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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식목일인데 / 어느 회원의 녹화사업, 축령산 글을 읽고

작성자도반(道伴)|작성시간26.04.04|조회수137 목록 댓글 6

 

내일은 식목일이다.

함에도, 생각이 전같지 않은 것 같다.

나무 심을 생각보다 벚꽃 축제에 온통 관심하지 않는가..

어느 회원의 글을 읽고 식목일, 축령산 등등을 생각해보지만

지난날 황폐된 산야를 녹화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런 덕에 벚꽃 축제도 즐기는 것이겠다.

 

지금은 모두 싱싱하고 푸른빛이나

산야도 사람들의 얼굴조차도 모두 누런 빛이었던

지난날 나의 추억을 꺼내본다.

 

 

          나의 색깔

 

                       김 난 석

 

철 따라 변하는 색조에서 기다림의 즐거움을 느끼고

삶의 신선함을 호흡하게 된다.

파릇파릇한 봄이 나른하다 싶으면 여름이요

짙푸른 녹음이 무겁다 싶으면 황홀한 가을을 기다리는데

분홍단풍이 농염하다 싶으면 은백색 겨울이 찾아오니 말이다.

 

이런 순환은 계속되는 것이어서 지루할 겨를이 없고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우리네 감성이 풍부해지는지도 모른다. 

 

일 년 내내 은백색의 설원(雪原)에서 뒹군다고 생각해 보라.

일 년 내내 작열하는 태양빛만 이고 살아간다고 상상해보라.

기다림의 미학이 없을 뿐더러 너무 건조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계절의 변화만큼 감정의 굴곡도 심한 게

너나없는 흠이기도 할 게다.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돌아서면 여러 여운이 남게 마련이다.

됨됨이라고 일컫는 교양이나 지혜의 정도,

조화에서 우러나오는 호감의 정도,

또는 겉으로 나타나는 따뜻함이나 차가움의 정도,

색조 등이 그것일 게다.

 

얼마 전 처음 만난 글벗으로부터

나는 카키색으로 여운 지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카키(khaki) 색은 누른빛에 담다색이 나는 것으로

인도어로 흙의 빛깔을 말하며, 군복용으로 많이 쓰인다.

내가 그런 것이었던가? 

 

가만히 내 주변을 돌아본다.

어깨에 걸고 다니는 숄더백은 누런 가죽 소재이며

그 안엔 누런 표지의 낡은 잠언집이 들어있다.

약지엔 은반지가 끼어있고, 그 알은 누런 호박이다. 

웃옷은 가끔 바꿔 입지만 바지는 늘 누런 빛깔이요

혁대도 누런 가죽이요 구두도 누런 소가죽이다.

책상 위엔 누런 대나무로 된 필통이 놓여있고

그 옆으론 누런 황금빛의 백제대향로(복제품)가 놓여있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들인데

이젠 멋으로만 지니고 있는 만년필을 제외하곤

모두 카키색 계열이다.

물론 나의 피부색도 황색이니

아, 그래서 난 카키색의 여운이었을까?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던 때

제일 먼저 검은색 테트론 소재의 양복을 맞춰 입고 다녔다.

그 당시로선 넥타이를 매었다 하면 모두 그걸 입고 다녔기에

자연스러운 걸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론 양복을 맞췄다 하면 검은색이거나

아니면 감색(흔히 일본말로 감색) 일변도였으니

그것이 법도요 권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십 년 가까이 그런 색조 안에서 생활하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하나로 응축되었을 게다.

바로 기계적 합리성의 건조함이었을 터요

그러다 보니 내 삶을 지배하는 건 감성이 아니라

오로지 이성이라 믿었을 뿐일 게다. 

그렇게 단조한 색조에서 단조한 생활을 했으니

인생을 반쪽으로만 산 게 아니던가.

 

그동안의 사회생활을 접고 자연인으로 돌아가기로 한 건

즈믄 해의 첫가을인 9월 28일이었다.

그때 제도권의 사회인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간 것이니

구이팔 서울 수복이 아니라

9, 28 자연 수복이란 말을 남기고 돌아서면서

검은색 또는 감색의 양복은 모두 장 깊숙이 쳐 넣었다. 

