인했다. 또한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는 2년 연속 NIT에 초대되는 영광도 누렸다. 1라운드에서 29득점을 올린 스톡스의 활약으로 시튼홀 대학을 물리친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는 8강에서 전년도 챔피언 홀리크로스 대학을 만났다. 당시 홀리크로스 대학은 훗날 보스턴 셀틱스에서 뛰게 될 톰 하인슨이 버티는 강호였다. 하지만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는 스톡스가 하인슨을 봉쇄하고 21득점을 터뜨리며 68-64로 승리하며 4강에 오르는 기적을 일으켰다. 비록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는 4강에서 2번 시드 데이튼 대학에게 연장 끝에 73-79로 패했지만 스톡스는 43득점(19리바운드)을 퍼부으며 주목받았다. 3, 4위전에서도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는 트와이먼이 버틴 신시내티 대학에게 패해 4위에 그쳤지만 이 경기에서 31득점을 터뜨린 스톡스는 NIT 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당시 스톡스의 활약에 대해 뉴욕 타임스는 ‘NIT 역사상 가장 눈부신 활약’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 운명의 선택
1954-55 시즌 NCAA AP 올아메리카 써드팀에 이름을 올린 스톡스는 1955년 NBA 드래프트에서도 최대어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스톡스의 기량을 탐낸 이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당대 최고의 흑인 선수들이 모인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의 에이브 세이퍼스타인 사장도 스톡스를 탐냈다. 세이퍼스타인은 당시로는 천문학적 액수인 연봉 15,000달러를 스톡스에게 제시했다. 또한 실업팀인 페오리아 캐터필러스와 위치타 뱅커스 등도 안정적인 직장과 올림픽 출전을 미끼로 스톡스에게 접근했다.
1955년 NBA 드래프트에서 밀워키 호크스는 1순위로 딕 리케츠를 지명했다. 201cm, 98kg의 포워드 겸 센터였던 리케츠는 듀케인 대학을 1955년 NIT 우승으로 이끈 기대주로 스톡스와는 피츠버그 길거리에서 라이벌이었던 선수였다. 2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로체스터 로열스의 구단주이자 감독이던 레스터 해리슨은 주저하지 않고 스톡스를 호명했다. 당시 일부 구단주들은 해리슨에게 스톡스는 세이퍼스타인이 원하는 선수고 세이퍼스타인은 NBA 흥행(당시 최고 인기 구단은 글로브트로터스였고 NBA 구단은 홈경기에서 글로브트로터스를 불러 오프닝 게임을 치르며 수익을 올리곤 했음)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니 스톡스를 포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해리슨은 “이봐, 잘 들어. 나는 스톡스와 이야기를 나눴어. 스톡스는 글로브트로터스에서 뛰길 원하지 않아. 그는 NBA를 원해. 나도 그를 원해. 나는 그와 계약할 거야”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결국 스톡스는 로열스와 2년에 25,000만 달러라는 거액에 계약했다.
1951년 NBA 정상에 올랐던 명문 구단 로열스는 슈퍼스타 밥 데이비스가 은퇴하고 센터였던 아니 라이슨이 보스턴 셀틱스로 이적하며 하향세를 걷고 있었다. 따라서 로열스는 새로운 스타가 필요했고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스톡스였다.
당시 로체스터가 뽑은 선수는 스톡스만이 아니었다. 로체스터는 2라운드에서 전체 8번으로 신시내티 대학 출신 슈터 잭 트와이먼을 뽑았고 3라운드 전체 16번으로는 스톡스의 고등학교에서 함께 뛰었던 에드 플레밍을 지명했다. 이로써 로체스터는 스톡스과 트와이먼으로 골밑과 외곽을 강화하며 리빌딩을 시작하게 되었다.
- 매직 존슨 이전의 매직 존슨
피츠버그 길거리 시절 스톡스의 멘토였던 척 쿠퍼(역사상 최초로 NBA 드래프트에서 뽑힌 흑인)는 “모(모리스의 애칭)가 대학을 나오면 흑인 선수들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줄 것”이라고 지인들에게 공공연히 이야기했다.
스톡스의 NBA무대 데뷔가 순탄했던 것만 아니었다. 1950년대 NBA는 현재와 달리 매우 거칠었다. 루키에게는 혹독한 신고식이 있었고 흑인들에게는 인종차별과 무시가 따랐다. 또한 상대 주득점원에게는 경기 중 폭력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이런 힘든 상황들을 스톡스는 모두 직면해야 했다. 보스턴 셀틱스와의 시범경기에서 스톡스는 상대 수비수의 거친 플레이로 관중석까지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스톡스는 주눅 들지 않고 그 선수에게 반격을 가했다. 경기 후 보스턴의 감독 레드 아워백은 “스톡스는 루키가 아니다. 대학에 있을 때도 NBA에 준비가 된 상태였다”며 스톡스의 패기를 높이 샀다.
