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밀린 빨래와 청소를 마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리모콘을 들었다.
휴일엔 어김없이 좌로 굴러 우로 굴러를 시작으로,
리모콘이라는 오락기만 있으면 만사에 남 부러울 것이 없었다.
뱃가죽과 등가죽이 붙으려고 할 때나 일어나서 라면을 앉히면 될 일이다.
가끔은 쌀을 끓이다가 라면을 넣으면 라면밥이라고 하는 캠핑 메뉴가 탄생하기도 한다.
라면밥은 형수님이 주신 김장김치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나 만의 신종 메뉴다.
하지만 김치가 없으면 먹을 수 없는 것 또한 라면밥이다.
휴일 날의 습관에도 변화가 왔다.
김치통을 열었을 때는 이미 김치가 김치가 아니었다.
김치라고 꼭지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 지난 주엔 그럭 저럭 라면으로 때웠지만,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밥알이 들어가야 힘도 나고 사람 구실을 할 것 만 같았다.
박차고 일어나 머리의 새집을 정리하고 외출을 감행했다.
드디어 휴일의 귀차니즘이 골목길에서 사라지는 것일까, 중국집에 들어가니 첫 손님이 틀림 없다.
벽시계를 보아하니 11시, 때 이른 손님이 확실했다.
주방 가까이에서 주인인 듯한 아주머니와 그의 친구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파를 다듬고 있다.
" 볶음밥 하나 주세요~"
" 아~예~ 잠깐만 기다리세요."
" 금방 되지요?"
" 예. 금방 해드릴 게요."
파를 다듬던 주인 아주머니가 탈탈 털고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사이 다른 아주머니가 나를 힐긋 쳐다본다.
무의식중에 나를 보는 것이겠지만
나는 물을 찍어발랐던 새집이 되살아나지 않았나싶어 머리를 한 번 매만져본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이라도 한듯 미소로 답변을 하니 다듬던 대파를 옆으로 치우고 물컵과 물통을 들이 댄다.
" 일찍 오셨네요? 아침이세요?"
" 예? 지금이 몇시인데 아침이예요. 점심이지..."
아침을 안먹었으니 아침인가, 점심을 안먹을 것이기에 점심인가,
아뭏튼 아점을 시켰는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아 볶음밥의 대령이다.
짜장면 만 빠른 줄 았았던 나는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던진다.
" 후라이만 해도 5분은 걸릴텐데 무척 빠르시네."
" 중국집은 시간이 생명인 걸요."
손님도 없을 시간에 생명은 무슨...힛죽 웃어보이며 수저를 드는데 뚱뚱한 아이가 한 명 들어온다.
" 나, 탕수육!!"
" 지랄하네. 살만 디룩 디룩 찌면서 탕수육은...짜장면 먹어!!"
파를 다듬는 아주머니의 아들인가보다. 얼굴은 중학교 저학년으로 보이지만 몸은 거구다.
거구의 몸에 탕수육을 찾는 것이 당연할 것 같으나 아이의 엄마는 단호했다.
" 탕수육 먹겠다는데...나, 탕수육!!
" 짜장면!!"
" 탕수육!"
" 저 시키가!? ...짜장면!!!"
이쯤되니 주인 마음에 따라 메뉴가 선택되어지고, 짜장면 곱배기가 채 5분도 안되어 식탁에 펼쳐진다.
파를 다듬던 주인의 친구가 젖가락에 힘을 주며 빈 그릇에 반을 가르려한다.
" 엄마도 먹을 거야?"
" 그래! 나도 먹을 거야! 이 건 니꺼! 요 건 내꺼!"
아들이 못내 아쉬워 울상이다.
곱배기도 모자랄 듯한 표정으로 젖가락을 입에 물고 오물거린다.
거구의 아이가 엄마의 짜장면 나누기에 한마디 더할 기세다.
" 나 더 줘! 이 게 뭐야~"
" 넌 이시키야 살을 빼야돼! 그 것도 많은 줄 알아!"
