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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미 버틀러의 블라인드 사이드

작성자jongheuk|작성시간14.04.02|조회수3,651 목록 댓글 12

"I don't like the look of you. You gotta go."

 

생긴 게 마음에 안드니 나가라는 이말은 알럽인들에게 익숙한 말일 수도 있지만,

사실 지미 버틀러 Jimmy Butler가 2011년 인터뷰에서 밝힌 그의 친엄마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입니다. 불스 팬들에겐 익숙할 수도 있는 지미 버틀러의 또하나의 ‘블라인드 사이드’ 이야기를 지금부터 소개하겠습니다. (따옴표 속이야기는 의역이 대부분입니다)

 

 

1989년 9월 14일생인 버틀러가 유아일 때 가족을 버린 아빠에 이어 13살 때 친엄마는 버틀러를 내쫓았다. 휴스턴 교외의 톰볼 Tomball에서 버틀러는 고아이자 홈리스였으며, 그때부터 몇 주마다 친구들 집을 전전하며 소파나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버틀러에겐 도움을 청할 친척도, 전화할 장소도, 돈도, 지원해주는 기관도 없었고 그의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 학교, 스포츠, 여자에 관심을 가질 때 그저 살아남으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인생을 바꾼 3점 슛 경기

 

톰볼 Tomball 고등학교에서 버틀러는 농구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여름의 어느 날, 서머리그 경기를 마친 뒤 학교의 신입생이자 농구·축구선수였던 조던 레슬리 Jordan Leslie가 선배 버틀러에게 3점 슛 경기를 제안했고 둘은 그것을 계기로 친구가 되었다.

 

레슬리는 버틀러를 집으로 초대해 비디오 게임을 하고 재워주기도 했는데 처음에 몇 밤을 잘거라 말했던 조던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레슬리의 엄마 미셸 램버트 Michelle Lambert는 그 기간과 횟수가 많아지자 고민을 하게 된다.

 

조던레슬리 미셸 램버트 지미버틀러

 

몇 주동안 재워주는 것도 쉽지 않은 결정인데다 이미 그들의 집엔 램버트가 사별한 전 남편과의 관계에서 아이들 3명과 현재 남편 마이클 램버트가 전처와의 관계에서의 3명, 그리고 새로운 아이까지 이미 7명의 아이가 있었으며, 한주에 식비로만 $400가 소비되는 상황은 건설업에 일하는 마이클과 석유가스회사에서 일하는 미셸에게 충분히 부담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톰볼 주변에서 버틀러를 문젯거리라고 보는 시선도 한 몫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남편과 상의한 뒤 조던에게 조건을 말해주었다.

 

“지미는 좋은 아이지만 우리는 이미 많은 아이가 있어. 이틀이상은 함께 지내지 않도록 하자.” 그러나 3일째가 되도 버틀러는 나가지 않았고 그녀는 조던에게 물었다. 그런데 다른 아이인 브래드 Brad가 말하길 “지미의 이번 밤은 조던과 함께 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밤부터는 저와 함께예요.”

 

그때 그녀는 이 아이들이 그와 함께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꼈고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 버틀러의 가족이 되기로 결심한다. “아이들은 그를 사랑했고 그는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죠.” 그녀는 버틀러에게 몇 가지 규칙을 말해 주었는데 통금시간, 학교 수업 참여와 학업성적, 집안 일 분담,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롤 모델이 될 것이 그 내용이었다.

 

후에 램버트와 버틀러가 이때를 회상했다.

 

“조던이 그를 도왔죠. 그들은 그 이후에도 매우 가깝고 세상 누구보다 서로를 더 신뢰해왔어요. 아마 조던도 아빠를 잃었기에 공감대가 있었던 거 같아요. 지미는 꽤 오랫동안 내성적이었어요. 그는 처음엔 밥도 밑에 내려와서 먹지 않았어요. 애들이 음식을 위로 가져다주었죠. 내 생각엔 그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가 많이 본다면 떠나게 할 것이라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녀의 가족은 저를 농구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사랑으로 받아들여주었어요. 엄마는 매우 다정했고. 지금 돌아보면 그와 같이 힘든

결정을 해준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죠.”

 

 

대학으로 가는 길

 

톰볼 고등학교에서 버틀러는 졸업반에 주장을 맡고 평균 19.9점 8.7리바운드로 팀 내 스타였지만 전국적인 명성은 거의 없었다. 그의 고등학교 코치 브래드 볼 Brad Ball은 버틀러가 자신의 가르친 아이들 중 가장 열심히 연습을 했던 것은 인정했지만 NBA 선수가 되리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고 학교의 교장도 마찬가지였다. 톰볼 고등학교는 전미체육협회 AAU Ball에 속해있지 않았고 당연히 스카우팅 랭크엔 이름조차 없었다.