1955년 11월5일 마침내 스톡스는 홈에서 뉴욕 닉스를 상대로 NBA 데뷔전을 치렀다. 뉴욕과의 개막전에서도 스톡스는 상대 수비수에게 얼굴을 발로 차이는 거친 플레이를 당했다. 스톡스는 한동안 코트 위에서 머리를 쥐고 쓰러져 있었지만 곧바로 일어나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뉴욕을 응징했다. 비록 팀은 연장 끝에 98-100으로 석패했지만 스톡스는 32득점, 20리바운드, 8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급 활약을 펼치며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경기 후 뉴욕의 감독 조 랩칙은 스톡스를 상대로 했던 거친 플레이에 대해 “스톡스는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라며 “만약 내가 계속 그런 플레이를 지시했다면 결국 우리 선수가 다쳤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톡스는 데뷔 첫 3경기에서 경기당 25득점, 20리바운드, 6.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리그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상대팀의 견제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 스톡스는 몇 경기 만에 상대의 거친 플레이로 부상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도 스톡스는 멈추지 않았다. 프로필상 201cm, 105kg(동료들에 의하면 신장은 203cm까지도 거론되곤 하고 체중은 118kg 정도까지 나갔다고 알려짐)이었던 스톡스는 센터로 뛰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의 플레이를 펼쳤다. 육중한 몸과 유연성 그리고 수준급의 스피드와 점프력을 지녔던 스톡스는 수비 리바운드를 잡고 자신이 가드처럼 드리블을 해 속공을 주도하기도 했고 공격 때에도 포인트가드처럼 비어있는 동료들에게 절묘한 패스를 연결했다. 또한 스톡스는 수비력도 발군이었고 3시즌 동안 두 차례나 DWS(Defensive Win Share) 리그 1위에 마지막 시즌은 빌 러셀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당시 스톡스의 플레이에 대해 보스턴의 전설적인 아나운서 조니 모스트는 “민첩성, 패싱 능력, 코트 감각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제가 처음 매직 존슨의 플레이를 보았을 때 모리스가 떠올랐죠. 스톡스는 201cm, 109kg이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는 포인트가드처럼 공을 다룰 수 있었고 리바운드는 센터처럼 할 수 있었죠. 그의 능력과 잠재력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항상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가 되었을지 궁금할 겁니다.” 라고 회고했다. 또한 보스턴의 아워백 감독은 훗날 “모리스 스톡스는 매직 존슨 이전의 매직 존슨이었다”며 그의 플레이를 설명했고 보스턴의 전설적인 가드 밥 쿠지는 스톡스에 대해 “최초로 훌륭한 운동능력을 겸비한 파워포워드”라며 “스톡스는 훨씬 기술이 좋은 칼 말론이었다”라고 추억했다.
NBA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스톡스는 1956년 올스타에도 뽑혀 밥 쿠지, 돌프 셰이즈, 밥 페팃 등 전설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당시 올스타전에서 20분을 뛴 스톡스는 10득점, 16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실력이 거품이 아님을 과시했다.
루키가 7명이나 포진한 로체스터는 31승41패로 리그 전체 꼴찌를 기록하며 아쉽게 창단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인 스톡스의 활약은 대단했다. 첫 시즌에 16.8득점, 16.3리바운드, 4.9어시스트를 기록한 스톡스는 당당히 리바운드 1위, 득점 11위, 어시스트 9위에 올랐다. 또한 스톡스는 올해의 신인과 올 NBA 세컨드팀에 오르며 슈퍼스타 탄생을 알렸다.
- 짧고 굵었던 NBA 생활
2년차부터 스톡스는 파워포워드로 뛰게 되었다. 1955-56 시즌 중반 영입한 리케츠가 센터를 맡았기 때문이다. 1956-57 시즌은 보스턴 셀틱스에 빌 러셀이 가세하며 ‘셀틱 왕조’가 시작된 시즌이다. 2년차가 된 스톡스는 단 한 경기도 결장하지 않고 72경기를 뛰며 15.6득점(13위), 17.4리바운드(1위), 4.6어시스트(3위)를 기록했다. 당시 스톡스가 기록한 17.4리바운드는 NBA 한 시즌 최다 리바운드 신기록이었고 1년 후 또 다른 괴물 빌 러셀에 의해 깨지게 된다. 당연히 스톡스는 1957년 올스타에도 선정되었고 올스타전에서 31분을 뛰며 19득점, 12리바운드, 7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급 활약을 펼쳤다. 또한 스톡스는 2년 연속 올 NBA 세컨드팀에 선정되었다. 아쉽게도 로체스터는 31승41패로 다시 리그 꼴찌(당시 서부 지구는 포트웨인 피스톤스,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 세인트루이스 호크스가 나란히 34승38패로 공동 1위였고 로체스터와 승차는 불과 3경기였음)에 그치고 말았다.
