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어린이도서관에서 한 얘기 정리해봅니다.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겠나, 이번 모임을 주선하신 분에게 여쭈어 보았습니다. 제게 보내온 메일 내용은 이랬습니다. 은행나무 어린이도서관은 서울 금천구에서 유일하게 동화 운동하시는 어머니들이 만든 도서관입니다. 모임분들이 개인 돈을 내서 건물을 마련하고, 또 운영비도 회비를 내서 운영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들이 자발적으로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운영하는 이런 도서관은 아마 전국에도 많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이 도서관은 우리 도서관 운동에서 새로운 본보기가 되는 예라 할 수 있겠지요.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같이 의견을 나누면 좋다고 보내주신 문제는 이랬습니다.
1)도서관운동을 하면서 어린이를 올곧게 키우려고 노력하는 어머니들도 일을 하다보면 자식 사랑과, 자식집착(이기주의)을 구별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니 이런 어머니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
2)아이들에게 책을 권하다 보면 늘 경계에 선 작품들이 문제다. 예를 들어서 <잃어버린 겨울방학>, <마지막 박쥐공주 미가야>, <네버랜드 미아>, <유진과 유진> 같은 책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을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다.
3) 그리고 방정환 문학이야기, 일본 문학이야기, 동요 동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대략 이런 문제를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시간 나는데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한 이야기 내용입니다.
<네버랜드 미아> 이야기를 먼저 해 보겠습니다. 이 작품 얘기 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판타지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우선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판타지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시공간은 내면현실 공간입니다. 우리 마음속 공간을 말합니다. 그렇기때문에 판타지 작품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은 이야기 결말 부분에 가면 어떤 의미든 내면성숙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책을 읽는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주인공과 함께 초현실공간인 마음속 공간을 여행하면서 나중에는 어떤 의미로든 내면성숙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왜 판타지를 읽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내면성숙을 얻기 위함입니다. 아이들은 초현실공간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계기를 얻는 것이지요. 자기 내면여행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시각에서 볼때, <네버랜드 미아>는 한 가지 큰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고장난 주문을 외워서 학교에 간다고 나간 미아가 네버랜드로 가는 버스에 타게 되었습니다. 보통 아이들이 초현실공간으로 들어갈 때는 어떤 계기가 있습니다. 그 계기는 바로 그 아이 마음 속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 마음속에 존재하는 간절한 바람(욕망)이 아이를 초현실 공간(내면현실공간, 무의식의 공간)으로 데려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미아란 아이는 이런 간절한 바람이고 뭐고 없이 그냥 우연히 고장난 주문인 "옛날에도 하늘은 파랬어. 지금처럼 말이야. 앞으로도 하늘은 파랄거야.", 이런 주문을 외우다 자신도 모르게 네버랜드란 초현실공간으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이건 자기도 어찌하지 못하고 우연히 한 사람의 목숨이 네버랜드란 이름 모를 공간으로 사라지게 된 것인데요. 그런데 더욱 무서운 건 아이도 모르게 끌려간 그 공간이 과연 재미있기라도 한 공간인가. 아이의 내면성숙을 돕는 그런 빛이되는 공간인 것인가를 한번 더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미아가 끌려간 공간은 더욱 아리송하고, 또 무섭기까지 합니다. 그 곳에 가서 미아는 살아있는 놀이기구를 탑니다. 우리가 흔히 놀이공간에서 만나는 돈을 주고 타는 그런 놀이기구들이 여기에서는 단지 살아있는 동물들이 대신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 가지 이런 질문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살아있는 놀이기구를 타는 미아는 과연 이런 놀이공원에서 어떤 내면의 성숙을 얻을 수 있을까요.
흔히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서 하루 종일 돈을 내고, 줄을 서고 하면서 타는 그런 놀이를 하고 나면 과연 어린이들은 거기에서 얼마나 내면의 성숙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실 돈을 주고 들어가서 기계를 타는 놀이공원은 그냥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오락의 기능을 하는 장소일뿐입니다. 거기에 어떤 정신놀이의 개념은 들어있지 않은 거지요. 거기에서 정신의 성숙이나, 내면의 성숙을 얻는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내면은 자라면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그 아이 내면에 상당히 다른 언어의 층이 형성되어 갈 것입니다. 아이의 내면 무의식에는 무수한 언어지층이 낙엽이 쌓이듯 형성되어 갑니다. 과연 놀이 공원에서 탈것을 즐긴 아이들의 내면에는 어떤 언어지층이 형성되어 갈 것인지. 그리고 그런 언어 지층의 질이 과연 얼마나 인간이나 자연이나 제도에 대한 탐구가 가능한 정신놀이를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을 할 것인지. 이런 저런 문제를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나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은 단지 그냥 하루 즐길뿐이지 그런 놀이를 통해서 어떤 내면성숙이 이루어지기는 힘들지 안을까. 그러니 동화 속 판타지 공간에서 살아있는 놀이기구를 타는 시공간에 던져진 미아의 내면이 자신의 본질을 되돌아볼 수 있는 그런 정신의 깊이를 얻어간다고 보기는 힘들겠지요.
