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최고의 멜로인가

작성자로더리고|작성시간26.08.21|조회수516 목록 댓글 8

 

 

 

시한부 선고, 뒤늦게 찾아온 사랑, 눈물을 강요하는 클라이맥스

1990년대 한국 멜로가 충실히 따르던 공식입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는 똑같은 재료를 쥐고도 정반대 길을 택했습니다. 관객을 울리는 대신, 관객이 스스로 슬퍼할 자리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이 영화가 지금도 '한국 영화사 최고의 멜로'로 꼽히는 이유는 이 하나의 태도에서 갈라져 나옵니다.




허진호 감독은 카메라를 인물의 감정에 붙이지 않습니다. 초반, 정원(한석규)이 혼자 사진관 문을 닫고 골목을 청소하는 장면에서부터 이 태도는 시작됩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인물이 응당 흔들려야 할 순간에도 카메라는 그를 몰아세우지 않고 일상적인 동작을 그저 지켜봅니다.

 

 

이 원칙이 가장 선명해지는 곳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정원이 죽은 뒤 다림(심은하)은 닫힌 사진관 앞에서 진열장에 놓인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고 옅게 웃는데, 카메라는 그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파고들지 않고 거리를 유지합니다.

 


설명 대신 관찰, 해석 대신 여백 - 마지막 20여 분이 거의 무대사로 흘러가는 것도 같은 원칙의 연장입니다.



이 영화가 실제로 다루는 주제는 사랑보다 시간입니다. 원제 후보였던 '즐거운 편지' 대신 최종적으로 선택된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부터 그렇습니다. 여름과 겨울, 어울리지 않는 두 계절을 한 제목에 욱여넣어 삶과 죽음, 젊음과 소멸, 두 사람 사이의 시간차를 예고합니다. 정원이 다림에게 자신의 병을 끝내 알리지 않는 이유도 이 시간의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순전히 '시간이 없어서'인지 '그녀를 슬픔에 묶어두고 싶지 않아서'인지 영화는 답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정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정원의 침묵을 완성하게 됩니다.




한국 멜로에서 죽음은 대개 눈물을 짜내는 도구로 소비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죽음을 극적 사건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정원은 영정 사진을 찍으러 온 노인을 담담히 대하고, 자신의 죽음도 일상의 연장선에서 받아들입니다. 허진호 감독이 가수 김광석의 환하게 웃는 영정 사진에서 이 영화를 착안했다는 사실이 이 태도를 정확히 설명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일상의 밝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사랑을 완성시키는 무대장치가 아니라 애초부터 거기 있던 삶의 조건으로 다뤄집니다.



한석규와 심은하의 연기가 완성도에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는 과장이 아닙니다. 다만 이 연기의 미덕은 기교가 아니라 배우의 존재감을 지운다는 데 있습니다. 한석규는 시한부라는 무거운 설정을 짊어지고도 비장함 대신 생활인의 얼굴을 유지하고,

 

 

심은하는 명랑한 다림 뒤에 감춰진 상실의 예감을 함께 담아냅니다. 관객에게 '연기를 본다'는 감각 대신 '삶을 엿본다'는 감각을 주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30년 가까이 지나도 낡지 않은 이유입니다.




다만 이 절제가 모두에게 미덕으로 읽히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다운 사건이 거의 없고, 갈등은 대개 인물의 침묵 속에서만 진행되며, 정지된 화면이 오래 지속되는 구간도 적지 않습니다. 빠른 편집과 명확한 전개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영화라고 느낄 수 있고, 실제로 그런 평가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30년 가까이 살아남은 힘은 역설적으로 그 '아무 일도 없음' 자체에 있습니다. 사건이 없기 때문에 관객은 인물의 표정과 침묵, 그 사이의 정적을 스스로 읽어내야 하고, 그렇게 읽어낸 감정은 영화가 떠먹여 준 감정보다 훨씬 오래 남습니다. 완성된 슬픔을 건네받는 관객과, 스스로 완성해야 하는 관객은 같은 장면을 보고도 다른 무게의 여운을 안고 극장을 나섭니다. 이 영화가 볼 때마다 다시 새롭게 다가온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한줄평

"사랑을 그리지 않고 사랑의 여백을 그렸기에, 30년이 지나도 매번 새로운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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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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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Webber Forever | 작성시간 26.08.21 아련합니다.
  • 작성자토마스 | 작성시간 26.08.21 관객이 스스로 슬퍼할 자리를 마련해준다는 표현에 너무나 공감합니다!!
  • 작성자jwAhn | 작성시간 26.08.21 저는 발톱 깎는 장면
  • 작성자RUN!TMC | 작성시간 26.08.21 처음 볼땐 젊을때여서 약간 지루함을 느꼈는데요,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어느 순간 영화 장면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며 다시 보게 되더라구요.
    봄날은 간다도 그랬습니다.
    심심한 듯 한 이 시절 영화들이 그립네요
  • 작성자coe... | 작성시간 26.08.21 전 마지막 다림이 자기 사진
    확인하고는 웃음지으며
    돌아설때 화면이 참으로
    쨍~ 했던 기억이 있네요.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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