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한 자가 왕좌에 앉지 못하고 배에 오릅니다.
놀란이 20년 동안 만들어온 모든 주인공이 결국 이 장면 하나로 수렴한다는 걸, <오디세이>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놀란의 필모그래피, 결국 이 영화를 향해 걸어왔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자신이 만든 기억의 미로 안에 갇혀 있었고,
<인셉션>의 코브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인터스텔라>의 쿠퍼는 딸을 구하기 위해 시공간을 넘었지만 정작 함께한 시간은 되찾지 못했고,
<오펜하이머>의 오펜하이머는 인류를 구했다는 승리 뒤에서 자신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평생 감당해야 했습니다.
놀란의 영화들은 오래전부터 '신화적'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는데, <오디세이>는 그 비유를 실제 신화로 바꿔버린 셈입니다. 거대한 여정 끝에 승리했지만 그 승리를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는 인간 — 이게 놀란이 20년째 반복해서 그려온 주인공의 얼굴이고, 오디세우스는 그 얼굴에 가장 오래된 이름을 붙여준 존재입니다.
놀란이 바라본 결말 — 왕좌보다 무거운 것
원작의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왕좌에 앉아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그런데 놀란은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트로이 전쟁의 승리가 사실은 한 문명을 학살한 순간이었음을 자각한 오디세우스는, 결국 이타카에 정착하기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 학살의 시작점에는 다름 아닌 그의 목마 계략이 있었습니다. 속임수로 얻어낸 승리가 성공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무너진 건 트로이의 성벽만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이건 실패가 아니라 놀란다운 정직함입니다.
코브가 팽이의 결말을 보여주지 않고 떠나버렸듯, 쿠퍼가 다시 우주로 떠나버렸듯, 놀란의 주인공들은 좀처럼 깔끔한 승리를 손에 쥐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무게를 짊어진 채로 다음 걸음을 뗍니다. 왕좌에 앉는 것보다, 왕좌를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그리는 쪽을 택한 겁니다.
앙상블 — 신화의 위엄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택한 캐스팅
맷 데이먼은 절제된 연기로 전쟁과 긴 표류가 남긴 상처를 표현해냈습니다. 놀란과 세 번째로 손을 맞춘 배우답게, 대사보다 표정과 침묵으로 감정을 절제하는 연출을 정확히 소화한 느낌입니다.
로버트 패틴슨의 안티노오스는 교활하고 조종적인 매력으로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올해 본 스크린 빌런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퍼포먼스였습니다.
앤 해서웨이, 톰 홀랜드까지 놀란과 거듭 호흡을 맞춰온 배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을 연기합니다.
이 절제된 연기가 대본의 건조함과 맞물려 감정적 공허함으로 읽힐 여지는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절제 자체가 이 영화의 태도라고 봅니다. 신화 속 인물답게 과장되게 울부짖는 대신, 상처를 삼키고 다음 장면으로 걸어가는 인간의 얼굴 — 그게 이번에 놀란이 원한 그림입니다.
카메라가 편을 드는 방식
이 영화가 스펙터클에 잡아먹히지 않는 이유는 촬영 방식에서도 확인됩니다. 포세이돈의 폭풍우는 CG가 아니라 실제 바다와 실물 선박, 대형 특수촬영 수조 위에서 찍었고, 그 결과 카메라는 하늘이 아니라 배 갑판 위, 인간의 눈높이에 붙어 있습니다. 신을 올려다보는 쇼트보다 인간이 파도에 휩쓸리는 쇼트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 - 이게 이 영화의 진짜 선택입니다.
놀란은 신들의 위엄을 찍을 기회를 계속 포기하고, 대신 그 위엄 앞에서 발버둥 치는 인간의 눈을 붙잡습니다.
키르케의 오두막에서 벌어지는 신체 변형 장면도 마찬가지로 괴물의 형상보다 변해가는 인간의 표정에 카메라가 오래 머뭅니다. 카메라가 누구 편인지, 이 영화는 한 번도 숨기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오디세이>는 3,000년 된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가 아니라, 놀란이 자신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관통해온 질문인 "거대한 힘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고, 그럼에도 얼마나 존엄할 수 있는가"를 풀어낼 무대로 신화를 골라온 작품입니다.
신들을 완전히 지우지 않고, 그렇다고 신들에게 이야기를 맡기지도 않은 채,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을 끝까지 붙잡은 이 태도가 놀란다웠습니다.
왕좌보다 무거운 죄책감을 짊어지고 배에 오르는 오디세우스의 뒷모습은 올해 스크린에서 본 것 중 가장 오래 남을 이미지입니다.
작성자 로더리고
사진 출처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