" 맞아. 너무 비만이야."
주인마저 엄마 편을 드니 더이상 식탐을 행세했다간 반그릇의 짜장면마저도 빼앗길 판이다.
일단 먹고보는 거다.
엄마는 반도 못억었는데, 아이의 짜장면 그릇에선 젖가락 부딪는 소리가 더거덕거린다.
젖가락 놓기가 그렇게도 아쉽더란 말인가.
빈 젖가락을 입에 물고 엄마의 짜장면 먹는 모습에 침을 흘리는 거구의 아이,
나의 중학교 시절이 어느새 작은 스크린에 담겨 화면을 돌리기 시작한다.
내가 짜장면을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이다. 학교 구내식당은 점심 때면 항상 북적거렸다.
메뉴는 한가지, 짜장면이 유일했다. 시중에서 40원이던 것을 구내식당에서는 20원 했다.
나는 이 세상 음식 중에 짜장면이 최고였다. 4교시가 끝나면 내쳐 튀는 곳이 구내식당이었고,
항상 10위 권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공부를 그토록 열심히 했다면 외무, 행정, 사법고시를 패스한 장덕진 선배보다도 유명했을지 모른다.
내가 짜장면 줄서기에 순위를 다퉜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맛이 있다하더라도 한꺼번에 두 그릇을 시켜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친 놈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인당 한 그릇 만 팔았으니깐.
나는 3분 만에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밖에 나가 30분을 기다리곤 했다.
한 번 더 짜장면을 사먹기 위해서였다.
담 너머에서 셈베과자나 라면땅도 팔았지만 결코 나를 유혹하진 못했다.
짜장면 만이 먹을수록 혀에 감기는 당대 최고의 음식이었다.
거구의 아이가 빈 젖가락을 물고있는 모습이 그 시절의 내모습이 아닐런지...
갑자기 짜장면이 먹고싶어졌다.
볶음밥을 해치우고 재차 짜장면을 시키니 두 아주머니가 고개를 쭈욱 빼들고 의아한듯 쳐다본다.
" 앗따. 짜장면 곱배기 하나 더 해달라니깐요!"
" 엥? 드실 수 있겠어요?"
" 일단은 내와 봐요. 뱃속에 들여보내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참견 마시고..."
점심 시간이 되어가나? 손님들이 들기 시작했다.
볶음밥 빈 접시는 앞자리에 밀어놓고 내가 아니먹은 척 숫가락의 방향도 틀어버렸다.
히히
볶음밥은 아침, 짜장면은 점심.
그 날은 한 자리에서 아침과 점심을 해결했다.
내친 김에 탕수육으로 저녁도 먹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럼 아이의 표정은 또 어땠을까 ㅎㅎ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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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모르미 작성시간 20.06.27 한창 클때는 그렇게 많이 먹어요.
어떤 아이가 그랬어요 먹어도 먹어고 배가 고프다고...
우리 어린시절 거의가 배고픈 삶을 못 면하고 살았을 때의 이야기
지금은 먹을 것이 너무 풍부하여 맛이 있느니 어떠니 하고 살지만... -
답댓글 작성자수줍은하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6.27 그러네요. 먹고 있으면서도 배가 고픈 때가 참 많았으니요.
저는 요즘도 게을러서 배가 배가 무진장 무진장 고파야 밥을 해먹게 되네요.
전 너무 게을러서 문제예요. 흑흑흑
하지만 다섯시엔 항상 일어난답니다. 먹는 것에만 게으르지요.ㅎ -
작성자모르미 작성시간 20.06.27 5시에 일어나신 다니 아주 부리런 하신 분이 시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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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수줍은하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6.27 출근이 여섯시이니 어쩌겠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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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함빡미소 작성시간 20.06.28 우리 어릴때는 짜장면 먹을때가 최고 행복 했었지요
나이드니 짜장면도 별로이고 특히 맛난게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