 

 

디비전 1의 꿈이 실패한 버틀러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지역의 타일러 주니어칼리지 Tyler Junior College에 입학했고, 첫 경기 34점을 시작으로 일 년동안 득점리더로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다. 30점, 40점 이상의 경기를 종종 가져간 지미 버틀러는 더 높은 레벨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고 그와 함께 그의 이름도 수많은 대학코치들에게 알려져 08년 4월 Marquette, Kentucky, Clemson, Mississippi State, Iowa State에 장학금 제의를 받게 된다. 이들 중 선택에 대한 버틀러의 고민을 조언해준 사람은 엄마 램버트였다.

 

“그는 많은 오퍼를 받았는데 저는 그중 학문적인 이유로 마켓에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저는 그에게 농구엔 불투명한 미래가 있기 때문에 좋은 교육과 학위가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했죠.”

 

*5일전 3월 13일 SK와 오리온스의 6강 플레이오프 1차전 하프타임 때 타일러 주니어 대학 드릴 팀의 축하공연이 있었다고합니다. 알럽 분들 중에서도 보신 분들의 꽤 있을 듯 싶네요.

 

 

웨이드 후배가 된 버틀러

 

 

그의 득점능력과 다재다능함이 마켓 스카우트의 관심을 얻었고 감독 버즈 윌리암스에게 버틀러는 중요한 리쿠르트 대상이었다. 그러나 마켓에서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으며 그는 소포모어 대부분의 시간을 벤치에서 보내야만 했는데 당시의 버틀러는 꽤 좌절해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수시로 램버트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의 엄마는 항상 그것이 성숙해져가는 단계라며 그를 설득했고 버틀러는 그녀의 말과 함께 그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지미를 내가 지도했던 어느 선수보다 더 힘들게 훈련시켰어요. 그는 자신이 더 나아질 수 있고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는 걸 잘 몰랐기 때문이었죠. 내가 그와 처음 사인했을 때 그가 1라운드 픽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나의 지도를 따르고 놀거나 연습을 빼먹거나 수업을 놓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가능성을 느꼈어요.” 감독 윌리암스가 말했다.

 

버틀러는 자신의 능력을 키워준 사람이 감독만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저의 선배 웨슬리 매튜스 Wes Matthews, 라자 헤이워드 Lazar Hayward와 함께 연습하고 그들을 백업하는 것은 저에게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들은 저에게 최고의 개인교사였죠. 그들은 저에게 플레이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줬고 저는 득점하는 이상의 리더가 되는 법을 깨달았어요. 팀이 저에게 원하는 것을 찾은거죠.”

 

*웨슬리 매튜스는 2009년 데뷔 헤이워드는 2010년 1라 30픽

 

지미 버틀러의 대학 기록

Totals

Per Game

Season

Age

G

FG%

3P%

FT%

MP

PTS

TRB

AST

2008-09

19

35

.514

.000

.768

19.6

5.6

3.9

0.7

2009-10

20

34

.530

.500

.766

34.3

14.7

6.4

2.0

2010-11

21

37

.490

.345

.783

34.6

15.7

6.1

2.3

Career

106

.508

.383

.773

29.6

12.0

5.5

1.7

 

 

잊지못할 Senior Night

 

*Senior Night : 시니어 나이트는 마지막 홈경기에서 경기 이전 혹은 후 아니면 하프타임 때 졸업반 선수들을 위해 여는 행사를 말합니다.

 

 

마켓의 팀 메이트들이 처음으로 의문을 품은 때는 시니어 나이트 때 버틀러의 부모가 흑인인 Michael Lambert와 백인인 Michelle Lambert로 소개되었을 때였다. 마켓의 홈페이지에선 버틀러의 부모가 Londa and Jimmy Butler라 적혀있고 그를 4명의 아이 중 한명이라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버틀러는 그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엄마 램버트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그날 하루 종일 울었어요. 그는 해냈고 저는 매우 행복하고 자랑스러웠죠. 그의 고등학교 코치, 교장등 모두가 그를 의심했지만 그는 그날 관중들의 응원 속에 그곳에 서있었어요. 저는 그때 지미가 우는 걸 봤고 지미의 눈물을 본건 그때가 두 번째였어요.”

 

버틀러는 완전한 가족이었고 그는 마켓에서의 여름 때면 집에 돌아와 아침 6시부터 그의 형제들의 운동경기를 챙기곤 했다. 당시 형제들의 나이가 9살부터 24살까지 다양했기에 그는 4일 혹은 5일 연속으로 그들의 경기를 본 적도 있었다.

 

 “그들은 내 가족이에요. 그들도 저를 지원해줬었죠. 만약 제가 새벽 4시 45분에 경기가 있으면 그들은 그것을 봤을 거에요. 저는 농구하느라 그들의 경기를 볼 많은 기회가 없었어요. 저는 밤새도록 그들의 경기를 보아도 괜찮아요.” 버틀러가 말했다.