1957-58 시즌은 스톡스의 마지막 NBA 시즌이었다. 로열스 구단은 연고지를 로체스터에서 오하이오州의 신시내티로 옮겼다. 신시내티는 농구에 대한 열정이 많았고 슈퍼스타 잭 트와이먼이 졸업한 신시내티 대학이 위치한 곳이었다. 신시내티는 올스타 센터 클라이드 러블릿을 영입해 골밑을 보강하며 새로운 시즌을 맞았다.
좋은 센터를 파트너로 얻은 스톡스는 16.9득점, 18.1리바운드(3위), 6.4어시스트(3위)로 세 부문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당연히 올스타전에도 3년 연속 출전해 10득점, 14리바운드, 3어시스트로 맹활약했고 세 시즌 연속 올 NBA 세컨드 팀에 들었다. 또한 신시내티도 33승39패로 서부 2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동률을 이루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농구의 신도 이런 스톡스의 다재다능함을 시기했는지 시즌 막판 불행한 사건이 터진다. 1958년 3월12일 신시내티는 원정에서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와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경기 중반 스톡스는 미니애폴리스의 번 미켈슨과 리바운드를 다투다 중심을 잃고 코트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다. 한 동안 정신을 잃었던 스톡스는 잠시 벤치로 물러났다 다시 경기에 투입되었다. 이날 경기에서 스톡스는 24득점을 올리며 신시내티가 96-89로 승리하는데 앞장섰다.
- 농구의 신이 질투하다
플레이오프 1차전이 열리는 3월15일까지 3일 동안 스톡스에게는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경기 시작 30분 전 스톡스는 구역질을 하고 구토를 했다. 워밍업하는 동안도 정상 컨디션은 아니었다. 원정에서 열린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스톡스는 12득점, 15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전혀 스톡스답지 않은 플레이를 했다. 당시 구단주였던 해리슨은 “디트로이트에서 뛰는 동안 스톡스는 아프기 시작했어요. 경기 내내 힘이 없어 보였죠. 에어볼도 몇 번 날렸고 리바운드할 때도 힘이 없었습니다. 빌 러셀 위로 날아오를 수 있었던 선수가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단지 독감 같은 것이라 여겼어요. 신시내티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모리스는 화장실로 가다 쓰러져서 신음을 내며 거의 죽을 것처럼 몸을 떨었죠”라며 스톡스가 쓰러진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스톡스는 훗날 “경기 후 호텔로 돌아갔다 길 건너 바에서 맥주를 마신 후 공항으로 갔어요. 경기를 잘 하진 못했지만 제게 이상이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한 후 아프기 시작했죠”라고 자서전(출간되지는 못함)에서 밝혔다.
2차전을 위해 신시내티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스톡스는 가장 친한 친구인 리케츠에게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트와이먼은 당시 상황에 대해 “디트로이트에서 이륙 후 10분 정도 지났을 때 스톡스는 땀을 비오듯 흘리기 시작했어요. 매우 아파보였고 실신했죠. 그래서 비행사에서 전화해 신시내티 공항에 앰뷸런스를 대기 시켰습니다”라고 기억했다.
신시내티에 도착 후 해리슨 구단주와 리케츠는 스톡스를 병원으로 이송했다. 이후 수술을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결국 스톡스는 사지마비가 되었다. 농구의 신이 스톡스의 재능을 질투해서인지 스톡스는 NBA에서 불과 3시즌 만에 기량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사라지게 된 것이다.
- 진정한 우정을 보여준 트와이먼
스톡스가 쓰러지자 문제가 발생했다. 누군가 그의 법적 대리인이 되고 보호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스톡스의 가족은 피츠버그에 있었고 생계를 위해 피츠버그를 떠날 수 없었지만 스톡스는 오하이오州 노동법에 따라 보호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신시내티에 사는 누군가가 도와줘야 했다. 당시 로열스 소속 선수들 중 신시내티에 살고 있었던 유일한 선수는 트와이먼이었다.
