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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첫 남자농구 남북대결 - 1978년 아시안게임 (feat. 김동광)

작성자Doctor J|작성시간24.04.23|조회수1,809 목록 댓글 10

남자농구 사상 첫 남북대결이 1978년 아시안 게임 준결승에서 성사가 되었습니다.
 
동서냉전시대에 삭막하고 긴장감 도는 분위기 속에서 경기 시작 전부터 북한선수들의 욕설과 매서운 눈빛 때문에 한국선수들이 잔뜩 겁먹었던 상황도 발생했었고요.
 
한국 팀은 신선우, 박인규, 황유하, 박수교, 김동광 라인업으로 신장은 작았지만 두 명의 올라운더 플레이메이커와 세 명의 전천후 슈터로 구성된 재능넘치는 팀이었습니다. 사실, 70년대 후반의 이 라인업에 이충희, 임정명, 조동우 등이 가세한 한국 농구는 아시아에서 무티에추의 중공만 빼곤 사실상 적수조차 없었던 강팀입니다.    
 
 

GIF 1

흰 색 유니폼이 한국팀입니다. 사자갈기 머리를 자랑하던 김동광, 최고의 피벗맨 신선우, 전천후 폭격기 박수교 등의 모습이 보입니다.
 
 

GIF 2

앞선 수비를 하는 7번이 김동광, 오펜스 파울을 유도해낸 10번 선수가 박수교입니다. 북한은 실력으로 게임이 안 되자 경기 내내 거친 파울과 안 좋은 매너만 보여줬습니다.
 
 

GIF 3

거친 파울의 연속. 북한은 의도성을 가지고 피지컬한 비매너 플레이만 계속 보여줬습니다. 신선우, 조명수 등 한국팀 빅맨들이 작은 부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넘어진 북한 선수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김동광의 매너 손이 돋보입니다.
 
 

GIF 4

아주 짧게 지나가고 말았지만, 위 영상처럼 당시 김동광은 빠르고 강한 체스트 패스로 얼리 오펜스를 지향하던 플레이메이커입니다. 플레이 자체가 매우 경쾌하고 다이내믹했습니다. 장발의 머리와 잘생긴 얼굴, 탄탄한 근육질 몸매로 해외에서도 그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GIF 5

당대 최고의 리딩가드였던 김동광이 경기를 풀어나갔고, 박인규, 황유하, 박수교, 이충희 등이 코트 곳곳에서 야투를 성공시키는 '양궁 농구'가 빛을 발한 한국팀은 후반전 시작하자마자 15점 차의 리드를 잡았고, 경기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북한은 그 때부터 심판에게 계속 거친 항의를 하다가 경기장을 떠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남한에게 패배하느니 차라리 몰수패를 당하는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죠.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남북 농구대결은 이렇게 허무하고 보기 흉하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한국팀 경기 수준이 매우 높았었는데, 경기영상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위에 제가 올린 GIF들은 당시 한 필리핀 농구팬이 소장하고 있던 비디오 테이프에 남은 얼마 안 되는 자료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GIF 6

저 경기에서 나온 김동광의 미드레인지 점퍼! 이건 대한뉴스 영상에 남아 있었습니다.
 
김동광은 70년대 한국팀을 이끌며 아시안 게임과 아시아 선수권에서 3개의 은메달, 2개의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중공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것인데... 물론,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 준결승전에서 한국이 중공을 잡는 이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요.

 

아이러니하게도 김동광이 대표팀에서 은퇴하자마자 중공의 무티에추도 은퇴를 했고, 한국 남자농구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드디어 숙적 중공을 꺾으며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죠. 70년대 말 대표팀에서 김동광 하나만 빠지고, 그 자리에 기업은행 팀 후배인 이민현이 들어왔을 뿐이었는데...
 
 

GIF 7

김동광 선수가 54세이던 시절에 보여준 레이업! 30년 전엔 어땠을까요?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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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3 그렇죠. 저 당시만 해도 혼혈인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했고 보는 눈도 곱지 않았을 때입니다. 미군에게 몸을 팔던 여성들로부터 출생하는 경우가 많았었고요. 그들 면전에 대놓고 '튀기'라고 놀리던 시절이었죠. 그런데도 인기가 하늘을 찔렀는데... 지금 뛰었다면 인기 진짜 많았을 겁니다.
  • 작성자SenesQ 작성시간 24.04.24 덕분에 귀한 자료 잘 봤습니다. 가끔 회자되는 무티에추 선수는 야오밍 같은? 그런 위상이었나보네요. 아 근데 우리 (후웨이동 덕분에) 야오밍은 이겼었네요? ㅎㅎ
  • 답댓글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4 당시엔 위상이 컸죠. 238센티였다는 말도 있었고... 적어도 225센티는 족히 넘었던 선수였고, 행동은 굼떴지만 하체가 튼튼해서 골밑에선 막강했습니다.

    한국도 무티에추의 중공을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딱 한 번 이긴 적이 있습니다. 그 경기가 제가 알기론, 70년대 통틀어 유일하게 한국이 중공을 이긴 경기였습니다. 하지만 결승에서 아시아 국가라곤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에게 패배했죠.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kazuya 작성시간 24.04.24 예전 박사님의 게시물을 통해서도 접했지만
    그 자존심 강한 허재가 롤모델로 꼽을 정도로 신선우 감독님께서 그렇게 대단한 선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뛰어난 피딩 능력을 바탕으로 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에 높은 BQ, 투지까지 갖춘...
    부상이 심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부상 전의 플레이 모습이 무척 궁금합니다ㅎㅎ
    박사님의 귀중한 게시물을 보면서 느낀게 요새 일부에서 예전 레전드들에 대한 평가가 다소 박해진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시대가 발전한 만큼 당연히 신체적, 기술적, 환경적으로 봐도
    현 세대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예전 선수들보다 우수해진 건 맞지만
    예전 레전드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코트에서 멋진 모습들을 보여줬는데 말입니다.
    귀중한 자료 너무감사 드리고 멀리서나마 박사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 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Doctor J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4.24 무릎부상 당하기 전의 신선우 선수는 허재와 빼박이었습니다. 허재가 더 나은 건 중장거리슛과 빠른 드리블 정도였고요. 리바운드나 수비력은 신선우가 더 나았죠.

    센터로서 신장이 작다보니, 1미터에 육박하는 점프를 너무 자주 하다가 무릎연골이 다 닳아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82년 아시안 게임 중공과의 결승전을 보시면 점프 없이도 경기 잘 풀어나갔죠.

    예전 선수들을 논할 땐, 당시의 열악한 환경 등을 감안해 평가하는 게 옳습니다. 요즘 같이 관리받았으면 무릎 건강도 훨씬 더 잘 유지될 수 있었을 거예요.

    멀리서도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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