 

 

NBA의 관심과 동시에 전국으로 알려진 그의 이야기

 

NBA의 한 스카우트는 버틀러의 득점과 수비를 포함한 다재다능에 관심을 갖고 매년 그의 경기를 보러왔었지만 버틀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대학 시즌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NBA 입성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나는 Providence전에서 그를 매우 인상깊게 봤어요. 그는 마션 브룩스 Marshon Brooks를 막으면서 모든 것을 해냈어요. 많은 대학 선수들이 롤플레이어 재능을 지녔지만 자신을 스타라고 생각하며 NBA에 들어가죠.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을 거 같았어요. 나는 그가 좋은 팀에 들어간다면 꽤 잘 맞을 거라 생각했죠.” 당시 스카우트가 말했다.

 

그리고 NBA급의 선수가 된 버틀러의 이야기는 ESPN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국으로 알려졌다.

 

“그의 이야기는 내가 농구계에 몸담으면서 본 가장 인상깊은 이야기 중 하나였어요. 그의 인생은 몇 번이나 실패할 뻔했지만 매번 그는 엄청난 고난 속에서 그것들을 극복해냈죠.” 2011년 드래프트 전 버틀러의 ESPN 인터뷰 내용을 본 한 GM이 이야기했다.

 

사실 버틀러는 자신의 대한 이야기를 하길 꺼려해왔고 이것이 그 주변사람들이 그 내용을 모르는 이유가 되었다.

 

“저는 친엄마가 왜 저를 내쫓았는지 정확히 몰라요.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이 제가 성장하는 연료가 된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저 보통 가족의 보통 사람처럼 다뤄지길 원했고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물어보면 항상 말하길 주저했어요. 저는 아직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

 

드래프트 날 버틀러는 톰볼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했다. 그곳엔 팡파르도, 안투라지도, 멋진 정장도 없었지만 그의 엄마와 7명의 형제 자매들이 그와 함께였다. 그들은 1라운드 마지막 선택이 이뤄진 후 서로의 얼굴에 케이크를 묻혀대며 축제를 즐겼다.

 

 

“그들의 행동은 저에게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가르쳐주었어요. 저의 인생에서 모두가 저를 의심했었죠. 고등학교 사람들도 제가 농구를 하기에 작고 빠르지 않다고 했었어요. 만약 그들이 제 이야기를 알았다면 그들도 무엇이든지 가능한 것을 알았을 겁니다.” 드래프트 후 버틀러가 말했다.

 

어릴 때 그의 이야기를 아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의 고등학교 코치 브래드 볼을 포함한 대부분이 완전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브래드 볼은 그마저도 버틀러가 램버트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알게되었다고 한다)

 

“그는 매우 착한아이고 매우 순진한 아이에요. 저는 항상 그에게 말했어요. 어느 사람들은 너가 필요하다고 난데없이 나타날거야.” 그녀의 엄마가 말했다. 실제로 버틀러는 드래프트 된 뒤 사촌이라고 접근하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페이스북을 접어야했다.

 

“나는 기뻤지만 내 아이가 새로운 세계에 직면할 것이 무섭기도 했어요 나는 그가 나쁜 이미지를 얻지 않길 원해요. 그를 뉴스에서 보기도 싫고 그의 팔과 목에 문신이 있는 것도 싫어요. 저는 그에게 항상 예의바르고 나이스해야 된다고 가르쳤어요.” 뿌리를 극복한 그의 엄마가 이야기를 덧붙였다.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의 마이클 오어와 지미 버틀러의 가장 큰 유사점은 그 둘이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방어적인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매우 방어적이고 사람들을 밀어내던 지미를 위해 그녀는 조건이 있는 사랑이 아닌 영원한 사랑임을 그에게 몇 번이고 말하곤 했다.

 

“당신이 누군가를 믿고 지지한다면 그들은 놀라운 것을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그랬어요. 엄마는 언제나 저와 함께 해줬고 그녀는 언제나 저를 믿어줬어요. 그녀는 저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줬어요.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내 가족이고 내 엄마에요.”

 

“우리가 그를 위해서 한 것만큼 그도 우리를 위해 대단한 것을 했어요. 그가 가족이 되면서 우리의 인생은 바뀌었고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해줬어요.”

 

 

세상의 얼마나 많은 재능들이 그들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저물게 될까요? 버틀러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이야기를 보면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도 듭니다. 버틀러는 아직도 발전할 부분이 꽤 필요한 선수이지만 검증된 그의 성실함을 봤을 때 한동안은 긍정적인 시선으로 기대해봐도 괜찮을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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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Coach K | 작성시간 14.04.11 버틀러도 영화로 만들어도 충분히 감동을 이끌수 있을꺼 같네요~^^ 브라인드 사이드...두번정도 봤는데 오늘 또 보고싶어지네요~ㅎ
  • 작성자MichaelMok | 작성시간 14.04.12 버틀러 농구선수로 앞으로도 잘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감동적인 글 잘 읽고 갑니다
  • 작성자Contradanza | 작성시간 14.04.14 잘봤습니다!
  • 작성자LaPhonso | 작성시간 14.04.23 대단한 사랑을 받고 성공한 선수였군요 죠은 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Tim duncan | 작성시간 15.07.06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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