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새벽별들이 하나 둘 스러지고 산등성이마다 햇살이 길게 뻗치기 시작했다.
섬진강은 구례를 지나 하동 쪽으로 흘러가다가 잠시 흐르기를 멈추고 고요히 지리산을 돌아 보았다.
해는 어느새 천황봉 위로 막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해는 처음엔 갓난아기의 작은 혀 같기도 하고 입술 같기도 하다가, 차차 아기의 얼굴만 해지더니 가늠할 수 없는 크기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섬진강은 눈이 부셨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햇살들이 몸 위로 떨어졌다.
섬진강은 바로 이 순간이 자신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바로 지리산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섬진강은 낮은 목소리로 가만히 지리산을 불러 보았다.
"아들아, 지금 어디쯤 흘러가느냐? 어디 아픈데는 없느냐? "
지리산은 여전히 포근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을 잃지 않은 채 산새 소리와 바람 소리같은 목소리로 아들
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는 다시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어요. 이젠 어머니를 향해 흘러가게 해 주세요."
섬진강은 어린 시절처럼 높고 깊은 지리산, 그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건 안 된다. 나도 널 안아보고 싶은 마음 한량 없다만, 그건 안되는 일이다."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저를 다시 어머니의 품 안에서 살게 해 주세요. 이제 더 이상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누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마냥 흘러가는 삶은 살기가 싫습니다.
너무 힘들고 외로워요. 이제는 흐르지 않고 좀 쉬고 싶어요."
섬진강은 이제 정말 흐르지 않겠다는 듯 그대로 멈추어 선 채 말했다.
"어허, 안 된다니까. 아들아, 어서 흘러가거라, 흐르는 것이 네 삶의 전부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단호했다.
"넌 너 자신을 위해서 난 남을 위해서는 흘러가지 않으면 안된다. 흘러는 것이 너의 삶이고,
흐르지 않는 것은 너의 죽음이다. 흐르지 않으면 너는 썩어 죽고 만다.
네가 죽으면 다른 이들도 함께 죽게 된다.
아들아, 무엇보다도 이 점을 명심해라."
섬진강은 잠시 할 말을 잊고 햇살에 반짝이는 자신의 물결을 한참 동안 쳐다 보았다.
"어머니, 그러면 제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것만이라도 좀 가르쳐 주세요
"그것 또한 가르쳐 줄 수 없다. 흘러가 보면 안다. 내가 미리 가르쳐 주면 넌 참고 인내하는 살의 진정
한 기쁨을 얻지 못한다. 너의 삶은 흘러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 과정을 통해 너 스스로 삶의 비밀
들을 깨달아야 한다. "
"그래도 어머니, 전 어머니와 같이 살고 싶어요. 왜 저를 이렇게 먼 곳으로 쫓아 내 버리십니까?"
"난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살 수 없다. 그것이 너와 나의 숙명이다. 그러니 이제 입을 다물고 조용히
흘러가도록 해라."
그 말을 끝으로 지리산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섬진강이 아무리 말을 시켜도 묵묵히 입을 다물고 햇살에 이슬을 털고 있을 뿐이었다.
섬진강은 지리산이 야속했다. 아무리 애원해도 더 이상 안아주지 않는 지리산이 참으로 섭섭했다.
해는 성큼 천왕봉 위로 더올라 있었다. 섬진강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섬진강은 곧 흐르지 않는 강이 되었다. 마음이 편안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는 없었다. 흐리지 않음으로써 오랜만에 피곤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얼마나 잤을까. 은어 한 마리가 급히 다가와 섬진강의 잠을 깨웠다.
"섬진강아, 너 왜 흐르지 않는 거니? 너 때문에 우리 물고기들이 숨이 막혀 주겠어. 썩는 냄새가 진동
해 헤엄조차 칠 수 가 없어."
은어는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 꼬리로 섬진강의 가슴을 자꾸 쳤다.
"내가 왜 흘러가야 되는 거지?"
섬진강은 은어에게 얻어 맞은 가슴을 천천히 쓰다듬으면서,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과 강물이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섬진강아, 흐르는 게 너의 삶이야. 그게 네 삶의 방식이야."
"글쎄, 내가 무엇 때문에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굳이 흘러갈 필요가 있을까. 난 이렇
게 흐르지 않고 가만히 있게 더 좋아."
은어는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났다. 어떻게 하면 섬진강을 흐르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넌 정말 사랑이 없구나, 이런 너를 믿고 우리는 섬진강으로 몰려 들었어. 너를 믿은 우리가 바보야."