결국 트와이먼은 스톡스의 법적 대리인이자 보호자가 되어 그를 간호하고 그를 위한 모든 조치를 취했다. 놀라운 사실은 스톡스가 쓰러지기 전까지 스톡스와 트와이먼은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트와이먼은 “모리스와 내가 특별히 친한 친구는 아니었다는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팀동료였죠. 모리스가 쓰러진 몇 주 후 레스터 해리슨은 로열스를 신시내티 그룹에 매각했습니다. 당시 매각 조건이 모리스가 뛰면 22만5,000달러, 뛰지 못하면 20만 달러였죠. 모리스는 시즌 마지막 날 다쳤고 당시는 다년 계약이 없었습니다. 모리스는 계약을 하지 못한 선수였고 보험도 없었죠. 모리스는 산업재해보험을 위해서라도 오하이오州에 남아야 했습니다. 모리스는 당시 은행잔고가 9,000달러였고 새 자동차가 있었어요. 병원비가 많이 나올 것이 뻔했고 누군가 그의 보호자로 은행에서 돈을 찾고 차를 팔고 병원비를 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트와이먼의 아내 캐롤라인은 병실에서 스톡스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고 트와이먼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후 수년간 농구선수로 뛰면서도 스톡스를 위한 일에는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결국 트와이먼의 노고는 헛되지 않았고 여러 사업가들이 여러 도움을 주었다. 특히 뉴욕州에 위치한 밀튼 컷처 리조트가 적극적으로 도왔다. 밀튼 컷처 리조트에서는 매년 스톡스를 돕기 위한 자선 농구대회가 열렸다. 이 농구 경기에는 빌 러셀, 밥 쿠지, 윌트 채임벌린(채임벌린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함) 등 슈퍼스타들이 참여했고 스톡스가 사망하기까지 무려 12년이나 이어졌다. 이런 행사로 벌어들인 수익 75만 달러는 모두 스톡스의 병원비와 농구 선수들(거스 존슨 등)을 위해 사용되었다.
또한 트와이먼은 12년간 시간이 날 때마다 스톡스의 병실을 찾아 그가 떠듬떠듬 말을 할 수 있기 전까지는 알파벳 하나씩 집어가며 눈 깜빡이는 것을 통해 대화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트와이먼과 그의 아내의 지극정성스런 보살핌에도 스톡스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1970년 4월6일 스톡스는 36살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스톡스의 유해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세인트 프랜시스 컬리지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 농구계를 바꿀 수 있었던 콤비
스톡스가 만약 쓰러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부 전문가들은 만약 스톡스가 건재했다면 1950년대 중후반부터 1960년대를 휩쓸었던 보스턴 왕조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스톡스는 러셀에 견줄만한 훌륭한 빅맨이었고 당시 최고 슈터였던 트와이먼에 훗날 시즌 트리블더블러 오스카 로버트슨과 제리 루카스(이 두 선수는 지역 연고 드래프트로 합류했기 때문에 팀성적과 상관없음) 그리고 웨인 엠브리까지 신시내티가 보스턴을 능가하는 화려한 라인업을 구축하기 때문이었다.
트와이먼은 “두 말 할 필요 없이 스톡스는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라며 “그는 매직(매직 존슨) 이전의 매직이었다. 센터와 포워드로도 뛸 수 있었고 가드처럼 공을 운반할 수 있었다”라며 스톡스를 평가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NBA까지 스톡스와 뛰었던 에드 플레밍은 “비행기에서 한 기자가 내게 ‘(엘진)베일러와 스톡스와 모두 뛰어봤는데 누가 더 뛰어났느냐’고 물어봤다. 나는 모리스가 엘진을 막을 수 있지만 엘진은 모리스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답했다”라며 스톡스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스톡스가 쓰러지면서 모든 일은 달라졌다. 사람들은 6차례나 올스타에 뽑혔고 올 NBA 세컨드팀에도 두 차례나 들었던 트와이먼은 선수로보다 스톡스의 날개 없는 천사로 더 많이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도 트와이먼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NBA는 이 둘의 영화같은 우정을 기리기 위해 2013년 ‘트와이먼-스톡스 올해의 팀메이트상’을 제정했다.