그리곤 카키색의 옷들로 몸치장을 바꿨으니

색의 변화를 통해 생각과 생활방식을 바꿔보자는 심사였다.

그렇다면 내가 카키색으로 변신한 건 자연스러운 의지였을까?

 

나의 부친은 공과(工科)를 공부하셨기에

일제강점기에 조병창(造兵廠)에 근무하셨다 한다.

이 부분 친일행각으로 매도하면 할 말이 없다.

그 흔적으로 장 속엔 누런 모직의 일본국 제복이 들어있었다.

그걸 소재로 어머니는 가끔 나의 옷을 마름 해주시기도 했다. 

 

광복을 맞아 미군이 진주하자 나의 부친은

다시 미군의 조병창에 근무하시게 되었다.

이 부분도 반미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매도당해도 할 말 없다.

그 흔적으로 장 속엔 항상 미군의 카키복과

누런 모직의 군용 담요가 들어있었다.

그걸 소재로 어머니는 역시 나의 옷을 마름 해주시곤 했었다.

 

그래서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란 한 나의 유소년시절엔

남들로부터 미국 놈이란 농도 많이 들으며 자랐다. 

왜냐하면 남들은 모두 무명지의 검은 바지저고리를 입었는데

나만 유달리 카키색 계열의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카키색 일변도로 감싸여 살았던 것이다.

 

인생을 흔히 무지개 빛 꿈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라 한다.

보라, 남, 파랑, 초록, 노랑, 주홍, 빨강.

그러나 꿈이 어디 이것뿐이랴.

삶에는 다양한 가치가 있으며 색깔이 있다.

그것이 어디 검정이나 카키색의 가치나 색깔뿐이랴. 

 

삶의 대부분을 명암만이 있을 뿐인 무채색에 머물다가

이젠 겨우 유채색 중 카키색 계열에 머물고 있는데

그것도 아픈 과거의 시대적 흔적으로 여운 지어지는 색조이니

나는 온전한 삶을 살아왔다 할 수는 없겠다.

 

한 가지만 고집한다면 지조라든가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선

바람직하기도 할 게다.

하지만 새로움이라든가 기다림의 맛이 없으며

다양한 삶을 수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색을 써보리란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그러면 나의 인생도 조금은 폭넓게 변신되지 않을까 해서다.

 

하지만 병상에서 일어난 아내와 함께

장성의 축령산 숲 속에 머물다 돌아오려니 첫눈이 내려앉아

이젠 도리 없이 하얀색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심신 치유의 숲으로 알려진 해발 육백여 미터의 축령산은

편백나무 숲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광복 당시의 산야가 모두 그렇지만 축령산도 민둥산이었다 한다.

여기에 춘원 임종국 선생이 20여 년 간(1956-1976) 물지게로

손수 물을 지어 나르며 240 헥타에 편백나무, 삼나무 등

120만 그루를 심어 우리나라 최초의 조림 성공지로 만들었다 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수입을 생각지 않은 평생의 조림사업으로

가산 탕진에 더해 빚까지 짊어지고

한 평의 묻힐 땅도 없이 타계하고 말았다니(1915-1987)

참 딱하시다는 생각 외에 오로지 푸른 숲으로 삶을 엮어낸

선생의 지조에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숲 속 작은 느티나무 아래 수목장 된 선생의 생애를 그려보다가

나의 색깔은 결국 카키색이 아닌 흙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으니,

아무리 하얀 눈으로 치장한들 지금의 형색이

그와 가장 닮은 게 아니던가.

그리 되면 종당엔 새로운 뭇 생명들의 어머니가 되는 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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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도반(道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4.04 좋은 친구를 두셨군요.
    함께 위로제를 드리는 모습이 보기에도 참 좋고요.
  • 작성자루비호박 | 작성시간 26.04.05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 축령산을 가보고 싶어 지는군요!! ~~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도반(道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4.05 거기 산장에서 머물다 오면 좋아요
    숲 향이 아주 좋습니다.
    피톤치드라 하나요...?
  • 작성자한울산 | 작성시간 26.04.05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토록 장문의 글을 여러 사람이 읽게 하기 위해
    빈틈없이 써내려가 주시다니......
    참으로 정성도 지극하십니다~그려~!
    아무튼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도반(道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4.05 아이구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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