은어는 섬진강을 믿은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섬진강은 은어가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은어야, 사랑이 뭐니?"
"네가 흘러가는 것이 사랑이야.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게 바로 사랑이란 말이야."
"그래?"
섬진강은 은어의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흐르고 싶지는 않았다.
"은어야, 난 아직도 내가 왜 흘러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혹시 네가 알고 있다면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니?"
"누구나 그 이유를 알고 흐르는 게 아니야. 그냥 흐르다 보년 기쁨을 만나게 되는 거야."
"기쁨?"
"그것 또한 설명할 수 없는 거야. 자신만이 직접 느낄 수 있는거야."
섬진강은 두려웠지만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은어가가 가르쳐 준 사랑과 기쁨을 조금이나마 직접 느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섬진강이 하동 철교 밑을 지나 '진월'이라는 곳에 다다랐을 때 였다. 갑자기 차갑고 짠 물이 그의 손끝을 간질였다.
"넌 누구니?"
섬진강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놀라지 마. 난 바다야."
"바다라니?"
"네가 되고 싶은 삶이야."
"내가 되고 싶은 삶?"
"그래, 나 네가 살 곳이기도 해, 넌 지금까지 바다가 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난 널 만나기 위해 미리 마중나온 거고."
"싫어 내가 왜 바다가 되어야 해? 난 싫어."
섬진강은 다시 지리산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기는 커녕 곧 바닷물과 한 몸을 섞게 되고 말았다.
섬진강은 서서히 자기의 몸이 차가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따스한 지라산의 정기가 사라지고 갑자기 온몸이 풀어져 없어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맞아.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거야. 나를 잃고 만 거야."
섬진강은 사라져가는 자신을 생각하며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바다가 다정히 섬진강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면서 말했다.
"아니야. 넌 죽은 게 아니고, 나랑 하나가 된거야."
"하하, 섬진강아, 나를 잘 봐. 내 속에 바로 네가 있다. 난 네가 없으면 바다가 될 수 없어. 우리는 하나가 된거야."
"그럼 원래 나도 너처럼 강물이었어. 내가 너랑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네가 나랑 하나가 된거야. 그러니까 지금 네가 바다를 만들고 있는거야. 내가 바다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니야."
섬진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바다의 말에 자신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내가 지금까지 흐르는 삶을 산 것은 이렇게 바다를 만들기 위해서야.'
섬진강은 그제서야 자기가 왜 흘러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지리산이 왜 그토록 자신를 냉혹하게 대했는지 알 것 같아야. 그리고 은어가 말한 사랑과 기쁨이 무엇인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 어머니.."
바다가 된 섬진강이 멀리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멀리 지리산이 다도해가 된 섬진강을 향해 다정히 손을 흔들었다.
- 정호승의 <항아리> 중에서-
영미시 공부하던 중, 'The buried life'에서 삶을 "FLOW"로 비유하더군요. 그리고 영미비평 교수님 계속 "Man alive" 반복하시고 오늘은 생각이 많은 날이었습니다. 공부도 별로 못하고....그래서 예전에 읽던 글이 생각이 나서 다시 읽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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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여국현 작성시간 10.11.27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게 바로 사랑이야..." 그렇겠지요? 다 알면서 사는 것도, 또 싫어하고 모르기만 하면서 사는 것도 분명 아니지만 어쨌건 오늘은 내일로 가는 것...그러니 잘 가야 하는 것...그게 삶이고 사랑이고, 그게 삶이라면, 오늘 이 순간도 우리는 사랑하며 사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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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이미승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11.29 누가 그러더라구요. 오늘은 내일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고..그냥 오늘을 사는 거라고..오늘도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야지요.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고 ..ㅎㅎㅎ 저 휴머니스트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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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인선 작성시간 10.11.27 바다로 가는지도 모르고 흘러갈때의 두려움은 갖진 않지만, 바람도 느끼고, 은어랑 노래도 부르고, 지리산에서 낮잠도 자고, 하는게 더 좋긴 하겠네요...바다에 도착해서도 버팀목이 되어준 고마운 존재들을 잊지 않을 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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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여국현 작성시간 10.11.28 결과, 중요하지만, 과정의 즐거움--남들이 보는 고통도 자신에게는 즐거움일 수 있겠지요, 과정을 즐긴다는 의미에서라면--이 수반되지 않는 결과는 허허롭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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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미승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11.29 가는 길에 만남도 있고 헤어짐도 있고, 노래도 있고, 기다림도 있고, ㅎㅎㅎ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