또한 트와이먼은 1983년 네이스미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스톡스도 2004년 명예의 전당에 올라 두 선수의 이름이 나란히 걸리게 되었다. 2012년 5월30일 트와이먼도 향년 78세를 일기로 스톡스의 곁으로 떠났다. 하지만 트와이먼의 등번호 27번과 스톡스의 등번호 12번은 새크라멘토 킹스 구단에 영구결번으로 남아 영원히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사족) 스톡스를 둘러싼 묘한 인연의 고리
스톡스와 고등학교 동창이던 에드 플레밍은 피츠버그의 멜론 파크에서 함께 농구를 하던 사이였다. 그리고 그때 그들보다 7살 많았던 척 쿠퍼를 만났고 쿠퍼는 스톡스에게 농구를 가르쳐 주었고 또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등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1950년 NBA 드래프트에서 보스턴 셀틱스의 지명을 받아 NBA 역사상 최초로 드래프트를 받은 흑인 선수로 기록된 쿠퍼는 불행히도 인종의 벽에 막혀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6시즌 동안 409경기에 출장, 6.7득점, 5.9리바운드, 1.8어시스트를 기록한 후 은퇴했다.
또한 당시 멜론 파크에서 스톡스와 함께 뛰곤 했던 인물이 바로 트와이먼이다. 트와이먼은 신시내티 대학으로 진학했고 두 선수는 NIT 3, 4위전에서 상대팀 소속으로 대결을 펼쳤다. 그리고 1955년 NBA에 나란히 입성했고 로열스에서 함께 뛰었고 평생을 함께 했다.
멜론 파크에서 스톡스와 함께 뛰었고 웨스팅하우스 고등학교에서 스톡스와 공동 주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플레밍은 1955년 NBA 드래프트 3라운드 16번으로 로체스터 로열스에 뽑혀 두 시즌 동안 스톡스와 한솥밥을 먹었다.
1955년 드래프트에서 스톡스에 앞서 전체 1번으로 밀워키 호크스에 지명을 받은 딕 리케츠는 1955년 NIT에서 듀케인 대학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당시 NIT MVP는 스톡스였다. 또한 피츠버그 길거리에서 스톡스와 맞붙기도 했던 리케츠는 1955-56 시즌 중반 로체스터로 이적해 세 시즌 동안 스톡스와 함께 뛰었고 스톡스와는 가장 친한 사이였다.
윌트 채임벌린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스톡스 자선 농구대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채임벌린은 스톡스와 함께 리바운드와 어시스트에서 한 시즌 3위 안에 모두 든 유일한 선수다. 또한 참여 선수들의 보험료 증가로 스톡스 자선농구대회가 없어진 후 2000년 이 대회는 모리스 스톡스/윌트 채임벌린 유명인 프로-암 골프 대회로 바뀌어 여전히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
* 스톡스의 대학 기록
|
시즌 |
G |
FGM |
FGA |
FG% |
FTM |
FTA |
FT% |
REB |
RPG |
PTS |
PPG |
|
51-52 |
30 |
206 |
450 |
.458 |
93 |
166 |
.560 |
- |
- |
505 |
16.8 |
|
52-53 |
18 |
170 |
331 |
.514 |
77 |
125 |
.616 |
397 |
22.1 |
417 |
23.2 |
|
53-54 |
26 |
234 |
549 |
.426 |
132 |
190 |
.695 |
689 |
26.5 |
600 |
23.1 |
|
54-55 |
28 |
302 |
707 |
.427 |
156 |
218 |
.716 |
733 |
26.2 |
760 |
27.1 |
|
Totals |
102 |
912 |
2037 |
.448 |
456 |
699 |
.655 |
1617 |
|
2282 |
22.4 |
- NIT 6경기에서 평균 31득점을 올린 스톡스는 NIT 역대 최고 선수 중 하나로 뽑혔다.
- 1964년 NAIA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 스톡스의 NBA 기록
|
시즌 |
G |
FGM |
FGA |
FG% |
FTM |
FTA |
FT% |
REB |
RPG |
AST |
APG |
PTS |
PPG |
|
55-56 |
67 |
403 |
1137 |
.354 |
319 |
447 |
.714 |
1094 |
16.3 |
328 |
4.9 |
1125 |
16.8 |
|
56-57 |
72 |
434 |
1249 |
.347 |
256 |
385 |
.665 |
1256 |
17.4 |
331 |
4.6 |
1124 |
15.6 |
|
57-58 |
63 |
414 |
1181 |
.351 |
238 |
333 |
.715 |
1142 |
18.1 |
403 |
6.4 |
1066 |
16.9 |
|
Totals |
202 |
1251 |
3567 |
.351 |
813 |
1165 |
.698 |
3492 |
17.3 |
1062 |
5.3 |
3315 |
16.4 |
- 1955-56 시즌 NBA 올해의 루키
- 올 NBA 세컨드 팀 3회(55-56~57-58시즌)
- NBA 올스타 3회(1956~1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