그래서 이 판타지 공간은 일단 진정한 인간성의 탐구가 가능한 공간이 아니고, 일종의 작가가 관념에서 오락의 기능을 하기 위해 만든 마술의 공간일 뿐입니다. 그야말로 관념의 유희공간이라 할 수도 있고, 무질서한 상상력인 공상이 만들어낸 진실한 내적질서가 갖추어지지 않은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나중에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살아있는 놀이기구를 즐기던 미아는 광대가 뿜어대는 연기를 맡으며 나비로 변합니다. 잘 놀아보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 바로 네버랜드이고, 잠시 머물며 살아있는 놀이기구를 타던 아이들이 이제는 나비로 변해 그 아이들이 가는 영혼의 나라로 가는가 봅니다. 그러면 역시 이 네버랜드는 일종의 중간계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중간계에 우연히 가서 미아는 놀아보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과 함께 놀아보았는데요.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작품 속 시공간인 네버랜드의 진실성을 놓고 좀더 고민해봤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놀아보지 못한 아이들이 진정 자신의 영혼을 위로받는 놀이공간은 어떤 곳이어야 할까요. 자연에서 멀어져 오직 도구화시키는 방향으로만 길들여진 아이들의 몸에 정작 위안을 주는 놀이가 과연 살아있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이었을까요. 이 문제를 작가는 좀더 고민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네버랜드 미아>에서 놀이공간의 내적 질서를 깊이있게 생각해봐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미아는 네버랜드에서 다시 현실공간으로 돌아올 때, 정말 부모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기때문이지요. 이건 아주 중요한 설정인데요.
사람들이 이 <네버랜드 미아>를 읽을 때 이 부분부터 어떤 충격이나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작가가 상당히 과감한 설정을 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보통 판타지로의 여행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회귀적 여행입니다. 아이들이 대개는 엄마의 품으로 돌아오는 여행을 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단선적 여행이라고 해서, 아주 판타지 세상으로 가 버리는 여행입니다. 네버랜드 미아는 현실세계로 돌아왔지만,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햇으니까, 결국은 단선적 여행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미아와 같은 아이에게는 이제 판타지 세상에서의 내면의 체험이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고아가 되어버린 이 아이의 내면 무의식에 힘이 되는 정신의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이 바로 네버랜드가 되어야 하니까요.
집을 나와 네버랜드에서 살았던 즐거웠던 삶의 힘, 정신의 놀이가 영양제가 되어, 이 정신 놀이의 힘으로 아이는 이제 현실공간에서 힘겹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내면 무의식의 성장에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네버랜드란 판타지 공간에서 아이는 그 어떤 내면의 성숙을 돕지 못하는 놀이기구를 타다가 다시 현실공간에 그냥 고아로 버려지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을 나온 시점에서 네버랜드로 간 시점,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시점, 이렇게 일단 미아의 삶을 크게 삼분할 수가 있는데요. 중간시기에 해당하는 네버랜드 나라에서 미아는 그 어떠한 내면 성숙의 기억도 없이,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일종의 암흑같은 삶을 살다가, 나중에 우연히 아파트에서 이웃집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바로 예전의 부모로 나와있습니다. 나중에 우연히 부모를 만나는 장면은 별 큰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해피엔딩이라 하지만, 이미 미아는 다 성숙해서 자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니까요.
