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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 사이 / 詩 이생진

작성자용오름|작성시간24.04.19|조회수31 목록 댓글 1

 


     👨‍👩‍👦‍👦

  아내와 나 사이 !?
                         詩 / 이 생 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있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시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 시가
바로 이생진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와, 낭송하는 ‘나’와,
그것을 듣고 있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 다시 모르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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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리아야 작성시간 24.04.20 중학교 1학년 때 미술선생님이셨는데요.
    서울로 전근가셨는데요. 유명한 섬 시인님이 되셨더라고요. 매일 영어 사전을 외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안 잊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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