이 작품에 나오는 미아처럼 정말 길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거나, 아니면 분리불안의 체험을 하였던 아이나 부모들이 이 작품을 읽는다면 어떤 위안을 얻을까요. 어떤 반응을 얻을까요. 왜 동화를 쓰는가. 이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과 동일시 할 수 있는 그런 아픈 체험을 가진 아이들이나 부모들이 읽었을 때 이 동화가 그들 마음에 따뜻한 위안이 되고, 빛이 되는 그런 눈물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동화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약한 판타지 작품을 써 보려는 작가의 실험정신은 높이 사고 싶지만, 아쉽게도 지난 번에 <바나나가 뭐예유>도 그렇고, 역시 <네버랜드 미아>도 그렇구요. 이 작가는 판타지 시공간을 구성할 때 등장인물들이 살아가는 시공간의 질서가 자꾸만 도구화시키는 방향으로만 달려가고 있습니다. 일종의 소비구조에 익숙한 상상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보통 신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경제학자들처럼 교환과 선물의 문제를 놓고 고민합니다. 왜 그럴까요.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구조는 교환의 개념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런 것입니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삽니다. 그래서 소유의 개념이 생기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데, 이런 교환의 과정에는 어떤 인격의 개념은 들어있지 않은 거지요. 한마디로 돈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더 많은 물건을 사서, 그 산 물건을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놀이 공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게 종사하는 기계들은 입장료를 주고 잠시 동안 사용할 권리를 얻습니다. 역시 교환의 개념인 것이지요. 교환의 개념으로 인간을 만나면, 사람도 역시 무슨 일을 위해서 돈을 주고 사면 되는 것이지요. 사람도 자본주의 노동시장에서는 이런 노동력의 단위로 계산이 되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나 물건이나 사람이 교환의 개념으로만 작동을 한다면 어떻게 살까요. 교환의 개념에서 그래도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는 선물의 개념이 작동을 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하더라도 서로 주고 받으며 즐길 수 없는 인격의 개념이 포함된 물질의 순환과정이 있게 마련인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강아지똥이 민들레를 피우는 존재로 변하는 과정에는 단순한 교환의 개념이 아닌 목숨이 목숨을 먹고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개념이 존재합니다. 교환과 선물의 개념처럼, 단순히 형태의 변화냐, 아니면 목숨의 부활(승화)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냐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사는 삶에는 이런 존재의 질적인 비약이 이루어지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지요.
네버랜드 미아에서 놀아보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이 광대의 연기를 맡고는 나비로 변합니다. 나비로 변한 영혼들이 가는 영혼의 나라는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 아이들은 형태가 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몸의 모습만 변해서는 여기에는 어떤 질적인 정신의 변화, 상상력의 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은 거지요. 그런 몸의 단순한 형태변화는 관념의 유희, 또는 마술의 기교로 언제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것입니다. 한마디로 무질서한 상상력인 공상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마리의 개가 죽어서 그 개를 나무에 묻고, 그 나무가 이듬해 더 많은 꽃을 피우는 발상은 단순한 자연의 순환에만 기댄 발상이 아니라, 그 속에는 자연이 자연에게 자기 몸을 던져주는, 먹히는 선물의 개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개념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네버랜드 미아>에서는 판타지 시공간을 거쳐 나온 미아가 놀이기구를 타면서 어떤 내면성숙도 얻지 못했는데, 현실로 돌아와서는 아주 가혹한 삶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지요. 정말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동화는 무얼 주려 한 것일까요. 무얼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요. 고아가 되어 버린 아이들의 내면에 어떤 말을 걸고 싶었던 것일까요.
집을 잃고 내면의 아픔을 겪는 아이들이 이 동화를 읽는다면, 그 아이들은 이런 동화속에서 어떤 위안 대신에 다시 한번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어린 시절 허무하게 고아가 되어 버린 시절을 회한과 두려움과 후회로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 동화를 잘 보려해도, 빛이 되는 점을 찾기가 참 힘듭니다.
<바나나가 뭐예유>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을 하였는데, 이 작품도 역시 비판적인 자리에만 서는 글을 쓰게 되어 나로서도 상당히 아쉽습니다.
하여튼 이 동화의 빛나는 점을 볼 수 있다면 같이 토론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잃어버린 겨울방학>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이 동화는 사실동화라 할 수도 있고, 소년 소설 형식의 이야기라 할 수도 있습니다. 세 작품이 실려 있는데, 잃어버린 겨울방학을 읽고 어머니들이 어쩌면 이렇게 아이를 버려두고 엄마만 가버릴 수 있나 하는 이야기를 한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동화를 읽히고 싶어하지 않는다구요. 보통 어머니들의 반응이 이렇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참 재미있단 생각을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들이 가진 모성이라면 당연하단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두 가지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남편의 폭력에 고통받는 어머니도 살아야하고, 또 아이들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살아야 합니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면서 엄마가 그냥 산다고 한다면, 과연 그 엄마가 아이들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가정에서 매를 맞고 살아가는 여자들의 아이들은, 분명 페로소나(가면)를 얼굴에 쓰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맞는 엄마를 보면서 아이들의 내면은 엄청난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상처를 일상의 생활에서는 억제하면서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이 아이들이 겪는 이중 의식으로 인한 고통은 참으로 힘든 시련이라 할 수 있겠지요.
프로이트가 쓰는 심리학 용어 가운데 <억압된 것의 귀환>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무의식 속에 억압된 감정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런 억압된 것들은 그러나 어른이 되고, 어떤 삶의 과정을 거치면서 늘 그 사람의 삶(의식)의 한 가운데로 귀환해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피하려 했던 어두운 기억들, 마음의 상처를 무의식의 저 깊은 집속에 억제하고 살았는데, 영원히 이 억압된 무의식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거지요. 무의식에 억압된 것들이 청소년기나 어른으로 성장하면 다시 일어나서 의식의 한 가운데로 걸어나온다는 겁니다. 그때 그걸 자꾸 피하려고 들면 그건 일종의 히스테리가 되는 것이지요. 신경증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시 귀환해 오는 억압된 그림자 인식들을 잘 받아들여서 같이 대화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때 인간은 오히려 더 성숙한 깊이있는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잃어버린 겨울방학>은 아이들이 겪는 가족해체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지만 갈등의 과정만이 드러나 있습니다. 엄마는 절로 가고, 아이를 찾아갔던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이래서 열린 구조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소년소설에도 이런 열린 결말로 끝나는 작품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열린 결말은 아이들에게 그렇다면 이 다음에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어떤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엄마는 고민하는 존재로, 그리고 엄마와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는 여전히 읽는 독자도 의문으로 남습니다. 아이들도 이런 고민하는 엄마를 두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하여튼 <잃어버린 겨울 방학>은 완성도가 있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요즘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고통스런 삶의 한 부분을 그려내고 있다는데 우선 관심이 갑니다. 그리고 작가의 시선이,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진지해서 좋습니다. 읽는 어린이들이 과연 이 작품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어줄지는 모르겠는데, <만우절 연극>은 한층 더 아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 것 같아 아이들도 관심을 갖고 읽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나오는 소설 형식의 작품들을 보면 너무 아이들의 감정을 작가가 지나치게 맞서는 자리에 놓아서 일종의 극적인 갈등을 지나치게 드려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야기가 소재주의에 갇힌 작품으로 떨어져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작품들에 비하면 <잃어버린 겨울방학> 감정을 극한으로 몰어가 작위적으로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낸 느낌을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재주의에 갇힌 작품이란 인상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이 작품 역시 그야말로 경계에 선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탐구 문제가 돋보이긴 하지만, 더 깊이있는 탐구가 이루어지는 시공간으로 승화되어가야할 숙제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의 작품이 기대됩니다.
<유진과 유진>, <마지막 박쥐 공주 미가야> 이 두 작품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은행나무 어린이도서관 분들과 토론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예정하기로는 11월 22일 아침으로 정했는데요. 은행나무 어린이도서관에서요. 이때는 내가 일방적으로 말하는 시간이 아니고, 작품을 놓고 같이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작품을 읽고, 자기 생각을 갖고 나오시면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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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야기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4.10.27 본질적인 문제 제기를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지요. 아이들의 내면성숙이란 게 뭘까요. 이것도 아주 큰 공부 주제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쓸 때, 어떤 추상적인 개념에만 의지하다보면 글이 모호해질 수 있겠지요. 핵심이 되는 주제를 이렇게 뽑아서 이렇게 제기해 주시니 정신이 번쩍 듭니다. 이쪽으로도 같이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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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야기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4.10.27 좋겠습니다. 공부할 게 참 많습니다. 결국 아동관이나, 어린이의 심리쪽 책을 좀 읽고, 이쪽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아이들을 직접 몸으로 겪고 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만해도 관념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지요. 아이들을 직접 만나는 과정이 없으니까요. 이게 문제입니다.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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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야기밥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4.10.27 으로 해야 할 숙제가 참 많습니다. 일단 공부라도 해 나가긴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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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omnus 작성시간 04.10.28 짧은 소견이지만 내면성숙을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동화(assimilation)와 조절(control)을 통한 이해의 틀(도식-schema)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쉽네요. 아이가 새로운 이해의 틀이나 경헙을 얻기 위해 기존에 내면에 가지고 있던 동화된 자신의 지식에서 다른 상위단계나 다른 형태의 지식을 얻기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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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omnus 작성시간 04.10.28 여러가지 경험과 교육적 도구들과 심리적 갈등과 보상 등등의 매개체를 연결해 가는 과정을 조절이라고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새로운 하나의 도식(schema)을 만들어 내는것을 내면성숙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